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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4일(성령강림절 후 열한 번째 주일)
열왕기하 7:3~10
약자들을 통해 전해진 복된 소식
본문 접맥 적 주제설교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김규태 목사
when?
여러분은 혹시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식을 삶아 먹어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까?
이스라엘 왕 여호람 시대에, 이스라엘은 아람의 공격을 받고 큰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람 왕 벤하닷은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성을 고립시켰습니다. 그래서 성 안에 있던 많은 사람이 돈을 주고도 물건을 구하지 못해 아우성이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데없던 나귀 머리 하나를 사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300일 치 품삯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비둘기 똥 300mL를 얻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20일 치 품삯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경제학에서는 인플레이션이라고 합니다. 이는 품귀 현상이 일어나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물건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을 의미합니다.
어느 날, 이스라엘 왕은 성안을 거닐다가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울면서 자신의 애통함을 해결해 달라고 왕에게 구했습니다. 내용인즉 이러했습니다.
두 여인이 너무나 배가 고파서 하루씩 돌아가며 자기 아들들을 삶아 먹기로 했답니다. 첫날에는 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여인의 아들을 삶아 먹었습니다. 그다음 날에는 다른 여인의 아들을 삶아 먹을 차례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여인이 약속을 어기고 자기 아들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자기 아들을 내놓았던 여인은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왕 앞에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얼마나 배가 고프길래 자기 아들을 삶아 먹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그렇지, 어떻게 어머니가 자식을 삶아 먹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 이야기는 사마리아 성의 고난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극한 슬픔을 느꼈습니다.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며 굵은 베를 입었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원망했습니다. “만일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왜 왕이 엘리사를 원망했을까요? 이전에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아람 왕은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람 군사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습니다.
수많은 아람 군사들이 앞을 보지 못하고 헤매는 사이에, 엘리사는 그들을 사마리아 성의 한복판으로 이끌었습니다. 신이 난 이스라엘 왕은 칼로 아람 군사를 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그것을 만류하고, 그들을 떡과 물로 먹인 후에 고향인 아람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랐습니다. 엘리사 덕분에 풀려났던 아람 군사들이 다시 사마리아 성을 에워싸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큰 곤경에 빠졌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아람 군사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엘리사에게 화를 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 자기 신하를 보냈습니다. 이때 엘리사는 신하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엘리사의 예언대로라면, 내일 상황은 갑작스럽게 반전될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밀가루와 보리를 예전처럼 저렴하게 구입하게 될 것입니다.
신하는 엘리사의 예언을 믿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사마리아 성은 아람 군대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고, 성안에 양식이 떨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물가는 치솟았고, 서로의 아들을 잡아먹을 정도로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누구든 이런 상황이 하루 사이에 개선된다는 것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믿지 못하는 신하를 향해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2절).”라고 예언했습니다.
who?
이 이야기는 성문 어귀에 있던 네 명의 나병 환자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이 성문 어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레위기의 규정대로, 사람들에게 부정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고, 누군가가 성안에서 먹을 것을 가져다주어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로운 사람들이었고, 버림받은 사람들이었고, 삶의 희망을 품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 현실적인 대안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자,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성읍에 들어가도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차라리 적진에 뛰어들어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나병 환자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어떤 분은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 성 밖에 있던 나병 환자들보다는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마찬가지인데도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안에 있던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 아들들 돌아가면서 삶아 먹을 판인데도 과연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더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을 적으로부터 지켜주어야 할 성이 오히려 감옥처럼 느껴집니다. 감옥 안에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성밖에 살던 나병 환자들이 성안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성안에 살던 사람이건, 성밖에 살던 사람이건, 예상하지 못한 인생의 고난 앞에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고, 그것을 견뎌낼 만큼 강인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나, 성문 밖에 있던 나병 환자들은 모두 인간이 처한 곤경의 상황을 가리킵니다.
오늘날에도 성안에 갇혀서 자유를 잃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사는 것보다 죽은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우리들교회 김양재 목사님이 어떤 책에서 자기 언니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희 언니는 명문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대학원까지 마쳤습니다. 하지만 후두염으로 목소리가 변하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선교지로 떠났습니다. 언니는 20여 년 동안 필리핀 빈민촌에서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그렇게 20년을 빈민가에서 똑같이 빈민의 모습을 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뭔가 ‘짠’하고 보여 주셔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형부는 소천하였지만, 언니는 인생의 말년에 선교를 그만두고 남편을 간병하는 일에 오래 매여 있었습니다. 동생인 제가 보기에도 멋있고 똑똑한 언니였습니다.
모범생에 효녀였던 언니가 선교사로 헌신까지 했는데, 왜 이런 말년을 보내게 하실까요. 눈에 보이는 응답만 바라고 주님의 일을 했다면 실족에 실족을 거듭할 만한 인생입니다.
