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11월 29일, KAL858기(機)가 인도양 상공에서 폭파돼 승객과 승무원 115명 전원이 사망했다. 한국 정부는 국제공조를 통해 일본인 하치야 마유미(蜂谷?由美)로 가장한 범인 김현희(金賢姬)의 신병을 확보했고, 김정일(金正日)의 지령에 의한 테러임을 확정 지었다. 그 사건 후 지금까지 23년째 북한정권과 남한의 일부 좌파(左派)단체는 “증거가 없다”, “김현희는 가짜”라며 한국 측의 조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010년 3월 26일, 대한민국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서해 백령도 해상에서 침몰해 장병 40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됐다. 한국 정부는 다국적 민군(民軍)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북한산 어뢰 ‘CHT-02D’의 추진체 등 결정적 증거를 확보했고,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임을 확정 지었다. 북한정권과 남한의 일부 좌파단체는 “북한의 어뢰가 아니다”, “합조단 발표에 의문점이 많다”며 조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KAL858기 폭파사건의 ‘결정적 증거’이자 ‘살아 있는 증거’인 김현희씨는 지금 천안함 폭침(爆沈)사건을 어떻게 지켜보고 있을까. 지난 6월 1일, ‘북풍(北風)’과 ‘노풍(盧風)’이 뒤섞인 지방선거 관련 기사에서 ‘KAL858기 폭파사건’이란 단어가 보이자 다시 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그 순간 기자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02’로 시작하는 발신번호를 본 후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기자, 정○○입니다.” 휴대전화가 없는 김현희씨의 남편 정씨는 항상 공중전화로 연락을 한다. 주소지인 서울로 투표를 하기 위해 올라왔다가 안부인사차 전화를 한 것이었다. 먼저 연락할 길이 없는 기자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뭔가 통했다’는 느낌이 왔다. 8일 후인 6월 9일, 지방의 한 식당에서 김현희씨를 만날 수 있었다. 지난해 2월과 6월 <월간조선>(月刊朝鮮) 인터뷰, 3월 일본인 납북(拉北)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씨의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飯塚耕一郞) 씨와의 공개 만남 등 몇 차례 언론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지만, 질문지를 미리 전달하는 등 사전 협의하에 단독으로 정식 인터뷰를 한 것은 국내 언론으로선 잠적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北에선 ‘1호’ 대신 ‘1번’ 훨씬 많이 써
|
지난 5월 20일 민군 합동조사단이 공개한 어뢰 추진체와 모터. KAL858기 폭파사건의 범인이자 ‘결정적 증거'인 김현희씨는 자신을 '살아있는 프로펠러’라 표현했다. | “천안함 사건과 KAL858기 폭파사건, 23년의 간극(間隙)을 둔 두 사건은 범인, 피해자, 범행방식, 증거 확보 등 여러 모양에서 너무나 닮았습니다. 둘 모두 사건이 터지자마자 한국 정부가 국제공조를 추진했고,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해 진실이 밝혀졌죠. 북한은 계속 발뺌을 하고 있고요.” 천안함 사건에 대한 생각을 묻자, 김씨는 23년 전 ‘악몽’을 다시 끄집어내면서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1997년 12월 안기부 직원이었던 정씨와 결혼한 후 세상과 거리를 둔 채 평범한 아내이자 엄마로 살려고 했지만, 좌파정권과 방송언론은 그들을 곱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월간조선>의 연이은 특종(特種)보도 후 어느 정도 평온을 찾은 듯했으나, 천안함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23년 전 사건이 불거져 나온 것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의 발표를 국민의 25~30%가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이 조사결과에 대해 ‘경탄’의 표현까지 쓴 것과 상반되는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살아 있는 프로펠러’입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결정적인 증거가 됐죠. 북한의 소행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쌍끌이 어선의 그물에 걸려 올라왔는데, 종북(從北)세력은 여전히 조작을 주장합니다. 그들에겐 진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북한이 했다’는 진실이 두렵고 싫은 것이죠. 