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기획]코리아 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④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 그리고 그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코리아 전쟁은 미국에 의해 발발된 전쟁이고 북한에게는 강요된 전쟁이었다. 미군과 그 하수인 노릇을 해 온 이승만 정권의 군대는 6.25 이전에도 여러 차례 전쟁의 불을 지피기 위해 실제로 군사공격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마치도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여 지금까지 벌인 대북대결정책과도 유사한 모습을 띄고 있다. 실제로 코리아 전쟁은 1950년 6월25일 전부터 시작되었다. 1949년 6월에 일어 난 ‘호림虎林부대 사건’도 그 중 한가지였다. 이 사건은 남한 군과 서북 청년단이 유격대를 조직한 다음 1949년 6월 29일에 설악산 및 금강산 줄기를 타고 들어가 원산 남방 안변 지구까지 침투한 사건이었다. 그 예로 1949년 6월 7일에는 남한 군이 북한군을 가장하여 38선으로 부터 북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한 고지를 점령하기도 하였고, 같은 해 6월 17일에는 38선 이북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태탄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6월 18일에는 은파산을 점령하였었는데, 이 전투 때에는 개인 화기뿐만이 아니라 포까지 동원되었다. 처음에는 이 전투에 남한이 더 적극적이었으나, 이후에는 북한이 더 적극적으로 변하였다. 당시 이승만 정권이 미군과 공모하여 입버릇처럼 말하던 ‘북진통일’의 한 부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전쟁 발발 한 후에 한국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하였었다. 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즉 유엔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 시나리오가 아니고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인민군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저지하여 시나리오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므로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도 단행하였다.
남한 군이 침입한 횟수는 432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회는 비행기 침입, 42회는 함대습격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충돌은 황해도 옹진에서 강원도의 양양까지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국부적 충돌이 아닌 말하자면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셈이었다. 그 가운데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부근에서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이 지역들은 1950년 6월 25일에 인민군이 주 공격지역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전쟁, 혹은 코리아 전쟁의 원인은 6.25 남침에 의한 것이 아닌, 여러 작은 북침전쟁을 수없이 도발한 데에 있었다. 반복된 북침에서 북침의 주체는 하수인 역을 맡았던 남한 군이 될 수 없고 당연히 지휘권을 쥔 미군이었다. 이러고서도 미군과 남한 당국이 지금까지 북의 남침으로 코리아 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 아닐 수 없다. 코리아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미국은 북한 정권을 전복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왔다. 미국은 이렇게 북한을 붕괴 시키려는 기도가 좌절 될 경우 전쟁을 통해서라도 목적을 달성 하려고 계획 하였다. 애치슨 선언이 있기 전부터 북파 공작원의 침입을 받아온 북한 정권은 미국이 결국은 전쟁을 통해 자신을 붕괴시키리라고 예상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1946년 미군 24군단 정보처는 산하에 ‘442 CIC’라는 첩보부대를 창설했으며, 이 부대는 1948년 여러 반공단체와 통합해 KLO(Korean Liaison Office) 부대가 된다. (KLO를 흔히 ‘켈로’ 부대라고 불렀다) 8240부대로도 불린 켈로 부대는 특수임무의 수행을 위해 북한에 파견되어 적 생포 및 사살 적군 진지 주요 시설물 폭파 및 각종테러를 통한 사회혼란 첩보 수집 첩보망구축. 중요 요인의 암살. 주요 공공기관을 방화하여 혼란을 부추기는 역할 등을 수행했다. 