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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이씨(陽山李氏)의 연원
양산(陽山)은 경기도 양지현(陽智縣)의 옛 이름으로 양양(陽良)ㆍ추계(秋溪)라고도 한다. 양지(陽智)는 본래 수천(水川)의 양양부곡(陽良部曲)인데, 조선 정종 1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縣)으로 만들었다. 태종 13년 현(縣)의 읍내를 광주(廣州) 추계향(秋溪鄕)으로 옮기고 죽주(竹州)의 고안(高安)ㆍ대곡(大谷)ㆍ목악(木岳)ㆍ제촌(蹄村) 등을 분할하여 소속시켰으며,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옮겨 왔다. 1895년 승격하여 군(郡)이 되었고, 1914년에는 용인군(龍仁郡)에 합하였다.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시조 이천일(李天一)은 신라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 5년(BC53년)에 중국에 초선(招選)되어 아우 이홍일(李弘一)과 더불어 사마시(司馬試)에서 장원했다고 ‘계유보(癸酉譜)’ 손록(孫錄)에 적혀 있다. 그 뒤 사마대장군(司馬大將軍)이 되고 흉노정벌에 공을 세워 요동백(遼東伯)이 되었다고 한다. 병으로 귀국해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오르고 공산군(公山君)에 봉해졌으며, 문무(文武)라 시호(諡號)되었다고 한다.
▲ 경북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에 자리한 득관조 이백령(李栢齡) 이하 19세의 열위(列位) 선조를 배향하는 모선단(募先壇).
그런데 ‘공주이씨족보(公州李氏族譜)’를 보면 시조가 이천일(李天一)이어서 양산 이씨(陽山李氏)와 동원(同源)임이 드러나 있고, ‘기축보(己丑譜)’ 서문에도 “양산 이씨(陽山李氏)는 공주(公州), 수원(水原), 전의 이씨(全義李氏) 등과 동조동원(同祖同源)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양산 이씨(陽山李氏)는 30세 희안(希顔)이 송(宋)나라에 들어가 문과에 올라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된 뒤 귀국해 고려 문종 때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태상(太常)이라 시호(諡號)되었는데,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기축보(己丑譜)’ 손록(孫錄)에 적혀 있다.
큰 아들 송령(松齡)의 현손(玄孫)대에 공주 이씨(公州李氏)와 수원 이씨(水原李氏)가 분관되었는데, 양산 이씨(陽山李氏)는 바로 31세 송령(松齡)의 아우 백령(栢齡)이 원(元)나라에서 세운 공으로 충민(忠敏)이라 시호(諡號)되고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짐으로써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관조(貫祖)가 되었다. 그리고 34세 교송(喬松)은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분적(分籍)되었고, 아우 자송(子松)은 수원 이씨(水原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 경북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에 자리한 충민공(忠敏公) 이백령(李栢齡)의 기적비각(紀積碑閣).
백령(栢齡)의 손자인 인의(仁義)도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진 사실이 ‘계유보(癸酉譜)’ 손록(孫錄)에 보이나 35대 이후 5세보(譜)가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이 뚜렷치 않다가 40세 당(棠)이 조선 태종조에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오르고 아들 근(根)은 세종조에 이천현 감무(伊川縣監務)를 지냈으며, 손자 중손(仲孫)이 문종조에 안성군수(安城郡守)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냄으로써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중흥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아들 항무(恒茂)가 뛰어난 인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조조에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었고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냈으며,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짐으로써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중조(中祖)가 되었다.
‘기축보(己丑譜)’에 보면, 선대의 세거의 터를 짐작하기 어렵고 29세 승경(承景)의 대부터 전북 남원(南原), 충남 공주(公州) 등지에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묘영(墓塋)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곳에 살았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34세 교위(喬違) 이하 5대가 실전(失傳)하였으나, 교위(喬違)가 충남 부여(扶餘)에 살기 시작했다고 나타나 있는 점으로 보아 일부 자손들은 한동안 이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았던 것 같다. 42세 중손(仲孫)의 대를 전후하여, 지금의 경북 칠곡(漆谷)으로 옮겨왔고, 중손(仲孫)의 5대손 성(晟)이 다시 지금은 경북 영천군(永川郡)에 속해 있는 신녕(新寧)의 사천(沙川)에 가 자리잡은 이래, 영천군(永川郡) 일원에 세거해 온 것으로 보인다.
