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법안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법안종(法眼宗)》
『불교 선종의 한 종파.
중국 오대(五代)에 활약했던 청량 문익(文益:885~958)이 종파를 열었다. 천태 덕소(德韶:891~973)가 계승하고, 그 제자 영명 연수(延壽:904~975)가 종풍을 크게 떨쳤다. 고려에서는 광종이 연수의 덕을 사모해 학승 36명을 중국에 보내 공부하게 했다. 이 36명의 학승 중에는 지종(智宗)이 있었는데 자가 신칙(神則), 성은 이씨로 전주사람이었다. 그는 8세 때 사나사(舍那寺)에 잠시 머물고 있던 홍범(弘梵) 삼장(三藏)에게 출가했다가 홍범 삼장이 중인도로 돌아가자 광화사(光化寺)의 경철(景哲)을 사사(師事)했다. 959년(광종 10)에는 왕에게 송나라에 가서 법을 구하겠다고 하여 허락을 받고, 오월(吳越)에 가서 연수를 사사했고 이어 천태산 국청사로 가서 정광(淨光) 대사에게 천태교학을 배웠다. 970년 고려로 돌아오자, 광종이 그를 우대해 금광선원으로 초빙하고 중대사(重大師)에 임명했다. 경종 즉위 후 삼중대사로 승진했고, 성종대에는 적석사(積石寺)에서 살았다. 현종대에 광명사로 초빙되어 적연이라는 법호를 받았고, 1013년 왕사(王師)에 임명되었다. 지종의 공로는 연수의 법계를 고려에 전한 것이다. 법안종은 화엄과 선을 융합해 일으킨 선풍으로, 균여의 화엄교학이 왕성했던 고려 초기의 풍조에도 적응되어 수용되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불교의 흐름을 백과사전에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내용을 보겠습니다.
《고려의 불교 - 선교의 대립과 지양》
『신라말에 선법(禪法)이 전래됨으로써 그 이전에 수용한 유식·화엄·정토 등 교학의 여러 방면과 더불어 상호 대립하거나 화해하는 양상으로 고려 불교는 전개된다. 이처럼 선·교의 대립과 지양이 고려 불교의 일대 특징이기 때문에 고려시대를 선교병행(禪敎幷行)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태조는 훈요에서 각각의 종파를 고수하고 이들간에 서로 바꾸거나 빼앗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였다. 또한 선종 출신 승려뿐만 아니라 교종의 승려도 우대하여 균형있는 태도를 취하였고, 종파를 초월하여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초에는 화엄종·유가종·선종이 뚜렷한 종파로 확립되었다. 광종(925~975) 때에는 교종을 화엄종 중심으로 정비하고 천태종을 중국에 역수출하였으며 선종은 법안종(法眼宗)을 새로 도입하여 통일하려 하였다.
균여(均如:923~993)는 남악파(南岳派)와 북악파(北岳派)로 분열된 화엄종단을 통합하였고, 화엄종의 교리를 재정리하여 화엄제일주의의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다른 교파를 포섭하려 하였으며, 실천적인 보현행(普賢行)을 강조하여 이를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王歌)라는 11수의 향가로 지어 민중 속에 정착시켰다. 체관(諦觀)은 천태종의 기본 교리를 정리한 〈천태사교의 天台四敎義〉를 저술하였으며, 의통(義通)은 중국 천태종의 13대 교조가 되어 교세를 떨쳤다. 법안종은 천태학과 정토사상을 함께 융합하고 있는 것으로서 국사인 혜거(慧居)에 의해서 영도되었다. 그러나 경종(景宗:976~981 재위) 때의 보수적 정치성향으로 인하여 법안종이나 천태종은 독립된 종파로 성립되지 못하였다.