또한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착용하고 육해공군의 물적 보급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으로 해결하며 임무수행 중 부상이나 임무수행 불가능 상태에서는 자결이나 자폭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46년 3월 1일 평양 역 앞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 수류탄을 투척한 것을 들 수 있다. 평양 역 앞 광장에서 열린 북한의 3•1절 기념행사에서 김일성 주석 암살을 목적으로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소련군 노비첸코 중위가 터지려고 씩씩 소리를 내는 수류탄을 집어 들고 주석 단에서 내리뛰어 김일성 주석 등의 지도부를 구했다. 당시 소련 장교 노비첸코의 헌신적인 경호로 김일성 주석은 무사하였으나, 노비첸코는 오른팔을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노비첸코는 제대 후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다가 1984년 소련을 방문(訪蘇)한 김일성 주석과 재회했다. 그 후 노비첸코는 북한으로부터 「노동영웅」 칭호를 받고, 김일성 주석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 당국으로부터 극진한 예우와 지원을 받았다. 2002년 8월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노비첸코의 유가족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귀국길에도 보시비르스크에서 노비첸코의 유가족들을 만나 감사를 표했다.) 이러한 테러는 CIA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백의사가 일으킨 것으로 이 백의사와 CIC (주한미군방첩대) 가 공동으로 정릉의 대북암살단훈련원을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군번 없는 용사로 불리우는 북파 공작원은 6.25전 해방 후부터 미국 정보기관의 지원 하에 비밀리에 양성되어 전쟁 시에는 6,000여명에 이르렀다. 전시에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라는 정식 호칭이 붙여졌다. 전쟁 발발 전까지 이미 10만여 명 이상 희생 미군정 치하에서 보내진 북파 간첩 가운데 실종된 사람이 10,726명에 이른다고 한다. 오늘날 테러와의 전쟁을 한다고 하지만 테러의 원조는 미국이다. 노벨상 시상식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평화 위한 전쟁은 불가피 하다”고 하였다. 뭘 위할지라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범죄이다. 오바마가 자신에게 노벨 평화상을 안겨준 군산복합체를 대변한 말이었다. 오바마는 이어서, 미국이 지난 60여 년 동안 미국민의 희생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안보를 책임지는데 기여했고 미군의 희생이 독일에서부터 한국에 이르는 국가들의 평화와 번영을 증진시켰다고 평가했다. 미국이 전 세계의 안보를 책임지라고 누가 요청하였는가. 전 세계의 안보를 책임진다는 논리를 내걸고 전 세계에 군대를 보내 모든 국가는 미군의 감독과 지휘를 받는 국가가 되라는 것이다. 결과는 미국은 전 세계를 통치한다는 것이다. 미국 정치인들은 코리아 전쟁의 진실을 모를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비극적 아픔과 슬픔을 모른다. 우리나라 산천에 부모님과 일가친척들의 시신을 방치해 두고 아무 일 없는 듯이 지내고 있다. 부모를 부모라고 친척을 친척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우리가 이런 공포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또 우리의 부모가 살아 있어도 생이별을 강요 받으며 현재까지 65년 동안 살고 있는 세계 유일한 나라라는 뼈저린 아픔도 외면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제 나라도 마음대로 못 가고 우리 안에 갇혀서 짐승처럼 살아온 지도 어언 65년이 되었다. . 오바마는 60년 전 코리아 전쟁이 평화와 번영을 증진시킨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코리안의 열망을 짓밟고 일본을 대신해 코리안을 다스리기 위해 코리안을 학살하고 제 맘대로 코리안이 목숨 걸고 반대한 이승만 사대매국 정권을 세웠다.그것도 부족해 북한과 대륙을 집어 삼키기 위한 침략 전쟁을 일으켜 우리의 조국반도를 전쟁터로 만들어 파괴했고, 양민들을 대 학살하는 천인 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다. 지금도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개입으로 남과 북이 대결하고 있다. 이게 오바마가 말하는 평화인가? 서해상에서 발생한 <천안함>침몰사건도 다름 아니라 한미합동해상훈련 기간 중에 발생되었다. 북을 침략하기 위한 각본으로 서해상에서 핵전쟁 연습을 하던 과정에 일어난 사건이 바로 <천안함>사건이다. 60년 전이나 지금에 와서도 달라진 게 없다. 