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포말 등대
김영근
기이한 등대가 하나 있다. 청정바다 동해안의 영덕 블루로드 제2구간 출발점에 서 있는 등대이다. 영덕 특산물인 대게가 등대를 안고 있는 모양새다. 더 기이한 것은 등대가 바다에서 쫓겨났는지 육지가 좋아서인지 산모퉁이 언덕배기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지키라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외롭게 서 있다.
등대는 바다를 지나는 배가 잘 다니라고 그저 눈빛만 보낸다. 그것도 낮에는 빈둥빈둥하고 시간만 보내고 밤이면 제 할 일이 있는지 부산하게 설친다. 누가 봐 주기를 기다리는 듯 지나는 배들을 잘 오라, 잘 가라고 인사를 한다. 또 하는 모습이 음식점의 서비스 안내 요원보다 더 잘한다.
밤이면 제 가슴 속에 품은 불꽃을 언제 그렇게 멀리 힘차게 내 뿜는지 모른다. 몇십 리를 개미 지나가는 것까지 샅샅이 살핀다. 불도 때지 않은 아궁이에 센 불 바람이 순식간에 번개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대게의 뱃속은 불을 지핀 대형 화약고이다. 화약의 폭발이 수십 리 먼 길 동해를 누벼 적을 쫓고 있다. 그것도 못 미더웠던지 갔던 길을 돌아와서는 다시 돌아가기를 수백 번 하고 있다. 입을 다물 때는 눈만 끔뻑이던 것이 성이 나면 수평선의 배를 산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던 등대가 비가 오는 밤이면 울기만 한다. 많이 울어서 시력을 잃는다. 손도 쓰지 않고 눈물 닦느라고 시간을 보낸다. 안 보여도 안 보인다는 말도 못 한다. 달이 비를 거두어 가야 한숨이라도 쉴 수가 있는데 속이 갑갑해도 눈꺼풀 살며시 뜨고 앞을 보려 한다. 비가 온다고 잠만 잘 수는 없다. 안 보일수록 더 살피고 다른 날보다 열심히 나대고 움직여도 빗줄기에 막혀 시각장애인 노릇밖에는 못 하는 것이 안타깝다.
밝은 낮에는 쥐죽은 듯 있다. 간혹 달이 친구이다. 지나는 사람들이 말을 걸어도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한마디 대답도 안 한다. 세상에 이런 언어장애인은 없다. 눈이 보배이지 입은 소용도 없다. 올빼미가 밤에만 활동하고 낮에는 쉬고 있는 모습과 같다. 등대 지붕에 올빼미가 놀러 온 날이 있다. 감은 눈과 산 올빼미의 눈이 멀뚱멀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눈이 뒤에도 있다. 앞쪽을 보고 망을 보며 진을 치고 지나는 배를 안내해야 할 것인데 뒤쪽 산을 보고 있다. 앞쪽만 지키는 것이 아니고 앞, 뒤 모두 보고 있다. 교통순경이 선글라스 끼고 눈동자 감추어 눈알을 어떻게 움직여도 모르게 하듯 등대 게의 눈도 정확하게 어디를 보는지 모르게 하고 있다. 영덕의 블루로드길을 여행하는 사람이 안전히 잘 다니라고 살피는 일을 동시에 하는 것 같다. 밤에는 앞을 지나는 여객선, 화물선 뱃길 안내하기에 바쁘지만, 낮에 할 일이 없으니 덤으로 하는 일치고는 안성맞춤이다.
영덕 블루로드 길을 걷는 사람에게 힘내어 걸으라고 용기를 주고 있다. 자신은 옆으로 걸으면서도 똑바로 걸으라고 일러준다. 똑바로 하는 말과 실제 행동이 달라 매번 실수하면서도 자기 습관대로 한다. 그게 아닌데 틀렸다, 잘 못 걷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잘 못이라 대꾸한다. 자신이 걷는 방식대로 가는 것이 똑바로 걷는 것이라고 재차 강조한다,
등대는 등산객 안전을 살핀다. 한 달에 한 번은 블루로드길 야간 산행 날에 앞 바닷길, 뒷산 모두 안내한다. 야간 산행자들과 동행하지는 않지만, 입구에서 잘 갔다 오라고 10개의 다리 흔들어 인사한다. 발 헛디뎌 다칠까 봐 밝은 눈빛 멀리 가는 척 가까이 되돌아와 산길 헤매는 발길을 밝혀 준다.
바다만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늘도 지킨다. 달이 제 할 일을 하는지 뒤에 숨어서 살핀다. 지나는 배들의 항해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하는지 보름을 기다린다. 재촉해도 소용이 없고 자신이 하는 일에 도움을 주지 않는데도 빨리 나오기를 기다린다. 때로는 빨리 제집으로 되돌아가는지 살핀다. 할 일을 못 찾았는지 기다리기에 명수인 양, 어둠 속의 왕자처럼 어두워도 좋다, 밝아도 좋다, 어느 편인지 구분이 안 되는 때도 있다. 그래도 어두운 편을 살피며 좋아서 찾아다니고 나 여기 있음을 뽐내는 것 같다.
달이 없을 땐 제 할 일을 더 잘할 수 있는데도 혼자 있기 외롭다고 달을 찾는다. 시간약속을 잘 지키는 달은 등대가 내미는 손 뿌리치고 도망가듯 가버린다. 달이 등대가 잘 있는지 살피러 오는 때도 있다. 밀고 당겨도 밀리고 다녀오는 것이 없어도 반복적으로 은근히 경계하는 것 같으면서 정다운 친구가 되어 주변을 살펴준다.
등대가 달이 못 뜨게 하여 바닷속 대게를 살찌운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믐이 될 때까지 활동을 멈추어 기다리며 숨어 살라고 부추긴다. 그믐 즈음에 잡히는 속살이 많은 대게 친구에게 다음 보름 동안 활기차게 잘 놀다 오라고 선심을 베푼다.
해일이 나면 바다 일을 못 하니 남자들이 할 일이 없다. 고작 집안에서 부인만 사랑하는 일을 한다. 그러니 작은 동네에 같은 날 생일인 친구가 여러 명 나온다. 해일 덕분에 등대가 지켜준 뱃속 선물이라고 어려운 날이 많은 줄 모르고 좋아한다. 그 반대도 있다. 미쳐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하여 해일을 만나 저승에 간 사람들도 있다. 해일이 큰일을 저질러 한 집안 부자의 목숨을 영원히 잠들게 하여 제삿날이 같은 날 여러 집이 생긴다. 그래도 등대는 지켜준다고, 제 할 일을 다 한다고 가만히 제자리만 지킨다. 전파 탐지기로 얻은 신호 미리 알려주어야 할 것도 잊은 채 제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 바다에 던져진 제사 산물 음식 넘겨만 보고 잘 먹은 양 눈 감으면서 용서해 주기만 마음속으로 빈다.
등대는 바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길잡이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 생활의 길잡이가 있다. 항시 비춰주고 살펴주고 있어도 그 고마움을 모르고 지나친다. 가다가 막히고 어려우면 되돌아보고 갈 길을 찾을 때 마음의 중심을 찾는다.
창포말 대게 등대는 산모퉁이에서 바다와 육지의 안전을 살펴주는 초병으로 오늘도 지나는 사람들이 보내주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