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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미술가들
스캔들로 보는 미술사 6 / 고통의 선물 - 고흐와 시엔
( 글 : 추명희 작가 vinosh@hanmail.ne)
⊙ 고흐가 자살한 이유는? 동생 테오의 죽음 임박 소식 때문 혹은 주치의의 딸과의 失戀
⊙ 매춘부 시엔, 고흐가 가장 아꼈던 최초의 데생작 〈슬픔(sorrow)〉의 모델
⊙ 일본 판화 우키요에에 자극받아 일본에 가려다가 남프랑스 아를에 정착
*추명희
《월간조선》 《톱클래스》 《더 트래블러》 기자로 일했다. 미술 작품 애호가로, 꾸준히 컬렉션을 모으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사와 정치학사,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를 마쳤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년)
네덜란드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약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 내내 종교적 가치를 추구했다. 한때 전도사 활동을 하며 목회자의 길을 가려 했으나 종교적 구원보다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게 낫다는 신념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동료 화가 카미유 피사로가 “이 남자는 미치거나, 아니면 시대를 앞서가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듯 그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화가가 되었다.
마음이 따뜻해서 더욱 외로웠던 예술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년). 그에게 있어 그림이란 너무도 아름다워서 현기증이 날 정도로 어지러운 그래서 한편으론 두려운 어떤 것이었다. 피가 웅덩이가 될 정도로 흥건히 고인 침대에 이틀간이나 누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했던 그가 마지막으로 마음속에 그린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죽음에는 의문점이 많다. 권총 자살로 알려졌지만 누구는 그를 괴롭히던 동네 불량소년들이 쐈다고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죽고 싶지만 용기가 없었던 그가 누군가에게 부탁을 한 것이라고도 한다. 물론 진실은 권총과 함께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명확한 것은 옆구리 관통상을 입은 그가 밀밭에서 무려 1.6km나 떨어진 집까지 걸어왔다는 것이고 치료를 거부한 채 조용히 고통 속에 죽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니 총탄을 어떤 이유로 맞았든 간에 스스로 죽음을 초래한 것은 맞다.
고흐는 왜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자 했을까. 불과 몇 달 전 생애 처음으로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 팔리고 평론가들의 극찬까지 받으면서 그는 창작욕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잔뜩 주문한 물감이 막 도착했고 그토록 원했던 화가로서의 성공, 그 문이 이제 막 열리기 시작했음을 그도 알고 있었는데. 도대체 왜?
주치의의 딸 마르게리트
당시 주치의였던 가셰 박사는 동생 테오가 매독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었고 그 사실을 고흐에게 알린 후 얼마 되지 않아 이 일이 벌어졌다고 증언했다. 아, 테오! 그렇구나. 테오는 그에게 있어 동생이자 후원자이자 친구이자 그 외 모든 것이었다. 그가 원했던 사랑과 성공, 우정 모든 것이 깨졌을 때도 고흐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기에 살 수 있었고,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테오 덕분이었다. 테오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그에게 암흑 그 자체일 뿐. 그는 이제 자신의 인생도 끝났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또 다른 정황도 있다. 고흐의 전문 분야였던 짝사랑 이야기. 〈가셰 박사의 초상〉 그림으로 유명한 폴 가셰 박사의 딸 마르게리트가 그 주인공이다. 정신병원에서 퇴원 후에도 병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테오는 평소 친분이 있는 가셰 박사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가셰 박사는 피사로, 세잔,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의 정신병을 치료한 경험이 있었고 본인 역시도 우울 증세를 겪고 있는 가히 우울증 전문가였다.