지구촌 모든 전쟁에는 언제나 미국이 관여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5년 8.15이후 1950년대 미국이 얼마나 코리아 전쟁을 필요로 하였는지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과 연구에 의해 밝혀져 왔다. 1946년 2월 26일에 국방경비대 제5연대장을 맡았고 그 후 한국 정부가 수립 되고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제5연대장과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로 하는 국군 1 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1951년까지 사단을 지휘하였던 백선엽 예비역 대장은 코리아 전쟁은 이미 1949년 5월의 하계 공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회고하였다. [백선엽. {軍과 나} 서울: 대륙연구소, 1989, 29쪽] 미국 국무부 정보분석국의 동 아시아부 책임자인 존 메릴(John Merrill) 박사는 {한국전쟁의 기원} 에서 그리고 서주석(徐柱錫)은 1996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한국의 국가체제형성과정-제1공화국 국가기구와 한국전쟁의 영향”} 에서 각각 6.25이전에 이미 남북한은 교전상태에 있었으며 10만 명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38선에서 작은 전쟁이 계속되었으나 코리아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세계는 주목하지 않았다. 미국의 거대 방송매체들도 공산당은 무조건 악이라고 여기는 매카시 광풍에 동조하였다. 수만 명이 죽어가는 상호간의 공격행위를 공산세력이 일으킨 도발로 축소 왜곡하였다. 미군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북한군과 그리고 미군의 명령에 의해 전쟁을 수행하는 한국군만 계속 피를 흘리고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일제 때부터 조선 사람 끼리 전쟁하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우익 독립투사하고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싸우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냉대를 받던 친일 세력들은 한국으로 남하하여 군대와 행정부의 각종 조직의 주요 구성원으로 참여하여 북한을 공격하는데 적극적이었다. 남북에 각각 이질적인 정권이 출범한 후 수년 동안 이와 같은 한반도의 극심한 혼란과 학살 및 충돌 상황은 미국뿐 아니고 한반도 주변국에도 알려져 협의가 있었지만 북한의 우방인 소련과 중국은 잦은 침범으로 위협에 놓인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고 지지하지만 코리아 전쟁의 발발이 세계3차 대전의 시작으로 될 수 있어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 공개적으로 지원할 수 없는 입장임을 밝혔다. 중국은 코리아 전쟁이 시작되자 세계대전으로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이 북한과 동맹관계에 있으므로 유엔군이 북한 지역을 침범하면 중국이 참전하여 전쟁이 확대될 것이므로 전쟁지역을 남한으로 한정하고 북한지역을 침범하지 말 것을 수차에 걸쳐 요구하였으나 이 요구는 묵살되었다. 8년간 항일투쟁과 4년간의 국 공 내전의 오랜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쳐 북한을 도와줄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미국은 중공군의 코리아 전쟁 참전을 예상치 못 했다. 남한에서 북한군을 후퇴시킨 유엔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북한 지역까지 침범해 들어갔다. 남한을 발판으로 하여 드디어 대륙 침략이 이루어지는 시점에 이르렀다. 중국은 자신의 요구가 묵살되자 동맹국에 의용군을 파병하였다. 그러나 역시 세계대전으로의 비화를 막기 위해 이 전쟁을 조선족과 미국의 전쟁으로 축소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항미원조 의용군을 조선족으로 조직하였다. 소련도 세계대전으로 되는 것을 염려하여 공식적으로는 참전하지 않았다.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해서 세계대전을 끝내게 한 세계 최강임이 입증된 미국과의 전쟁은 북한을 비롯하여 주변의 소련 중국 등 어느 나라도 원치 않았으나 북한은 이에 맞서 전쟁을 결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과 그 휘하에 놓여있는 남한군의 48, 49, 50년에 걸친,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북침으로 마침내 강요된 전쟁, 예고된 큰 전쟁이 시작되었다. 반복되는 북침으로 위협을 느낀 북한으로서는 근원지역을 공격하기 위한 전쟁 외에는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다. 