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빠삐용>의 주제곡 '바람처럼 자유롭게(Free as the wind)'
* 영화 <패튼 대전차군단>에서
[ ‘혹성탈출’ ‘패튼’ ‘빠삐용’을 만든 헐리우드의 거목, 프랭클린 J. 샤프너 ]
<빠삐용>,<혹성 탈출>과 <패튼 대전차군단>으로 너무나 유명한 프랭클린 J.샤프너 감독은 1920년 5월 30일, 일본 도쿄에서 미국 선교사 아들로 태어나 미국 TV 황금시대에 활동을 시작한 감독 중 하나입니다. 그는 콜럼비아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브로드웨이와 CBS에서 TV 연출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여러 TV물과 영화들을 연출하다가 1965년에 제작된 광대한 대서사극 <워 로드(The War Lord)>에서 대배우 찰스 헤스톤과 인연을 맺습니다. 이어서 샤프너 감독은 1968년 그를 다시 주연으로 내세운 <혹성 탈출>(68)의 엄청난 흥행으로, 일약 대중적 스타 감독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어 다음 작품 <패튼 대전차군단>(70)은 아카데미 7개 부문을 석권하면서 자신도 감독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됩니다. 3년 후에 만든 <빠삐용>(73)은 인간고립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 작품으로 다시한번 높은 평가를 받게됩니다.
* <패튼 대전차군단>에서, 발지전투시 독일군의 진격
이와같이 그는 몇몇 대작 영화들을 통해 웅장하고 스펙타클한 장면을 만들어내는데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큰 스케일의 서사시적인 작품으로 성공을 거뒀고, 다작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종종 데이비드 린과 비견되기도 합니다.
그는 <혹성 탈출>의 찰스 헤스톤이나 <패튼 대전차 군단>의 죠지 C. 스콧, 그리고 <빠삐용>의 스티브 맥퀸이나 더스틴 호프만의 명연기를 펼칠 수 있게 하는 등 배우들로부터 최고의 연기를 이끌어낼 줄 아는 감독으로도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30년간에 걸쳐 연출 활동을 했던 그는 월남전에서 귀향한 주인공의 방황을 그린 마지막 작품 <웰컴 홈>(89)을 마지막으로 1989년 6월 2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장르 법칙에 충실하면서도 진부하지 않게 인생의 진실을 건져 올린 프랭클린 샤프너 감독은 영화사에 "장인"으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 대표작 소개 ]
< 혹성탈출1 >
오늘날 문명을 이룬 인간, 그리고 인간이 진화하기 전의 모습이라고 여겨지는 원숭이라는 동물의 입장은 〈혹성탈출〉에서 서로 완전히 뒤바뀝니다.
주인공 테일러(찰턴 헤스턴 분) 일행이 도착한 미래의 행성에서 원숭이는 무기를 비롯한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고, 말을 하고 글을 쓸 줄 알며, 자기들이 이룩한 문명을 고고학적으로 발굴하고자 하는 지적 욕구를 가진 존재인 반면, 인간은 그러한 원숭이들이 부리는 대로 수동적으로 노동하고 자신의 의사를 말과 글로 표현할 줄 모르는 비문명적이고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렇게 영화는 문명인으로서 인간의 속성을 원숭이에게 부여함으로써 현대인이 자기 존재를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끔 유도합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테일러가 자신이 도착한 행성이 결국 지구의 미 대륙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설정을 통해 인간 문명의 이기가 자칫 인간에게 불행한 미래로 돌아올 수 있음을 경고하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합니다.
* 이 영화에서 특수분장 이야기
분장 기술과 CG 기술이 발달한 최근의 기준으로 보면 〈혹성탈출〉의 원숭이 특수분장은 다소 어설프게 느껴지지만, 영화가 공개되던 1968년 당시로서는 영화계 전체를 충격에 빠뜨린 매우 획기적인 수준의 분장이었습니다. 영화의 총제작비 중 15%가 이 특수분장에 쓰일 정도로 〈혹성탈출〉은 분장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하지만 영화가 제작되기 전 이 영화는 영화사에서 투자를 받지 못해 고전했는데 바로 분장과 관련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영화의 원작인 피에르 불의 소설 〈원숭이 행성〉은 말하는 원숭이들이 반드시 등장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영화화가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완벽한 원숭이 모습이 아니고서는 관객을 영화에 몰입시키기 어려울 것이 뻔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를 가능하게 만든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1966년 미국에서 방영된 TV시리즈 〈스타트렉〉에서 분장을 맡아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던 존 챔버스였습니다. 그는 특수분장 일을 하기 전, 군대 병원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위해 이목구비부터 팔다리까지 각종 신체 모형을 제작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 살아 있는 생명체의 피부 조직과 유사한 텍스처를 만드는 자기만의 요령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이십세기 폭스사의 관계자들이 여전히 〈혹성탈출〉의 영화화에 회의적일 때, 존 챔버스는 주인공 테일러 역을 맡은 찰턴 헤스턴과 당시 원숭이 닥터 제이우스 역에 내정됐던 에드워드 G. 로빈슨을 완벽하게 원숭이로 분장해 그들에게 보여주었고 이로써 관계자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극적으로 투자를 성사시켰습니다(에드워드 G. 로빈슨은 건강상의 이유로 영화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의 역할은 모리스 에반스에게 돌아갑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분장상 부문이 따로 마련된 것은 1982년인데, 그보다 무려 13년 전인 1969년에 존 챔버스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특별히 분장부문 특별상을 시상했을 정도로 이 분장은 매우 성공적으로 평가됩니다.
