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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그램 (상편)
천태봉
선박검사 준비하느라고 휴일도 쉬지 않고 바쁘게 일했다. 덕분에 그 유명한 호주 PSC 검사를 잘 받았고 이제 출항도 하였으니 그동안에 쌓인 노고를 풀 차례다. 마침 적도도 앞에 있고, 다음 주에는 날짜선도 통과할 것이다. 승조원들이 적도제를 지내고 다음날 쉬자고 한다. 그리고 이제 업무에 여유도 좀 생겼으니, 날짜선도 일요일에 통과하는 것으로 하여 하루 더 쉬자고 한다.
이 날짜선은 우리 선원들에게 고무줄처럼 재미가 있다. 날짜선을 동향으로 통과하면 같은 날짜가 반복된다. 그 선을 일요일 넘으면 하루를 더 쉬게 된다. 실제로는 월요일 넘는데 일요일 넘는 것으로 조정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휴일도 없이 항상 당직을 서야하는 항해사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러한 얘기를 들은 실습선원이 신이 나서 말했다.
“나이롱 날짜선을 만들어주신 용왕님께 감사!”
서향으로 날짜선을 넘을 때는 하루가 없어진다. 일요일 통과하게 되면 쉬는 날이 없어지므로 토요일로 당기기도 하고, 월요일로 넘기기도 한다. 업무가 바쁠 때는 주중에 넘어도 주말에 넘는 것으로 해서 쉬는 날을 없앨 수도 있다.
지구 지도의 구면에 그려놓은 이 씨줄과 날줄은 바다뿐 아니라 육지에도 그려져 있다. 그러나 뭍에서는 산이나 강 등으로 여기와 저기가 구분이 잘 되므로 이것을 잘 모른 채 산다. 바다에서는 지형지물에 의한 위치 표시가 없으므로 이 선에 의지해서 위치를 인지한다. 지도의 구면에 가로로 180개, 세로로 360개의 이 선을 누가 그었을까. 이것의 절대적인 유용성을 생각하면 조물주가 세계를 창조한 본래부터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불과 몇 세기 전에 관련 학자들이 창안하여 그린 것으로 우리 인간이 만든 것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가정하는 것인데, 그것이 나라 사이의 영토나 영해를 나누기도 할 만큼 매우 엄정하고 정확하다. 마치 허깨비에게 경계를 세웠는데 정직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 인간이 우리의 편의를 위해 만든 이러한 가상의 장치는 지구뿐만 아니라, 천체에도 그려서 공간을 구획함으로써 우주를 개척하는데 보다 체계적이게 하고 있다.
오늘날 인터넷을 두고 가상의 장치라거나 사이버 공간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우리 세대는 인터넷은커녕 컴퓨터도 구경하지 못하고 자랐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사이버의 개념이 인터넷과 함께 이 시대에 새로 나온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이것을 자유롭게 다루고 이런 세상을 즐기며 사는 젊은이들을 새로운 인간 유형이라고 여기기도 하는 듯하다. 많은 어른들이 이 새로운 세상이 생경해서 알려 하지 않고, 인터넷의 편리함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터넷뱅킹을 못해서 여전히 은행까지 직접 가서 일을 보는 불편을 감수한다. 여기에는 인터넷 사용법 자체의 어려움 이전에 그것을 다른 세계의 것으로 여기는 의식의 단애가 배우기를 가로 막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사이버는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있던 것이 조금씩 심화돼 오다가 인터넷으로 한 단계 도약을 한 것뿐이다. 땅의 구획도 애초에는 금을 긋고 말뚝을 박아서 내 땅 네 땅 구분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측량을 하고 번지수를 정해서 종이 위에 그려놓고 관리를 하다가, 그것이 확장되어 지구 위에 이 위도와 경도를 그렸을 것이다. 이러한 가상 개념의 역사 가운데서 세상에 돈이 출현한 것이 획기적인 발전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물에 대한 화폐야 말로 가공의 가치다. 처음에는 쇳조각이나 종잇조각에 쓴 가치의 표에 불가했지만, 나중에는 가치의 기준이 되었다. 살고 있는 집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달리는 마차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실물을 봐서는 알 수가 없다. 이거 ‘얼마짜리’하고 돈이라는 잣대를 갖다 대 봐야 그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현물을 돈으로 바꾸어서 보관을 하니 재물의 보관 장치까지 되었다. 이 돈도 가상화가 더욱 진행되어 이제는 인터넷으로 단지 숫자만 오고 가는 비트코인이라는 것도 생겼다.