▲ 충간공(忠簡公) 이승수(李承須)을 추앙하기 위해 1964년 중건한 경북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 만휴정(晩休亭).
항무(恒茂)의 손자인 승수(承須ㆍ1491~1550)는 자는 자건(子健), 호는 만휴(晩休), 중종 11년(1516년) 문과에 급제해 권지교서관 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를 지낸 뒤, 이듬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다음해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이 되었다. 중종 14년(1519년)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옮겨 1522년에는 장락원 첨정(掌樂院僉正)을 지낸 뒤 종부사첨정(宗簿寺僉正)을 맡았고, 1524년에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등을 거쳐 태천현감(泰川縣監)으로 나아갔다. 그는 목민관(牧民官)으로도 이름을 떨쳐 교민효제(敎民孝悌)로 선정(善政)을 쌓았다고 하며, 낙안현감(樂安縣監)으로 부임한 뒤 그 치적이 더욱 빛이 났다고 한다. 그 뒤 내직(內職)으로 돌아 병조참판(兵曹參判)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마지막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사후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
승수(承須)의 둘째 아들 수전(守全)은 자는 전지(全之)로 명종 때 음사(蔭仕)로 한성참군(漢城參軍)을 거쳐 안성군수(安城郡守)를 지냈으며, 그 후손으로 시욱(時郁)ㆍ동원(東元)ㆍ성춘(成春) 등이 환로(宦路)에서 명맥을 지켜낸 분들이다.
양산(陽山)은 경기도 양지현(陽智縣)의 옛 이름으로 양양(陽良)ㆍ추계(秋溪)라고도 한다. 양지(陽智)는 본래 수천(水川)의 양양부곡(陽良部曲)인데, 조선 정종 1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縣)으로 만들었다. 태종 13년 현(縣)의 읍내를 광주(廣州) 추계향(秋溪鄕)으로 옮기고 죽주(竹州)의 고안(高安)ㆍ대곡(大谷)ㆍ목악(木岳)ㆍ제촌(蹄村) 등을 분할하여 소속시켰으며,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옮겨 왔다. 1895년 승격하여 군(郡)이 되었고, 1914년에는 용인군(龍仁郡)에 합하였다.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시조 이천일(李天一)은 신라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 5년(BC53년)에 중국에 초선(招選)되어 아우 이홍일(李弘一)과 더불어 사마시(司馬試)에서 장원했다고 ‘계유보(癸酉譜)’ 손록(孫錄)에 적혀 있다. 그 뒤 사마대장군(司馬大將軍)이 되고 흉노정벌에 공을 세워 요동백(遼東伯)이 되었다고 한다. 병으로 귀국해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오르고 공산군(公山君)에 봉해졌으며, 문무(文武)라 시호(諡號)되었다고 한다.
▲ 경북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에 자리한 득관조 이백령(李栢齡) 이하 19세의 열위(列位) 선조를 배향하는 모선단(募先壇).
그런데 ‘공주이씨족보(公州李氏族譜)’를 보면 시조가 이천일(李天一)이어서 양산 이씨(陽山李氏)와 동원(同源)임이 드러나 있고, ‘기축보(己丑譜)’ 서문에도 “양산 이씨(陽山李氏)는 공주(公州), 수원(水原), 전의 이씨(全義李氏) 등과 동조동원(同祖同源)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양산 이씨(陽山李氏)는 30세 희안(希顔)이 송(宋)나라에 들어가 문과에 올라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된 뒤 귀국해 고려 문종 때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태상(太常)이라 시호(諡號)되었는데,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기축보(己丑譜)’ 손록(孫錄)에 적혀 있다.
큰 아들 송령(松齡)의 현손(玄孫)대에 공주 이씨(公州李氏)와 수원 이씨(水原李氏)가 분관되었는데, 양산 이씨(陽山李氏)는 바로 31세 송령(松齡)의 아우 백령(栢齡)이 원(元)나라에서 세운 공으로 충민(忠敏)이라 시호(諡號)되고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짐으로써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관조(貫祖)가 되었다. 그리고 34세 교송(喬松)은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분적(分籍)되었고, 아우 자송(子松)은 수원 이씨(水原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 경북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에 자리한 충민공(忠敏公) 이백령(李栢齡)의 기적비각(紀積碑閣).
