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하나님이 정하여 준 한자리 원문보기 글쓴이: 생명의 목장
122. 축복과 저주(창27: 27-40)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오늘 말씀은 야곱과 에서에게 내려지는 축복과 저주에 관한 말씀이다.
이삭이 야곱을 보고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다 이렇게 말했는데 의복의 향취라고 하는 것은 인격의 향취를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의복을 통해서 신분을 표현하고 그 사람의 용모, 성품, 행위 이런 것들을 표시했기 때문에 성경에서 의복은 그 사람의 행실, 인격에 관계된 의미다.
밭의 향취다 이렇게 말했는데 씨는 같아도 땅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열매가 많이 열리기도 하고 적게 열리기도 한다. 또 열매가 좋게 되기도 하고 나쁘게 되기도 한다. 엄밀히 분석하면 성분도 조금씩은 다르다고 한다. 인삼도 개성에 심는 것과 풍기에 심는 것, 금산에 심는 것에 따라서 각각 성분의 차이가 생긴다고 한다. 토질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에게 똑 같이 내린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어떤 밭이냐에 따라서 거기서 나오는 소산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네 의복의 향취는 밭의 향취와 같다 그렇게 말했다.
요즘 화학 비료로 인해서 땅이 산성화되고 여러 가지 공해 물질로 인해서 오염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밭은 자갈이 많아서 흙이 부족한 자갈밭도 있다. 이것은 아담 안에서 오염된 밭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하나님이 주신 밭은 좋은 밭이었지만 거기에 다른 것이 들어옴으로서, 인공적인 것이 들어오고 지식이 들어옴으로서 오염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지식으로 오염되면 사람이 자고하게 되고 고집스러워지게 된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자고해지게 되었다. 하나님 같이 된다 이런 오만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그런 모습이 바로 아담의 모습이다. 이것은 밭으로 말하면 오염된 밭이나 마찬가지다. 좋은 곡식은 잘 안 되고 잡초만 잘 되는 것이다.
농약을 계속 쳐야 되는 이유는 밭이 산성화되었기 때문이다. 밭이 정상적으로 되면 농약을 안 쳐도 된다. 그런데 화학 비료를 많이 쳤기 때문에 지금은 농약을 계속 치지 않으면 땅의 힘이 약해져서 곡식이 약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농약을 붓고 있는 형편이고 인간의 사정도 꼭 마찬가지다. 사람은 오염되어 있는데 거기에 법을 계속 강화하고 벌을 계속 강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벌을 강화하지 않으면 사람이 엉망이 되니까 율법이 나오게 되고 법칙이 나오게 되고 그렇게 되었다.
원래 하나님이 지으신 대로 두면 그런 것이 없어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동물의 세계나 이런 것을 보면 그 안에서 다 자연적으로 무엇이 조절되어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인간만은 그렇지 않고 인간의 계획과 생각에 의해서 사회를 조절하고 있기 때문에 우선은 좋은 것 같은데 지나고 나면 엉겅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와 같다. 그러니까 복 있는 밭,
그런 밭과 같다는 뜻이니까 좋은 곡식을 많이 맺는 밭이다 그런 뜻이다.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가 있다 이렇게 했는데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 이것은 인격 위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땅이 아무리 좋아도 하늘에서 이슬이 내리지 않고 물이 흐르지 않으면 땅은 사막이 되고 만다. 그러니까 사람 위에, 어떤 인격 위에 하나님의 은혜는 적절하게 부어지고 그렇게 되면 거기는 소산물이 나오게 되는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라고 표현된 이것은 모든 곡식을 대표한다.
곡식은 생명을 자라게 하고 유지하게 하는 그런 양식이고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먹고 생존하고 즐겁고 만족하고 이런 것들이 그 밭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향취구나 그것을 알 수 있다. 사람 속에서 어떻게 이렇게 풍요한 것이 나올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 밖에는 이럴 수가 없는 것이다.
