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강우석 감독이 연출하고 의리파 배우 ‘김보성’과 청순 미녀 배우’이미연’이 주연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를 기억합니다. 사실 이 영화는 개봉되기 3년 전인 1986년 당시 전교 1등을 하던 어느 여중생이 삶을 비관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의 이 문구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어져 더 유명해졌습니다.
이 영화는 당시 대한민국의 과열 학습과 교육열, 학업 경쟁 등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관객들로부터 깊은 공감을 얻어낸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 영화 이후 이 말은 한동안 학업성적이 인생의 행복과는 무관하다며 여러 방면에 인용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이 말에 공감하며 살아왔고 실제로 살다 보니 인생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었다는 것을 깊이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세상은 다시 변했습니다. 소위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회 곳곳에서 펼쳐지는 삶의 모습들을 살펴보니 행복은 성적과 결코 무관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당일치기 부산 출장이 있었습니다.
출장 일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밤 열차 안에서 피곤하여 내내 잠을 청한 탓에 귀가 후 곧바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늦은 밤 TV를 틀었는데 모 방송국에서 지난 4월 말에 방영한 ‘다큐 인사이트, 별점 인생>’이란 프로그램을 재방송하고 있었습니다. 늦은 밤까지 배달하는 사람의 힘든 모습을 동병상련으로 잠시 시선 고정하게 되면서 이내 이 프로그램에 빠져들며 끝까지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근로자의 날을 맞아 지난 4월 30일 전파를 탔던 내용으로 4차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소위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에 우리 사회의 과제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고자 제작된 기획물이었습니다.
'우리의 새벽을 깨우는 건 이제 신문배달원이 아닌 새벽배송맨이다’라는 핵심이 되는 카피(Copy)를 주제로 던지며 시작됩니다. 시대의 산물인 4차 산업혁명은 앱과 SNS를 통해 수많은 노동을 ‘건당(件當)’ 거래되는 이른바 ‘플랫폼 자본주의’로 만들었음을 고발합니다. 초창기 배달과 대리운전에서 시작된 변화는 점차 청소나 요리와 같은 같은 가사노동, 번역, 웹 개발, 미용 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노동이 플랫폼 노동의 형태로 급격히 확산되어 거래되고 있음을 조명합니다. 방송의 카메라는 급속도로 확산되는 ‘플랫폼 자본주의’의 노동 사례의 단면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편집하여 배달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노동의 신개념인 ‘플랫폼 노동’이 가진 매력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원하는 시간만큼 할 수 있다는 자율성으로 꼽을 수 있지만 ‘건’단위 계약을 맺기 때문에 고용보험, 최저임금, 산업재해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플랫폼 노동의 사례로 당일 방송에 등장한 주인공들은 ‘플랫폼 배송 서비스 기사 P 씨’, ‘플랫폼 메이크업 강사 K 씨’와 ‘플랫폼 가사 서비스 일을 하는 L 씨’, 그리고 ‘플랫폼 배달 대행을 하는 P 씨’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정교하게 구축된 플랫폼을 통해 자신들의 일을 배정받고 성실히 서비스를 수행함으로 그 대가로 건당 수수료를 받게 됩니다. 이들의 수수료 수입과 이어지는 배정 건수는 이들이 수행하는 서비스의 질에 따라 달라집니다. 서비스의 질은 고객들로부터 받는 후기와 별점에 따라 절대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낮은 점수를 받을 경우 전체적인 평점에 영향을 미쳐 이어지는 주문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최고의 별점을 받아 높은 평점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심초사 점수 관리에 신경을 쓰는 플랫폼 노동자들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이들의 행복지수는 그들이 받는 별점에 따라 좌우되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은 다시 성적순이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기억하기조차 싫은 1997년의 암울했던 IMF 외환위기 사태 이후 ‘비정규직’이란 새로운 노동 형태가 등장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지금 맞이하게 된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플랫폼을 통하여 별점으로 평가받고 거래되는 또 다른 노동형태인 ‘플랫폼 노동’을 탄생시켰습니다.
