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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문화와 담론
- 시대의 실마리를 푸는 기호와 상징, ‘음식’과 문학의 만남,
권대근
문학박사
I.
한국의 음식문화는 식생활의 계층화가 일어나는 삼국시대에도 그리고 한식이 발달하는 조선 전기 그리고 한식이 완성되는 조선 후기에도 감자, 고구마 같은 농작물이 유입되고 우리 식생활은 큰 변화를 겪는다. 문학작품은 다양한 가치를 복합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특히 문학이 내포하는 다양한 가치 중에서도 음식이라는 기호는 흥미롭다. 그동안 음식은 단순히 영양과 건강이라는 양생의 관점에서 주로 다루어 온 경향이 있다. 문학 속 음식을 통해 음식문화를 살펴보고 이를 한국의 현대에 재조명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또한 언어로 쓰여 진 문학작품에서 제시되는 음식은 시대의 실마리를 푸는 기호 즉 상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즉, 작품에서 음식은 단순히 생리적인 본능을 해결하는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관계성을 드러내거나 소통을 위한 그 사회를 설명하는 매개체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통해 당대의 음식문화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음식은 우리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하지만 음식은 단순히 우리의 식욕을 충족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문학과 음식의 만남은 우리의 감각을 사로잡는 환상적인 조합을 선사한다. 수필 속의 미식 문학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음식은 우리의 감각을 만족시킨다. 이 두 가지가 만나면,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떠나게 된다. 미식 문학은 우리에게 다양한 맛과 향을 상상하게 해준다. 수필 속의 음식은 종종 우리의 입맛을 자극하고, 먹고 싶은 욕망을 일깨운다. "그 수필 속에서 묘사된 초콜릿 케이크는 정말 맛있어 보였어!"라고 말하며, 우리는 그 수필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미식 문학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쾌감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또한, 음식은 우리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중요한 요소다. 음식은 우리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냄새와 맛을 통해 우리의 감각을 자극한다.
그런데 음식을 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음식의 과학적 사실과 문화적 측면까지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그들이 음식에 대한 생각을 문학 속에서 찾아서 살펴보고자 한다. 작품에 나타난 음식으로 그 시대에 음식상을 통해 다양한 음식문화에 대한 담론들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II.
■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보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식사 습관은 한 사람의 라이프스타일과 성격까지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문학 작품에서도 음식에 얽힌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배고픈 시대일수록 음식에 대한 비극적인 에피소드가 빈발한다. 배고픔 때문에 자식을 내버린 부모들에 대항하여 아이들이 생각해낸 천국은 바로 헨젤과 그레텔이 발견한 ‘과자로 만든 집’이었고, 청년 장발장을 감옥에서 19년이나 갇혀 지내게 만든 사건의 발단은 그가 훔친 빵 한 조각이었으며, 남의 밭에서 감자 몇 알 훔치려다가 자신의 정절을 팔고 목숨까지 잃어버린 여인의 이야기는 김동인의 소설 <감자>로 형상화되었다. 오랫동안 문학은 어떻게 먹을 것인가, 누구에게 먹일 것인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두고 싸우는 인간의 끝없는 투쟁을 그려왔다.
■ 긍정적인 밥
시 한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 이 시에서 볼 수 있듯 화폐의 교환가치로 따져보면 한없이 힘겨운 글쓰기라는 노동이, 쌀 두 말, 국밥 한 그릇, 소금 한 됫박의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뿌듯하고 숭고해진다. 겨우 삼백원, 겨우 삼천원, 겨우 삼만원 밖에 안되어 보이던 노동의 대가가, 온식구가 몇 달동안 먹을 소금 한 됫박, 누군가의 외롭고 추운 저녁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국밥, 온 가족을 몇 달 동안 먹일 수 있는 쌀 두 말로 바뀌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 ‘기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이 시는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있다.
■ 한편, 가난의 고통을 묘사하는 데 ‘음식의 결핍’을 묘사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장치도 드물다. 동서양의 수많은 문학작품은 과식의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이나 걸식이나 거식의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음식에 대한 태도는 당대인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결정적인 지표가 된다. 누군가를 자신들의 커뮤니티로 초대하는 가장 관습적인 상징이 바로 식사 초대이기도 하다. 아직 완전히 ‘자신이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는 때는 그냥 ‘차나 한 잔 할까요’라고 말하지만,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한다는 것은 타인을 자신의 커뮤니티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함께 식사하는 것은 ‘나의 세계로 들어온 것을 환영합니다.’ 혹은 ‘당신은 내 인생의 일부분입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인 셈이다. 아무리 진수성찬에 산해진미가 넘쳐나도 불편한 자리거나 눈치가 보일 때, 마주치기 어색한 사람이 있을 때는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이 세상에 아무리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진리만큼은 인류의 명백한 공통점이다. 다음 시는 아무리 최첨단 정보화 시대의 바람이 불어도 변하지 않는 밥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운다.