코리아 전쟁이 남북한 간의 전쟁 또는 동족간의 전쟁이나 동족상잔이란 소리는 미군의 침략을 감추려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코리아 전쟁 발발 전 까지 10만 명 이상이 희생된 작은 전쟁에 세계는 관심을 쏟지 않고 조선 민족만 계속 피를 흘리는 상황이 계속되어 세계에 호소하기 위한 코리아 전쟁을 북조선은 맞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코리아 전쟁은 당시 미국의 극단적인 매카시즘과 여기에 행동으로 나타난 팽창주의로 말미암아 예고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남침에서 비롯됐다는 남침주장은 진위여부를 가릴 수 없는 문서만 있을 뿐이고 반면에 미국에 의한 북침 주장은 문서로서 뿐 만 아니고 문서와 당시의 상황이 딱 들어맞고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침이냐 북침이냐의 결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전쟁이 발생한 그 원인과 배경이 된다. 남침이냐 북침이냐보다 전면적 충돌을 낳은 요인이 중요하다고 브루스 커밍스도 그의 저서 코리아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Korean War)에서 주장했다. 전쟁이 발생한 원인은 해방된 코리안의 독립국 열망과 미국의 대륙으로의 세력 확대가 상충했던 것이 근본 원인이다. 미국은 당시에 합리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소하려고 하는 대신에 무력으로 해결 하고자 하는 데서 반인륜적인 범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반인륜적 범죄를 수단으로 해서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던 것이 다름 아닌 ‘코리아 전쟁’이었다. 남한에서와 달리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완전히 철수하였다.그것도 1948년 4월 김일성 주석이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자리에서 약속하였고, 그 해 말 소련군은 이북 땅에서 철수작업을 마쳤다. 한편 1950년 6월24일 일어난 몇 가지 경우를 통해 북의 남침 유도설을 엿볼 수 있다. 남한군 분위기를 돌아 보면, 6월 24일이 토요일이어서 숱한 장병이 외출•외박을 나갔다. 부대원 절반 정도가 전선을 떠나 있던 상황이었다. 6월 들어 비상 상황이 이어져 외출•외박을 금지해 오다가 모처럼 육군본부가 병사들을 내보냈다고 누군가 설명해 줬다. 그나마 문산 방면의 13연대가 검열준비와 야외훈련으로 병력 대부분이 대기하고 있던 것이 큰 다행이었다고 회고하는 전쟁수기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내내 비상상황이 이어지다가 전쟁개시 날짜가 잡힌 그날에는 미군 지휘를 받은 육군본부가 병사들을 내보낸 것이다.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국장 장도영, 북한반장 김종필, 문관 박정희)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전방부대의 중화기와 차량중 60%가량을 후방으로 보내는 등(일제 점검 목적임) 개별적으로는 이해가나 종합적으로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집중적으로 하여 이형근 장군은 저서 "군번 1번의 외길인생"에서 6.25 초기의 10대 불가사의를 제기하며 군지휘부(이승만,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장, 신성모 국방부장관, 김경근 국방부차관)안에 통적분자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원인이 되며 일각에서는 남침 유도설의 근거가 되었다. 돌연히 북한 군 진지에 맹렬한 포 사격을 시작하여 24일 오전 4시까지 105미리 포와 81미리 포 204발을 발사하였다. 계속하여 24일 오후 12시 25분부터 6시 30분까지 300발을 쏘았으며 세 번째는 25일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사이에 200발을 북한군 진지에 쏘았다. 남한 군 당국은 백선엽 대령의 제 17연대가 1950년 6월 24일 전투를 개시하여 해주까지 북진하여 점령했다고 당시에 공식 발표했었다. 미국도서 《미국과 한국전쟁》(일문판) 99쪽에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6월 24일 토요일 아침 트루먼은 고향 미주리 주에서 처, 딸과 같이 조용히 주말휴가를 지내기 위해 전용기 <인디펜던스>호를 타고 워싱턴을 떠났다. 이는 뜻밖의 일이었다. 트루먼은 1945년 2월부터 그때까지 5년이 넘는 재임기간에 주말휴가를 그렇게 여유작작하게 지낸 때가 없었다. 트루먼은 백악관의 주인이 되자 《결단은 내 수중에》라는 좌우명을 내걸고 쉴 새 없이 모든 일에 참견하였다. 그것은 그 자신이 관록 있는 가문의 출신도 아니고 장성급을 지닌 경력도 없고 제1차 세계대전시기에 겨우 포병대위로 복무한 초라한 군 경력과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탓으로 상대방이 깔볼 것이라는 선입견이 언제나 머릿속에 지배하고 있었기에 모든 일을 자기 손에 틀어쥐고 자기의 승인이 없이 처리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백악관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트루먼은 처와 딸까지 데리고 형이 경영하고 있는 자기 농장 개조문제를 토의하러 간다는 소문을 크게 냈다. 그 소문이 퍼지자 누구나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루먼은 고향의 농장으로 가던 도중 프린드씨프 국제공항에 들러 확장공사의 완공 테이프를 끊고 연설 하였는데 그는 앞으로 평화가 계속될 것이라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평화의 화신처럼 생각하도록 그럴 듯 하게 행동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대통령뿐 아니라 미 국무장관 애치슨도 코리아 전쟁 발발 전야에 메릴랜드 근처의 자기 농장에 가 있었다. 