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창립 40주년 영훈학원
2005년 3월 27일은 영훈학원이 40년을 맞이하게 되는 날이다. 학원 설립자는 서울시 초대교육감을 지내신 김영훈 선생님으로, 당신의 환갑일을 개교기념일로 삼았으니 생존해 계신다면 2005년 3월 27일 개교 40주년, 이 날은 꼭 100세를 맞이하는 날이기도 하다. 영훈학원은 개교 당시부터 유치원, 초, 중, 고가 있어 왔으며 현재 유치원은 운영되고 있지 않다. 현재의 이사장님은 설립자의 큰 아드님이신 김하주 이사장님이다.
나는 1989년도에 대방동에 있는 장훈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94년 나의 모교인 지금의 영훈고등학교로 전근을 오게 되었다. 그 당시 나를 가르쳤던 은사님들이 25분이 계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제 한둘 퇴직을 하시거나 세상을 떠나시는 분이 늘고 있다. 나는 나를 가르쳤던 은사님들을 모시고, 또 나의 제자이며 후배들을 가르치며 큰 보람을 느끼는 가운데 교사 생활을 하고 있다.
40년사를 맡아주면 좋겠어
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인 2001년. 이사장님께서 나를 불렀다.
“최선생, 영훈학원 40년사를 썼으면 좋겠는데 최선생이 좀 해주었으면 좋겠어. 30년사를 만들기는 했는데 내 마음에는 전혀 들지를 않거든. 그러니까 30년사는 없던 것으로 하고 이번에 40년사를 좀 맡아서 했으면 좋겠어...”
이미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후였다. 한 사람의 교사가 학원 전체의 역사를 집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특히 내가 무척 바쁜 것은 하나님께서 다 아실 텐데, 쉽지 않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 일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맡도록 하시는 어떤 뜻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어찌할까를 고민했다.
무엇보다 40년사를 하게 되면 담임 업무나 다른 잡무는 접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기독학생회 운영이나 선생님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이 되서는 안 될 것이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후 꽤 오랜 시간 기도하고 난 후 나는 마음을 굳혔다.
무엇보다 김하주 이사장님을 자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기대감을 가졌다. 이사장님을 위해 기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직접 대면하다보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명확히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그 일을 감당하는 까닭은 충분하리라 생각이 들었다.
기록보존실의 탄생
나는 이사장님께 확실한 어조로 말씀드렸다.
“네, 알겠습니다. 이사장님. 부족하지만 기쁘게 감당하겠습니다. 다만 언제든지 이사장님을 뵈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괜찮으실는지요?”
“그럼, 언제든지 와요. 초등학교하고 중학교도 담당 선생님을 선정해서 그렇게 진행해요. 그리고 기록보존실을 만들어 줄 테니까 업자를 불러다가 원하는 대로 잘 꾸미고,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하고 말야...”
“네, 알겠습니다.”
나는 영훈고 7회, 1982년 졸업생이다. 학생 당시에도 문예기자부원으로 교지와 신문 편집 등을 했었다. 그리고 1994년에 영훈고에 와서 현재의 기독학생회를 맡기 전까지 문예기자부 지도교사를 하며 학생들과 함께 교지와 신문을 약 7년 정도를 맡았었다. 약 10여년간 영훈고를 떠나 있던 대학과 군 시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항상 영훈고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 때문에 학교의 근황을 잘 알 수 있었다.
기록보존실을 꾸몄다. 예전의 수위실과 창고를 뚫어 개조하여 겨울에는 따뜻한 온돌방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업자를 불러 책장 네 개와 긴 탁자 두 개를 짰다. 또한 컴퓨터와 개인 전화, 작은 냉장고, 예쁜 커텐, 캐비넷 등 40년사를 진행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이사장님께서 배려하셨으며 나는 그곳을 주신 하나님께 무척 감사해 했다. 왜냐하면 아이들과 점심 시간을 이용해 일주일에 한 번씩 성경공부를 해왔는데 그동안 적당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힉교의 기록보존 자료를 정리하고 또 보관하는 중요한 일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을 순종하는 데 필요한 준비의 공간으로 감사히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초중고 담당 선생님들
2001년도에 기록보존실 공사를 마무리 하고 그 곳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훈학원 전체의 틀을 고민하고 어떤 방향으로 집필할 것인지 방향을 잡았다. 매우 분주한 날들이었지만 수업도, 당시 직업반(비전반)을 맡았던 것도,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들도 모두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건강과 시간 등 모든 여건을 허락하고 계셨다. 특히 국어과 선생님들께서 내가 할 일이 무척 힘들고 또한 중요한 일이라는 것에 공감하셔서, 수업 시간도 다른 분들보다 가장 적게 해주셨고, 보충수업도 맡지 않도록 배려하셨다. 마음이 따뜻한 분들이 많은 국어과 선생님들, 그리고 영훈고의 선생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린다.
