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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8일 금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2사무 11,1-4ㄱㄷ.5-10ㄱ.13-17
복 음 : 마르 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정년 퇴임을 한 어떤 형제님의 말씀입니다.
직장생활하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온종일 집에 있다 보니
아내의 잔소리에 너무나 힘들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아내와의 행복한 일상을 꿈꿨는데,
아내는 자신을 짐짝 취급하는 것 같다고 하소연하십니다.
하루의 많은 시간을 직장에 있다가 집에 오는 남편을 맞이했던 아내였지요.
그렇게 거의 30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온종일 남편과 함께 있으니 얼마나 혼란스럽고 힘들겠습니까?
하지만 남편은 전과 다른 모습만 바라보면서 아내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 형제님께서 얼마 뒤에 저를 찾아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어느 책에서 보았는데 부인에게 잔소리를 많이 듣는 남편일수록
당뇨 발병 위험이 낮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부인의 잔소리가 남편을 돌보는 역할도 한데요.
아내의 잔소리를 저의 건강을 위한 영양제로 생각하니까
이제는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상황 자체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좋은 쪽이 아닌, 나쁜 쪽으로 생각합니다.
내 탓이 아닌, 남 탓을 말합니다.
긍정적인 마음이 아닌 부정적인 마음을 채우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그런데 좋은 마음, 긍정적인 마음을 갑작스럽게 바꿀 수가 있을까요?
이는 단 한 번의 노력이 아닌, 계속된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자라는 씨의 비유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농부가 밤에는 자고 낮이 되면 일어나고 하는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씨앗은 싹이 트고 자랍니다.
농부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땅은 저 혼자서 줄기를 자라게 하고
이삭을 패게 하며 낟알을 맺게 합니다.
결국 곡식이 익으면 농부는 바로 낫을 댑니다.
추수할 것이 무르익었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씨를 뿌려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가
곡식이 무르익었을 때 추수를 거둬들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씨를 뿌려 놓고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농부가 있을까요?
그러나 주님께 실제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부분에 초점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을 키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말씀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물을 막 퍼주고 햇볕만 쬔다고 열매가 빨리 열리지 않습니다.
법석을 떨면서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열매가 맺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성령의 움직임에
인간의 노력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단 한 번의 노력보다 계속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말씀이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저의 죄악을 지워주소서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오늘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기념일입니다.
그는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했던’(집회 15,5. 입당송) 사제 학자로서,
‘뛰어난 성덕과 거룩한 학문의 본보기’(본기도)였습니다.
교회의 두 번째 천년기가 시작된 시기에는
우르바노 2세의 호소로 교회가 십자군 전쟁(1095~1291)을 일으켰는데,
뛰어난 성덕을 지녔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 불행한 사태를 학문적으로 수습하였습니다.
13세기에 그가 쓴 「신학대전」(神學大典)은
이 십자군 전쟁으로 유입된 앞선 이슬람 문명이 전해준 보물 창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이용하여
근세와 현대를 준비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담았던 것입니다.
두 번째 천년기를 마무리하던 20세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준비하던 교부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방법론인 네오 토미즘을 응용하여
귀납법적으로 사태에 접근하였습니다.
역대 교황들은 이 귀납법적 방식에다가 가르멜 수도자들이 발견해 낸 지혜,
즉 사회악을 관찰하고 나서 공동선을 판단하며
사도직으로 공동선을 창출해 내는 영성으로
현대 사회를 해석할 수 있는 문제의식으로 삼았습니다.
그 요체가 시대의 징표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시대 상황을 통해 추론해 나가는 방식으로 공의회 문헌이 작성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의 시대는
이집트 노예살이 시절에 바닥을 치고 올라온 정점이었고
그 이후 예수님 시대까지 줄곧 내리막을 걸었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심으로써 바닥을 치고 올라갈 뻔하더니,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래
다시 2천 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떠도는 유랑생활을 하다가
20세기에 들어서 겨우 수습을 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다윗의 시대에 시온 계약으로 정점을 찍었던 순간은 시편 8장으로 남아 있지만,
그가 곧이어 부하의 아내를 범하고 부하를 죽이는 죄악을 저지름으로써
자신과 동족의 운명을 내리막으로 끌어내린 일은 시편 51장에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정녕 저는 죄 중에 태어났고 허물 중에 제 어머니가 저를 배었습니다. …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당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
제가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오리이다.