결국 코리아 전쟁이 도발되기 전야에 미국에서는 대통령이나 국무장관이 다 자기 농장에 가서 주말휴가를 즐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트루먼이나 애치슨에게는 코리아 전쟁 발발에 관한 상황이 즉시 전달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며 이상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미국도서《한국전쟁: 대답 없는 질문》의 필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이상야릇한 일이었다. 미국이 싸운 세 번째로 값비싼 전쟁전야에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대통령과 국무장관 둘 다 외출하였던 것이다. 국무성에 모여온 중간 급의 관리들은 정책 작성자들이 아니라 장관급의 명령을 집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야말로 6.25 코리아 전쟁이 일어나는 전날 밤(토요일 밤) 미국은 완전히 해이되어 비어 있었다는 것이다. 대통령과 국무장관뿐만 아니라 정책 작성자들 까지도 모두 부재중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서방세계의 학자들까지도 이상야릇한 것으로 지적해 왔다. 코리아 전쟁이 발발될 줄 모르고 해이되어 미 국무성이 텅 비어있었다는 것인데 한 나라가 절대로 그렇게 되었을 수 없으며 만약 그렇게 되였다면 그것은 의식적으로 연출한 것이 분명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리차드 코엔의 칼럼(2003.2.24) '반전과 비논리(Antiwar and Illogical)'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다. '거짓말쟁이'는 워싱턴 정가에서 잘 안 쓰는 말입니다. 그건 워싱턴에 거짓말쟁이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나중에 주워 담기 힘든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워싱턴 정가에는 오래 전부터 그 말을 쓰지 말자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다. 트루먼이나 애치슨 뿐 아니고 미 정가에는 거짓말이 일상으로 되어 있다. 6.25전쟁 당시 내무부장관 김효석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행동개시의 시간은 6월 25일 새벽으로 정했다. 그날은 일요일이다. 일반이 휴일로 생각하고 있는 일요일 새벽을 기해 진격을 개시하면 불의공격의 효과를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날 서울을 비롯한 전략적 지점들에 예비로 배치한 사단들에서는 하급사관 및 사병들의 외출을 허락했다가 개전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북한에서 공산군이 침입해 왔다고 비상소집을 하라. 그러면 일반시민들도 북한에서 먼저 쳐 내려온 것으로 인식할 것이다.』 일요일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요일을 이용하여 불의의 무력침공을 감행하는 것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범죄자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수법이다. 독소전쟁을 도발한 히틀러 도이칠란트군은 1940년 6월 22일 일요일을 이용하여 소련에 대한 불의의 침공을 감행하였으며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41년 12월 8일 일요일을 이용하여 진주만에 대한 불의의 타격을 감행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교를 믿는 미국, 남한에서 일요일이 안식일이어서 휴식의 한때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려는 틈을 타서 인민군대가 남침 하였다는 것을 널리 선전하기 위하여 전쟁개시날짜를 일요일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당시 한국주재 미 군사고문단 단장이었던 로버트 준장은 전쟁개시날짜를 6월 25일 일요일로 선택하게 된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왜 25일로 택하게 되는가. 여기에는 우리의 심중한 의도가 있다. 25일은 일요일이다. 그리스도교국가인 미국이나 남조선은 일요일을 안식일로 정하고 있다. 우리가 일요일에 전쟁을 개시하였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전쟁을 먼저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승만은 국군에 북침공격명령을 하달하고서도 6월 25일은 일요일이어서 태평하게 낚시질을 하였다고 선전하여 세상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였다. 