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전 박정희가 씨앗 뿌린 100조 수주 ‘방산 코리아’
맨 하늘에서 떨어진 '한국의 방산 산업인가?'
보낸사람 : Jae suk sung <woowonsung523@gmail.com>
아래 기사를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누군가는 決死的으로 매달리며 노력을 해야 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윤 석열 정부가 週52시간제를 週69시간제로 발표했다가, 다시 週62시간제로 변경 발표했다고 듣고 있습니다. 물론 週52시간중, 하루 8시간을 넘겨서 일을 하면 overtime을 받습니다. 필요하면 62시간까지, overtime을 받고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overtime 주어도 52시간 이상을 하기 싫다는 것이 민노총의 주장입니다. 더하여 그들은 週4일제 근무를 주장합니다.
개인이나 국가는 동일합니다. 선진국 국민들도 오늘 날 그들의 선진 기술과 부를 이루기 위해서, 그들은 과거에 잠자지 않고, 늦은 밤까지 공부하고, 일했습니다. 제가 과학원 석사과정 시절, 강의하였었던 미국인 교수와 私的 대화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과학원의 실험실에는 밤 8시만 지나면, 실험실 燈 이 꺼져, 캄캄한 건물이 된다. 왜 그러 한가? 미국 대학의 연구실은 24시간 불이 켜져 있다.” 라고하는 말을 듣은 적 있습니다. 그 때 집에서 잠자는 외 연구실에서 늦은 밤까지 노력했었습니다. 오늘 오전, 함께 학위 공부했던 Prof. Bill (William) Clarke를 UQ Lakeside Cafe에서 만나, coffee 한잔하면서 Bill이 한국방문한 과거이야기, 3년에 학위를 끝낸 자는 저 혼자 뿐이라고 (본인은 5년) 대단한 노력을 치켜 세웠습니다. Bill은 65세로 내년 말에 퇴직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좀 쉬고 싶다는 뜻입니다. Australian Universities 에는 교수의 정년이 없습니다.
資源이라곤 인력 밖에 없는 한국에서 ‘적게 일하면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인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하면 자신의 정치 생명이 유지될 것으로 보는한 한국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습니다. 정치인의 ‘버리 장 머리’를 고치는 것은 오직 미래를 보는 유권자의 몫입니다. 일, 공부하지 않고는 절대로 선진국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성 재석 올림
50년전 박정희가 씨앗 뿌린 100조 수주 ‘방산 코리아’
70년대초 北은 도발, 美軍 철수 군사력 열세에 소총도 못 만들어 朴대통령 “병기 개발” 총력전 땀과 기름 범벅 5개월 철야 자신들도 놀랐던 발사 성공 황무지서 일궈낸 K방산 신화
김창균 논설주간 입력 , 조선일보
K2 전차 환영행사 참석한 두다 폴란드 대통령 -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이 6일(현지 시각) 폴란드 북부 그디니아 해군 기지에서 열린 한국산 K2 전차와 K9 자주포 초도 물량 인수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두다 대통령은“우크라이나 전쟁 국면에서 한국 무기의 신속한 인도는 중요하다”고 말했다. /AFP 연합뉴스
K2 전차 환영행사 참석한 두다 폴란드 대통령 -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이 6일(현지 시각) 폴란드 북부 그디니아 해군 기지에서 열린 한국산 K2 전차와 K9 자주포 초도 물량 인수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두다 대통령은“우크라이나 전쟁 국면에서 한국 무기의 신속한 인도는 중요하다”고 말했다. /AFP 연합뉴스
1970년대 초 대한민국 안보는 백척간두에 서 있었다. 1.21 청와대 습격, 울진·삼척 침투,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사건... 북의 도발은 거칠 것이 없었다. 평양서는 “수령님 환갑 잔치를 서울에서 열자”는 충성 구호가 등장했다. 1972년 4월 15일 이전에 남침한다는 뜻이다. 미국은 “아시아 방위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닉슨 독트린에 이어 “주한 미군 7사단 2만명 철수”를 일방 통보했다.
영국 전략연구소는 남한 군사력이 북한에 1대3 열세라고 분석했다. 한국군 탱크는 2차 대전때 쓰던 76㎜포 장착 M-4, 북한군 탱크는 1950년대 말 배치된 100㎜포 장착 T-55, T-59였다. 한국군 전투기는 200기, 북은 최신예 미그 21을 포함해 580기였다. 12노트 속도 우리 해군 함정이 25노트 북한 함정에 나포되는 사태도 벌어졌다. 북은 화포, 탱크까지 생산하는데 우리는 소총 한 자루 만들 능력이 없었다.