사실을 증명하는 문서도 사이버로 발달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 하면 실제의 땅, 실제의 집, 실제의 자동차 등으로 실제로 있는 것, 즉 실재를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실물 보다 가상의 것들이 실제 주인 노릇을 한 지 오래다. 우리 집에 있는 금덩어리는 내가 실물을 가지고 있으니 확실히 내 것 같다. 그러나 이것도 다른 사람이 자기 것이라는 문서를 가지고 있으면 내 것이 아니라 그 사람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중요한 문서들도 컴퓨터에 옮겨 놓았다. 컴퓨터를 연결하여 인터넷을 만들고 멀리 떨어져 있는 당사자들 앞의 컴퓨터에 문서들이 똑 같이 나타나게 하였다. 탁자 앞에 마주 앉아 종이에 써서 할 결정 사항들을 컴퓨터 화면 위에서 서로가 인정을 하니, 종이마저 불요하고 직접 만날 필요도 없게 되는 것이다.
어떤 내용을 설명하는 서류의 가상화도 체계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생명체나 기계, 조직체 등의 유기체가 움직이는 원리는 실물을 봐서는 알기 어렵고, 설명되어진 이론을 봐야 알 수 있다. 가령, 누가 어떤 기계를 발명해서 특허를 내었다. 사람들에게 돈을 모아서 상품을 생산해보자고 하니, 어떤 투자자는 서류로는 믿을 수 없으니 실제 기계를 만들어 오라고 한다. 그러나 처음으로 발명된 기계는 실물의 기계가 진짜가 아니라, 서류상의 기계, 이론상의 기계, 즉 가상의 기계가 진짜이다. 그 기계가 기름을 절반 밖에 먹지 않는 새로운 자동차라면, 애써 실물을 만들어서 전문가에게 보이거나 특허청에 가져가서는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실제로 눈앞에서 달리는 것을 봐도 그것이 기름을 얼마나 어떻게 적게 먹는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열역학법칙 동역학법칙 연소공학법칙 등의 자연법칙에 입각해서 그 작동과정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서류를 가져와야 된다. 이 서류만 있으면 실물 기계는 쉽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특허청은 모두 이러한 ‘서면주의’를 채택하고 있고, 이는 당연한 이치이다.
얼마 전, 어느 대기업 회장님이 ‘생각의 힘’이라는 말을 해서 유행을 하기도 했다. 사람의 생각에서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의 상품들과 새로운 문화가 창조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회사나 나라나 세상을 생각이 이끌어 온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람은 몸 동아리가 크지만, 그 주인은 머리이고, 머리의 주인은 뇌이고, 뇌의 주인은 생각이다. 이 생각이 모든 것을 움직이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낸다. 이 생각들이 말이 되고 글로써 정리되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책 속에 저장되어 그 힘이 역설돼 왔고, 그것들이 더욱 더 체계화된 종교와 철학이 기관차가 되어 인류역사를 이끌어 왔다. 보이는 모든 것을 나타나게 하고 이끌어가는 보이지 않은 몸통은 생각으로 ‘유추’되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세상 모든 현상의 배후에 있는 가상의 무엇인데, 이것이 진짜 알맹이라고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기에 본체니 본질이니 하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이 가상의 본체에서 현상 세계가 나왔고, 한 단계 한 단계 점점 더 구체적인 가상화를 거쳐서 다시 그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며 역사가 아닐까. 그러한 것을 가르치는 종교와 철학은 이미 세상 가운데 깊숙이 들어와 있다. 서양 철학의 원류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 IDEA’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의 본체는 이데아이고,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그 그림자라고 한다. 서양 하느님의 원형이 바로 이 이데아라고 한다. 이것이 사이버의 본질을 명료하게 말해주는 것 같다.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세상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그 주인이고 그는 사이버로 존재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 물질에 대한 헛된 욕망 쫓지 말고 그 진짜 주인을 섬기라고, 예수님도 “진실로, 진실로” 거듭 거듭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더욱 강조해서 세상의 만물 만사가 실제나 실재가 아니고 허깨비들의 행진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명상가나 선사禪師들이 평생을 수행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을 보다 확실하게 깨닫고 심신에 배게 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현대 과학적 개념으로는 ‘홀로그램HOLOGRAM’에 매우 적절하게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같은 영상이지만 기존의 화면에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비춰지는 영상이다. 허공에 사람과 세상이 비춰져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나’와 세상이 환영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그 홀로그램 영화 속에서 희로애락 하는 나라는 배우가 진짜 내가 아니라, 그 영화를 비춰내는 영사기가 참나라는 것이다. 이 영사기는 환영들을 비춰내는 본체이다. 그런데 이 본체는 표현을 위해서 그렇게 부를 뿐, 또한 존재하지를 않은 것이다.
