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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일 화요일 (설)
제1독서 : 민수 6,22-27
제2독서 : 야고 4,13-15
복 음 : 루카 12,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는 지인이 감동적인 영상이라면서 제게 하나의 파일을 보내주셨습니다.
미국의 인기 프로그램 ‘아메리칸 갓 탤런트’ 무대에 오른
제인 마르크레프스키라는 어느 여가수의 영상이었습니다.
노래를 부르기 전 인터뷰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이 노래는 서른 살 내 생명의 마지막 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여성은 폐와 간 그리고 척수까지 전이된 암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자기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작곡으로 ‘It’s Okay’라는 제목의 노래를 들고나왔습니다.
그녀의 노래는 진심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했습니다.
노래 후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이 쉬워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행복해지도록 결심해야 합니다.”
나의 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주변의 환경이 먼저 바뀌기를 바랍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어떤 기회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일분일초가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나의 행복을 위해 먼저 결심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복음을 통해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라면서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종처럼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영원한 생명을 목표로 삽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생명을 언제 얻을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언제 이 세상을 마치고 하늘 나라에 갈지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1독서의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라는
민수기 말씀처럼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즉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십니다.
그래서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삶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후회는 늘 남이나 주변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면서 기다릴 때 생기는 감정이었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남보다 ‘나’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를 줄이면서 행복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설날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많은 결심을 합니다.
올해에는 남 탓, 주변 탓, 환경 탓에서 벗어나서,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탓’만 하다가 결국 후회만 남는 마지막 날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허무할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을 힘주어서 하셨습니다.
깨어 있어라.
송영진 모세 신부
우리가 새해를 맞이한 것은, 우리의 공로나 능력으로 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조금 더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나의 시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시간을 사용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는 것은 남아 있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뜻이고,
또 그만큼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 빌어주는 ‘새해의 복’은,
지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일만 바라는 일이 아니라,
아무 두려움 없이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설날의 복음 말씀은 바로 그것을 묵상하고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이 말씀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지금’입니다.
신앙인은 ‘지금’ 깨어 있어야 하고, ‘지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라는 말씀은,
‘지금’ 준비되어 있는 상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이라는 말씀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이라는 뜻인데,
‘때’를 결정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그 ‘때’를 마음대로 예상하거나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7,21).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종말의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종말의 날’이라는 말은
이미 시작된 종말이 ‘완성’되는 때를 뜻합니다.)
따라서 “문을 두드리면”이라는 말은, 언제인지 모르는 먼 훗날에
문을 두드린다는 말이 아니라, 주인이 이미 도착해서
‘지금’ 문을 두드리고 있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으로만 생각하면,
이 말씀이 실감 나지도 않고, 긴박감도 생기지 않고,
막연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각 개인의 ‘임종’ 상황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뜻이 분명해지고, 느낌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 가고,
수술실과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깨어 있어라.”라는 예수님 말씀이 더욱 실감 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이 몇 시간 뒤에 끝나는지,
오늘 끝나는지, 내일 끝나는지, 그것을 모르니까,
하느님 앞으로 갈 준비도 ‘지금’ 해야 하고, 회개도 ‘지금’ 해야 합니다.
복음서에 “신앙생활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잘 맞이할 준비를 하는 생활”로
표현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현실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 앞으로 갈 준비를 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거나,
무의식중에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언젠가” 생길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지금의 일’이 될 수 있음을 의식하면서
자만하지 않고 방심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곧바로’ 라는 말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회개할 시간 없이 곧바로 심판이 진행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동시에 이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곧바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애원할 수도 없고,
왜 벌써 부르셨냐고 항의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떠나야 합니다.
여기서 ‘행복하다.’는 ‘복되다.’(복을 받을 것이다.)인데, ‘복’은 ‘구원’을 뜻합니다.
주인이 종들의 시중을 들 것이라는 말씀은,
충실한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씀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실제로 주님께서 제자들의 시중을 드는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2ㄱ.13).”
제자들은 그때 천국의 기쁨과 행복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충실한 종들’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지만,
뒤의 45절-46절에는 ‘불충실한 종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루카 12,45-46)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행복과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처벌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인가는
‘지금’ 각자의 선택과 실천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이 말씀은 그날은 틀림없이 온다는 것과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른다는 것,
그리고 ‘지금’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은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면”입니다.
여기서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일부러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지도 않고 있다가, 즉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당하는 일이 없도록
평소에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훈계입니다.
잘 준비한 사람에게는 그날은 갑자기 당하는 무서운 날이 아니라
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행복을 누리는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1테살 5,2-10).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과
사람의 아들이 갑자기 오실 것임을 명심하라는 말씀(루카 12,39-40)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그 속에서 축복을 느끼는 이는 진정 복된 이입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 자체를 깨우쳐줍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 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합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바르크,브라크하)는
‘어떤 것을 선사함’이요, ‘주어진 선물’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무생물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축성될 뿐입니다.
‘축복’이란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곧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요,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설'인 오늘 우리는 서로에게 축복을 빌어 줍니다.
사실 축복을 빌어주면 빌어주는 이에게 축복이 먼저 옵니다.