■ 꿈의 진리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좋아져도
사람은 밥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
정보와 서비스를 먹고는 못 산다.
이 몸의 진리를 건너뛰면 끝장이다.
첨단 정보와 지식과 컴퓨터가
이 시대를 이끌어간다 해도
누군가는 비바람치고 불볕 쬐는 논밭을 기며
하루 세끼 밥을 길러 식탁에 올려야 한다.
누군가는 지하 막장에서 매캐한 공장에서
쇠를 캐고 달구고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
이 지구 어느 구석에선가 나대신 누군가가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몸으로 때워야만 한다.
정보다 문화다 서비스다 하면서 너나없이
논밭에서 공장에서 손털고 일어서는
바로 그때가 인류 파멸의 시작이다.
앞서간다고 착각하지 마라.
일하는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다.
- 박노해
6. 문학 작품 속 ‘음식’의 상징(2)
■ “금동아리의 비싼 술은 만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고혈이라.”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변학도의 화려한 잔칫상을 풍자하는 대목이다. 만백성의 피눈물이 묻은 금은보화와 산해진미로 사리사욕을 채웠던 탐관오리들. 그들이 즐겼던 호화로운 음식들은 곧 수많은 백성의 굶주림을 대가로 만들어졌다. 의식주의 비중에서 음식의 중요도가 가장 높았던 시절은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기나긴 시간이었다. 음식이 곧 화폐 못지않은 가치를 발휘했고, 보통 사람이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날은 1년 중 명절과 제사를 빼고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삶을 견디게 해주는 것도 음식이었고, 사람의 살림살이와 됨됨이를 표현하는 것도 음식이었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도 음식을 나눠주는 것이었다. 음식이 곧 삶이자 사람이자 사랑이었던 시절이었다.
■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에서는 음식의 맛을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막내딸은 결혼조차 할 수 없고 평생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가혹한 관습의 희생자였던 티타.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 페드로가 친언니와 결혼하는 불행을 견디며 오직 ‘요리’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요리의 달인이었던 티타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 “모든 물질이 왜 불에 닿으면 변하는지, 평범한 반죽이 왜 토르티야가 되는지, 불같은 사랑을 겪어보지 못한 가슴은 왜 아무런 쓸모도 없는 반죽 덩어리에 불과한 것인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여성의 의사 표현이 제한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랑조차 맘대로 할 수 없었던 티타는 요리의 역동적인 행위와 음식을 통한 오감의 체험을 통해 말 할 수 없는 내면의 비밀을 소통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 티타는 요리를 쟁반에 담아 식탁으로 향하던 중 페드로와 눈길이 마주친 순간, “팔팔 끓는 기름에 도넛 반죽을 집어넣었을 때의 느낌이 이런 거겠구나”하고 생각한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기름에 튀겨지는 도넛반죽처럼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이 된다. “얼굴과 배, 심장, 젖가슴, 온몸이 도넛처럼 기포가 몽글몽글 맺힐 듯이 후끈 달아올랐다.” 이렇듯 그녀는 요리에 완벽하게 감정을 이입한 나머지 자신의 온몸이 음식이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한다. 서로의 감정을 철저히 숨겨야했던 두 남녀는 그녀의 영혼과 정성이 가득 담긴 요리를 통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사랑을 속삭일 수 있게 된다. 그녀를 자유를 옥죄던 요리라는 힘겨운 노동이, 그녀의 억눌린 육체와 감성을 해방시키는 사랑의 기술로 변신한 것이다. 이렇듯 음식은 단지 배고픔을 해소하는 도구를 넘어 인간의 감성을 표현하고 인간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 존 스타인벡의 퓰리처상 수상작 <분노의 포도>(1939)에는 인간에게 ‘음식’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대공황기의 엄청난 경제난으로 일자리와 삶의 터전을 잃은 조드 일가. 조드의 딸 ‘로져샨’은 갖은 우여곡절 끝에 아기를 사산하지만, 죽은 아기에게 미처 먹이지 못한 모유를 먹일 사람을 비로소 발견한다. 오직 뱃속의 아이와 자신의 생존만을 생각하던, 다소 이기적이고 냉정한 성격의 로져샨은 거의 아사 직전에 있는 노인을 헛간에서 발견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 로져샨은 천천히 헛간 구석으로 가서 사나이의 쇠약한 얼굴을 내려다보고 크게 뜬 겁먹는 눈을 들여다보았다. 