자기 집 아들이 맞아 죽었는데, 가해자를 규탄하는 대신 집안 형제끼리 싸우고 뒤집어엎는 경우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또 가해자는 그렇게 보호하려고 하고요. 그 사람들이 정말 대한민국 국민인지 궁금합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돼요. 의식화된 세력이라고 봅니다.” 지난 6월 13일, 참여연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과 이사국에 “한국 정부의 조사에 의혹이 많으니 안보리 대북제재에 신중을 기해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대상으로 한 한국 민군 합동조사단의 ‘천안함 사건 조사 브리핑’을 하루 앞두고 일어난 일이다. 의장국인 멕시코는 지금까지 안보리 논의에서 NGO의 자료를 회람한 적이 없다며 선을 그었지만, 여전히 모호한 입장을 보이는 중국과 러시아의 대응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천안함 사건 조사 결과 발표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게 어뢰 추진축에 적혀 있던 ‘1번’이라는 글씨다. 북한에서는 ‘1번’이라는 용어를 안 쓴다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金大中·盧武鉉)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세현(丁世鉉)씨가 그런 주장을 했다. 정씨는 “북한에선 1번, 2번 같은 일본식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1962년에 북한에서 태어나 1987년까지, 25년간 북한에서 살았던 김현희씨에게 ‘번’과 ‘호’에 대해 물었다. ―북한에선 정말 ‘1번’ 대신 ‘1호’란 말을 사용합니까. “‘호’란 말보단 오히려 ‘번’을 더 많이 씁니다. ‘호’는 특수한 경우에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1호 행사’라고 하면 김일성이 참가하는 행사, ‘1호 통역’은 김일성의 통역을 일컫는 말입니다. 초대소도 ‘2호’ 등으로 쓰죠. 하지만 그 외에 학습할 때, 줄을 설 때 등 평소엔 ‘1번’ ‘2번’을 훨씬 자연스럽게 씁니다.” 김정일 지시 없이 이뤄졌을 가능성은 0%
|
김현희씨는 천안함 공격이 김정일 지시 없이 이뤄졌을 가능성은 절대 없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지난 6월 5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김정일. | 북한 국방위원회는 지난 5월 28일 기자회견을 갖고 “북에서는 광명성 1호 등 ‘호’라는 표현을 쓰지 ‘번’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며 “‘번’이라는 표현은 축구선수나 농구선수 같은 체육선수에게만 쓴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왜 북한은 직접 기자회견을 하면서까지 ‘번’을 쓰지 않는다고 해명했을까요. “23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KAL858기를 테러하고도 안 했다고 끝까지 발뺌하잖아요. 북한은 지금도 저를 가짜라고 주장합니다. 증거를 인멸하려 하는 거죠. 일단 일을 저질러놓고 안 했다고 우기면 다 되는 줄 압니다. 이번 사건을 지켜보면서 ‘북한 수법이 진짜 하나도 안 변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생각하는 수준이나 발뺌하는 방법,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고요. 김정일은 끝까지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천안함 공격이 김정일의 지시 없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북한에서 이처럼 큰 건을 김정일이 모르게 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사소한 것까지 비준이 있어야만 실행이 됩니다. 물론 이를 기획하고 전략·전술을 세워 훈련한 것은 정찰총국이나 군이었겠죠. 하지만 최종 보고는 분명히 김정일에게 갔을 겁니다.” ―극비리에 실시된 천안함 공격의 경우 김정일이 그날 밤 남한 TV를 보고 작전의 성공을 알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KAL858기 폭파 때도 북한에 따로 보고하지 않았겠네요. “보고는커녕 저희도 성공 여부를 알 수 없었죠. 일단 (폭탄을) 놓고는 내렸는데, 이게 터졌는지 안 터졌는지 모르잖아요. 한국대사관에서 호텔에 찾아와 항공기가 실종됐단 얘기를 했을 때 성공했다는 걸 알았죠. 물론 그 다음 탈출이 문제이긴 했지만. 폭파사건 직후 북한 노동신문이 ‘마유미, 신이치란 일본인을 내세워 남한이 KAL858기를 폭파하는 자작극을 벌여놓고 북한에 뒤집어씌운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간부들을 대상으론 자작극임을 선전하기 위해 제 사진이 잠깐 나오는 자료도 돌렸다고 해요. 그런데 그 사진이 문제가 된 거죠. 