현종(1009-1031) 때는 현화사(玄化寺)를 중심으로 법상종이 다시 대두되어 화엄종과 함께 불교계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교·선의 대립은 그대로 100여 년 간이나 계속되었다. 의천(義天:1055~1101)은 교(敎)와 관(觀)을 겸수하지 못했다고 하여 균여의 화엄학을 비판하였고, 경교(經敎)를 무시하는 당시의 선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천태종을 창설하여 천태의 교와 관으로써 교·선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또한 의천은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어 4,000여 권의 제부장소(諸部章疏)를 수집하여 속장경(續藏經)을 간행함으로써 교학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혜소(慧炤)·학일(學一:1052~1144)·탄연(坦然:1070~1159) 등이 크게 선풍을 떨쳤고, 이자현(李資玄:1061~1125)을 비롯 한 곽여(郭輿:1058~1130)·권적(權適:1094~1146) 등은 거사적(居士的)인 선수행에 열중함으로써 선수행이 고려사회에 토착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2~13세기에 걸쳐 밖으로는 원(元)의 6차례 침입이 있었고, 안으로는 이자겸(李資謙)·묘청(妙淸)·정중부(鄭仲夫) 등의 난이 잇달아 일어나 최충헌(崔忠獻)에 의한 무인정권시대가 출현한다. 이런 상황에서 귀법사·중광사·부인사·동화사·부석사·흥왕사·홍원사 등 대찰(大刹)의 승려들이 무인란·민란에 깊이 개입하여 유혈충돌을 벌였으며, 내우외환을 신불(神佛)에게 기도하여 해결하고자 과도한 불사를 거행하는 등 교단의 타락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를 반성하고 승려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가려는 사상운동이 일어났다. 자은종(慈恩宗)에서 일어난 진억(津億)의 수정결사(水精結社), 선종에서 일어난 지눌(知訥:1158~1210)의 정혜결사(定慧結社), 천태종에서 일어난 요세(了世:1163~1245)의 백련결사(白蓮結社)를 그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진억의 수정결사는 서방정토왕생의 염불결사에 점찰참회법(占察懺悔法)을 가미하여 전통적인 유가종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지눌은 정치권력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나서 종교적 순수성을 지켜 정혜(定慧)에 힘쓸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돈오점수(頓悟漸修)·선오후수(先悟後修)를 표방하고,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함으로써 뜻도 모른 채 졸기만 하는 치선(痴禪)을 바로잡고 선교의 대립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화엄과 선은 근본에 있어서 둘이 아니라는 선교일치의 체계를 확립하였다.
그의 제자 혜심(慧諶:1178~1234)은 한걸음 더 나아가 유불일치설을 내세워 유교와 불교의 타협을 기도하기도 했다. 요세는 철저한 범부의식에 입각하여 참회에 의한 멸죄와 타력에 의한 정토구생(淨土求生)에 중점을 두고, 이를 지관(止觀)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이러한 결사운동은 남녀·빈부·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실천신앙운동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서민대중의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원 지배하에서 일연(一然:1206~89)은 〈삼국유사〉를 저술하여 민족적 자주성을 일깨웠고, 충지(沖止:1216~93)는 시문을 통해 백성들의 괴로움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고려 왕실은 원의 황실과 깊이 연결되어 천태종·자은종과 같은 교학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서민불교적 순수성으로 출발했던 백련결사운동도 묘련사(妙蓮寺)에 그 중심이 옮겨지면서부터는 권문세가인 조인규(趙仁規) 집안과 밀착하는 등 귀족불교로 변질되었다. 운묵(雲默)은 이에 맞서 백련결사 본연의 서민불교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미타신앙으로 나아갔고, 화엄종의 체원(體元)은 화엄경에 입각한 관음신앙을 고취하였다. 이럴 즈음 태고 보우(太古普愚:1301~82)·나옹 혜근(懶翁慧勤:1320~76)·백운경한(白雲景閑:1290~1374) 등은 원에 들어가 당시의 가장 활발한 선풍인 임제선(臨濟禪)을 들여왔다. 보우와 혜근은 모두 염불을 선수행과 연결시키고 있다. 보우에게 있어서 염불은 자성의 발현을 목표로 하므로 이는 관(觀:看話)의 성격을 띠는 것이고, 혜근은 망념의 방편으로 염불을 권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지(止:無念)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여기에서 서민대중이 쉽게 동참할 수 있도록 염불의 성격을 전환시키고, 염불을 통해 그들을 자력수행이라는 불교의 본질에 접근시키려는 노력을 볼 수 있다. 경한은 선·교가 이름만 다를 뿐 체(體)는 같아 평등한 것이라고 하여 선교를 회통하였고, 나아가 유·불·도 3교를 모두 자기의 사상 속에 융합시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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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의 선교일치에 일환으로 선종을 장려하기 위해 법안종을 채택하였고, 교종을 장려하기 위해 화엄종의 균여를 발탁하여 귀법사의 주지로 들여 앉혔습니다.
고려 초기 특히 광종때(물론 정치적인 이유이긴 하지만) 선교일치사상에 입각하여 법안종과 선종과 교종의 화엄종을 채택한 것은 맞지만 위 백과사전의 내용으로 보아 같은 초기때인 현종때 법상종과 화엄종이 대표하여 100년이 지속되었습니다.
법안종은 광종의 정치적이유와 선교일치사상으로 법안종을 크게 띄운 것은 사실이지만, 단대시기에 한한 이것을 근거로 과연 대표성을 띠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