왜냐하면 축복을 비는 행위는 이미 ‘축복을 비는 축복’을 입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축복기도’를 해 줄 수 있습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주십시오.
당신의 축복이 실현되도록 그가 응답하게 하소서!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참 묘한 것은 상대를 축복해주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위하는 마음’(호의, 선의)을 북돋으십니다.
이처럼 이 소박한 기도는 우리에게 당신의 권능에 응답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다시 한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한 해 되길 빕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창세 12,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설을 맞이하여 축복을 빕니다.
용솟음치는 ‘축복’이 먼 하늘로부터 무수한 시간을 달려와
설이라는 고귀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베푸신 ‘축복’이 날마다 온몸에 사랑의 지문을 새겨 주고
가슴 속을 따뜻하게 지펴 줄 것입니다.
꺼지지도 식지도 않는 변함없는 보살핌으로 감싸며,
멈추지도 지치지도 않는 줄기찬 사랑을 퍼부어 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정직한 삶의 반려자가 되어 주고,
하는 일마다 전폭적인 사랑과 신뢰로 지지하고 성원해 줄 것입니다.
혹 어려움이 있더라도, 힘들 때가 있더라도,
늘 다정한 벗이 되어 주고 사랑을 강화시켜 주며
올 한 해를 사는 힘과 용기의 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저희는 지금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선물인
'축복'을 건네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이 축복을 받은 이들이 한 해 내내 참된 행복 안에 머무르고
또한 이웃에게 사랑과 행복을 나누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이신 아버지께서는 기꺼이 저희의 소원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설날입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2022년은 범의 해입니다.
비범하고, 대범한 것도 좋지만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맛볼 수 있는 2022년이 되면 좋겠습니다.
마스크 없이 서로의 환한 얼굴을 마주 보고 웃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2022년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한 해를 덤으로 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지난 한 해 인생의 그림을 성공적으로 그렸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들은 지난 한 해 시작부터
인생의 그림을 망치고 후회와 번민 속에서 한해를 마쳤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잘 그리던 인생의 그림이
끝에 가서 그만 엉망이 되어버린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에게 새로운 한 해라는
흰 색의 도화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하느님의 배려와 따뜻하신 사랑에 감사를 드리면서
새로운 한 해 열심히 인생의 그림을 그려야겠습니다.
뉴욕에 있으면서 코로나 검사를 3번 받았습니다.
별 증상이 없어서 가능하면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동료 신부님들이 외부 활동이 많으니 받아보라고 해서 부득이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를 받고 하루가 지나면 인터넷으로 결과를 알려줍니다.
음성이 나왔을 때, 기분이 좋았습니다.
요즘은 집에서 손수 검사할 수 있는 도구가 있습니다.
신부님 4명이 약국에서 구입 해서 검사를 해 보았습니다.
다행히 4명 모두 음성이 나왔습니다.
오미크론이 등장하면서 주위에 많은분들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검사를 받으면서 3부류의 유형을 보았습니다.
본인과 타인의 안전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검사를 받자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행을 가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려면
증명서가 있어야 하기에 검사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능하면 피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 검사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증상이 없는데도 확진 판정을 받으면 격리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확진 판정을 받았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좋은 생각’ 12월호를 읽으면서 ‘회피, 도피, 대피’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
피한다는 의미에서는 비슷 지만 심리적인 면에서는 많이 달랐습니다.
회피는 무의식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웬만하면 코로나 검사를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회피는 가상의 위험에 대한 반응입니다.
회피는 위험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벌어지지 않은 일을 미리 상상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회피는 위험을 외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피는 의식적인 차원의 반응입니다.
도피는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도피는 실재하는 위험에 대한 반응입니다.
산에서 멧돼지를 만나면 일단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도피는 위험에서 멀어지고 위험을 느낀 대상에서 확실하게 도망치는 것입니다.
대피는 아직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생길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준비입니다.
어릴 때 민방위 훈련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위험한 상황에 대처하는 훈련입니다.
컴퓨터의 자료들은 외장하드에 따로 저장해 놓기도 합니다.
삶의 태풍이나 폭설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당 할 수 없는 문제와 역경 앞에서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위험이 약해지거나, 감당할 힘이 생길 때 앞으로 나가면 됩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마귀가 팔을 벌려 수레를 막는다.’는 뜻으로,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강한 상대에게 무모하게 덤벼드는 것을 일컫습니다.
공자가 제자 자공에게 “너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니 자공이 답했습니다.
“저는 길에서 주워들은 것을 제 것인 양 떠벌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만용을 용기로 아는 자를 미워합니다.”
세상 길을 걸어갈 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만용은 용기와 다릅니다.
셰익스피어는 “세상에 환영받는 충고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새해에는 남의 탓과 남의 허물을 이야기하기 전에 좀 더 신중할 수 있도록
될 수 있으면 남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더욱 성실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도 더욱 건강하시고, 소망하시는 모든 일들이 다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꿈에서 본능이 통제되지 못하는 이유: 잠이 지극히 개인적이기 때문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우리의 명절 ‘설’입니다.