2002년에 들어서며 초등학교에 방청, 석창준 선생님과 중학교 김동순, 안동원 선생님께서 이 일을 같이 하시기로 정해졌다. 특히 방청 선생님은 퇴직을 하신 분인데 초등학교의 특성상 다른 인력을 사용할 수 없어 맡기로 하셨다 한다. 이 선생님은 건강과 여러 힘든 여건, 그리고 60이 넘으신 연세인데도 무척 책임감 있게 일을 잘 마무리해주셨다. 감사의 말씀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선생님들과 내가 각 학교의 것을 정리한 후 총괄 책임은 내가 맡아야 함에 어깨가 무거웠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을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무의미한 것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세상의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기쁘게 감당하기로 했다.
편집비가 없어요
선생님들께서 자료 수집을 하시고 각 학교의 것을 정리하는 2003년까지 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학교에서 기도하며 기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2004년도를 맞이하고 40년사도 본격적으로 총괄 편집, 진행해야만 했다.
나는 그동안 신청하지 않았던 2004년의 일 년간 편집비 중 6개월분 70만원을 교장선생님의 결재를 얻어 재단으로 넘겼다. 이 편집비는 최소의 경비로 나보다도 초등학교와 중학교 선생님의 식사와 교통비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편집비를 지출할 수 없다는 통보가 이사장님에게서 돌아왔다고 전해졌다. 나는 먼저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그 연유를 여쭈었다.
“교장선생님, 40년사 편집을 하는데 편집비가 지출 될 수 없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네요. 겨울에 두 달 동안 교지 편집을 해도 100만원 가량의 편집비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잖아요. 어찌된 건지요?”
교장선생님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최선생, 그러게 말야. 어찌된 영문인지... 평교사가 시간 내서 그런 것을 만드는데 무슨 편집비냐고... 아마도 누가 옆에서 안 좋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심증은 가는 선생이 있거든... 최선생 알잖아? 응?”
장로님이시며 나의 고1때 담임선생님이셨던 교장선생님은 이 일을 신앙적인 제동으로 보고 계셨다. 기독교학교가 아닌 영훈고 뿐만이 아니라 종교 자체를 무척 싫어하시어 모든 종교반을 없애도록 하였던 현재의 이사장님. 결국 그 이사장님을 움직이는 분들의 부추김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이사장님의 생각이 그러한데 편집비 때문에 일을 그만하겠다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 누가 하게 될 지는 모르지만 50년사, 100년사 등 학교의 일을 하게 될 때 편집비 없이 40년사를 썼었다는 것 때문에 선례가 되어 그분들이 불편해 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자세한 경위를 말하고 어찌하면 좋을지 상의를 했다.
“여보,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그 돈이 사실 많은 것도 아닌데... 당신 고생하는 것을 보면 사실 몇 배는 더 알아서 줘야 하는 것 아냐? 담임도 못 맡고, 선생님들과도 예전보다 더 어울리기가 힘들고... 손해 보는 게 사실 많잖아. 당신이 못하겠다고 하면 어떨까?”
아내의 답도 근본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 날 저녁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불 꺼진 방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내와 두 딸은 이미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묻기 시작했다.
“하나님, 정말 이 일을 제가 계속해야 합니까? 사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고 벅찹니다. 거기에다가 일을 시켰으면 할 수 있도록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편집비도 주지 않고 책을 만들라고 하는 이런 일이 어떻게 학교 안에서 생길 수 있는 겁니까? 좋습니다. 저는 졸업생이니까 제 돈을 써가면서도 순수하게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기도했을 때였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그거다. 그렇게 해라.”
나는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순수하게 봉사하겠다는 그것, 바로 그것이 내 뜻이다. 물질적인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40년사에 품은 내 뜻은 분명히 있으니까 참고 그대로 기쁘게 진행해라......”
하나님의 음성은 너무도 명확히 내 가슴을 쳤고 또한 깊이 박혔다.
순수하게 봉사하죠
다음 날 교장선생님께 밝은 어조로 말씀을 드렸다.