우리는 사물의 알맹이라고 하면 과일속의 씨앗처럼 단단한 무엇일 것이라고 은연중 생각한다. 그런데 진짜 알맹이는 그렇게 단단해 보이는 그것이 아니라, 다만 유추된 가상의 ‘생각’일 뿐이라고 하니 뭔가 허망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허망해 보이는 가상이야말로 불교에서는 근본적 진리라 하고,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실물들이 오히려 허망한 것이라 한다. 이렇게 거꾸로 된 허망을 가르치는 책에다 가장 단단한 다이아몬드(금강)라는 이름을 붙여서 우리 가치관의 반전을 유도하고 있다. 이 불교 금강경은 우리 감각기관과 인식체계에 지각되는 사물이 진짜가 아니니, 그런 것에 ‘속지마라, 속지마라’하고 거듭 거듭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비슷한 구절이 많이 나오지만,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행하여도 행함이 없다’는 것이다. 바위를 옮기고 모래알을 옮겼다고 생각하라는 정도가 아니라, 우주를 건설하더라도 무엇을 했다는 의식을 손톱만큼도 갖지 말라고 한다.
우리들이 배에서 일을 하면서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것을 금강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일을 해도 한다는 의식을 갖지 않으면 힘들지도 않고 스트레스도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은 몸으로가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이고,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 앎으로써 다만 선택을 하는 것일 뿐이다. 일의 대상은 어떤 실체지만, 그 일을 하는 내 안의 작용체는 실체가 아니고 가상적 존재가 가상적으로 작용할 뿐이다.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힘이 든다거나 지치거나 어렵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에 대한 의식을 바꿀 수 있다면 일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일 아니하는 휴식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것이 간단하지 않기에 도를 닦는 것이지만, 이렇게 가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지면 우리 안에 안식과 평화가 깃들 것이다. -7월호에 계속.
홀로그램 (하편)
천태봉
(6월호에 이어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 우주가 탄생하여, 역학적 법칙에 따라서 확대되어 은하와 별들을 형성하였다. 황막한 무기물의 한 별에서 유기 화학적 법칙에 따라 생명이 탄생하였다. 그 생명체에서 심리적 법칙에 따라서 마음이 자라난 것이 사람 아닐까. 그 사람이 그의 환경 배후에서 자연의 물질들을 움직이게 하는 수많은 법칙들을 찾아내어, 이를 이용해서 집을 짓고 기계를 만들고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고 환경을 자신에게 편리하게 변화시켜 왔다. 현상 배후의 이 법칙과 규칙들이 실물에 대해서 사이버적인 무엇이 아닐까.
물질의 자연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패턴을 알아내고, 세상 역사 발전의 규칙성을 찾아내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정보화시대는 가상의 이치며 법칙이며 그것들의 작용 형태들이 모여서 더 심화된 사이버 세계를 이루어서, 그것이 현실 세계를 제어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의 발달은 모든 현상 뒤에 숨어있는 이치나 원리를 응용하여 현실 세계에 구체물을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래서 역사는 가상이 구현돼가는 행진이며, 더욱 심화된 가상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마침내 우리 스스로가 가상적 존재가 되어가는 여정이 아닐까.