설은 한 해의 시작입니다. 시작은 마침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심판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으라는 내용입니다.
주인이 언제 오더라도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주인이 그들을 시중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한 명의 종을 대상으로 시중들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고 하십니다.
또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에게 시중들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이미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에 머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유튜브에 개신교 ‘다니엘라’라고 하는 여자 청년의 간증이 있습니다.
20대로 보이는 이 자매는 부모님을 지독히 미워하였고,
학교에서는 집단 따돌림을 받는 아이였습니다.
그 외로움 속에서 동방신기라는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팬클럽 일원이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게 된 동성애자들 때문에 자신도 동성애자가 되었습니다.
가족이 그녀를 깨어날 힘을 주지 못했고,
그녀는 예뻐지고 유명해지려는 것, 육체의 쾌락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두바이로 가서는 부잣집 아이들과 어울렸고 어느새 인스타 유명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텅 비어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가끔 나가기는 했지만, 설교시간에 나가 화장을 다 고치고 돌아오면
목사님 설교는 이미 끝나있는, 뭐 그런 신앙인이었습니다.
외로워도 보았고 유명해져도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먼지를 먹고 사는 것 같았습니다.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니엘라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찬양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한 오래된 동영상이 그녀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1990년대의 교회 집회 영상이었습니다.
세련되지도 않고 그야말로 오래된 기도회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공동체는 뜨거웠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기도하며 찬양하는
그 뜨거움이 다니엘라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다니엘라는 지금 청년들이 회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그런 뜨거운 교회 공동체가 사라진 것이라 말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찾지 않고, 무엇보다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공동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데 왜 요즘 친구들이 하나님을 못 만나냐면
정말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교회가 없어서 그래요.
제가 하나님 그렇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저같이 악한 자를
하나님께로 돌이키시게 하려고 어떤 세련된 말, 사람을 통해서도 아니고,
누가 나에게 찾아와서도 아니고 그냥 우리나라 성도들이 모여서
나라와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찬양하는데 거기서 예배가 진실하게 드려지니까
그걸 통해서 저에게 임재해 주시는 거예요.”
왜 공동체가 사람을 바꿔놓을까요? 양심을 작동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혼자 있을 때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그리스도 공동체에 속하면 엄청난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변하고 싶은 사람은 변화된 공동체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이 깨어 있을 줄 아는 사람들을 보시고 주님은 함께 머무시는 은총을 주십니다.
깨어 있음과 반대로 잠은 매우 ‘개인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자기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꿈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꿈은 바로 자신의 ‘무의식의 표현’이라 하였습니다.
무의식이란 바로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나타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잠에 빠졌을 때 양심이 작동하지 않아
욕망이 활개를 쳐서 그런 꿈들이 제어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몸이 아프다고 하며 프로이트를 찾아왔습니다.
프로이트는 몸의 증상도 욕망이 충족되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몸이 아픈 이유를 꿈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꿈은 무의식을 알아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통로로 보았습니다.
그녀가 자주 꾸는 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녀의 조카가 죽어서 장례식에 있었는데 그녀는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심지어 기분이 좋은 마음마저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조카가 죽었는데
기분이 좋다는 것에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비슷한 꿈을 꾼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가 언니의 남편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그러한 관계를 언니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녀는 형부와의 관계를 청산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언니가 죽게 된 것입니다.
언니가 죽으니 다시 형부와의 관계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서 기분이 좋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일입니다.
프로이트는 원초적 욕망을 ‘원초아’(Id)라 하였고,
이 욕망을 제어하는 양심과 같은 기재를 ‘초자아’(Super-ego)라 불렀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처음엔 원초아밖에 없습니다. 원초적 본능만 살아있는 것입니다.
자아는 초자아보다 더 먼저 형성되는데 젖을 먹고 싶은데
숟가락이 입에 들어올 때 생겨납니다.
자신의 욕망만으로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자아가 생기는 것입니다.
초자아는 부모님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특히 배변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에
세상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양심은 사회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더 활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원초아 – 자아 – 초자아는
가정에서 사회성이 형성되면서 함께 발달한 것이기에
덜 사회적일수록 더 원초적인 욕망에 휘둘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더 사회적일 때 더 윤리적 인간이 됩니다.
요즘 가정이 많이 분해되고 있습니다.
명절은 특별히 가족이 왜 한 데 모여서
친교를 나누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가족은 바로 우리가 생존 본능에서 양심에 통제받는 사람이 되는 성장을
처음으로 이룩한 공동체입니다.
가족이 함께 모이는 이때는 우리가 왜 교회 공동체에서
형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현명한 처녀, 미련한 처녀 내용에서
미련한 처녀들은 현명한 처녀들 안으로 들어올 줄 몰랐습니다.
현명한 처녀 무리로 들어왔다면 그들이 하는 일을 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얻어지는 성령의 기름으로 죄에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다섯이라는 육체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섯이라는 성령으로 육체를 이긴 이들 무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원초아를 눌러줄 초자아는 반드시 공동체와 함께 있을 때
힘을 발휘하는 특징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