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새 (외 3편)
최서림
풍각장에서 콩나물 팔던 우리 엄마처럼 짝고 바지런하다
한겨울 감나무 가지에 매달린 감을 서로 먹으려고 동박새랑 다투는 것을 보면, 쑹화강 유역에서 만주족과 싸우며 텃세권을 형성한 조선족 여자 같다
눈알을 똘망똘망 굴리며 쉴 새 없이, 찔레나무 가지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붉은 열매를 쪼아 모으는 모습이 세상 여느 아낙네와 같다
아무르나 우수리 강변 버려진 집에는 이혼하고 딱새가 되어 돌아온 둘째 누나 같은 여자들이 둥지를 틀고 산다
목화
너무 멀리 왔구나
말이 곧 밥이 되고 법이 되던 땅으로부터
토해내지 못해
안으로 타들어간 말들이 끄는 대로
두 눈 멀쩡히 뜨고 여기까지 흘러왔다
바람 빠진 공 모양 쭈굴렁쭈굴렁 굴러왔다
길을 찾지 못해
쌓이고 쌓여 헝클어진 말덩어리가
쭈글쭈글한 몸 여기저기 불쑥불쑥 찌르며 비집고 나오는데
어두운 몸을 찢고 나온 혼돈의 말들은
화려한 독버섯이 되고 사금파리가 되고
이 땅의 모든 불씨를 사위어버리게 하는 얼음이 되고
너무 멀리 떠나왔구나
말이 곧 목화가 되고 따뜻한 구름이 되던 땅으로부터
구름을 타고 하늘을 만지고 놀던 때로부터
버들치
중택이는 버들치의 청도 사투리다 중학교 때부터 중택이란 별호(別號)를 얻은 까까머리 친구가 있다 1급수에만 사는 버들치같이 맑은 눈을 가졌기 때문인지 중 같은 머리 때문인지 지금도 청도서 가장 깊은 계곡 버드나무 숲 속에다 집을 짓고 산다 버드나무 숲 때문인지 눈물 많은 중택이 때문인지 이곳 바람은 눈물처럼 맑고 푸르다 으레 술자리가 막 벌어질 즈음이면 주식 얘기, 군대 얘기 다음으로 먹는 얘기가 따라나와서 개, 개구리, 뱀 잡아먹던 얘기로 마무리되지만, 물이 맑고 길이 곧은 청도서 나온 우리들에겐 뻐구리, 송사리, 버들치 얘기로 끝이 난다 한밤에 차를 몰아, 버들치같이 해맑은 얼굴로 산림청 서기를 하다가 이제는 진짜로 버들치가 되어버린, 바위틈에 숨쉬고 산다는 중택이를 찾아가는 친구들도 있다
—시집『버들치』(2014)에서
시인의 탄생
—서울 풍경 44
내 아내가 초등 1학년 때 광안리서
톰 소여랑 놀 때
청도서 나는 글자도 몰랐다.
내 아내가 마크 트웨인, 빅터 위고랑 여름을 피할 때
나는 붕어, 피라미, 물새알과 더불어
개천에서 방학을 홀라당 까먹었다.
서울 올라와 내 아내는 밤샘하는 카피라이터가 되고
나 역시 먼 길을 돌고 돌아 밤을 지새우는 시인이 되었다.
나를 시인으로 만든 것은 눈 내리는 겨울밤이 아니다.
아마릴리스 같은 여자와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키스가 아니다.
그녀의 머리칼에 떨어지던 윤중로의 벚꽃도 아니다.
공룡 같은 대학도 고리타분한 시론 강의도 아니다.
국민소득 2만 불도 아니다. OECD도 아니다.
나를 시인으로 키운 건
초등학교도 못 나온 내 아버지와 어머니다.
나를 들판의 망아지처럼 풀어놓은 아버지와 어머니다.
나를 찔레 같은 시인으로 단련시킨 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청춘의 분노와 좌절, 패배주의
긴장되고 졸아있던 방위병 생활, 5·18
서울의 봄, 최루탄, 마르크스, 성경, 촛불
중이염, 페니실린 쇼크, 짝사랑과 반복된 이별
불면증, 노숙, 지하방이다.
나를 무늬만 시인으로 만들지 않는 것은
아내의 끊이지 않는 잔소리와 걱정이다.
이 땅에서 먹고 살아남기의 문제이다.
미친 전세 값, 학원비, 큰 아이 대입, 노후 걱정이다.
—《애지》201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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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림 / 1956년 경북 청도 출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및 같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93년《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이서국으로 들어가다』『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세상의 가시를 더듬다』『구멍』『물금』『버들치』, 시론집『말의 혀』. 2014년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