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서는 승패는 알 수 없다는 의미로 ‘축구공은 둥글다.’는 말이 통용된다. 이번 시즌 내내 레알마드리드를 꺾으며 기대감을 높이고 있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이하 AT마드리드)가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에서 레버쿠젠에 1:0으로 패배했다. 레버쿠젠의 수준을 생각해보면 ‘이변’이라는 말이 어울리진 않지만, 객관적 전력에서 우위에 설 것으로 예상되었던 AT마드리드의 패배는 ‘의외’라고는 할 수 있겠다. AT마드리드 입장에서 경기에서 패한 것보다도 경기력이 부진했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레버쿠젠의 경기력 역시 훌륭했지만, 패배의 원인은 AT마드리드 본인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 빠른 타이밍의 원터치 패스로 역습 속도를 높인 손흥민. 그러나 그렇게 동료에게 향한 공은 손흥민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레버쿠젠의 역습 – 아틀레티코의 높은 라인
이번 경기에서 특이할 점은 레버쿠젠의 역습이 꽤나 효과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중앙 공격수로 나선 드리미치는 적극적으로 수비수들과 볼경합을 했고 훌륭하게 공을 지켜내기도 했다. 양 측면의 손흥민과 벨라라비의 공격 가담은 그야말로 질풍과 같았다. 레버쿠젠은 역습을 통해 여러 차례 위협적인 공격을 성공시켰다. 골을 성공시킨 장면 자체는 완전한 역습은 아니었지만, AT마드리드 선수들이 수비로 제대로 내려오기 전에 빠른 공격을 펼쳐 골을 성공시켰다. 레버쿠젠의 주된 공격 패턴인 ‘역습’이 AT마드리드에게 제대로 적중한 경기였다.
그러나 레버쿠젠의 전술이 잘 적중했다고만 표현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AT마드리드의 수비력이 평소 같지 않았다. AT마드리드는 세계 최고의 역습을 자랑하는 레알마드리드를 상대를 이번 시즌 내내 압도하면서 ‘천적’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번 경기에서는 레버쿠젠의 공격 특히 역습에 수차례 흔들렸다. AT 마드리드는 단순히 실점 장면에서만 약점을 노출하면서 아깝게 패한 것이 아니었다. 레버쿠젠의 공격은 경기 전반에 걸쳐 준수한 수준을 보여주었으며, 여러 차례 위협적인 찬스를 만들면서 AT마드리드를 위협했다. 경기 내적으로도 레버쿠젠이 우세한 경기였다.
그 원인은 AT마드리드의 달라진 수비라인에 있다. 객관적으로 선수 개개인의 역량이 AT마드리드보다 우월한 레알마드리드를 상대할 때에는, 수비 라인을 골키퍼 앞까지 끌어내리고 2줄로 수비를 견고하게 세웠다. 지난 프리메라리가 22라운드 마드리드더비에서도 AT마드리드는 골라인-수비라인-미드필더라인의 사이를 극도로 좁혀놓았고, 이 공간에서 레알은 좀처럼 공격적 활로를 찾지 못했다. 호날두와 베일은 드리블을 할 공간을 찾지 못했고, 벤제마는 터프한 AT마드리드의 수비에 밀려 측면으로 돌아나오기를 반복했다.
반면 이번 경기는 객관적 전력에서 AT마드리드가 전혀 뒤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최근 만주키치-그리즈만을 앞세운 공격진의 분위기가 좋았다. 당연히 아틀레티코는 ‘정상적’인 경기를 펼치기 위해 수비라인을 전진시키고 경기를 치렀다. 아틀레티코의 수비라인은 라인을 높인 상황에서도 괜찮은 수비를 보여주었으나, 레알마드리드 전에서 보였던 것과 같은 견고함은 전혀 보이지 못했다. 전진한 수비 배후 공간으로 연결되는 패스에 대해 수비수들은 즉각적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고, 미드필더들은 수비수와의 간격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기에 수비-미드필더 간의 간격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 때 벌어진 간격을 레버쿠젠의 미드필더들이 빠르게 이용하면서 공격적 활로가 생겨났다. 즉 레알마드리드 전과 달리 세컨드볼을 레버쿠젠에게 여러 차례 내주면서 위기를 맞았다.
그래도 수비라인을 골대 앞에 두 줄로 갖춘 이후에 펼치는 수비는 훨씬 나은 모습이었다. 레버쿠젠이 지공을 펼칠 때에는 좀처럼 위험한 상황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중앙에 밀집되어 있는 AT마드리드를 상대로 중앙에서 찬스를 만들기란 어려웠기에, 측면에서 공격작업을 활발하게 진행했고 2줄 수비를 완벽히 구축했을 때에 비하면 측면이 허물어지는 경향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크로스 허용 자체도 적었고 크로스가 올라오는 경우에도 수비 집중력을 잃지 않고 모두 끊어냈다.