“교장선생님, 마음을 정했습니다. 제가 이 학교 졸업생이고 또 40년사를 마무리하는 기간도 얼마 안 남았지 않습니까?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 편집비 없이 그냥 순수하게 봉사하겟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장님께 말씀드려 주세요. 편집비 관계는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은 큰 숙제가 하나 풀린 듯한 얼굴로 화안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최선생, 정말 그렇게 해 주겠어? 사실 내가 좀 고민했거든. 이치에는 맞지 않는다 해도 이사장님이 그렇게 단언을 하셨으니 말야. 고마워!... 그리고 내가 한 번 다른 길을 좀 찾아보지.”
“아닙니다. 교장선생님.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신 것이 있거든요.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있다는 겁니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요.”
그로부터 사흘 후 교장선생님께서 부르셨다.
“최선생, 이사장님이 말씀하시는데 그 편집비 말야. 그냥 따로 하지 말고 각 학교에서 초과근무수당으로 계산해서 지급하면 어떠냐는 말씀을 하시더라고. 많지는 않겠지만 최선생, 그렇게라도 하면 좋겠는데... 어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사장님도 고민하셨나 보네요. 하지만 전 괜찮습니다. 그냥 순수하게 봉사하는 것으로 할게요.”
그러나 교장선생님의 강력한 권유로 결국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 다음 날부터 은사님이신 교감선생님께서 초과시간근무대장을 들고 사인을 받으러 다니셨다. 이 모습을 보는 제자된 내 입장에서는 어찌나 송구스럽던지...
윤감사님의 등장
2004년 1학기 초반 무렵의 어느 날 이사장님께서 나를 찾았다. 이사장님의 옆 자리에는 한 늙수그레한 신사 한 분이 동석하고 있었다. 이사장님께서 소개를 하셨다.
“최선생, 이 분은 영훈학원 재단 감사고, 내 고등학교 동창이고 또 평생을 책을 만드는 일에 전념하신 분이거든. 그래서 40년사 관계를 말씀드렸더니 기꺼이 도와주신다고 해서 말야. 최선생. 이제 나에게 상의할 일이 있으면 이 윤감사님하고 해주면 좋겠어.”
나는 그 분과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잠시 혼동이 일어났다. 어떤 일을 추진할 때 전체 리더는 한 명이어야 한다. 그 리더가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할 찌라도 좌우에서 도와주며 일을 진행할 때, 성과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한 경계선이 필요함을 감지했다. 특히 책임의 소재가 명확해야 했다. 윤감사님이 전체를 맡아 책임을 지는 리더의 역할로 변경을 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내가 일을 진행할 때 조언을 구하는 정도이어야 할지... 잠시 혼동이 일고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일단 인사를 나누고 기록보존실로 올라왔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왜 이렇게 40년사를 진행하는데 이런 생각지도 않은 어려움을 주십니까? 제가 부족하고 적임자가 아니라면 진작 윤감사님을 보내주시든지, 아니면 이런 혼동을 주시지 말든지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네?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네?”
하나님께서는 나의 이 부르짖음에 별다른 말씀을 들려주지 않았다. 일단 그대로 진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고 했던 그 확실한 음성을 다시금 새기며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윤감사님의 잦은 호출에 나는 법인실로 자주 내려가야만 했다.
시간이 갈수록 이건 아니었다. 전체 일정을 윤감사님께서 조정하고 있었고, 책의 흐름에도 조언이나 상의가 아닌 당신의 생각을 고집스럽게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사장님께 드린 편지
나는 이사장님께 편지를 드렸다. 정부에서 사학관계법을 개정하려는 것 때문에 한국 사립중고등학교 연합회 회장이신 이사장님은 학교를 비우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드리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그 내용에는 이사장님의 건강, 그리고 학교와 이사장님을 위한 기도를 계속 하고 있다는 것 등으로 쓰여져 있었다. 또한 40년사에 대한 내용은 리더를 분명히 해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자칫 윤감사님을 공격하는 글이 되지 않기 위해 쓴 후에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다. 윤감사님이 전담하신다면 나는 고등학교 것만 정리하면 될 일이었다. 그것을 꼭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솔직하게 내 심경을 피력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를 부른 것은 이사장님이 아니라 윤감사님이었다. 그분은 상당히 불쾌 한 얼굴로 나를 대했다.
“최선생, 이사장님에게 편지를 드렸다고요?”
나는 담담히 말씀드렸다.
