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숲의 정경이다. 아무것도 더하지 않은 본연의 숲 내음이 고즈넉이 서려 있는 서울 집 서쪽 창밖 풍경이다. 사철나무 목련 단풍 산수유 들이 어우러져 그런대로 아늑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나만의 수목원은 한 가닥 오후의 햇살 마저 외면할 만큼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창을 열고 손을 내밀면 닿을 만한 거리에 해묵은 단풍나무 한그루가 살았다. 봄비 잦은 밤이면 잠못 들고 새로 돋은 단풍잎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나타에 흥건히 가슴 적시던 날도 많았다. 그즈음 우리는 가정사 적으로 무척 힘든 고비를 겪고 있었다. 가족들은 더듬이가 잘린 곤충처럼 방향감각을 잃었고 서로를 위로하기는커녕 자기 몫의 설움에 겨워 말문을 닫아걸었다. 살림의 주역인 나는 누구보다도 심하게 휘청거렸다. 어디로든 사라지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며 자나 깨나 외돌았다. 우울한 심사를 덮치고 쓸쓸함이차올랐다.
자주 서쪽 창을 열었다. 가까이 있는 단풍나무에 마음을 붙이기 시작했다. 따끈한 커피 한 잔을 창탁에 올려두면 쌉싸래한 김이 나무를 향해 흘러나왔다. 그 순간만은 외로움을 잊었다. 시나브로 식물과 인간이 친구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알아갔다.
관악의 아카시 향기가 뻐꾸기 소리를 실어 나르는 봄, 녹음의 밀독 고르게 짙어지는 숲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마음 깊은 곳의 소용돌이가 수그러들었다.
몇 날의 해가 뜨고 저물었던가, 단풍과 나는 침묵의 언어로 미소를 나누는 은밀한 사이로 발전했다. 형태도 소리도 없이 오가는 나무와의 교감을 믿기로 한 것이다. 나무 앞에서만큼은 울분을 터트릴 일도 눈물을 쏟아낼 일도 없었다.
돌아서는 여름의 뒤태를 본다. 숲속의 푸른 잎들이 윤기를 잃어갔다. 나의 단풍나무도 한두 잎이 불쏘시개인 양 불긋해지더니 며칠 새 솟구치는 불길처럼 번지며 활활 타올랐다. 덩달아 내 안에 엉겨 붙은 설움과 근심 덩이도 불살라버리고 싶었다. 그럴수록, 태우고 가벼워지는 나목의 철학은 머나먼 나라의 전설일 뿐이었다.
겨울이 달려왔다. 창유리 너머 혹한의 밤을 맨몸으로 살아내는 식물의 생명력을 생생히 마주한다. 보살펴 주는 이도 없건만 무엇이 저 발가벗은 가지들을 견디게 하는가. 운명처럼 수맥을 찾아서 악착같이 흙 속으로 뻗어 내려가는 뿌리의 저력이 아니고 무엇이랴.
뿌리! 그렇다면 나도 누군가에게는 뿌리가 아니던가, 그렇다. 가지 끝까지 수액을 길어 올려주어야 하는 엄연한 어미의 존재다. 어떤 상황에서도 상처 입은 새끼를 보듬고 본분을 감내해야 하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어머니인 것이다. 더 이상 비틀거릴 수는 없었다. 여전히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각성으로 눈이 뜨였다. 말하고 먹고 걸을 수 있는 멀쩡한 육신은 삶의 기본 여건을 채우고도 남는 상태였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기진했던 모성본능이 끓어올랐다. 홀로된 딸아이를 부둥켜안았다.
나는 깨어났다. 목숨이 있는 한 절망으로 얼어붙었던 몸과 맘에도 피는 돌고 있었다. 그제야, 아픔을 내비치지는 못해도 따뜻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는 가족이 돌아 보였다. 우리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서로의 죽지에 기대어 함께 가야 할 공동의 운명체로 어떠한 불행 앞에서도 허물어지지 않을 유일한 관계였다. 무표정 무언의 속마음을 포용하고 다독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서로를 위한 최소한의 자구책이었다.
비로소,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있는 사람이라면 굳건히 살아가야 한다는 깨달음 앞에 선다. 조약돌보다 작은 용기의 불씨라도 꺼트려 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흙 속의 뿌리만큼 강인하지는 못할 지라도 안간힘을 다해 불모지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 산자의 운명이었다. 폭풍우와 혹한에 맞서야 하는 생존여건 속에서도 마침내 봄마다 새잎을 피워 올리는 창밖의 나무가 새삼 경이롭고 거룩해 보였다.
어언간 우리의 슬픔은 밤을 도와 흐르는 강물처럼 몸을 누이고 제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잠잠하던 집안에 다문다문 말소리가 들리고 온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매일의 시간이 흘러 세월이 되었다. 굽어진 등에 열 줄의 나이테가 보태지는 동안 끝 모르는 절망감에 몸서리치던 시절도 옛일이 되어갔다. 삶의 본거지인 일상의 무대도 바뀌었다. 해풍과 봄볕이 어우러져 속살거리는 이곳은 따듯한 남쪽 항구 부산이다. 또 하나의 단풍나무 한 그루가 나의 소박한 작업실 창밖에 바투 서 있는 건 무슨 우연일까. 며칠 전 싹을, 틔웠는가 싶은데 그새 초여름 숲을 이루었다. 서울 집 창밖의 작은 숲이 떠오르며 암담했던 지난날을 반추한다.
사노라면 뜻하지 않게 인간의 위로가 닿지 않는 영역에서 홀로 신음하게 되는 날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그 막다른 길목에서는 너나없이 누군가의 위로를 바라는 게 인지상정이나 우리에게 최상의 위로는 무위자연 안에 더 높고 깊게 서리어 있다. 빌딩 사이로 보이는 손바닥만한 하늘 한 조각, 굽은 나무 한 그루, 아스팔트 갈라진 틈새에 피어나는 민들레 한 송이도 우리를 위로할 천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겨우내 동토에 뿌리를 묻은 나목이야말로 홀로 우듬지까지 수액을 올리고도 침묵 그 이상을 표현하지 않는 묵언의 기도자여, 조건 없이 내어주는 궁극의 위로자다. 우리는 자연에 기대어 사유함으로써 자신을 넘어서는 인내와 끈기를 배움보다 강인한 인성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맑고 따사로운 태양광 아래 상긋한 바람 이는 한 갖진 봄날, 창밖의 단풍나무에 살가운 우정의 미소를 보낸다. 살래살래 손짓하는 푸른 잎사귀들······. 생명의 공기 방울을 퉁기며 성장하는 오월의 숲이다. 순한 바람에 만 갈래 연두의 물결이 창을 타고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