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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상적광선원(常寂光禪院) 원문보기 글쓴이: 상적광토(常寂光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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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연우/소동파
여산연우(廬山煙雨) - <소동파(蘇東坡)>
廬山煙雨浙江潮 未到千般恨不消 여산연우절강조 미도천반한부소
到得歸來無別事 廬山煙雨浙江潮 도득귀래무별사 여산연우절강조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여 가보지 못했을 땐 천만가지 한이었는데 가서 보고 돌아오니 별다른 것은 없고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었네.
<해설>
이 글은 중국 북송 때의 시인이자 정치가며 시문서화(詩文書畵) 모두에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던 소동파(蘇東坡 : 1036-1101)의 시다. 본명은 소식(蘇軾)인데 호가 동파거사이다. 아버지는 소순(蘇洵)이며 동생은 소철(蘇轍)로서 모두가 당송팔대가에 든다. 또 전하는 바에 의하면 누이동생 소소매(蘇小妹)는 불교의 유명한 의식문인 관음예문(觀音禮文)을 지었다고 한다. 집안이 모두 문장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불교에도 남다른 안목을 지녔다. 동파거사는 깨달음을 노래한 오도송도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이 시도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하였다. 그러나 깨달음의 경지란 한마디로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며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경지다. 그러므로 세존도 일생을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설하시고도 마지막에는 한 마디도 설한 적이 없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깨달음의 경지는 실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만 깨달은 사람만이 아는 자리다. 그래서 도가 같아야 안다[同道可知] 라는 말도 있다. 소동파는 이러한 사정을 신비한 풍광을 보았을 때의 심정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중국에는 땅도 넓으려니와 아름다운 산과 강과 풍경이 무수히 많다. 계림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계림이 있다.”라고 하여 계림을 천당과 겨루는 표현을 한다든지 또 단하산에는 “중국에 계림이 있다는 것만 알고 단하산이 있는 줄을 모르면 견문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 받는다.”는 등의 표현을 하여 계림보다 못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들은 바에 의하면 계림보다 더 아름답고 신비한 곳이 많다고 한다. 여산에 안개비가 내릴 때의 풍광과 절강에 조수가 들어오고 밀려가는 모습과 그 소리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실로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으로 헤아려 짐작할 수 없는 경치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경치를 전해 듣기만 하고 가보지 못하면 그 한이 천 가닥 만 가닥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러다가 직접 그곳에 가서 그 풍광을 보니 “별다른 것은 없고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었네.”라고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 말은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은 한마디도 표현하지 못했다. 마치 세존이 팔만대장경을 설하고도 자신의 깨달음의 경지는 한마디도 설하지 못했다고 한 것과 꼭 같다. 그래서 결국은 가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한만 더욱 깊게 만들뿐이며 하루빨리 가보고 싶게 만든다. 팔만대장경이란 것도 결국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욱 깨달음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킬 뿐이며 하루빨리 깨닫고 싶게 할 뿐이다. 깨달음이란 직접 자신이 체험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을 절묘하게 표현하였다.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여, 가보지 못했을 땐 천만가지 한이었는데 가서 보고 돌아오니 별다른 것은 없고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었네.”
01. 차의 향기 02. 나무끝에 연 03. 대숲에 홀로 앉아 04. 하늘정원 10. 홀로 있으면 내 모습이 보인다 11. 이밤을 어디서 쉬나 12. 차한잔에 담긴 향기 명상음악 : 초심>님이 올린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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