로져샨은 이불 한쪽을 헤치고 자신의 젖가슴을 내놓았다. “먹어야 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로져샨은 몸을 꿈틀거리며 더 가까이 다가가서 사나이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자!”하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녀의 손이 사나이의 머리 뒤를 받쳐주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사나이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눈을 들어 헛간 안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입술을은 다물어지고 신비스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중에서
■ 로져샨의 진짜 아기는 죽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돌봐야 할 ‘또다른 아기’를 발견한다. 오직 자신만의 안위를 걱정하던 그녀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좌절된 ‘모성’이 구원받는 장면이기도 하다. 가난과 폭력에 시달리던 그녀의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음으로써, 그녀는 그토록 원했던 ‘엄마’가 되는 일에 실패한다. 하지만 이름 모를 나그네가 굶어 죽기 직전, 자신의 모유를 죽어가는 사나이에게 먹임으로써 로져샨은 진정한 ‘어머니’의 힘을 깨닫게 된다. 자기 가족들의 먹을거리가 모자랄지라도 낯선 사람들의 배고픔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던 그녀의 어머니 마조드의 거대한 사랑의 유산을 로져샨이 이어받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녀의 쇠약한 젖가슴에서 나온 소중한 모유가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 이렇듯 무엇보다도 음식은 인간의 생명과 생존 그 자체의 강력한 은유다. 아무리 값비싼 옷과 집을 소유해도 음식이 없다면 인간의 생명은 유지될 수 없고, 아무리 성대한 잔치를 벌여도 음식이 모자라거나 맛이 없다면 축제의 흥은 깨져버리고 만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단 한 조각의 음식이 있다면 인간은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 최첨단 문명의 진보가 아무리 휘황찬란할지라도, 여전히 음식은 우리에게 사랑이자 사람이자 삶, 그 자체인 것이다.
7. 트릭스터(trickster)의 유쾌한 반란 (1)
■ 분리된 두 세계 잇는
메신저 역할하는 캐릭터,
진정한 문화영웅이 되다
■ 만약 방자가 없었다면 <춘향전>의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는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별주부전>에서 토끼의 기상천외한 잔꾀와 속임수가 없었다면 토끼는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까.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얼빠진 호랑이가 없었다면 오누이는 해님, 달님이 되어 서로를 애틋하게 그리워할 수 있었을까.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의 용기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불을 사용하는 지혜를 배워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를 괴롭히는 골룸이 없었더라면 반지원정대의 여정이 그토록 모험과 감동으로 가득할 수 있었을까.
■ 방자, 토끼, 호랑이, 프로메테우스 등의 공통점은 바로 ‘속임수’나 ‘장난’을 통해 위기를 모면한다는 것 외에도 ‘두 세계’ 사이의 매개자 혹은 중간자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세계 여러 민족의 신화나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장난꾸러기 또는 어릿광대, 확연히 분리된 두 세계를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캐릭터를 ‘트릭스터(trickster)’라고 한다. 트릭스터는 단순한 사기꾼이나 장난꾸러기가 아니라 대립되는 두 세계의 질서를 교란시키고 부당한 금기를 깨뜨리는 문화영웅이기도 하다. <톰과 제리>에서 늘 자신의 몇십 배나 되는 덩치를 자랑하는 고양이 톰을 기상천외한 잔꾀로 골탕먹이는 생쥐 제리야말로 트릭스터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 양반의 울타리에 갇힌 이몽룡, 기방의 울타리에 갇힌 성춘향은 서로 직접 나서 솔직하게 구애를 할 수 없는 제한된 신분이다. 향단이의 혼을 쏙 빼놓는 방자의 엄청난 수다와 오두방정이 없었다면 춘향과 몽롱의 사랑 이야기는 훨씬 힘겹고 지루한 로맨스가 되었을 것이다. <토끼전>의 토끼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귀여운 속임수를 쓰는 장난꾸러기다. 힘없는 약자가 강자의 절대권력에 대항하여 쓸 수 있는 무기 중의 하나가 이렇듯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영악함이라는 것을 토끼는 증명한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토끼전>의 토끼는 힘겨운 백성들의 삶을 요절복통의 잔꾀로 위로하는 어릿광대 혹은 전통사회의 개그맨 역할을 할 수 있었다.