박사와 고흐는 처음에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이제 갓 스물한 살인 딸 마르게리트가 고흐를 만나기 시작하자 박사는 불안해졌다.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던 가셰는 고흐를 좋아했지만 사윗감으로는 추호도 생각이 없었을 터. 정신질환자에 가난한 화가라니 가당찮은 일이다. 가셰는 마르게리트에게 고흐를 만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흐가 제안한 모델 일을 승낙했고 고흐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명목으로 집에 드나들며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다. 분노한 가셰는 고흐와 언성을 높이며 싸웠고 결국 서로 등을 돌렸다. 가셰의 가족은 “고흐가 실연(失戀)에 대한 충격으로 자살을 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스토킹
“결코 끊을 수 없는 열정으로 삶을 살아라”고 말했던 셰익스피어의 말을 누구보다 몸소 실천한 고흐. 그는 누구보다 사랑을 갈구했다. 그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던 대상은 런던 구필화랑에서 근무하던 시절 하숙집 주인의 딸이었다. 이름은 유지니아. 그는 용기를 내어 청혼했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과 약혼했다며 차갑게 거절했다. 혼자 사랑을 키웠던 그는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고 1년 넘게 매달렸지만 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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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이 인류의 구원이라고 믿었던 그가 두 번째로 집착한 대상은 그의 사촌 케이 포스 스트리케르. 케이는 고흐보다 일곱 살 연상에 다정하고 무엇보다 고흐처럼 동정심이 많았다. 반 고흐 가족은 1881년 에텐에서 여름을 지내는 동안 과부가 된 케이와 함께 살았는데 그때 고흐는 사랑에 빠졌다.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돌아온 답은 “싫어, 싫어, 절대 안돼!”였다.
고흐는 케이를 스토킹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어느 날 밤, 암스테르담의 삼촌 집에 들이닥친 그는 숨어버린 케이를 만나게 해달라며 램프 불꽃 속에 자신의 손을 집어넣고는 그녀가 나올 때까지 계속 그러고 있겠노라고 협박을 했다. 그러곤 깜짝 놀란 삼촌이 달려들어 불을 채 끄기도 전에 그는 고통으로 기절을 하고 말았다. 그 후로도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테오, 난 케이를 사랑해, 나한테는 영원히 그녀뿐이야”라고 토로했다.
매춘부 시엔
정말 영원히 그녀뿐이었을까. 고작 1년 후 그에게 또 사랑이 찾아왔다. ‘시엔’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상대는 클라시나 마리아 호르닉이라는 본명을 가진 노숙하는 매춘부(賣春婦)였다. 신분이 높은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버림받아 거리의 여자가 된 그녀는 고흐를 만났을 때 알코올 중독에 둘째까지 임신한 상태였다.
고흐는 그녀를 거리에서 구출하기로 결심하고 집으로 데려왔다. 그는 빛바랜 듯한 그녀의 지친 얼굴에서 이를 데 없는 매력을 느꼈다. 그는 동료 화가 안톤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마치 한쪽 발을 무덤에 걸친 듯한 그녀를 외면할 수가 없었네. 혼이 나간 듯 멍한 얼굴에 무척 불안해 보였지”라며 그녀에 대한 첫인상을 언급했다.
고흐가 가장 아꼈던 최초의 데생작 〈슬픔(sorrow)〉은 시엔을 모델로 그린 것이다. 두 사람은 가난과 병마(病魔)와 싸우며 고단한 나날을 보냈지만 그럴수록 둘의 애정은 더욱 깊어졌다. 고흐는 사회적으로 외면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시엔과 반드시 결혼할 생각이었다. 물론 가족들은 시엔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고 동생 테오까지 나서서 재정적 지원을 끊겠다며 말려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돈 없고 몸 아프면 열에 하나는 꼼짝없이 죽어 나간다지만 시엔과 헤어지느니 차라리 그 길을 택할 거야. 난 절대 시엔을 떠나지 않아. 그녀가 없으면 내 인생은 엉망진창으로 변해서 그림이고 뭐고 다시 하지 못할 거야. 시엔은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녀를 사랑해.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충실하기로 약속했어.”
‘새순까지 말라버린 나뭇가지’
고흐는 시엔과 그녀의 딸을 모델로 한 수많은 작품을 그렸다. 심지어 시엔의 어머니까지 함께 살며 보살폈다. 1882년에서 1883년까지 시엔과 함께한 1년 반 남짓한 시간은, 어쩌면 그의 삶에서 사랑의 감정으로 충만했던 유일한 시절이었다.