워싱턴의 휴가와 괴뢰군의 계속되었던 비상상태의 해제 그리고 이승만의 부슬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낚시질 떠난 일 이런 것은 각각 따로따로 생각해봐도 보통 때도 여간 해서 일어나기 힘든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것들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은 의도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런 비상식적인 3가지 일이 모두 6.25에 꼭 맞춰서 하나같이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히 취한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밖에 갑작스런 대규모 인사이동도 우연으로 생겼을까.. 후퇴 명령에 거역하고 맞섬으로써 유엔군을 끌어오는데 차질이 생기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철저히 예방하는 조치였다. 남한군을 초기에 확실하게 후퇴시키기 위하여 한국군 지휘관들의 갑작스런 대규모 인사이동을 전쟁 발발 직전에 단행하였다. 새로 부임해서 군 지휘관의 조직 장악력이 떨어진 상태여서 인민군에 대해 자체 방어도 담당하기 곤란한 상태가 되어 미 고문단의 지시대로 무질서하게 후퇴만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두고 보자는 식으로 그렇게 공산군이라면 지옥까지 쫓아갈 듯이 덤비던 남한군이 총 한발 쏘지 않고 물러나기만 했던 것은 후일을 도모 하는 뭐가 있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때 유엔군이 합류하는 것은 문학작품에서 수없이 보아온 바로 그거였다.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는 악당을 물리칠 뛰어난 능력의 초인을 필요하게 만들어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1950년 6월 11일 발령됐던 군부대 비상경계령이 6.25 하루 전인 24일 0시 갑자기 해제됐다. 더구나 병사들에게 외출과 휴가를 허용하였다 이에 따라 전 장병의 절반이 휴가와 외박을 갔고 육군본부 장교들은 전쟁 당일 새벽까지 댄스파티를 즐겼다. 이런 해이된 사건들이 워싱턴과 이승만과 한국군이 완벽히 삼위일체를 이루어 일어났다. 이와 같이 코리아 전쟁은 사전 시나리오에 의해 철저히 준비된 전쟁이었다. 지금까지 인내하던 북한의 반격이 있자 미국은 기다리던 것이 왔다. 드디어 미국이 간절히 바라던 대대적인 전쟁이 주어져 미국의 능력을 또 한 번 펼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유엔 일부 국가들을 코리아 전쟁에 끌어 들이는 구실로 작용했다. 미국은 또 상대국을 교란시키는 음모를 통해 전쟁을 교란시키기도 했다. 미국 정보기관은 박헌영 등을 간첩으로 들여보내서 북한 사정을 알고 있었다. 박헌영이 김일성 주석과 함께 모스크바에 갔을 때 미국으로 암호 전문을 보냈다. 북한은 자신이나 소련이 발송하지 않은 이상한 전파가 어디론가 발송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 풀 수 없는 암호 전신문은 김일성 주석과 함께 간 일행이 발송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은 전쟁 준비 상황이었으므로 색출 보다는 협력이 필요한 시기이므로 덮는 수밖에 없었다. 소련에게 분열상을 보이면 믿음을 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발신자도 자신을 색출하여 전열을 흐뜨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암호발신을 감행한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전쟁 때 최고사령부주변에 반혁명분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조국의 운명과 직결된 극비자료들이 박헌영과 리승엽을 통해 계속 미국사람들에게로 날아갔습니다. 1952년 여름에 리승엽은 졸개들을 시켜 무전련락으로 최고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던 건지리골안에 미국비행기들을 수십 대나 불러들였습니다. 그 비행기들이 최고사령부주변을 발칵 뒤집어놓았습니다. 최고사령부 건물 곁에는 큰 시한탄까지 떨구고 달아났습니다. 내가 있던 집에서 그 시한탄까지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때 리을설이 비상회의를 열고 부관들과 호위성원들에게 결사전을 호소한 다음 당원증을 바치고 목도로 그 시한탄을 메다가 골짜기에 내던졌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리을설은 최고사령부주변에 잠복해있던 암해분자들과 반동분자들을 모두 잡아냈습니다.” 1952년 8월 3일 리승엽을 비롯한 13명이 '북한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선전•선동행위에 대한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피체되었다. 박헌영도 그들이 체포 당하면서 그들의 '반란'에 대한 후원자로 몰리면서 가택 연금 당하였다.