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에게 쓸쓸을 선물해 다오 / 이기철
온종일 이름 모를 꽃을 심고
꽃삽을 씻어 볕살 아래 놓아두고
죽은 샐비어 꽃받침을 모질게 끊어 내고
버려진 베고니아 화분을 돌 위에 얹어 놓고
어둠이 안심하고 내 곁으로 다가오도록 어둠의 허파 속으로
대문을 풍금처럼 열어 놓고
오지 않은 내일의 아름다움을 혹은 가 버린 어제와의 별리를
피는 꽃보다 지는 꽃나무의 남은 시간을 헴가림하며
내 몸도 혹 새소리처럼 가벼울 수 있을까 궁리하지만
옛날 사랑했던 이름들이 뭐였더라?
지금도 그 이름들을 사랑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한때는 별, 한때는 나무, 한때는 냇물과 바람을 사랑했다
어느 때는 돈, 어느 때는 명예, 어느 때는 여자
그러고는 최후의 애인일 시를 사랑했다
그 말 써 놓고 잠들면 편안했던 이름들이 있었다
잎새 위에 떨어지는 새똥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게 기대는 살의 푸름
앞바람이 뒤바람을 안고 가는 살가움
고독을 빌려 올 수 있는가
살면서 단 한 벌뿐일 고독, 애걸해도 돌아보지 않을 길의 고독
돌아선 애인처럼 쌀쌀해지는 고독
점점 차가워지는 물, 점점 단단해지는 돌, 점점 굳어지는 나무
누가 나에게 리본도 없는 쓸쓸함 한 상자를 선물해 다오
나도 그 힘으로 결코 보석일 수 없는 내일을 만나러 갈 것이니
부탁해, 나 혼자 가질 수 있는 이슬비의 맑음을 뺏어 가지 마
부탁해, 나 혼자 가질 수 있는 저 잎 지는 쓸쓸을 뺏어 가지 마
- 이기철 시집 <나무, 나의 모국어> 2012
[출처] 이기철 시집 26|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