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명한 명서(예언자)를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저자 (칼릴 지브란)을
대다수의 지성과 영적 지도자들은 잘 알것입니다.
그 분의 사고의 깊이나 명상적 높.깊이의 위치는
실로 저같은 범부는 차마 따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이 위기와 갈증의 시대에 이르러
어쩔 수없이 이러한 분들의 상당히 고차원적인
영적 세계와 인간 이해의 전 분량을 다소 간추린
얘기로 얼마간으로나마 맛보기와 받아들이기를 하지
않고서는 어디까지로 줄행랑 쳐버린 오늘의 현실을
그 알맹이로부터 점차 치유와 걸르기며 어렵게
어렵게 준비된 것으로서의 다시 바로 세움의 길이
아예 불가능할 것이기에,
꽤 번거롭고 어려움이 많을 그 일들을 앞으로 몇차례
시행해 가보고자 합니다. 이 세상 어디엔가는 아직은
태고로 돌아가 맨처음으로 돌아가는 바다와 숲이
있을 것임을 우선 먼저 우리는 믿어야할 것입니다.
그곳이 어디라고는 미리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수없이 반복과 다시 바꿈자리며 모든것으로
바꾸어 왔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아직껏 우리가 현실속에서 오늘을
견디며 살아내고 있는것은 바로 그런곳과 이들이
이세상 어디엔가는 아직 얼마간이나마 생존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모든것을 분석과 합리화할
필요가 있는 인식보다 그것의 경험 후 마침내는 그
자체가 조용하고 완전하여 만족스러운 인식을
좋아하게 되지요 또
깨어있는 이들이라면
훤히 밖으로 드러나있는 진실보다는 감추어져 잘
드러나지 않은 한층 더 고귀한 진실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나 또한 숭고한 침묵은 언제나 숭고한 말로
시작한다는 것을 가려진 진실을 조금씩 바로보게
되면서 점차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만큼
살아내고서는 (근심 걱정 없음의) 모든 장점을 실로
높이 평가하고 온갖 거짓과 악의의 혼란스러움을 떠난 생의 모든면을 높여 더 좋아합니다.
만일 그런 삶의 장점들이
온갖 혼란스러움에 의해 가려진다면 저는
눈을 감고 자신에게 가만히 마법을 걸 것입니다.
"이미 견뎌야하는 백가지 이상의 고난 위에
부처와 성자의 염주와 십자가가 더해졌구나" 라고
생각하며ㅡ
그 이유라면
삶에서 가장 중심에 서있는것은 그 누구든
의식을 떠나있기 때문일 뿐, 스스로의 크기와
그 인격만큼의 영혼세계나 정신세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세월)동안 온세상 속의 철학자나 모든 지성의
선자들이 온갖 천차만별의 인간과 세상을 품어내며
과거와 현제 미래까지를 이끌며 대변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 삶이 고요하고도 자기다워서 아름다웠던
것으로
마치 진리와 과학에조차 쉽게 입문해 다달은 듯한
그분들의 한층 일찍부터 깬 정신과 영혼의 (데칼콜마
같은)요소가 아니었을까요? 사실 에로스도 그렇지만
아가페와 이드의 사랑은 알고보면 모두가 같은 그 자체일 듯 보이지만 사실은 천차만별의 보이지 않는 이데아
까지를 지니고 있으며 그 너머의 진실이란 드러나
있는 눈앞의 진실보다는 전혀 드러나지않은 감추어진
진실속에서 더 커져가거나 깊어지고 또는 거꾸로
갈수록 아주 작아진 모습으로 삽니다. 실로
칼릴지브란의 말처럼,
정말 높고 숭고한 침묵과 행위는 역으로 언제나
숭고한 언어로부터 시작한다는 그 사실은 지당하신
말씀이란 걸 어느날에야 비로소 저도 깨달으며
배웠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매번 시를 쓰면서 어떤
마음과 영혼을 지녔느냐에 대한 물음은 가장 첫번째의
연구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또한 참고로
이집트와 시리아의 필자들은 책의 형식보다 (그 내용의
핵심 요소들을 발견하는 방법과 시의 외적인 형태를 탐구하기에 앞서 시인의 심리구조를 먼저 탐구하려고 시도하는 방법을 찾고있다고 하네요. 이는 그만큼 시인의
내면 세계가 그 축을 끌며 인간의 모든 행위와 결과물에 있어서 그가 누구든 어떤분야의 무슨 일을 하는 자이든 수만 격차를 가진
인간의 영혼과 정신 영역이 모든것을 좌우할 만큼
지대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사실 제가 아는 한의
것으로서도 단 하나의 분야만으로도 조금은 우스운
얘기일지는 모르나 아마도 단 하루만에도 백층짜리
건물과 산을 짓기도 하고 또 쉬 무너뜨리기도 할만큼
선과 악으로부터 사랑과 미움까지의 격차만으로도
대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정말
제대로 알고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