백령(栢齡)의 손자인 인의(仁義)도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진 사실이 ‘계유보(癸酉譜)’ 손록(孫錄)에 보이나 35대 이후 5세보(譜)가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이 뚜렷치 않다가 40세 당(棠)이 조선 태종조에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오르고 아들 근(根)은 세종조에 이천현 감무(伊川縣監務)를 지냈으며, 손자 중손(仲孫)이 문종조에 안성군수(安城郡守)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냄으로써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중흥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아들 항무(恒茂)가 뛰어난 인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조조에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었고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냈으며,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짐으로써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중조(中祖)가 되었다.
‘기축보(己丑譜)’에 보면, 선대의 세거의 터를 짐작하기 어렵고 29세 승경(承景)의 대부터 전북 남원(南原), 충남 공주(公州) 등지에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묘영(墓塋)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곳에 살았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34세 교위(喬違) 이하 5대가 실전(失傳)하였으나, 교위(喬違)가 충남 부여(扶餘)에 살기 시작했다고 나타나 있는 점으로 보아 일부 자손들은 한동안 이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았던 것 같다. 42세 중손(仲孫)의 대를 전후하여, 지금의 경북 칠곡(漆谷)으로 옮겨왔고, 중손(仲孫)의 5대손 성(晟)이 다시 지금은 경북 영천군(永川郡)에 속해 있는 신녕(新寧)의 사천(沙川)에 가 자리잡은 이래, 영천군(永川郡) 일원에 세거해 온 것으로 보인다.
▲ 충간공(忠簡公) 이승수(李承須)을 추앙하기 위해 1964년 중건한 경북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 만휴정(晩休亭).
항무(恒茂)의 손자인 승수(承須ㆍ1491~1550)는 자는 자건(子健), 호는 만휴(晩休), 중종 11년(1516년) 문과에 급제해 권지교서관 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를 지낸 뒤, 이듬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다음해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이 되었다. 중종 14년(1519년)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옮겨 1522년에는 장락원 첨정(掌樂院僉正)을 지낸 뒤 종부사첨정(宗簿寺僉正)을 맡았고, 1524년에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등을 거쳐 태천현감(泰川縣監)으로 나아갔다. 그는 목민관(牧民官)으로도 이름을 떨쳐 교민효제(敎民孝悌)로 선정(善政)을 쌓았다고 하며, 낙안현감(樂安縣監)으로 부임한 뒤 그 치적이 더욱 빛이 났다고 한다. 그 뒤 내직(內職)으로 돌아 병조참판(兵曹參判)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마지막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사후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
승수(承須)의 둘째 아들 수전(守全)은 자는 전지(全之)로 명종 때 음사(蔭仕)로 한성참군(漢城參軍)을 거쳐 안성군수(安城郡守)를 지냈으며, 그 후손으로 시욱(時郁)ㆍ동원(東元)ㆍ성춘(成春) 등이 환로(宦路)에서 명맥을 지켜낸 분들이다.
양산(陽山)은 경기도 양지현(陽智縣)의 옛 이름으로 양양(陽良)ㆍ추계(秋溪)라고도 한다. 양지(陽智)는 본래 수천(水川)의 양양부곡(陽良部曲)인데, 조선 정종 1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縣)으로 만들었다. 태종 13년 현(縣)의 읍내를 광주(廣州) 추계향(秋溪鄕)으로 옮기고 죽주(竹州)의 고안(高安)ㆍ대곡(大谷)ㆍ목악(木岳)ㆍ제촌(蹄村) 등을 분할하여 소속시켰으며,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옮겨 왔다. 1895년 승격하여 군(郡)이 되었고, 1914년에는 용인군(龍仁郡)에 합하였다.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시조 이천일(李天一)은 신라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 5년(BC53년)에 중국에 초선(招選)되어 아우 이홍일(李弘一)과 더불어 사마시(司馬試)에서 장원했다고 ‘계유보(癸酉譜)’ 손록(孫錄)에 적혀 있다. 그 뒤 사마대장군(司馬大將軍)이 되고 흉노정벌에 공을 세워 요동백(遼東伯)이 되었다고 한다. 병으로 귀국해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오르고 공산군(公山君)에 봉해졌으며, 문무(文武)라 시호(諡號)되었다고 한다.
▲ 경북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에 자리한 득관조 이백령(李栢齡) 이하 19세의 열위(列位) 선조를 배향하는 모선단(募先壇).