“네, 그렇습니다. 윤감사님.”
“이사장님이 보여주시더군. 그런데 왜 그랬어요?”
나는 어차피 한 번 와야 할 시간, 심호흡을 하고 상세히 내 심경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윤감사님, 감사님의 위치와 저의 위치를 명확히 해달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이것은 나중에 책임 소재가 따르게 되거든요. 책을 윤감사님께서 총괄 책임지신다면 저는 고등학교 것만 감당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였다. 윤감사님은 나의 말을 가로 막았다.
“아니, 아니 최선생. 그게 아닙니다. 나는 그냥 조언하고 또 최선생이 일을 하다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 올 때 도움을 주려고 있는 거예요. 총괄 책임자는 최선생님이고...”
나는 담담히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윤감사님. 지금 모든 진행이 윤감사님의 일정에 맞추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실 초등, 중등 선생님도 혼란스러워하구요. 윤감사님의 생각이 그렇다면 전적으로 저희들에게 맡겨주십시오. 그리고 제 생각에 윤감사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판단되면 제가 찾아뵈면 되지 않을까요?”
윤감사님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그래요, 최선생. 그렇게 해요.”
어려움의 연속
진행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40년 동안의 역사에 비해 많은 자료들은 분실되었고, 또 흩어졌으며 선생님들의 협조도 몇 분을 제외하고는 부족했다. 완전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심정이었다. 기존 30년사의 자료도 사진 중심이어서 기록물로는 매우 부족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보다도 생각지도 않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하나둘 일어날 때면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러시나’하는 생각으로 초점을 결국 하나님께로 돌리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나 서운함이 아니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도 학 학원의 40년 역사책을 집필한다는 것은 큰 영광이요 기쁨일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도 하나님께서는 분명 무슨 뜻이 있다고 하셨고, 확신의 마음을 주셨었다. 그래서 더욱 큰 기대감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세한 사항은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니까 분명은 하지만 그때까지 드러나지 않고 있는 비밀스러운 일, 그것은 여름이 지나면서 밝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귀하신 뜻
전교생 순결서약예배!
하나님께서는 영훈고에 전교생 순결서약예배를 허락하고 계셨던 것이다. 2001년 5월 19일 기독학생들과 문예기자부 70명을 대상으로 학교 인근 신성교회에서 순결서약식을 시작한 것이 2003년까지 12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해 왔다. 이것은 한동대학교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시행하고 있는 순결서약식을 중고등학교 청소년들에게 맞게끔 조정하여 실시한 것이다. 기독활동을 학교에서 공식적으로는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우회 선생님들 중심으로 방과 후나 자율학습 시간을 빌어 원하는 아이들 중심으로 진행해 오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교무실에는 한국청소년순결운동본부에서 나눠준 순결사탕이 선생님들 책상마다 놓여져 있었다. 그것은 통일교에서 교세 확장의 목적으로 전파하고 있는 것이며, 한국청소년순결운동본부는 그 산하 단체인 셈이다. 이 사실을 교장선생님께 알렸고, 교장선생님은 다시는 이 단체의 행사에 우리 학교가 참여하지 않기를 결심했다. 나는 그 때 말씀드렸다.
“교장선생님, 감사하게도 우리 학교는 순결서약을 이미 해 오고 있습니다. 신우회 선생님들 중심으로요. 지금까지 1200명 가량 했거든요. 공식적으로 하지는 못했지만요. 교장선생님. 이것을 학교 차원에서 하게 된다면 굉장한 의미가 있을 겁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여러 선생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순결서약식을 밀어 붙였다. 특히 목사님이 오셔서 메시지를 전달해주시는 것에 대해 불만의 뜻을 표하는 선생님들에게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응수하셨다.
“아, 그러면 목사님이 마음에 안 들면 순결서약 하실 수 있는 스님이나 누구 데리고 와 봐. 이 사람들아, 그래도 목사님이 제일 낫지 않아? 응?”
그렇게 해서 2004년 7월 6일과 9일 본교 1, 2학년의 순결서약을 할 수 있었고, 그 후 수능 이후 12월 3일에 고3들이 서약을 하여 전교생 1800명이 2004년도에 순결서약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내가 한 일을 기록하라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무의미한 일을 계획하지도 않으시고 진행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영훈학원 40년사에 나로 하여금 40년의 역사 속에 있는 영훈고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활동을 기록하기를 원하고 계셨던 것이다.