■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이야기에서도 호랑이는 자칫 단순한 악역으로 보이기 쉽지만, 실은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이어주는 소중한 매개자 역할을 해냈다. 트릭스터 중에는 골룸처럼 탐욕스럽고 변덕스러운 실패자도 있지만, 프로메테우스처럼 인류에게 중요한 생활 수단을 가져다주는 ‘문화영웅’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제우스의 명령을 인간 세계로 전달해주는 헤르메스 또한 대표적인 트릭스터 중의 하나다. 날개달린 신발을 신고 신과 인간 사이를, 또는 죽음과 삶 사이를 매개해주는 메신저 헤르메스는 때로는 속임수로 때로는 도둑질로 신과 인간들의 세계를 교란시키지만, 결국 곤경에 빠진 인간을 도와주거나 신의 명령을 전달하는 멋진 트릭스터다.
■ 그렇다면 왜 각종 설화나 민담, 신화 속에는 그토록 많은 트릭스터가 등장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위반의 욕망, 금기를 깨뜨리고 자유를 얻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 아닐까. 트릭스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각종 경계와 규칙과 제도들의 불합리성을 고발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우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쓰 산중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려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 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야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 윤동주, <간>
■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형벌로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파 먹히는 끔찍한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진정한 문화영웅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일찍이 이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을, 경계를 위반하고 그 위반의 책임을 홀로 짊어진 자의 슬픔을 이해했다. 프로메테우스에게 이런 엄청난 형벌이 없었다면 그는 단지 신의 눈을 속인 앙큼한 사기꾼이나 도둑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저 객기를 부리기 위해, 혹은 아무 생각 없이 ‘금기’를 위반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 위반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 자신의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제도나 질서의 불합리를 고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의 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각종 트릭스터들은 바로 그런 자발적인 ‘책임’과 ‘윤리’를 통해 진정한 문화영웅이 되었다.
III.
불행하게도 많은 이들이 폭식과 폭음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폭식은 무절제한 사랑을 부르고 영혼을 타락시키는 좋지 않은 습관이다. 물론 식도락의 즐거움과 사랑의 감미로움을 싫어할 이는 없다. 그러나 근자에 유행하는 ‘먹방 프로’는 점점 더 자극적이고 이색적인 맛을 부추기는 경향이 없지 않다. 하루하루 바쁜 일상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음식을 탐하게 된다. 칠레의 망명 작가이자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대문호 이사벨 아옌데는 험난한 현실을 헤쳐나간 여주인공들을 고결한 사랑의 화신으로 그려내 찬사를 받았다. 이번에 그녀가 펴낸 ‘아프로디테’는 에로티시즘을 부르는 사랑에 주목한다. 특히 사랑의 촉매제라 할 수 있는 음식과 감각에 주목한다. ‘감각의 향연’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책은 음식과 에로티시즘을 감각의 세계로 엮어낸다.
"그 요리의 향기는 정말 미쳤어!"라고 말하며, 우리는 그 요리의 맛을 상상해보게 된다. 음식은 우리의 감각을 사로잡는 마법의 재료다. 문학과 음식의 만남은 우리의 감각을 최대한으로 만족시키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글 속의 음식을 상상하며, 우리는 다른 문화와의 만남을 경험할 수 있다. "그 수필 속에서 묘사된 음식은 정말 매혹적이었어!"라고 말하며, 우리는 문화와 음식에 대해 더욱 알아가고 싶어진다. 미식 문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선사하여, 우리의 시야를 넓혀준다. 문학과 음식의 만남은 우리의 감각을 사로잡는 환상적인 조합이다. 글 속의 미식 문학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음식은 우리의 감각을 만족시킨다. 이 두 가지가 만나면,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떠나게 된다. 문학과 음식의 만남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선사하여, 우리의 시야를 넓혀준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과 음식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감각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먹는 것이나 사랑하는 것은 모두 감각을 주관하는 뇌의 기능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거의 모든 현상들이 꿈이나 환각, 속임수인 것처럼 말이다.” 저자에게 최음제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동료들과 1년에 걸쳐 문헌 탐색이나 현장 실사를 통해 조사하고 내린 결론은 세상의 모든 식재료에는 쾌락을 안겨줄 최음제 효능이 있다. 어떤 식재료든 궁합도 맞고, 보기에 좋고, 건강에 좋으면 그 자체로 최음제라는 것이다. 즉 사랑의 힘은 최음제에서 나온다. 음식과 사랑이 조화를 이루면 우리의 일상은 팍팍하고 힘들어도 행복과 쾌락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상정하는 최음제는 진화한다는 점이다. 육체적 사랑을 자극하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이에 해당한다.
레이스 달린 속옷, 목욕향 향염, 장밋빛 조명 등 말이다. 저자는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최음제는 ‘이야기’라고 한다.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이 나누는 이야기만큼 에로틱한 자극제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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