비가 똑 같이 내려도 땅에 따라서 그것이 농사 용수가 될 수도 있고 홍수가 될 수도 있고 또 진탕 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적절한 인격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질 때 그것이 좋은 소산을 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할 것이다 했는데 만민은 백성이고 열국은 나라다. 밭은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소산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승패가 결정된다. 그러니까 소산으로 승리를 하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키가 크냐 적냐 여기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 인격으로 승리하느냐 못하느냐 거기에 달려 있다. 결국 사람의 어떠함은 모양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인격에 달려 있다.
밭은 모양에 달려 있지 않고 소출에 달려 있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인격에서만 곡식과 포도주가 나온다. 우리가 사탄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것은 결국 인격이지 다른 것은 없다. 무기로 이기는 것도 아니고 권력으로 이기는 것도 아니고 또 우리의 외모로 이기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사람의 인격으로 밖에는 승리를 거둘 수 없다.
모든 만민과 모든 열국들은 이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만물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 이런 말이 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 자기 뜻이 아닌데 어쩔 수 없어서 허무한데 굴복한다는 것이다. 참 아들들이 오면 자기들은 즐겁게 경배를 할 수 있는, 즐겁게 봉사할 수 있는 자리를 만날텐데 그렇지 않고 억지로 끌려가서 섬길 수밖에 없다 이런 뜻이다.
사람의 자랑과 사람의 능력은 그 인격에 달려 있다.
그것으로 밖에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그것으로 밖에는 모든 것을 복종케 할 수 없다.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 밭을 저주하는 농부가 있다면 그 농부 자체가 저주받은 농부다. 밭을 축복하는 농부가 있다면 그 농부는 자기가 축복 받은 농부다.
밭을 저주하는 농부는 저주받은 농부다. 마찬가지로 인격을 저주하는 인간은 저주를 받은 인간이다.
인격을 멸시하는 인간은 멸시를 받은 인간이다. 사람은 인격이 생명인데
그것을 무시한다든가 멸시한다든가 저주한다든가 하면 바로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다.
세상은 인격을 무시하고 다른 것을 우대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됨을 중시해야 하는데 사람됨을 무시하고 다른 것을 중시하고 있다. 가령 힘을 중시한다 그러면 코끼리 앞에 가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사람은 지금 모두 자기가 영광을 받을 자리를 떠나서 자기가 저주 받을 자리를 찾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힘을 찾아간다면 나는 저주받을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나는 모양을 찾아간다면 나는 저주받을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망하는 길이다.
아담은 생명과를 무시하고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니까 스스로 생명에 대해서는 저주받은 자가 되었다. 누가 일부러 저주를 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무시하면 거기서는 저주받은 사람이 된다. 내가 나를 무시하면 나에게 저주받는 사람이 된다. 내가 인간을 무시하면 인간에게서 내가 저주받는 사람이 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볼 때 야곱이 받은 복은 전적으로 인격에 관계된 복이다. 구약 시대에는 이것을 그렇게 해석할 수가 없고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그런 문제로 해석을 했다. 농사가 잘 되게 될 것이다, 야곱은 농사를 지어서 큰 부자가 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한다든지 아니면 야곱은 강성한 나라를 만들어서 세계 모든 나라들이 굴복하는 그런 나라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한 것이다.
유태인들은 지금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지금 그들은 이 세계 속에서 어찌하든지 이 축복을 바라보고 이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또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그들은 가장 강한 자가 되려고 그렇게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해 봤자 그것은 육신의 복에 불과하지 영원한 복이 아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 이미 그 소망은 끝나고 참 복은 인격 안에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이 증명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거부함으로 그 인격적인 복을 거부하고 지금도 물질적인 복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독일에서 600만이 학살당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세계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이 복인 줄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이 받아야 할 복이 아니었다. 그들은 더 높은 더 귀한 복이 그들에게 주어졌는데 그것을 스스로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택한 백성으로서의 자리를 뺏기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바울의 말대로 하면 유태인들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그것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갔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예비 된 그 축복을 거절했기 때문에 결국 예수를 받아들인 세계로 그 축복이 넘어가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이 복이 온 것은 결국 유태인들이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복을 환영하고 영접했다면 아마 그들이 이 우주적인 장자권을 수행해야 될 것이고 우리는 모두 거기에 복종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제 육신의 세계에서 끝이나고 이 축복은 우리에게 넘어와서 우리에게서 복의 원천이 나오도록 그렇게 바꾸어진 것이다.