지난 5월 1일 근로자의 날 기준, 플랫폼으로 일감을 구해 건당 정해진 보수를 받는 노동자들은 약 54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입니다. 이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무려 13.7시간이지만 월평균 순 수입은 163만 원에 불과하여 최저 임금을 밑도는 수준입니다. 더욱이 평점이 낮은 경우, 일감도 떨어지고 수입도 낮아지는 이중고를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즈니스의 기회를 잡은 플랫폼 운영 회사들은 이미 공룡과 같은 신흥 재벌이 되어 버렸습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을 챙기는 주인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세계적인 경제지들은 가까운 미래에 노동인구의 절반이 플랫폼 노동으로 일을 하게 될 것으로 전망합니다. 코로나19로 플랫폼 시장에 뛰어드는 노동자들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그들에게 돌아오는 주 수입원인 수수료가 갈수록 낮아지게 되면서 이들의 고민은 날로 깊어지고 행복지수는 낮아지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4차 산업혁명이 만들어 낸 플랫폼 시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별점과 리뷰 평가는 인간의 노동을 마치 상품처럼 거래하는 경쟁구조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마치 노예제도하에서의 노예들 몸값이 연상될 정도로 슬픈 현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구조에서 일하는 플랫폼 노동자들의 삶은 갈수록 척박해지고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별점을 받기 위한 치열한 경쟁 구조하에서 감정 노동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또한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현대인의 ‘워라밸 삶’은 이들에게 요원한 이야기인 듯하여 방송을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학교 성적만이 출세의 지름길이던 아날로그 시대에 외쳤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외침이 4차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이 디지털 시대에는 무색해진 듯합니다.
그 도도한 시대 변화의 흐름은 올해 코로나의 창궐로 그 속도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학업성적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줄을 세우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최저 생계를 보장받아야 하는 막노동의 세계에서까지 별점으로 등급평가를 받으며 작은 소망으로 행복하고 싶은 마음마저 난도질당하고 있습니다.
언택트 시대가 되면서 문화계의 많은 무대들이 사라지자 그 대안으로 각종 경연 대회가 대체 상품으로 개발되어 불티나게 도입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도 여지없이 별점으로 순위를 정하며 행복을 지수화하기 시작합니다.
SNS 시대의 꽃이라고 하는 유튜브와 같은 OTT 플랫폼 세상에서는 언제부턴가 구독자의 수와 조회 수, 좋아요의 숫자로 행복 서열이 매겨집니다.
소위 잘나가는 핵심 인사들도 자신의 명함 하나 소지하듯이 너도 나도 앞다투어 개인 방송 하나쯤 운영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연말이 되면 한 해의 업적을 평가받으며 별점으로 순위가 매겨집니다.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은 작품의 예술성과 질적 수준에 상관없이 시청자들의 별점 평가인 시청률로서 그 순위가 매겨지고 그곳에서 스타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행복은 부산물로 주어집니다.
끊임없는 경쟁 사회 속에서 지쳐가는 현대인들의 진정한 쉼터는 과연 어디인지…
그리고 그들이 찾아야 하는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지…
각박한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자연인들의 삶이 문득 행복해 보입니다.
(출처 : 늘푸른언덕)
첫댓글 ['우리의 새벽을 깨우는 건 이제 신문배달원이 아닌 새벽배송맨이다’라는
핵심이 되는 카피(Copy)를 주제로 던지며 시작됩니다.
시대의 산물인 4차 산업혁명은 앱과 SNS를 통해 수많은 노동을
‘건당(件當)’ 거래되는 이른바 ‘플랫폼 자본주의’로 만들었음을 고발합니다.]
[세계적인 경제지들은 가까운 미래에 노동인구의 절반이
플랫폼 노동으로 일을 하게 될 것으로 전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