-출처: 김양재, 「천국을 누리라」(두란노, 2011);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7월호), 225쪽에서 재인용.
우리 교단의 신길교회를 담임하는 이기용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이분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다행히 이분이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아버지의 이른 죽음에 대한 의문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 분이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후에도 경제적 어려움이 컸습니다. 생활비가 떨어져서 6일째 굶고 있던 토요일에, 자기 연민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정말로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게 맞나 싶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분이 교회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며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6일 동안 침묵하시던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기용아,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그 말씀에 이 분은 이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사랑하신다면 왜 굶기십니까?”
하나님, 저를 사랑하신다면 왜 굶기시나요? 저를 사랑하신다면 왜 저에게 이런 큰 고난을 주시나요? 혹시 이러한 질문이 여러분의 질문이 아닙니까?
-출처: 이기용, 「믿음의 정석」(두란노, 2024); 「생명의 삶」(두란노, 2024년 8월호), 61쪽에서 재인용.
바울은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는 평일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천막 만드는 일을 했고,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에서 많은 핍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고린도에 살던 많은 유대인이 바울을 법정으로 끌고 가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떠나 복음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바울에게 이러한 어려움이 있어야 했을까요? 왜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고자 노력하는 우리에게도 견디기 힘든 고난이 찾아올까요?
what?
다시 본문의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은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 희망을 품고 적진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람 진영에 있어야 할 군사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뛰어든 사람들에게 살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나병 환자들은 아람 진영에서 먹을 음식과 은과 금과 의복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풍족히 먹고 마시고 귀한 패물들을 취했습니다. 과연 아람 진영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런 일이 광경이 펼쳐진 겁니까?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람 군사들에게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아람 군사들은 큰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 왕이 이웃 나라들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다급했던지, 양식과 무기와 장막을 내팽개치고 도망쳤습니다.
이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람 사람들에게 두려움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멸망에서 구원받은 나병 환자들은 자신이 받은 구원의 축복과 감격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8절에 보면, 그 나병 환자들이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감추고,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또 그렇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병 환자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곤경에 처한 동포들에 대한 일종의 의무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9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나병 환자들이 나눈 대화 속에는 ‘교회의 사명’에 관한 중요한 메시지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죄악 된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구원받은 감격이 있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충분히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는 우리끼리 모여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삶으로 체득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는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기쁨이 있고, 용서받은 눈물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용서와 평안을 느끼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끼리의 위로, 우리끼리의 기쁨으로 그쳐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소중한 사명은 증거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사랑의 빚을 세상에 흘려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자신이 체험한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과연 나병 환자들의 증언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나병 환자들이 전한 아름답고도 기쁜 소식을 전해 들은 이스라엘 왕은 병사를 성 밖으로 내보내 상황을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병사들은 나병 환자들의 말대로, 아람 군사들이 급히 도망하느라고 버린 의복과 병기가 길가에 가득한 것을 보고 왕께 보고하였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듣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성 밖으로 나아와 아람 사람들이 버리고 간 음식과 물건들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전쟁 이전의 삶으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던 왕의 신하는 백성들에게 밟혀 죽게 되었습니다. 신하의 죽음을 통해 “네가 네 눈으로는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라고 예언하였던 엘리사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병 환자와 같던 우리를 위해, 사마리아 성안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라는 소식은 우리에게 전해진 최고의 소식입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을 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일에 주저해서야 되겠습니까?
what's then?
비록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훗날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새 번역, 고전 9:16).”
우리는 바울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자신의 특권이나 자랑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우리의 특권이나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요, 사명입니다.
신길교회 이기용 목사님은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극심한 가난 가운데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도 아버지의 이른 죽음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분은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후에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큰 고난을 겪었는데, 생활비가 없어 6일째 굶고 있을 때, “기용아,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반문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사랑하신다면 왜 굶기십니까?” 이때, 하나님은 “아이들에게 네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어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분은 예배 시간에 모인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삶과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진솔하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끝나고 아이들의 통곡과 기도 소리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몸이 너무 힘들어 강대상 의자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이분에게 하나님의 또 다른 음성이 들렸습니다.
“기용아, 네가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저 아이들에게 해 줄 말이 있었겠니?”
그 순간, 이 분은 지금까지 풀리지 않던 인생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이분은 자신이 살아온 모든 삶이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최선의 길’이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이기용, 「믿음의 정석」(두란노, 2024); 「생명의 삶」(두란노, 2024년 8월호), 61쪽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을 사방으로 에워싸고 있는 아람 군대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힘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직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기적을 베푸시고, 나에게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다면, 여러분이 먼저 경험한 아름다운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9절).”
이 나병 환자들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