그런데 ‘공주이씨족보(公州李氏族譜)’를 보면 시조가 이천일(李天一)이어서 양산 이씨(陽山李氏)와 동원(同源)임이 드러나 있고, ‘기축보(己丑譜)’ 서문에도 “양산 이씨(陽山李氏)는 공주(公州), 수원(水原), 전의 이씨(全義李氏) 등과 동조동원(同祖同源)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양산 이씨(陽山李氏)는 30세 희안(希顔)이 송(宋)나라에 들어가 문과에 올라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된 뒤 귀국해 고려 문종 때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태상(太常)이라 시호(諡號)되었는데,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기축보(己丑譜)’ 손록(孫錄)에 적혀 있다.
큰 아들 송령(松齡)의 현손(玄孫)대에 공주 이씨(公州李氏)와 수원 이씨(水原李氏)가 분관되었는데, 양산 이씨(陽山李氏)는 바로 31세 송령(松齡)의 아우 백령(栢齡)이 원(元)나라에서 세운 공으로 충민(忠敏)이라 시호(諡號)되고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짐으로써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관조(貫祖)가 되었다. 그리고 34세 교송(喬松)은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분적(分籍)되었고, 아우 자송(子松)은 수원 이씨(水原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 경북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에 자리한 충민공(忠敏公) 이백령(李栢齡)의 기적비각(紀積碑閣).
백령(栢齡)의 손자인 인의(仁義)도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진 사실이 ‘계유보(癸酉譜)’ 손록(孫錄)에 보이나 35대 이후 5세보(譜)가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이 뚜렷치 않다가 40세 당(棠)이 조선 태종조에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오르고 아들 근(根)은 세종조에 이천현 감무(伊川縣監務)를 지냈으며, 손자 중손(仲孫)이 문종조에 안성군수(安城郡守)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냄으로써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중흥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아들 항무(恒茂)가 뛰어난 인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조조에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었고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냈으며,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짐으로써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중조(中祖)가 되었다.
‘기축보(己丑譜)’에 보면, 선대의 세거의 터를 짐작하기 어렵고 29세 승경(承景)의 대부터 전북 남원(南原), 충남 공주(公州) 등지에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묘영(墓塋)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곳에 살았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34세 교위(喬違) 이하 5대가 실전(失傳)하였으나, 교위(喬違)가 충남 부여(扶餘)에 살기 시작했다고 나타나 있는 점으로 보아 일부 자손들은 한동안 이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았던 것 같다. 42세 중손(仲孫)의 대를 전후하여, 지금의 경북 칠곡(漆谷)으로 옮겨왔고, 중손(仲孫)의 5대손 성(晟)이 다시 지금은 경북 영천군(永川郡)에 속해 있는 신녕(新寧)의 사천(沙川)에 가 자리잡은 이래, 영천군(永川郡) 일원에 세거해 온 것으로 보인다.
▲ 충간공(忠簡公) 이승수(李承須)을 추앙하기 위해 1964년 중건한 경북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 만휴정(晩休亭).
항무(恒茂)의 손자인 승수(承須ㆍ1491~1550)는 자는 자건(子健), 호는 만휴(晩休), 중종 11년(1516년) 문과에 급제해 권지교서관 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를 지낸 뒤, 이듬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다음해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이 되었다. 중종 14년(1519년)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옮겨 1522년에는 장락원 첨정(掌樂院僉正)을 지낸 뒤 종부사첨정(宗簿寺僉正)을 맡았고, 1524년에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등을 거쳐 태천현감(泰川縣監)으로 나아갔다. 그는 목민관(牧民官)으로도 이름을 떨쳐 교민효제(敎民孝悌)로 선정(善政)을 쌓았다고 하며, 낙안현감(樂安縣監)으로 부임한 뒤 그 치적이 더욱 빛이 났다고 한다. 그 뒤 내직(內職)으로 돌아 병조참판(兵曹參判)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마지막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사후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
승수(承須)의 둘째 아들 수전(守全)은 자는 전지(全之)로 명종 때 음사(蔭仕)로 한성참군(漢城參軍)을 거쳐 안성군수(安城郡守)를 지냈으며, 그 후손으로 시욱(時郁)ㆍ동원(東元)ㆍ성춘(成春) 등이 환로(宦路)에서 명맥을 지켜낸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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