“들어가 보니 그녀는 마치 시든 나무처럼 늘어져 있더구나. 차갑고 메마른 바람에 시달려 새순까지 말라버린 나뭇가지 말이야.… 절대로 떠나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그녀를 안심시키고 있단다.”
시엔이 느낀 불안감은 결국 현실로 다가왔다. 그녀가 먼저 떠났는지 고흐가 먼저 떠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둘은 헤어지게 된다. 고흐는 시엔을 만날 무렵부터 고열과 여러 가지 통증 등으로 자주 병원 신세를 졌었는데 전문가들은 아마도 매독 초기 증상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 시엔이 매춘부 생활로 인해 매독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
시엔은 고흐가 떠난 뒤에는 다시는 몸을 팔지 않았고 세탁부로 취직해 힘들게 살았다. 그러다 1901년 로테르담에서 만난 다른 남자와 결혼하였지만 3년 후 자살로 슬픈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생전에 “나는 꼭 물에 빠져 죽어야만 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는데 마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이 정말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시엔과 헤어진 후 고흐의 여자관계는 단순히 육체적인 것이 되었다. 그는 아를에 있을 때 테오에게 쓴 편지에 “2주일에 한 번씩만 동네 사창가에 들르는 것을 습관화하고 있어, 순전히 건강을 위해서!”라고 적기도 했다. 고흐의 가족들은 끝까지 그가 시엔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동정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가족들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그가 쓴 편지를 보면 시엔을 정말로 사랑했음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그가 그린 그림 속 시엔의 모습은 고흐가 사랑했던 사촌 케이와 그의 어머니와도 얼굴선과 분위기가 묘하게 닮아 있다. 어쩌면 그는 그 누구보다 이상형이 뚜렷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시엔과 헤어진 후 1883년 9월 중순, 고흐는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를 띄웠다.
“혼자 산책을 했어. 거센 비바람을 맞고 서 있는 나무를 보았지. 비할 데 없이 씩씩해 보이더구나. 주변 오두막과 모든 것이 다 비바람에 쓰러졌는데 그 나무는 씩씩하게 버텨내더라. 그걸 보고 느꼈지. 아무리 평범한 인간이라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낸다면 그 내면에 비범함이 있다는 걸.”
그는 자신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오로지 자연의 말 없는 위로 속에서 혼자 견뎌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해 정말로 비범해져 갔다. 그는 더욱더 대상을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느끼는 대로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종교적인 열정
고흐는 네덜란드 쥔더르트에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인생에는 총 다섯 명의 빈센트 빌렘 반 고흐가 등장한다. 바로 목사였던 할아버지, 미술상으로 성공한 큰아버지, 그리고 그보다 1년 먼저 태어난 친형. 네 번째가 바로 고흐 자신이고, 다섯 번째는 조카 바로 동생 테오의 아들이다. 고흐의 친형은 한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죽었고 고흐가 살던 마을에 묻혔다.
어린 고흐는 자신의 이름이 쓰인 묘비를 매일같이 마주하며 자신이 죽은 형의 삶을 대신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의 깊은 외로움의 근원은 첫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공허한 눈빛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고흐는 열여섯 살부터 스물세 살이 되던 해까지 큰아버지의 화랑(畵廊)에서 아트 딜러로 일했다. 그 기간이 고흐의 인생에서 가장 안정적인 시기였고 평생 도움만 받았던 테오에게 도움을 준 유일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다 그가 1873년 런던 지점으로 옮겼을 때부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을 휩쓸던 복음주의 운동에 전도된 그는 종교적인 열정으로 마음이 끓어올랐고 그때부터 그림을 팔기보다는 복음을 전하기를 좋아해서 고객들을 짜증 나게 만들곤 했다.
