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성의 <밀밭에서, 테오에게> 감상 / 이동훈
밀밭에서, 테오에게 / 박진성
저물면서 밀밭은 까마귀를 품는다
지평선의 지루한 경계를 넘나드는 까마귀,
테오야, 소용돌이치는 저녁 하늘 관통하는 새들은
머리나 심장에 부딪칠 것만 같다
나는 캔버스, 네가 보낸 준 50프랑으로 물감들을 샀단다
나는 캔버스, 밀밭은
구할 수 없는 많은 빛으로 출렁인단다
몇 프랑의 물감으로도 만질 수 없는 저 경계를
우리는 무어라 불러야 하나
내가 바라보는 오베르의 평원은
새들을 자유롭게 날게 하지만
캔버스에 자꾸만 까마귀가 달라붙는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밀밭에서 솟아올라
캔버스 밖으로 쏟아지는 새 떼를 따라가려 한단다
저녁 하늘이 강물처럼 밀려오면
밀 꽃이 피워 내는 예쁜 상처도
까마귀의 탄알 같은 날갯짓도
내 몸속에서나 꿈틀대겠지
밀밭의 수런거림은 내 오른쪽 귀를 통과해서
갈가마귀의 노래로 태어나겠지
소용돌이치는 밀밭을 네게 준다,
통째로 받아라, 내 몸이다, 테오야……
- 『목숨』, 천년의시작, (개정판)2012.

*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 이생진 시인의 말이다. 박진성 시인의 시집에도 고흐 이야기가 많다. 옛 친구가 간호사가 되어 자신의 공황장애가 기록된 차트를 읽고 있는 순간에도 “허만하 시집 갈피 살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모래알”(‘안녕’ 중)에서 보듯이 시인은 허만하 시인의 시를 읽고 있는데, 그 시집 제목이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라는 것을 아는 독자라면 묘한 재미를 느낄 법하다. 허만하 시인의 시집에도 고흐 이야기가 여러 편이란 걸 알면 더욱 그렇다.
이생진, 허만하, 박진성 그 외 많은 시인들이 고흐를 깊이 앓는다.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선생이 보고자 했던 건 고통받는 사람들의 연대 아닙니까”(‘반 고흐와 놀다’ 중)에 드러나는 고흐의 생각이 좋고, 동생에게 손 벌리지 않으면 물감 값도 얻지 못하는 고흐의 무능이 좋고, “구할 수 없는 많은 빛”과 색에 대한 고흐의 줄기찬 연구와 꺾이지 않는 집념이 좋고, 정신착란을 겪으며 쏟아진 “소용돌이치는 밀밭”과 사이프러스와 별밤의 그림들이 다 좋다고 이야기할 것 같으면 당신은 고흐를 좋아할 준비가 된 것이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은 고흐의 마지막 몇 작품 중 하나다. 사뭇 흔들리는 밀밭과 밀밭 사이로 사라진 길, 그 위로 뜨는 까마귀가 거친 붓질로 살아 움직인다. 까마귀는 “캔버스 밖으로”으로 날아간다. 현실에서 현실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고, 예술에서 그 예술 너머로 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 안팎의 경계에 젊은 고흐와 고흐를 좋아하는 시인이 있다. 아니, 경계란 것은 나중 사람들이나 구경꾼이 짓는 것일 뿐, 고흐는 이미 마지막 시구처럼 “소용돌이치는 밀밭” 그 자체이기도 하겠다. 자신의 존재와 정신과 예술을 한몸으로 소리치게 해서, 그를 좋아하게 하면서 동시에 절망하게 만드는.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