주님, 제 입술을 열어 주소서.
제 입이 당신의 찬양을 널리 전하오리다.”
본시 시온 계약에 내려진 하느님의 축복은 시나이 계약의 정신,
즉 하느님을 섬기고 약자를 돌보겠다는 약속에 붙여진 부록과도 같은 것이었고
다윗이 그 정신을 실현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검증되어 왕위에 올려진 것이었는데,
다윗은 축복을 받자마자 죄악을 저지름으로써
하느님의 축복이 더 이상 사람에게서는 가망이 없어지게 만들었고
급기야 다윗 가문에서 출현할 메시아에게서 실현되도록
단계를 건너뛰게 만들어버린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뿐만 아니라 이러한 다윗의 죄악과 속죄하는 참회도
사실 알고 보면, 이미 옛적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으셨던
하느님의 말씀(신명 30,19)에 대하여 개인이든 민족이든
인간의 자유가 선택한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세상 창조 때부터 하느님 나라를 현세에 세우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은
하느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것이지만, 인간의 자유와 노력 여하에 따라서
그 열매 맺는 시기와 풍성함의 정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리해 놓았고,
공의회가 집대성한 문제의식으로 지금과 다가올 시대의 사회를
해석하고 응답하는 관점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이 읊은 속죄의 시편을
우리가 하루를 시작하는 성무일도의 초대송에도 되풀이하는 것이며,
특히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로 갈 때에
연도의 한 부분으로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자라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요,
인간의 자유와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역사의 철칙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사람은 모른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우리가 우리 마음에 좋은 뜻을 품는다면,
그것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씨가 어떻게 싹이 터서 자라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
즉 자기 안에 심어져 자라나고 있는 덕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아직 헤아릴 길이 없다.
땅이 은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열매를 맺듯이,
인간도 그렇게 스스로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
땅이 처음에는 싹을 트게 하고 줄기를 내고 그다음에는 이삭을,
또 그다음에는 이삭에 가득 달린 낟알을 낸다.
아직 약한 싹이지만 좋은 시작이다.
우리 마음에 심어진 덕이 선행으로 발전할 때,
줄기에서 이삭이 패는 것이다.
덕에서 훌륭하고 완전한 행동이 나올 정도로 진보하면
마침내 이삭에 낟알이 가득 달리는 것이다.
그 낟알들이 영글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31절)
겨자씨는 아주 평범하고 하찮은 씨앗이다.
빻으면 그 힘을 드러낸다.
믿음도 처음에는 단순하지만, 역경으로 으깨어지면 그 힘을 발휘하여,
믿음에 관해 읽거나 듣는 사람들을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운다.
하느님의 말씀은 분노의 쓸개즙을 가라앉히고, 교만의 불꽃을 억누른다.
말씀의 씨앗에서는 커다란 나무와 같이 자라났다.
이 나무는 바로 세상 곳곳에 세워진 교회이다.
이 교회에 하늘이 새들,
곧 하느님의 천사들과 사람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
주님은 겨자씨였다.
그분께서 상처 입지 않은 겨자씨였을 때,
백성들은 그분을 겨자씨로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이 그분을 아직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려고 잘게 부서지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겨자씨처럼 동정녀의 태라는 정원에 뿌려지신 그분은
십자가 나무로 자라셨고, 그 가지들은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갔다.
수난의 절구에 빻아진 그분의 열매는
그분과 관계를 맺는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이
맛을 지니고 보존될 수 있도록 넉넉한 양념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빻아짐으로써
당신 안에서 우리 모두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모든 것이 되셨다.
그분은 당신 정원 즉 교회에 씨를 뿌리셨다.