선교사 되려다가 화가로 방향 전환
결국 화랑에서 해고당한 후 교사 활동도 하고 서점에서 일도 해봤지만 고흐는 어느 곳 하나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부모님은 그에게 차라리 네덜란드에 머물면서 신학교에 들어가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고급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해야 하는 입학시험 자체가 무리였다. 할 수 없이 입학이 용이한 복음주의 학교에 등록을 했지만 거기서도 선교사가 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고 만다. 걸핏하면 분통을 터트리는 성격이 문제였다.
고흐는 개의치 않고 선교 활동을 위해 찢어지게 가난한 탄광촌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마치 광부처럼 살았는데 테오가 보내준 생활비가 아니었다면 그때 정말로 굶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탄광촌에서 2년을 보내면서 그는 종교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1880년 스물일곱 살의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종교로 구원하는 대신 그림으로 위로하겠다고 결심한다.
고흐는 늦게 시작한 만큼 강박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좋아하는 밀레의 작품들을 모사하면서 연습을 했다. 첫 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면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의 종교화 같은 느낌마저 드는데 이때 그는 갈색, 회색, 검은색 계통의 어두운 색채를 주로 썼다. 그가 만약 네덜란드에 계속 살았다면 네덜란드 전통 화풍(畵風)인 숯 검댕이 같은 그림을 계속 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상파 및 우키요에와의 만남
다행히(?) 그의 불안정한 영혼은 시골 생활에도 싫증을 느끼게 되고 1886년 드디어 파리행 기차에 올라타게 된다. 도착하자마자 인상파 전시회를 보러 간 그는 인상파 화가들의 색채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당시 파리에서는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그리다 만 그림, 그림인지 낙서인지 모르겠다”며 조롱을 받고 있었지만 그는 그들의 밝고 순수하고 강렬한 색채(色彩)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그가 찾고 있던 바로 그 세계였다.
고흐는 특히 젊은 작가들에게 물감을 팔던 탕기 영감이 수집한 일본 판화 우키요에(浮世繪)를 보고 새로운 색채 조합을 배웠다. 그가 테오의 아들을 위해 그린 〈꽃이 핀 아몬드나무〉를 보면, 생생한 푸른색 하늘 위에 초록색 가지들과 창백한 꽃송이가 어우러진 섬세한 아름다움이 일본 판화를 떠오르게 한다. 이 그림은 파란색 배경인데도 불구하고 차갑지가 않고 포근한 생명력과 희망이 뿜어져 나온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고 살렴, 네 인생에도 이렇게 꽃과 열매가 맺히기를 바란다”는 그의 편지처럼 따스한 온기가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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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보낸 2년 동안 지나치게 마셔댄 브랜디와 물랭루주에서 보낸 무절제한 시간들은 고흐를 병들게 했다. 어떻게든 파리에서 벗어나 건강을 회복해야만 했다. 일본 판화에 빠진 그는 일본에 가고 싶었지만 여비 마련이 쉽지 않아 대안으로 1888년 2월 남프랑스로 향한다. 아를로 가는 기차에서 그는 아를이 일본의 풍경과 같았으면 하고 기대하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여기 오니 내가 일본에 온 것만 같다”며 흥분했다.
들뜬 고흐와 달리 시골 마을 사람들은 이 괴상한 네덜란드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했다. 프로방스인들의 사투리를 구사하지 못하는 그는 이웃과 거의 소통할 수 없었고 끔찍한 외로움에 시달리며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때 그는 열다섯 달 만에 무려 200여 장의 그림을 그렸다. 1889년까지 이곳에서 그야말로 혼신을 다해 그림을 그렸고 그의 대표작 대부분이 여기서 탄생했다.