코리아 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3월 '미국의 스파이', '반당 종파분자' 등의 죄목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1955년 12월 15일,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북한에서 검사로 일하다가 남파되어 장기수로 복역했던 김중종은 공판을 직접 참관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중종에 의하면 문제가 된 것은 박헌영의 집 지하실에 있던 무전기로서 이는 코리아 전쟁 기간 동안 미국과 직접 접촉했던 증거라고 증언하였다. “박헌영은 6.25 당시 자기 집 변소에서 미군부대에 무전을 치다가 주세죽(前妻)에게 들켜 체포되었습니다.”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은 1953년 박헌영과 리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의 거물 북조선 정치인들이 미국의 간첩으로서 정부 전복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최고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정식 명칭은 미 제국주의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이다. 이 사건의 피의자 13명 가운데 박헌영을 제외한 12명은 1953년 7월 30일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8월 6일 판결이 내려졌다. 박헌영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재판이 미루어지다가 2년 후인 1955년 12월 3일 기소되어 12월 15일에 판결을 받았다. 재판 결과는 피의자 전원 유죄 판결로,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원조와 윤순달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피의자들은 간첩 혐의와 반혁명적 모략, 무장 폭동 기도 혐의 등을 법정에서 전부 시인했다. 예를 들어 최후 진술에서 박헌영은 자신을 매국역적이라고 부르면서 그 죄악을 더 널리 알려달라고 말했으며, 리승엽은 생명이 둘이 있어 둘다 바친다 하더라도 사죄에는 모자란다는 표현을 썼다. 박헌영 공판 마지막 날, 판사가 박헌영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일제 때 변절했던 것에 관해서 솔직히 밝히지 않았느냐?" 그러자 박헌영은 "일제 때 변절한 것을 밝히면 날 총비서 시켜주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박현영이 변절한 것은 '고문'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고, 박헌영이 '미제 간첩'으로 포섭될 수 있었던 것은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1945년 8월 15일 8.15 해방이 되자 '위대한 박헌영 선생이여 빨리 나오시라'는 격문이 돌았다. 박헌영이 자작으로 붙였던 것이다. 미제는 일제시대 '박헌영 변절' 내용을 담은 자료를 고스란히 접수하였고 이를 통해서 미제는 박헌영을 협박하고 회유하여 간첩으로 포섭했던 것이다. 박헌영이 이러한 미제의 공작에 넘어갔던 것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양심' 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남한의 친일파 당국은 김일성이 박헌영 일행을 숙청 했다고 비난 하였다. 그 후 박헌영 일당이 미국이 보낸 스파이였다는 것이 비밀 해제된 미군 문서에 의해 밝혀졌다. 가증스런 사기꾼 미국은 전쟁이 나자 뜻밖의 전쟁이 난 것처럼 연기하였다. 음모를 꾸미는 기관인 미 CIA 극동지역 고위 책임자였던 하리마오는 “6.25 코리아 전쟁은 미국의 작품이었다”고 불편한 진실을 털어 놓았다. 코리아 전쟁이 일어 날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전개과정에서 미국은 한 민족에게 천추에 씻지 못할 죄를 범했다고 증언 하였다. 증언에 따르면 미국은 자신의 국익만을 위해 한반도에서 무자비하고 처참한 전쟁 판을 벌렸다는 것이다. 코리아 전쟁이 일본에 원폭투하로 일본이 항복하여 예상보다 빨리 종전되었고 그 이후 유럽 및 아시아에서 돌아온 500만 명의 참전 군인들의 일자리가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다. 1949년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7%까지 떨어져 실업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나타났다. 1930년을 전후한 대공황이 다시금 오리라는 비관적인 예측이 나와 워싱턴은 어디에선가 전쟁 발발 같은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코리아 전쟁으로 5백만 명이 죽었고, 그 사망자의 90%가 민간인이었다. 그리고 천만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집집마다 가족이나 친척이 죽거나 행방불명 되었다. 미군은 타민족의 시체 더미 위에서 축배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야수들이었다. 북한은 코리아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부르는 것이 전쟁의 성격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미국과 우리민족과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남한 땅은 미국 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코리아 전쟁을 말하면서 북에서 미국의 점령군과 싸운 것을 가리켜 그것을 남침한 것으로 조작하여 전쟁의 원인과 그 진실을 왜곡하여 온 것이 그 동안의 잘못 된 전쟁역사였다. 