유추해냈다는 것은 현상 뒤의 보이지 않는 이치, 곧 크고 작은 진리를 찾아냈다는 말이다. 실제로 있는 것 보다 유추되어진 가상적 존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에서 많이 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인 것이 수학이 아닐까. 수학의 답은 모두 유추된 생각인데, 그것이 얼마나 정확하고 사실적인가. 문제에서 답을 얻으면 문제는 껍데기로 밀려나고, 찾은 답이 새로운 문제가 되며 그 답들이 길이 되어서 다음의 장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이렇게 유추 가운데 살면서도 유추에 의한 가상이 본질이라는 것까지는 ‘유추’하기 어려웠던가 보다. 현실 세계 이치의 유추뿐만 아니라,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유추되어 별로 실감이 나지 않던 정신세계의 진리도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이제 물리적 차원에서 증명이 되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중에서도 한 단계 더 근원적 작용으로 주목되는 것이 물질이 우리 정신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원자 속에서 물질의 최소 단위 알갱이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연구하는 양자물리학에서는 물질이 사실은 물질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물질이란 객관적인 실체마저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체가 아니고, 가상의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다. 양자의 ‘이중슬롯실험’에서는 물질의 최소 알갱이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입자가 되기도 하고 파동이 되기도 하는 이중적 반응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미 입자의 상태로 운동을 시작한 것도 나중에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도 파동으로 변하기도 하고, 반대로 되기도 한단다. 이는 시간적으로 나중의 사람 마음에 의해 앞의 일을 바꿀 수 있다는 것으로, 미래에서 과거를 결정하거나 번복하는 일도 가능할 것인가 하는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시간의 본질이 물질적 변화이고, 이는 당연히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변화가 일방 진행을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과 세상의 역사가 인과관계로만 이루지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이런 현상 또한 낯선 것이 아니다. 과거의 어떤 일의 성격이나 의미가 나중에 바뀌는 경험을 마음이나 정신적 삶 속에서 종종 경험한다. 이러한 추상적 경험이 이제 구체적인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인지 모른다. 이렇게 ‘과거에서 미래로, 질서에서 무질서’로 라고 고정돼 있는 시간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면, 물질과 생명적 차원의 세계에서는 혼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적 삶을 산다면 과거의 감옥을 벗어나고 미래의 불안을 떨쳐버리고 비로소 ‘지금 여기’에서 내 존재의 완성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양자 작용의 또 다른 특징으로, 소립자가 인과의 과정이 없고 확률적으로 일어나거나 여기 저기 동시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원인 없이 결과 없다는 인과관계 상식의 관점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물질의 근본적 모습이 과학적으로 그렇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큰 혼란을 주고 있는 우연,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수많은 이 ‘우연’들이 단일성 사건을 넘어 그 일어나는 모양이 우주적 패턴이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양자의 소립자들이 모여서 우주를 이루는 것과 같이, 그 우연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운이라거나 운명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 운명이라는 것이 우리가 모르고 믿음으로써 붙이는 이름이 아니라, 이제 양자적 작용으로 이해가 가능해지고, 그 몸통이 우주 본질이라는 가상에 잠재해 있는 무엇은 아닐까.
하느님이라는 정신적 존재가 이 물질의 우주를 창조했다거나, 우리의 마음에서 물질세계가 나왔다거나 하는 말이 얼마나 믿기가 어려운가. 어떤 영적인 존재가 빛을 만들어내고 땅을 만들고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은 전설이나 설화 정도로 알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은 우리 신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는 식의 추상성으로만 이해해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내 발길에 차이는 돌멩이, 저 앞의 산, 광활한 바다와 지구, 은하 등 구체적인 물질과 우주의 자연마저 내 마음과 연결돼 있고, 나아가 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해석의 비약이 가능해 질지 모른다.
우연과 필연, 인과의 법칙과 카오스이론 등으로 우리는 더욱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도 살펴보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으로 잠재해 있는 것을 우리가 불러내어 몸을 운행하게 한다. 어떤 이들이 말하듯이, 우주의 본체 또한 그렇게 사이버로 잠재해 있으면서 인연에 따라 모양을 지어서 이 세상이라는 이름의 현상으로 나타내는 것을 아닐까. 물질세계에 떨어져서 물에 뜬 기름처럼 겉도는 천애고아이던 우리 정신이 아니던가. 이제 물질이 내 살과 피라는 소식에 비로소 우리는 물질 가운데 들어앉아 안식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바깥의 물질들과 내 안의 자아를 따로 보는 구별을 지양하고 일체로 의식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 사상이 좀 더 깊이 이해가 될 것 같다. 예전에는 이러한 근원적 진리를 주관적으로 깨달은 선각자들이 대중들에게 추상적으로 가르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 과학이 객관적으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바야흐로 근원적 진리에 대한 지식이 대중화 단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전 사람들은 적도赤道에는 붉은 줄이 있고, 날짜선에서도 무슨 표시가 있는가 하고 상상했다. 우리 배 실습생도 이제 경도와 위도가 실제로 있는 것처럼 엄정하지만 너와 나의 생각 속에 있는 가상의 선이라는 것을 새삼 주목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한국사람과 미국사람, 유럽사람, 아프리카사람의 머릿속에서 해양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공통의 장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상의 좌표인 경도 몇 도, 위도 몇 도의 위치를 특정하면 어김없이 실제로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나의 머리에 그려진 이 지도(해도)가 너의 머리에 똑 같이 그려짐으로써 실제 땅이 아니라, 머릿속 가상의 같은 땅 위를 살고 있는 것이다. 지도나 해도는 우리의 이 생각을 알기 쉽게 종이 위에 옮겨놓은 것이다. GPS는 이 종이마저 버리고 그것을 컴퓨터 화면에 구현한 것이다.