40년사를 시작할 때 스스로 생각한 것은 있었다. 초창기의 기독활동부터 현재까지의 활동을 기록하고픈 마음. 그러나 학교에서의 불인정으로 신우회와 기독교반은 왕성한 활동임에도 비공식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2001년 가스펠반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반이 본교 유일한 종교 동아리로 인정되고, 또 여러 기독 활동들을 허락하셨으며, 2004년에는 급기야 전교생 순결서약식을 상담부 주관으로 하도록 하여 명실상부한 학교 행사로 40년사에 기록하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그렇군요, 하나님. 영훈학원에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 이 엄청난 계획을 어리석은 제가 잘 알지 못하고 편집비니, 실질적인 리더니 하며 속상해했네요. 알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루어나가시는 이 아름다운 일들, 제가 기도하며 잘 기록하지요.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런 귀한 사명을 주셔서요...”
나는 울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그 확신을 발견할 때보다 기쁜 순간이 또 있을까?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짜증내고 원망하며, 한탄하며 오고 있었던가.
하나님의 기막힌 계획에 감탄을 했다. 그리고 너무너무 감사해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일이 또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출판사 선정 문제
가을로 접어들 무렵. 원고가 마무리되었다. 이제 일을 잘 해줄 출판사를 선정해야 되었다. 나는 십여 년간 우리 학교의 교지와 신문, 기타 발간물들을 만들어 준 씨티플랜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영훈의 꽤 많은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었기에 일하기가 무척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윤감사님을 위시한 재단측에서는 한 교사에게 출판사 선정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을 한 듯 출판사 선정에 있어서는 자신들이 알아서 하겠다고 나섰다.
일을 하는 사람은 최대한 신뢰도가 있고 또 안정적이며 감각을 같이 타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일의 효과는 크다고 믿는다. 40년사에 대해 비교적 많은 몇 천만원대의 돈이 개입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작용 요인이었다. 세상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어떤 큰 건을 물어 줄 때면 돌아오는 떡고물에 관심을 두고 또한 오고가는 것이 예상되는 속물적인 생각도 개입되는 듯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나의 생각은 책이 잘 나와야 한다는 것이고, 나와 호흡을 잘 맞추어야 하는 것이고, 또한 출판사와의 거리가 멀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또 한 번 깊은 숙고를 해야 했다. 일을 하는데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중간마다 제동을 걸어버리는 재단측과 윤감사님. 그냥 내가 못하겠다고 적당한 이유를 댄다면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나중에 불이익을 당할 것이고 그러한 것은 내 안중에 없었다. 처음부터 아쉬워서 일을 부탁한 사람은 이사장님이었고, 그렇게 진행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하고 안하고의 선택권은 사실 나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하나님의 뜻 하면 내 생각을 접곤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며, 의미 없는 일을 하지 않으시며, 또한 비밀스러운 일을 보여주시는 분이기에 그렇다. 상황에서 오는 부족함과 서운함이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기대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으로 바꾸어 주고 계셨다.
J-PLUS로 확정되고
10월 16일 모든 원고가 정리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출판사가 선정되었다는 연락이 와서 법인실로 내려갔다. 아무런 하는 일 없이 한 달 남짓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동안 12월 초 찬양제를 준비하는 시간을 확보하여 주신 깨달음에 도리어 감사하고 있던 중이었다.
법인실에는 윤감사님과 두 분의 손님이 차를 앞에 두고 마시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안경을 낀 출판사 직원인 듯한 남자 분이 명함을 내밀었다. 나는 별 뜻 없이 명함을 받아들고 무심코 들여보았다.
‘J-PLUS 이우양 출판부장’
명함에는 그렇게 씌어져 있었다. 나는 보자마자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제이 플러스면 A-PLUS와 어떤 관계가 있나요?”
A-PLUS는 한 입시 교재 출판사에서 나오는 교재를 말한다. 나는 분위기를 일부러 밝게 할 목적으로 농담처럼 말을 건넨 것이다. 그때 이부장님은 살짝 웃으며 조용하게 그러나 명확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네, 그건 아니구요. J는 JESUS를 말합니다. 저희 회사는 크리스천들이 운영하는 회사입니다.”