고흐는 아를에서 그가 평생 꿈꾸던 화가공동체를 만들 결심을 하게 된다. 파리에서 사귄 많은 화가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에 응한 것은 폴 고갱이 유일했다. 사실 고갱은 공동체보다는 유능한 그림 상인이었던 고흐의 동생 테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고갱이 도착하자 고흐는 그야말로 강아지처럼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좋아했다. 하지만 둘의 즐거운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미치광이 화가’
고갱은 테오가 보내주는 생활비로 생활하는 고흐에게 늘 악평만을 쏟아부었고 고흐의 고집스러운 성격도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갈등은 켜켜이 쌓이고 마침내 고갱이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흥분한 고흐는 면도칼로 자신의 귓불을 잘라버렸다. 눈앞에서 고흐의 광기를 목도한 고갱은 겁에 질린 채 허둥지둥 아를을 떠났고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미치광이 화가가 자신의 귀를 잘라 매춘부에게 건네준 사건은 작은 시골 마을에선 엄청난 스캔들이었고 사람들은 “이 미치광이 화가를 어서 정신병원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청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마을 사람들의 냉랭한 시선에 상심한 그는 자청해서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다. 병실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는 가끔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히는 〈별이 빛나는 밤〉과 〈붓꽃〉 등이 여기서 탄생했다. 병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그의 눈에 여느 때보다 더 아름답고 간절하게 비친 것이리라.
정신병원에서 나온 후 그는 파리 북쪽 외곽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고흐는 마을 주변 풍경들을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그려댔다. 여름 태양 아래 이글거리는 밀밭 그림들에서는 무언가 잔뜩 억눌린 심정이 깔려 있다. 특히 그가 생을 마감하기 전 그린 마지막 작품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는 이글거리는 밀밭 위로 무거운 절망감이 드리워져 있다. 왠지 자신에게 비참할 정도로 고독한 삶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견했던 것 같다.
서른일곱의 짧은 생을 살다 간 그가 화가로 활동한 기간은 겨우 10년이다. 그동안 고흐는 900점 이상의 유화와 1100점 이상의 스케치, 1700페이지 이상의 서신을 남겼다. 전문가들은 정신분열증, 매독, 조울증, 측두엽 간질, 알코올 중독을 앓았던 그가 문서와 그림 중독까지 걸렸던 것이라고 말한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가 남긴 작품들은 모두 질식할 것 같은 외로움, 그 고통의 산물이었다.
‘절대 고독’
귀에 붕대를 맨 채 먼 곳을 응시하는 고흐의 자화상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데이비드 보위의 명곡 ‘Space Oddity(우주 괴짜)’의 선율이 뇌리를 스친다. 1969년 7월,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5일 전에 발표된 이 곡은 우주선 발사와 함께 시작되는 지상관제소와 우주비행사 톰 소령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지상관제소에서 톰 소령에게. 카운트 다운 시작, 엔진 가동, 점화 확인. 신의 가호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 여기는 톰 소령, 지상관제소에게. 저는 지금 문을 나서고 있습니다… 이 깡통 같은 우주선에서 떠다니며, 세상과 멀리 떨어져 지구는 푸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네요… - 여기는 지상관제소, 톰 소령. 통신이 끊겼어요, 뭔가 잘못됐어요. 톰 소령, 내 말 들리나요? - 난 여기 깡통 속을 떠다니며 저 멀리 달과 떨어져, 지구는 이렇게나 푸른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요.”
후렴구에 비치는 망망한 우주 공간에서의 절대 고독,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운명에 맡겨야 하는 톰 소령의 심정이 마치 고흐의 독백처럼 느껴진다. 어떤 이들은 우주선 사고로 톰 소령이 우주 미아(迷兒)가 된 것처럼 끝나는 가사의 내용을 두고 톰 소령이 일부러 통신을 끊고 우주 저편으로 사라지길 원했던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쩌면 고흐도 그랬던 것이 아닐까? 그도 톰 소령처럼 이제 그만 이 지긋지긋한 고독의 사슬을 끊고 현실 저편의 세계로 사라지고 싶었던 것인지도. 슬프도록 아름다운 푸른 지구여 이제, 그만, 안녕!⊙
♨출처/ 필자의 공저(共著) 《발칙한 예술가들 - 스캔들로 보는 예술사》에서 발췌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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