교회는 온 세상으로 퍼져가는 정원이다.
복음의 쟁기로 갈고, 가르침과 규율의 말뚝으로 울타리를 치고,
사도들의 노고로 온갖 해로운 잡초를 제거한 정원이다.
이 정원에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영원한 꽃들인
동정녀들의 백합과 순교자들의 장미꽃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모든 이의 푸른 풀밭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의 부드러운 초목 가운데 자리 잡은 아름다운 정원이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정원에 뿌리신 겨자씨이다.
그분은 성조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셨고,
예언자들은 싹을 틔웠고, 사도들은 크게 자라게 하였다.
그 씨앗은 교회 안에서는 큰 나무가 되어,
선물 즉 은총을 실은 수많은 가지를 뻗었다.
우리에게 있는 씨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매일 먹는 밥인 쌀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먹어왔고, 지금도 먹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쌀이 귀했습니다.
잡곡밥을 먹어야 했고, 분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5000년 역사 이래
처음으로 매년 쌀이 남아도는 시대입니다.
매년 40만 톤의 쌀이 남고,
그렇게 남는 쌀을 보관하는 비용이 수천억이라고 합니다.
맛있는 밥은 가마솥에서 지은 밥이라고 합니다.
가마솥의 밥이 맛있는 이유는 밥을 짓는 과정에 압력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압력으로 생긴 고온의 수증기는 쌀의 내부부터 익힌다고 합니다.
그래서 압력밥솥의 밥이 맛있다고 합니다.
90년대 초까지는 일본의 압력밥솥이 인기 있었지만
92년에 국내에서 출시된 압력밥솥이 일본산 압력밥솥을 몰아내고,
우리의 가정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밥맛의 압력을 알아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압력밥솥의 기압은 3기압인데,
한국에서 출시된 압력밥솥의 기압은 1.6기압이라고 합니다.
이 기압의 차이가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매일 마시는 커피의 브랜드를 알고 마시면 커피의 풍미를 느낄 수 있듯이
매일 먹는 밥인 쌀에 대해서도 좋은 쌀을 고르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외형이 좋은 쌀을 고르면 된다고 합니다.
동그랗고, 균형이 잘 잡힌 쌀은 씨앗 자체가 좋다고 합니다.
둘째는 생산 년 도와 도정 일자를 보라고 합니다.
최근에 도정된 쌀, 작년에 생산된 쌀을 고르면 된다고 합니다.
셋째는 혼합이라는 표시보다는 단일품종을 고르면 된다고 합니다.
혼합으로 표시된 쌀은 종류가 무엇인지,
어디에서 생산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단일품종을 고르면 어디에서 생산된 것인지,
어떤 품종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농산물 개방을 대비해서 우수한 품종의 쌀을 개발하였다고 합니다.
당뇨에 좋은 쌀, 빈혈에 좋은 쌀, 다이어트에 좋은 쌀, 임산부에 좋은 쌀도 있다고 합니다.
우수한 품종의 좋은 쌀을 고를 수 있다면
맛있는 밥, 건강에 좋은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를 때는 그냥 쌀이었지만 알면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맛있는 밥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는
중세의 신학을 집대성한 학자입니다.
성인이 저술한 신학대전은 교회의 보물입니다.
성인의 성체 찬미가는 주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기도문입니다.
성인에게 감사드리며 오늘은 성체찬미가를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사여.
사람에게 생명 주는 살아있는 빵이여,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사랑 깊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저, 당신 피로 씻어주소서.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내시리이다.
예수님,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아멘”
사막이 에덴이 되려면 믿음의 나무 한 그루부터 심기 시작하는 수밖에!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저절로 자라난다는 뜻으로
씨가 땅에 떨어져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와 이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뜻이 그 땅에 떨어져 죽을 수도 있고
자라나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선택은 땅에 달려있습니다.