아들의 향취는 곧 그리스도의 향취고 그리스도의 향취는 곧 인격의 향취다. 인격의 향취를 비유로 말할 때 밭의 향취라고 말했다. 밭은 인간에게 모든 양식을 공급하는 원천이다. 그러니까 인격은 그 인생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는 원천이다. 평안을 공급하고 사랑을 공급하고 안식을 공급하고 아름다움을 공급하고 모든 것을 공급하는 원천이 인격이다.
우리 육신의 일은 그렇다. 육신 자체가 모든 능력의 원천이다. 내가 힘이 있으면 이런 일도 할 수 있고 저런 일도 할 수 있다. 밭을 갈 수도 있고 배를 탈 수도 있고 땅을 팔 수도 있고 기계를 만들 수도 있고 전부 다 우리 육신의 건강에 달려 있다. 그러니까 그런 모든 것은 육신의 건강이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과 평안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 인격이 원천이 된다. 내가 힘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평안한 것도 아니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행복한 사람이 아니다. 생명과 평안과 행복에 관한 밭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격이 바로 그 밭이다.
에서는 뒤로 와서 축복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 오히려 저주를 받게 되는데 여기 있는 성경 말씀이 해석하기가 좀 어렵다.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며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이렇게 말했는데 처음의 기름짐에서 뜨고 하는 말은 뜬다는 말이 아니고 보라! 하는 감탄사다.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라 하는 말은 높다 하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이 말이 또 떠나다, 물러나다 하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머니까, 높다 하는 것은 먼 것이니까 그렇게 의역이 된다.
알아듣기 쉽게 다시 번역하면 보라 너의 위치는 땅의 기름짐과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어질 것이며, 떠날 것이며 그런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너는 멀어질 것이다 이런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가까워진 것이 복이데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에서 멀어져 버렸으니까 그것이 바로 저주다. 그러니까 보라, 너의 위치는 땅의 기름짐과 내리는 이슬에서 멀어질 것이다. 영어로는 away로 번역한 곳도 있고 without 이라고 번역한 수도 있다.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다, 칼을 의지한다 이 말은 은혜가 절대적으로 결핍되었다 그런 뜻이다. 사람이 싸우는 것은 은혜가 모자랄 때 싸우는 것이다. 내가 넉넉하면 싸울 필요가 없다. 내가 풍성하면 싸울 필요가 없고 여유가 있으면 싸울 필요가 없다. 내가 받은 것이 많으면 남하고 싸울 필요가 없는데 내가 메마르고 메마르면 싸움이 생기는 것이다. 도저히 다른 것으로 위로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마지막 방법이 싸우는 방법이다.
은혜가 없는 것의 최종적인 방법이 싸움이다. 무언가 여유가 있을 때는 타협도 되고 의논도 되고 화해도 되고 용서도 되고 다 된다. 그런데 이것이 다 메말라 버렸다. 모든 것이 다 메말랐다면 마지막은 전쟁이다. 싸움이다.
북한과 우리 사이에도 아직은 여유가 있다. 그러니까 협상이 가능하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서 제일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저들을 완전히 몰아붙이면 마지막 판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대어 들 것이다 하는 것이다. 쥐가 달아나다가 마지막 판에 고양이를 무는 것처럼 이런 것을 두려워한다. 마지막에 그들이 화학 무기라든지 생화학 무기라든지 생물학전을 벌릴 것이다 이것을 제일 우려하고 있다. 이런 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나면 모두 다 죽으니까 어찌하든지 이것을 라운드 안으로 끌어들여서 거기서 같이 살면서 문제를 해결해 보자 하는 것이 햇볕정책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생각 같으면 미국이 한 방에 쳐버리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곳에 있다. 아직 지금 여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도 죽게 되었다 그러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이 싸울 수밖에는 길이 없다.