< 패튼 대전차군단 >
“조국을 위해 죽는 걸로는 아무도 전쟁에 이기지 못한다는 걸 명심해라. 전쟁에서 이기려면 다른 멍청한 녀석이 제 조국을 위해 죽게 만들어야하는 것이다.”
프랭클린 J. 샤프너의 <패튼 대전차군단>의 프롤로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그렇게 생생한 독백을 들려준 후 영화는 조지 C. 스코트가 연기한 패튼장군이 자신의 운명을 완수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먼저 튀니지에서, 시칠리아에서 그리고 눈 속의 발지전투에서 그의 활약상을 보여주며 실화에 근거한 많은 삽화가 등장합니다.
그는 복종하지 않는 자에게 가차없는 독설을 퍼붓고, 독일군은 항상 그의 행방에 집요한 관심을 보입니다. 패튼의 최후로 끝을 맺는 이 영화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을 살았던 한 인물의 세밀하고 흥미로운 초상화를 그려냈습니다.
2천년 전, 로마가 북부 아프리카를 침공 했을 때에도, 또 나폴레옹군이 눈보라 속의 러시아에서 철군할 때에도 자기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고 말하던 패튼,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불교의 윤회설을 믿고 입에는 항상 "Damn"이나 "Son of Bitch"를 달고 다니던 패튼,
그 자신의 표현대로 그는 단지 우직하고 싸울 줄만 아는 늙은 군인일 뿐이고 부하들은 그런 그를 "Old Blood & Guts(피 배짱 늙은이)"이라고 부르며 애증을 나타내었던 패튼,
이런 독특한 성격의 패튼을 샤프너 감독이 1970년 매가폰을 잡고 영화로 완성하였습니다. 음악은 <빠삐용>의 주제곡을 작곡한 제리 골드스미스가 담당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1971년, 제43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감독상,주연상 등 7개 부문에서 수상하였습니다.
패튼 역에는 애초에 버트 랑카스터,로버트 미첨,리 마빈,로드 스타이거 등이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조지 스코트로 결정되었습니다. 1961년에도 이미 아카데미 조연남우상을 거절한 전력이 있는 조지 스코트는 이번에도 주연남우상을 거절하여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는 패튼의 명예를 등에 업고 아카데미 상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시상식에 즈음하여 기자회견을 가진 그는 "수상식은 두 시간에 걸쳐 행해지는 고깃덩어리 퍼레이드이다. 상업적인 이유로 미리 계획된 서스펜스를 수반하는 인간 전시회같은 것이다."라고 독설을 퍼부었다고 전해집니다.
< 빠삐용 >
가슴에 새긴 나비 문신 때문에 빠삐용(나비라는 의미)으로 불리던 프랑스 청년 앙리 샤리에르는 1931년 유흥가에 놀러갔다가 이상한 사건에 연루되어 살인자의 누명을 씁니다. 종신수(終身囚)가 된 그는 남미 적도 부근에 있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명 높은 형무소에 수감되죠.
거기서 11년 동안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혹심한 더위 속에서 강제노역을 하다 여덟 차례에 걸쳐 탈출을 시도하게 되는데….
영화 <빠삐용>은 앙리 샤리에르의 동명(同名)의 자서전을 토대로, 샤프너 감독이 1973년에 만든 미국영화입니다. 개성이 뚜렷한 두 캐릭터(빠삐용과 드가)를 등장시켜 고립상황에서의 인간의 심리변화와 대응양상을 심도 있게 탐구한 걸작입니다.
빠삐용으로 나온 스티브 맥퀸과 드가로 나온 더스틴 호프만의 명연기가 일품이었고, 제리 골드스미스의 주제곡 ‘Free as wind(바람처럼 자유롭게)'도 이 영화를 살려주는데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 실제 악마의 섬 탈출 후의 빠삐용의 인생
탈출 성공 후,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않은 실제 빠삐용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야자더미 위에 몸을 뉘이고 망망대해를 둥둥 떠가며 "나는 자유다(I am free!)"라고 외쳤듯 정말 빠삐용이 그가 그토록 열망하였던 자유라는 것을 찾기는 찾았을까요?
악마의 섬을 탈출한 빠삐용은 베네주엘라에 자유민으로 정착하게 되고, 그곳에서 잠시 광산노동자로 일하지만 제버릇 개 못준다고 그곳에서도 파리에서 갈고닦은 뒷골목 실력을 발휘하여 곧 전당포털이, 은행털이등 어둠의 세계를 전전하다가 아마도 어느 전당포나 은행이나 크게 한탕한 밑천으로 짐작되는 자금으로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제법 큰 규모의 여관과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게 됩니다.
그가 60세 되던 해인 1967년 카라카스의 대지진때 빠삐용의 잘 나가던 여관과 나이트클럽은 잿더미가 되는데 정부로부터 한푼의 재해보상도 못 받고 무일푼이 된 것으로 보아 그 영업장들은 아마도 빠삐용식의 불법, 무허가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늙으막에 무일푼이 되자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어 자리잡고 앉아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자서전 형식으로 집필한 것이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돈방석에 앉게 되고 세계적인 명사의 반열에 오릅니다. 그리고 그의 자서전이 영화화되던 1973년 스페인에서 암으로 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