땅이 그 뜻을 받아들인다면 저절로 열매를 맺어
마치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뜻이란 “서로 사랑하라”라는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이렇게 그 뜻을 따르기만 하면 분명 좋은 사람들과 사귐이 일어나
행복한 하느님 나라가 이뤄지는데도,
세상 사람 대부분은 왜 이것을 믿지 않고 서로 미워하고 불목할까요?
왜 단 한 번이라도 이 계명을 끝까지 믿어보지 못할까요?
그것은 그 사람들 안에 ‘그걸 믿어서 뭐가 좋은데?’라는
의문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장 경쟁에서 이기고 원한을 갚고 보복하는 것이 즐겁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맞는다면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 땅은 나무가 하나도 없는 사막처럼 됩니다.
새들도 없고 짐승도 없습니다. 외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지옥입니다.
‘악마를 보았다’(2001)라는 영화는 매우 잔인해서
보시라고 추천해 드릴 수는 없는 요즘 같으면 절대 안 볼 그런 영화입니다.
줄거리는 자신의 약혼녀가 살해된 것을 알게 된 수현이
살인자 장경철을 어떻게 하면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하게 복수할까만을 생각하며
둘이 대결하는 내용입니다.
수현의 이 복수심 때문에 애꿎은 많은 사람이 희생당합니다.
결국에 가장 잔혹하게 복수는 하지만
장경철은 고통을 모르는 사이코패스였습니다.
고통스럽게 보복을 하려 했는데
하나도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며
복수를 한 수현은 복수의 쾌감이 아니라
뭔지 모를 공허감으로 울부짖습니다. 이것이 끝입니다.
복수해서 누군가를 죽이면 속이 후련할까요?
나도 살인자가 되는 것일 뿐 나의 고통이
그 사람에게 복수하지 못해서 오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고통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은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악마와 같은 존재들을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분명 그런 길을 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연쇄살인범 유영철에게 가족을 잃은 고정원 루치아노 씨입니다.
이분은 유영철에게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들까지 잃었지만
그를 용서했고 그를 양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말을 듣자 유영철의 피해자 가족들은 들고일어났습니다.
어떻게 그런 인간을 용서하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용서하지 못한 그들은 대부분 자살을 하거나,
알코올 중독, 혹은 우울증 등으로 가정이 파탄 났습니다.
사람들은 왜 믿느냐고 말합니다.
왜 믿는지에 대한 증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아서 행복한 사람들,
곧 용서하고 복수해서 행복한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다면
저의 믿음은 흔들릴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막에 나무를 심어서 그 사막이 정원이 되게 하는
행복을 누리는 이들은 많습니다.
“모래밖에 없던 사막에, 스무 살 처녀가 가서,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막에는 이제 숲이 생겼습니다.”
동화에나 나올 듯한 이 이야기는 중국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입니다.
황사의 진원지라고 알려진 중국 네이멍구의 마오우쑤 사막.
그곳에서 20년 넘게 나무를 심어 거대한 숲을 일군 여인 인위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때 푸른 초원이었던 마오우쑤는 무차별 벌목과 양 떼로 인해 사막으로 변했습니다.
거기다 기온 상승까지 겹쳐 사막화는 더욱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때때로 불어오는 모래바람에 숨이 막혀 사람이 살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이곳에서
1985년 당시 20대 청년 바이완샹은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친구와 친척들이 사막에 지쳐 떠나갈 때도 겁 많던 그는
외지에서 먹고 살길이 막막하다는 이유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갓 스무살이던 인위쩐은 그런 바이완샹에게
시집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우연히 알게 된 바이완샹의 부모에게
“딸을 시집보내겠노라”라고 약속을 했다는 사실은
이미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사막에 온 지 한참이 지나서였습니다.
사방에는 모래뿐이고 길조차 없는 사막에서
몇 날 며칠을 통곡으로 보낸 인위쩐은 그를 지켜보던
바이완샹이 따라 우는 모습을 보고 점차 원망이 연민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희망의 말을 먼저 건넨 쪽은 인위쩐이었습니다.
“여기에 꽃을 심으면 안 될까요?