북한도 지금은 원조를 받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 남한과 협상을 하면 손해 볼 것이 없다, 미국하고 협상하면 손해 볼 일이 없다. 지금 그들은 이익 볼 일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들은 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런 상태니까 협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협상을 하려면 자꾸 줘야 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자꾸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협상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유가 있으니까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인데 만일 전혀 여유가 없다 그러면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충분히 이해될 수 있고 화합될 수 있는 그런 상태에는 싸울 필요가 없다. 그런데 도저히 안 된다 이러면 싸우는 것이다. 내 안에 전혀 그런 여유가 없을 때는 싸우게 된다.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다. 그러니까 마른 명태처럼 기름기 하나 없이 될 것이다 이런 말과 마찬가지다.
네 아우를 섬길 것이다. 장자권을 잃었으니까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 만유는 우주적인 장자에게 굴복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야만 이 우주의 질서가 유지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에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이 통일된다 이런 말이 있다. 올바른 주인 밑에, 올바른 머리 밑에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 아우를 섬길 것이다 했다.
네가 매임을 벗을 때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떼어버릴 것이다 했는데 매인다는 말을 찾아보니까 방황한다는 뜻이 있다. 네가 방황할 때는 그 말이다. 방황할 때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떼어버릴 것이다 하는 말인데 말이 어렵다.
쉽게 해 보면 네가 방황할 때, 불안해서 방황할 때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릴 것이다 이렇게 일차적으로 번역하고, 조금 더 쉽게 하면 네 목의 멍에가 없어지게 되면 너는 불안해서 방황할 것이다 이런 말이 되고, 이것을 더 의역해서 알기 쉽게 하면 네가 방황할 때는 네 목에 멍에가 없어진 때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너는 네 목에 멍에가 없으면 방황하게 될 것이다 이런 뜻이다. 너는 항상 목에 멍에를 매어 놓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방황할 것이다 그런 말이다.
개는 멍에를 매어 놓아야 안전하지 목을 메어 놓지 않으면 어디 가서 죽을지 모른다 이런 것과 마찬가지다.
너를 법적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너는 버려질 것이다 이런 말과 마찬가지다. 멍에를 너에게 씌워 놓아야 안전하지 멍에를 벗어버리게 되면 너는 불안해서 방황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인데 그렇게 번역이 되었다.
네가 매임을 벗을 때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떼어버릴 것이다. 얼른 들으면 좋은 말 같이 들리는데 그 말이 아니고 너는 멍에가 없으면 안 될 자다 이런 뜻이다.
소에 코뚜레를 해 놓은 것은 소가 힘이 세니까 통제가 잘 안 된다. 그래서 코뚜레를 해 놓았던 것이고 사나운 개에 목을 매어 놓는 것은 아무 곳에나 가서 물고 뜯고 하니까 그래서 목줄을 매어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목을 매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이 있다면 바로 저주라는 것이다.
축복과 저주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이렇게 저주를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아버지로서는 할 수가 없는 말이다. 무엇을 하더라도 좋은 말을 해야지 좋은 복을 주고 싶지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이렇게 완전히 은혜가 고갈 된, 그래서 칼을 믿고 살 수밖에 없고 멍에를 메고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이 되라고 저주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고 하는데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하겠는가?
그러니까 축복과 저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누가 축복하고 싶다고 해서 축복이 되는 것이 아니고 저주하고 싶다고 해서 저주가 되는 것이 아니다.