눈감고 두는 바둑이 생각난다. 바둑판을 버리고 두 기사가 눈을 감고 말로써 바둑을 둔다. 흑의 기사가 4-4하면 가로 4번선의 세로 4번점(상변좌화점)에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백의 기사는 16-16(하변우화점)에 놓았다고 말한다. 서로가 자기 머릿속에 있는 바둑판 위에서 돌을 하나 둘 놓는 것이다. 상대가 말로써 놓은 것을 각자의 머릿속의 바둑판에 그리면서, 서로 싸움도 하고 집 수를 헤아리고 승패도 가릴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언젠가 우리는 실제 세상이 아니라, 머릿속 가상의 세계를 살지 모른다. 각자의 머릿속에 있지만 하나의 장이요, 하나의 나라로 이루어져 있는 하나의 세계다. 이 생활상의 가상이 본체적 가상으로 지평을 넓혀가는 과정이 우리의 역사가 아닐까. 각 국면의 가상들이 더욱 심화돼 가서 퍼즐을 맞추듯이 본체 가상과 오버랩이 되면, 이것이냐 저것이냐 구별이 없어지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정신마저 불요해지지 않을지 모르겠다.
‘나’라고 하는 이 물건이 정신 같은 것은 있지 않은, 바윗돌 같은 것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라고 상상만 해봐도 심신이 녹아내리는 듯이 평안해 진다. 정신이 정신이랍시고 얼굴을 드러내어 설치면 번뇌를 부르는 귀신이 되고, 없는 듯이 잠재해 있다가 우리가 부르면 나와서 그 작용만 하고 다시 사라지는 정신이 참 정신이 아닐까. 우리는 없는 듯이 있는 이런 정신의 사람을 점잖은 인품이라고 하고, 이런 권력의 왕을 ‘요순遼順’의 이상적인 임금이라 하지 않는가. 이렇게 우리들의 정신이 없어지면(?) 머지않아 이 물질의 우주도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빅뱅이 일어나고 다시 우주가 나오고 생명이 나오고 정신이 나와서 다시 사라져가는 우주의 하루를 되풀이 하지 않을까.
여기에 이 모든 과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한 존재가 있다. 회로애락을 반복하는 내 마음을 바라보고, 해가 뜨고 지는 하루를 바라보고, 한 나라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지구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우주 역사를 바라보고, 우주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바라본다. 우주 생멸이 한 번 두 번 반복하는, 우주의 하루 이틀 사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존재다. 구도자들은 이 존재가 참 ‘나’ 라고 한다. 이 본래의 존재, 가상의 존재로 돌아가기 위해서 도를 닦는 것이다.
도를 닦아 트인 사람들에게는 이미 그것이 실제 현실 세계가 아닐까. 부산역 광장에서 탁발하는 수도승, 오가는 군중들 가운데서 어깨를 부딪치며 목탁을 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이미 그 세계에 들앉아 있지는 않을까.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개념이 접근할 수 없는 적멸의 자리, 참 나의 상태에서 없는 듯이 있지 않을까. 우리 보통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로, 있지도 않은 세상이라는 환영의 귀신들과 얽히고 설켜서 혼란 가운데서 괴로워하고 있다. 지금 우리 눈으로 보고 있는 세상이 아닌 의식의 세계, 정신의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을 상상을 해보니 세상살이라는 이름의 승냥이 상태로부터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놓여나지는 것 같다.끝.
월간 海바라기 2017.06~0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