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안에 떠있는 구름을 보자
김 상 립
이제야 가을 끝자락인데 날씨가 꼭 깊은 겨울 같다. 이른 아침, 동네 가까운 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가 2층 건물을 짓고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공사장 한쪽 켠에 허리가 잘려진 드럼통을 둘러쌓고 인부들 몇이 여유 있게 불을 쬐고 있다. 불빛에 어른거리는 그들의 모습이 왠지 선명하지 않고 찌그러져 보인다. 아마 그들의 고된 노동이 추위에 얼어있다가 열기에 녹아내려 그런 느낌이 왔을 성싶다. 나는 발길을 멈추고 우두커니 섰다. 누가 추가로 불태울 물건을 통 안으로 던져 넣었는가 보다. 갑자기 검정과 회색이 섞인 짙은 연기가 울컥 울컥 솟아나다. 그러다 점점 엷어지면서 공중으로 올라가니 가늘고 하얗게 바뀐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연기가 솟아 난다. 두 갈래의 연기가 공중에서 만나 춤추듯 함께 이리저리 어울리더니 어느새 시야에서 아주 사라져 버린다.
어찌 쓰레기를 태운 연기뿐이겠는가!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을 가릴 것 없이 죽어서 불에 태우면 다같이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오를 것이다. 또 땅에 묻힌다면 땅 속으로 스며들어 흙의 일부가 될 터이다. 살아있던 것들이 죽고 나면 연기나 흙으로 바뀌어 각기 다른 세상으로 가고, 그곳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되면 또 다른 몸으로 살아가게 되는 이치가 참으로 오묘하다. 영영 헤어진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것들이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하도록 조정하는 힘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숙연해 진다. 내가 평소에 느끼지 못할 뿐, 만물은 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로 한데 묶어있어 기회가 되면 서로 몸을 바꾸어 살기도 할 것이다.
고명한 어떤 스님은‘만일 그대가 시인이라면 종이 안에 떠있는 구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구름과 종이는 함께 존재한다. 종이와 햇볕도 함께 있다. 그 모든 게 없으면 종이도 없다. 아마 종이의 다음 생은 구름이 되고 꽃도 될 것이다. 대신 꽃은 구름이 되기도 하고’란 설법을 했단다. 죽음이란 단지 형태를 바꾸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비유하여 말했을 것이니, 어찌 시인만이 구름을 보랴! 모든 사람의 죽음은 단지 육신의 변화일 뿐이다. 우리 몸을 지배하는 의식은 탄생과 동시에 생겨났다가 죽음에 맞추어 육신을 떠난다. 몸이 죽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게 아니라 의식이란 생명력으로 살아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분명한 에너지 덩어리임으로 하늘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여 유유히 다음 생을 이어갈 것이다. 우주의 에너지 운행법칙으로 본다면 오늘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보살피는 일이 먼 훗날 제 자신을 돌본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는 해석을 낳게 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삶을 두고 사람들은 서로 좋은 기억 쌓기는 고사하고 작은 이익을 두고도 원수를 대하듯 서로 다투기 일쑤다. 자기는 무지 중요하지만 타인들은 안중에도 없는 인간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더구나 요즈음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소용돌이를 보면 나 같은 평범한 노인에게도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다. 뿐인가? 뻑 하면 테러소식이고, 아차! 하면 전쟁 뉴스다. 또 나라간의 자원이나 무역전쟁도 수시로 일어나 많은 이들의 가슴을 졸이게 한다. 지진이나 화재, 태풍 등 큰 재해 소식은 이미 뉴스의 단골메뉴가 되어버렸으니. 정말 이대로 두었다간 인류 스스로가 멸망을 자초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세상이 이렇게 순화되지 못하고 지나치게 어지럽고 타락한 것도, 순환하는 삶에 대한 불신과 이해부족도 단단히 한 몫 거들고 있을 게다. 내 죽어 비록 똑 같은 몸으로 다시는 이 세상에 올 수는 없다 하더라도, 내게 왔던 영혼만이라도 내 의식과 기꺼이 하나되어 미련과 집착에 쌓여 이승을 떠돌지 말고, 휙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천상 제일 높은 곳으로 이동하여 나름의 역할을 부여 받아 열심히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내 주변의 믿는 사람들은 지금의 딱한 사정을 하느님께 간곡히 하소연해도 아무 대답이 없다고 탄식을 한다. 하느님은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는 믿고 있다. 아직 팔 걷고 나설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시는걸 보면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남아있는 모양이라 다행이다.
이처럼 심각한 지경에 와있는 병을 고칠 방법은 정말 없을까? 설령 누가 나서서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 해도 결코 쉽게 찾아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비밀은 개개인의 가슴 속에 꽁꽁 숨어있기 때문이다. 사회를 정화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깨어있는 인간정신이라 한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가 왜 태어났는지? 진정으로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하늘에 물어야 한다. 산에도 묻고 바다에도 묻고 자신에게도 물어야 한다. 학자들 중에는 ‘인간도 신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만큼 인간에게는 대단한 잠재능력이 있고 창조적인 힘도 구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이런 대단한 능력을 가진 인간이지만 실제로 살아가는 내용이 영 틀려먹었으니 좋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뿐이란다. 답답하여 가슴이라도 치고 싶다. (2024년 12월)
첫댓글 선생님의 글 오랜만에 읽었습니다. 사라졌다가 다시 태어나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게 되는 게 만물의 조화인가 봅니다. 사람 역시도 만물 중에 하나일 뿐인 것을.....
맘에 담고 있는 분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원하고,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에 연연하며 살아가는 저의 요즘 일상이기에 선생님의 글이 더욱 간절했나 봅니다. 아무쪼록 내내 강녕하시기를 빕니다. 창 밖 나무들은 열심히 새순을 틔우고 있습니다. 우리도 저 나무들처럼 새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