돌을 보고 너는 금이다 해서 금이 되는 것이 아니고 금을 보고 너는 돌이다 해서 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금은 금이고 돌은 돌이다. 그래서 금은 귀하게 쓰여지고 돌은 천하게 쓰여지고 존재 자체가 그러니까 그렇다. 하나님이 이것을 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금은 귀하게 정해 놓았고 돌은 천하게 정해 놓았다. 그래서 이 복은 사람에 의해서 표현될 뿐이지 사람이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사람이 좌우할 수 있는 것 같으면 이삭이 당장 취소하고 야곱 이놈이 나를 속였구나, 그러니까 너는 정말 저주를 받아야 된다 할 수가 있다. 도덕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그렇게 하고 다시 뺏어서 에서에게 줄 것이다. 예를 들어서 논밭을 준다고 생각한다면 야곱에게 준다고 약속했을지라도 뺏어서 다시 에서에게 줄 수 있다 그 말이다. 정주영씨가 한 것처럼 그렇게 할 수가 있다.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야곱은 이미 이런 복을 받게끔 되어 버렸다. 이런 복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우리가 성경을 잘 연구해보면 이삭이 과연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야곱이 이렇게 되었느냐, 아니면 야곱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이 말을 썼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은 훨씬 뒤에 쓰여진 것이니까, 이 사건이 있고 아주 오랜 후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야곱의 결과를 보니까 좋은 밭과 같이 되고 만민이 복종하는 그런 백성이 되었고 에서를 보니까 저주받은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축복은 존재에 달려 있는 것이다. 존재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에 달렸다면 부모가 어찌 자식을 저주하겠냐는 것이다.
축복은 축복의 길을 가야 축복이 오는 것이지 내가 축복을 달라고 애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쫓아간다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물 속에 뛰어 들어가면서 안전하기를 바란다고 해서 안전해 질 수도 없고 불 속에 들어가면서 안전하기를 바란다고 해서 안전할 수도 없는 것이다. 불에 들어가면 죽게 되어 있으니까 그것이 아무리 자기가 원하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불 속에 들어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길을 잘 잡아서 축복의 길에, 축복의 노선 속에 있어야지 축복을 받지 저주의 노선 속에서 축복을 바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단지 어떤 사람이 그것을 대신 해 주는 것, 대신 알려주는 것이다. 너는 지금 저주의 노선에 있다 이것을 알려 주는 것이지 저주의 노선으로 가라 이렇게 할 권리는 사람에게 없다. 그리고 저주 가운데로 집어넣을 그런 사람도 아무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보면, 눈이 밝아서 보면 이 사람은 축복의 노선에 있구나, 이 사람은 저주의 노선에 있구나 이렇게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너는 지금 축복의 노선에 있다, 너는 지금 저주의 노선에 있다 이렇게 말해 주는 것이지 우리가 그것을 정해서 너는 축복의 길로 가고 너는 저주의 길로 가라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야곱과 에서의 길은 두 길, 두 민족의 길이다. 어떤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인 문제고 단체적인 문제인데 야곱에게 와서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된다. 아브라함과 이삭 때에는 구체적인 민족이 아닌 개인이었다. 그런데 야곱에 와서 비로소 열 두 형제를 낳고 그 열두 형제가 열 두 지파가 되고 그 열 두 지파를 가리켜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이다. 택한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 백성이 둘로 나누어지는 그런 길이다. 축복과 저주로 갈라지는 그런 길이다. 한 노선은 야곱으로 갈라져서 예수까지, 오늘 교회까지 이렇게 갈라지는 길이 되었고 하나는 에서로 해서 다른 길로 되어서 세상이 되어버린 그런 길이다.
중동에서의 역사는 민족적으로 갈라졌다. 유태 민족과 아랍 민족으로 이렇게 갈라지게 되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온 인류가 둘 중의 하나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축복의 노선이냐 저주의 노선이냐 이렇게 되었다.
결국 에서는 환경을 자기가 정복하면서 살아야 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은혜가 없으니까, 받은 것이 없으니까 자기 힘으로 발버둥쳐야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나가야 하는 그런 사람이 되게 되었다. 그리고 야곱의 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은혜로 열매 맺는 그런 길이 되게 되었다. 두 길로 갈라지게 되었다.
오늘날 세상은 이렇게 갈라져 있고 교회도 역시 그렇게 갈라져 있다. 어디를 가 봐도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 있고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있다.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저주의 노선에서 필요한 것이다. 은혜가 없는 곳에서 필요한 것이니까 말한 대로 멍에를 매어 놓지 않으면 불안하고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멍에라는 것은 바로 율법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통해서 유지되고 있는 세계가 하나 있고 전적으로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과 땅의 기름짐에서 오는 그것으로 사는 세계가 있다. 이 두 노선이 여기서 갈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