1971년 11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상공부 차관보를 제2 경제수석에 임명했다. 그리고 “예비군 20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병기 개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했다. “연말까지 시제품을 만들라”는 시간표와 함께. 촉박한 시한 때문에 ‘번개 사업’이라고 불렸다.
미국은 한국산 화포 개발에 “No, Gun Never”라고 반대했다. 병기가 필요하면 미국에서 구입하라고 했다. 남북 군비 확충 경쟁을 경계했던 것이다. 자체 개발밖에 방법이 없었다. 육군 장비를 분해해서 치수를 잰 뒤 도면을 작성하는 역설계에 의존했다. 부품을 잃어버릴까 야전침대를 갖다 놓고 불침범을 섰다. 미국 무기 교범을 찾으러 청계천 헌 책방도 뒤졌다.
개발팀은 집에 갈 엄두도 못 냈다. 머리와 수염을 못 깎고, 땀과 기름 범벅으로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거지 행색 때문에 ‘거동 수상자’로 몰리는 일도 벌어졌다. 인천 바닷가에 여관을 잡아 놓고 밤마다 지뢰 성능 시험을 했을 때였다. 며칠 후 소총으로 무장한 군경이 여관을 에워쌌다. 가죽점퍼 입고 고무장화 신은 괴한 10여 명이 인적 드문 바닷가에 밤늦게 나갔다 돌아오면서 “폭발물” 얘기를 한다는 신고 때문이었다.
1971년 12월 16일, 청와대에서 시제품이 전시됐다. 샹들리에 불빛을 받은 빨간 카펫 위에 60㎜ 박격포, 로켓포, 기관총, 소총이 놓였다. 처음 보는 국산 병기의 그럴듯한 겉모습에 사람들은 감격했다. 박 대통령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했다. 뒤풀이 만찬에서 박 대통령은 오 수석에게 “오늘은 임자가 내 앞에 앉아”라고 했다. 그리고 맞담배를 권했다. 청와대 신관 30평 반지하실에 병기 진열장이 마련됐다. 박 대통령은 아침 산책길마다 들러 병기 개발 상태를 점검했다.
1972년 4월 3일, 보병 26사단에서 시사회(試射會)가 열렸다. 5개월 날림 작업으로 생산된 병기가 과연 작동할 것인가. 진실의 순간이었다. 3부 요인과 각 군 총장이 참관했다.
카빈총과 기관총 사격이 첫 번째였다. 사고가 날까 내빈석은 300m 멀리 설치됐다. 놀랄 만큼 명중률이 높았다. 표적에 달아둔 타일과 접시가 산산조각 날 때마다 함성이 터졌다. 정작 인솔 장교는 떨떠름했다. 사격 병사들의 철모를 두드리며 핀잔을 줬다. “자식들아, 미국 총 대신 국산 총 주면 어쩌려고 그래.” 국산 병기가 그만큼 못 미더웠던 것이다.
대전차지뢰 폭발 때 10m가 넘는 불기둥이 치솟았다. 내빈석으로 시커먼 캐터필러 조각들이 날아왔다. ‘악’ 하는 비명과 함께 대피 소동이 벌어졌다. 국방장관이 벌떡 일어나 “중지”라고 외쳤다. 박 대통령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쌍안경으로 폭발 지점을 관찰하더니 “순서대로 진행해”라고 지시했다. 시사회는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박 대통령은 병기 진열대로 향했다. 81㎜ 박격포 포신을 쓰다듬었다. 귀여운 자식의 뺨을 어루만지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방위 산업이 지난해 사상 최대 규모 판매 계약을 체결하며 수주 잔액이 100조원을 넘어섰다. 뛰어난 가성비와 철저한 납기 준수로 경쟁력을 인정받은 결과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작년 4월 대한민국 국회 화상연설에서 “러시아의 탱크, 배, 미사일을 막을 수 있는 군사 장비가 한국에 있다”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작년 12월 폴란드 대통령은 계약 넉 달 만에 배달된 K2 전차와 K9 자주포를 해군 기지까지 나와 마중했다. 방산 강국 코리아가 자유 민주주의의 무기고 역할을 하고 있다. 50년전 박정희 대통령이 황무지에 뿌렸던 씨앗이 맺은 열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