박헌영과 관련하여서도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을 두고서도 남녘에서는 진짜와 가짜 논쟁을 많이 벌여 왔다. 해방 후 박헌영은 자신이 일제의 앞잡이였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남로당을 이끌었으나 미제는 일제시대 ‘박헌영 변절’ 사실을 약점으로 잡아 박헌영을 협박하고 회유하여 간첩으로 포섭했던 것이다. 코리아 전쟁은 이미 1950년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을 6월25 코리아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쟁의 배경과 진실을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무지의 소치라고 말할 수 있다. 권투에서 상대방이 약한 잽을 여러 번 얻어맞다가 강한 펀치를 한번 날리자 그때부터 경기가 시작됐다고 우기는 경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당시에 남한 민중들은 자신의 정부나 자신의 군대를 갖지 못했다. 남한에는 남한 민중들이 결사 반대하므로 미국이 보호하고 있는 미국의 하수인 역을 맡은 이른바 ‘괴뢰정권’인 이승만 정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군과 그리고 미군의 명령에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친일파들이 거느린 괴뢰군이 있었다. 남한은 아직 국가가 형성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승만 꼭두각시는 있지도 않는 국가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구실로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국가를 지키고 보호한다는 구실로 미 식민지를 지키고 보호하려는 법이다. 식민지란 자신이 자기나라에서 주인 노릇을 못하고 다른 나라가 대신 주인 노릇을 하는 땅을 말한다. 북조선은 남한과 전쟁을 한 것이 아니고 남한 양민을 학살하고 남한 국민들이 결사적으로 싫어하는 괴뢰정권을 세운 미국과 전쟁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북조선은 남한 국민들을 대량 학살하고 끊임없이 북침을 명하여 남북의 군인들을 죽게 하는 미국을 몰아내고 전체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조국해방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사대매국적 생각을 갖지 않은 우리 민족성원이라면 누구든 침략자 미국을 몰아낼 전쟁을 반드시 해야 할 의무가 있었을 것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북한에서 소련군이 우리형제를 대량 학살해 죽인다면 남쪽에 있는 우리는 분단됐다고 바보같이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아니면 북한 동포를 구출하기 위해 미국이나 일본의 도움을 받더라도 싸워야겠는가? 더구나 38선에서 소련군의 명령을 받은 매국노들이 군대를 지휘하여 끊임없이 작은 전쟁을 벌려 남북한 우리 겨레인 군 장병들이 죽어 가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 장병들이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 이때 북한동포를 구출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면 우리 남한이 북한을 침략한 걸로 되는가? 김일성 장군은 해방직후 중국혁명을 도와주기 위하여 수많은 항일혁명투사들을 동북지구에 파견하였다. 그 당시 일본관동군도 김일성 장군이 영도하는 조선군대라면 꼼짝 못하고 손을 들었는데 우리 같은 거야 어림도 없어. 하면서 국민당 군대는 달아났고 그래서 조선인 부대만이 아니고 중국인부대에 조선사람 몇 명만 있어도 그 부대는 전투에서 패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당시의 역사와 관련하여 많이 흘러 나왔다. 김일성 장군은 중국해방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전체 조선 사람들이 중국동북지방이 해방되었다고 싸움을 그만둘 것이 아니라 중국혁명이 완전 승리하는 날까지 끝까지 싸우라고 하였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당시 모택동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 오성 붉은기에는 조선인민들의 피가 스며있다'고 특별히 강조하였다. 이렇게 북조선과 중국은 보통 인연이 아니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계속...) |
|
첫댓글 북은 소련에 의하여 전쟁준비가 척척 잘 되어 가고 있었지만 남쪽은 미군의 반대로 방어 준비를 하나도 못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기 까지 죽어 큰 소리를 못 친다면 북에서 더 얕잡아 보기 때문에 똑 같이 준비가 잘 되어 가는듯 쑈를하면서 기 싸움에 안 질여고 하다보니 이런 오해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