순간 내 입에서는 ‘아멘’ 소리가 튀어나오는 듯 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놀라웠다. 재단측에서는 다섯 군데 남짓한 출판사를 후보로 받아 여러모로 검토하였고, 바로 J-PLUS를 가장 적당한 회사로 선정했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간섭이며, 인도하심이었다. 옆에 있던 디자인실장 유정림 씨도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소개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또 한 번의 확신을 주셨다. 영훈학원 40년사의 편집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그래서 일을 하면서도 신나게 하라고, 아니 이 일이 끝이 아니라 크고 놀라운 비밀스러운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 동역자를 붙여주신다는 마음을 주셨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J-PLUS 회사는 서대문구 연남동, 경성고등학교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은 내가 살고 있는 연희동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었다. 일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집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기도하는 출판사를 연결시켜주고 계셨다.
함께 기도하며
나는 그 두 분을 기록보존실로 안내했다. 교정 언덕을 걸어 올라갈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감사해서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먼저 아이들이 예배드리는 지하기술실을 보여 드렸다.
“이부장님, 유실장님. 우리 학교는 기독교학교는 아니지만, 아니 신앙생활에 핍박이 많지만, 학생들이 이곳에서 매일 기도하며 나아간답니다. 그래서 간증이 많은 학교이지요...”
기록보존실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영훈학원의 역사와 비전,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등을 말씀드렸다. 모두들 그 이야기에 흠뻑 취했고 시간은 1시간 30분이 흐르고 있었다.
“이부장님, 그래서 영훈학원 40년사를 단순한 책으로 봐주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서 영훈학원이 정말 아름다운 사랑의 학교로, 하나님의 학교로 바뀔 수 있도록 기도하시면서 책을 만들어주십시오, 저 또한 J-PLUS를 위해 두 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이부장님과 유실장님은 한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 더한 감동을 맛보고 있는 듯했다. 나는 두 분과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영훈학원 40년사를 이미 삼 년여 전에 계획하시고 기도하게 하시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록할 수 있도록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더욱이 오늘 기도하는 출판사 J-PLUS를 붙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어찌 저희들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 오늘 이 시간 업무상으로 만났지만 이 책을 통하여 영훈학원이 복음화 되고 또 이사장님 등 믿지 않는 선생님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는 과정이 되게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일을 진행해야 하는 이부장님, 유실장님 성령께서 온전히 붙잡아주셔서 책 잘 만들 수 있게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오늘 이 기쁜 만남 주심에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기도를 마치고 서로 바라 본 우리들의 눈에는 감동과 사랑의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하나님, 인도하소서
이제 한 달 남짓 후면 <영훈학원 40년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현재 삼교 교정을 보는 중이다. 지난 주 이사장님을 만나 뵈었다. 표지의 색깔과 글자체를 정하기 위함이었다. 초록색 바탕에 금박 명조체로 정하였다. 그리고 이사장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최선생, 미안해. 일 하는데 많이 도와주지도 못하고 말야. 많이 애쓰고 있는데...”
나는 환한 웃음과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사장님, 아닙니다. 미안하긴요. 저는 아주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게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무리 잘 되어야 할텐데... 잘 될 겁니다.”
그리고 몇 마디의 말씀을 더 나누고 이사장님 방을 나왔다.
70세가 넘었고, 아내가 있음에도 함께 살지 못하는 현재. 홀아비 아닌 홀아비처럼 혼자 계신 그분, 김하주 이사장님이 어서 예수님을 영접하시길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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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동역자 여러분! 아래와 같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1. 영훈학원 40년사가 따뜻하고 감동적인 책이 될 수 있도록요.
2. 이사장님이 이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되도록요.
3. 영훈학원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찬 학교가 되도록요.
4. 일을 진행하시는 J-PLUS와 이우양 부장님, 유정림 실장님께 성령의 능력이 더하시도록요.
5. 부족한 저에게 책의 마무리 발간까지 지혜와 명철을 더하셔서 멋진 책이 발간될 수 있도록요.
6. 기독활동과 순결서약 등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으로 올려드리는 책이 될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7. 기도로 동역하여 주시는 형제 자매님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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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2. 9
영훈고 기독교사 최관하(017-264-5097)
홈피 : www.cyworld.com/3385097
첫댓글 최관하 ~~~~~~님 테잎으로만 듣던 짜랑짜랑한 음성의 주인공 이제사 게시물로 만나네요... 선생님 답게 빼곡히 써신 이글을 어찌 볼꼬...? ~~ 눈 아포 ~~ 생활의 승리 영적승리 추카드립니다.. 반가워요...
능력이 되시니 맡기셨습니다. 끝까지 승리하시구, 멋진 40년사가 만들어질것을 믿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