(△ 레버쿠젠의 공격장면. 지공 상황이었음에도 수비하는 AT마드리드의 선수들이상당히 높은 위치까지 전진해있다.)
레버쿠젠의 전방 압박
반면 레버쿠젠은 전방 압박 그리고 유사시에는 파울까지 동원해서 경기 흐름을 끊으면서 AT마드리드다운 경기를 펼치지 못하도록 했다. 만주키치는 등을 진 상황에서 많은 반칙을 얻어냈지만 평소처럼 패스를 연결하진 못했다. 그리즈만 역시 공을 잡을 때마다 들어오는 적극적인 태클에 제대로된 공격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전방에서의 압박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공을 빼앗겠다는 생각이라기 보다는 사람을 통과시키지 않겠다던가, 공의 전개를 잠시라도 늦추겠다는 의도가 내비치는 강한 압박을 선보였다. 벨라라비와 손흥민의 수비가담을 비롯해서 모든 선수들이 많이 뛰었다. 실제로 레버쿠젠은 AT마드리드보다 5Km정도 더 뛰면서 강한 전방 압박을 펼쳤다. 고의적인 전략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파울 장면에서는 지속적으로 심판에게 거친 반응으로 항의하면서 공격 자체를 지연시키기도 했다.
안정적인 수비를 바탕으로 만주키치의 볼키핑과 그리즈만의 스피드를 앞세운 역습을 펼치는 AT마드리드는 속도를 살린 역습을 펼치지 못하자 공격의 흐름을 잃었다. 공격이 답답할 때 측면에서 공격을 풀어주는 아르다 투란 역시 거친 수비에 시달려야했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팀의 장기인 수비도 불안함을 노출하였고, 역습 과정마저 상대의 거친 플레이에 막히고 나자 AT마드리드는 흐름을 잃고 말았다. 흔히 '말린다'는 말로 표현하는데, AT마드리드는 경기 내내 팬들이 기대하는 AT마드리드다운 경기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 전방부터 강한 압박을 선보인 레버쿠젠.)
(△ 경기 통계. 거친 플레이로 소문난 AT마드리드이지만 오히려 더 많은 파울을 범한 레버쿠젠)
축구공은 둥글다.
객관적인 전력이 늘 경기의 결과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전력 차이가 승패로 직결될 정도로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경기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으며, 정신적인 자세가 승패를 가를 수도 있다. 이번 AT마드리드의 패배 역시 레버쿠젠에 대한 심리적 방심에서 나온 결과라 생각한다.
AT마드리드는 늘 일정 수준 이상의 팀을 만나면 강한 수비를 펼치고 역습 혹은 세트피스를 통해 골을 노렸다. 라인을 높게 끌어올리고 ‘정상적’인 상태에서 경기를 펼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본인들의 최대 장점인 두 줄 수비를 펼칠 수 없을 만큼 수비가 전진한 탓에, 수비의 견고함이 떨어졌다. 게다가 견고한 수비는 역습에 있어서도 핵심적인 요소이다. AT마드리드의 골대 앞에 수비가 두 줄로 정렬하고 나면, 상대의 수비라인 역시 공수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거의 중앙선까지 라인을 높일 수밖에는 없다. 이 때 바로 후방의 넓은 공간은 역습으로 노리기에 적당한 공간이다.
오늘 경기는 레버쿠젠을 상대로 방심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분명 심리적인 허점을 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의 장기를 스스로 포기하였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수비라인을 높게 가져가면서 레버쿠젠을 압도하려고 한 AT마드리드의 전술적 선택은 의외로 강한 상대의 저항에 막혔고, 이에 페이스를 잃고 허둥거리다가 경기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반면, 레버쿠젠은 AT마드리드의 객관적 우세를 인정했다. 거친 플레이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상대를 잡아내기 위해 더욱 열심히 뛰었다. 레버쿠젠이 AT마드리드에 크게 열세에 놓인 팀은 아니기에 이런 정신적 무장은 경기력으로 나타났고 값진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객관적 전력이 승패와 무관함을 보여준 경기였다. 이번 패배로 AT마드리드 역시 공은 둥글다는 말을 실감했을 것이다. 2차전에서는 심기일전하여 보다 나은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1;0패배로 AT마드리드가 공격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은 부담이다. 공격적으로 나서는 AT마드리드를 상대로 역습이 장기인 레버쿠젠이 또다시 오늘과 같은 결과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2차전 역시 결과는 붙어봐야 안다. 공은 둥글기 때문에.
http://blog.naver.com/hyon_t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