꽃이나 나무가 자라면 여기도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을까요?”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 내가 빠져나갈 수 없다면 차라리 이곳을 살 만한 땅으로 만들자.
모래를 퍼먹고 살 수는 없잖아?’
그때부터 인위쩐의 눈물겨운 노력이 시작됐습니다.
새벽 3시에 집을 나서 70리 길을 걸어가 도착한 묘목상에서
종일 일한 대가로 얻은 백양나무 묘목 30그루를 삽니다.
그 묘목을 업고 다시 돌아와 나무를 심었습니다.
나무에 준 물이 단 한 방울이라도 옆으로 새 나가지 않도록
모래를 쓸어 올려 둥그렇게 둑을 만드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모래 위에서 버티던 나무들은
며칠 뒤 모래바람에 전멸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인위쩐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임업국에 약간의 임차료를 내고 얻은 넓은 사막 땅에
그녀는 다시 600그루를 심었고 그중 200그루가 살아났습니다.
두 사람의 손으로 직접 만든 4㎞의 울타리와 7㎞의 용수로가 나무를 살린 것입니다.
자신감을 얻은 인위쩐은 이후 죽기 살기로 나무 심기에 매달렸습니다.
과도한 작업량으로 인해 첫 아이를 조산하고,
둘째 아이를 유산하기까지 했지만 인위쩐은
“10년 안에 눈앞의 모든 모래 언덕을 숲으로 만들겠다”라는
집념 하나로 나무 심기를 계속했습니다.
실패를 반복하기를 7여 년.
마침내 인위쩐은 사막에 나무를 심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바람의 방향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사막을 살리는 속도가 훨씬 빨라지고
조림 성공률도 80~90%까지 높아졌습니다.
나무가 살 수 있는 토양을 만들기 위해
지문이 닳도록 풀씨를 털어내 자루에 담아
모아 모래에 풀씨를 흩뿌리기도 했습니다.
풀씨가 뿌리를 내리고 살아날 확률은 만분의 일, 10만분의 일에 가까웠지만,
군데군데서 가는 싹들이 돋아났습니다.
살림도 조금씩 불어났습니다.
학교도 다니지 않았던 인위쩐은
“나무가 살 수 있으면 채소도 살 수 있다.
채소가 살면 사람도 산다”라는 생활의 철학으로
밭을 일구고 채소도 가꿨으며 닭, 돼지, 양도 한 마리씩 불려갔습니다.
버려졌던 땅에 숲이 생기고, 길이 뚫리고, 우물이 생기고,
전기가 들어오는 것을 본 인위쩐과 바이완샹의 친척들도
하나둘 그녀를 도우러 사막으로 들어왔습니다.
풀조차 살기 힘들던 징베이탕에서 80여 명이 일하여
2012년 한 해 옥수수를 재배한 면적이 4000평이었으며
같은 해 참마 5000㎏, 메밀 1500㎏, 녹두 3000㎏을 거둬들였습니다.
20년 전 사막에 남겨진 뒤 1주일간 먹지도 않고 펑펑 울었던 여자.
그리고 정부의 지원금 한 푼 없이 사막 1400만 평을
오아시스로 만든 질기고도 강한 여자 인위쩐.
그리고 그는 오늘도 풀씨 자루를 들고
아직도 모래로 덮여 있는 사막을 찾아가 풀씨를 뿌린다.
이제 사막은 그에게 황금빛 미래를 약속하는 기회의 땅이다.
[출처: ‘사막을 숲으로 바꾼 질긴 여자’, 강미현 기자, 프레시안, 2006.10.20]
‘사랑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진리를
안 믿어도 행복한 사람 한 사람만 보여주십시오.
이것은 마치 사막에 나무를 심지 않아도 정원이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막이 정원이 되려면 나무를 한 그루 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지금 사막이고 씨앗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정원이 되어 많은 이들이 쉴 수 있는 곳이 됩니다.
용서와 사랑의 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 심읍시다.
그러면 모든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 상처를 기억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내가 사막에서 정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고,
많은 이들이 내 안에 살아서 그저 행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