간부들만 보여줬는데도 저를 안다는 사람이 너무 많이 나오는 바람에 보위부와 당이 입막음하느라 혼이 났다고 합니다. 가짜라고 선전하려고 한 게 오히려 진짜임을 입증한 셈이 됐죠.” ―지난 3월 천안함 사건 보도를 처음 접한 순간 북한의 소행이란 감이 바로 왔습니까. “100%는 아니지만, 북한 소행일 확률이 꽤 높다는 감은 왔습니다. 아무래도 언론을 통해 전해진 정보는 한정돼 있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었죠. 그런데 사건 현장이 바다라 마음에 많이 걸렸어요. 23년 전에도 ‘확실한 증거인멸을 위해 (KAL기) 폭파 위치를 바다 위로 선택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깊은 바다로 기체를 빠뜨려 흔적을 없애려고 했죠. 이번 천안함도 잠수함으로 접근, 어뢰로 공격해 증거를 없애려고 했고요. 수법이 그대로입니다.” “‘테러 지휘부는 반드시 타격을 당한다’는 사실 각인시켜야”
|
소설 <배후>의 저자 서현필씨가 2003년 11월 기자회견장에서 김현희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모습. 서씨는 지금도 의혹이 해소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 1987년 12월 김현희씨가 바레인 공항에서 자살에 성공했다면 그들의 위조여권상 국가인 일본과 한국은 큰 혼란을 맞이했을 것이다. ‘결정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국내에선 반일(反日)·반미(反美)시위가 잇따르고, 좌파단체는 ‘북풍’과 ‘자작극’을 주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김정일의 KAL858기 폭파 목적대로 ‘서울올림픽과 두 개의 조선 책동이 분쇄됐을 것’이다. 김씨는 천안함 사건도 ‘결정적 증거’의 획득이 무엇보다 큰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만약 어뢰 추진체를 찾지 못했다면, 좌파단체의 조작설이 더 큰 힘을 발휘해 한국이 제대로 된 대응을 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10년 동안 쌀과 비료를 비롯해 자금까지 공급받다가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뚝 끊기니까 ‘한 방 먹인 셈’이죠. 또 북한 내부적으론 화폐개혁 실패 후 경제가 어려워져 민심이 이반된 데다 후계자 문제까지 불거져 나온 상황에서 결속을 위해 공격한 것이고요. 한마디로 북한이 이명박(李明博) 정권을 얕잡아봤다고 봅니다. 솔직히 최근 안보에 대해 좀 소홀히 했던 것은 사실 아닙니까. 실용정부의 맹점(盲點)이죠.” ―사건 직후 청와대와 정부는 “북한의 특이동향이 없다”며 해난(海難)사고 같은 발표를 했는데요. 답답한 생각은 안 들었습니까. “정부 입장도 이해는 됩니다. 대통령도 고심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아직 정확히 규명이 안됐으니까 그렇게 했겠죠. 답답하긴 했지만, 결국 확실한 증거가 나와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결과보단 앞으로의 대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말만 하는 것보단 행동과 실천이 있어야겠죠.” ―어떤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봅니까. “‘북한이 이런 테러를 자행하면, 그 지휘부가 타격을 당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합니다. 그냥 넘어가면 절대 안 됩니다. 테러엔 단호한 입장을 보여야 재발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 대통령이 얼마 전 ‘전쟁을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전쟁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셨는데, 물론 맞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전쟁을 원하진 않죠. 하지만 북한엔 ‘우리가 전쟁을 두려워하지도 원하지도 않지만, 막상 필요하다면 해서 이긴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여줘야 합니다. 그게 진정으로 전쟁을 막는 방법이라고 봅니다.” 김씨는 또 “천안함 공격은 북한이 어떤 나라인가에 대한 경종을 울린 사건”이라며 “천안함 사망·실종자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국민과 군이 해이해진 안보를 새롭게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北, 23년 전엔 在日 간첩 동원해 선동, 지금은 인터넷으로 쉽게 對南 공작 “지난 10년 동안 안보의식이 엉망이 됐잖아요. 국민 전체가 무장해제되고, 안보기관의 사기도 떨어졌고, 간첩과 그 동조세력들은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고…. 사실상 국가가 종북세력을 양성한 셈이 됐죠. 그들이 사회 곳곳에서 대한민국을 반대하고 깎아내리고 있어요. 외부의 적도 중요하지만, 내부의 적이 더 무섭습니다. 아무리 겉이 멀쩡한 좋은 집에 살면 뭐 합니까. 안으론 쥐가 구멍 내고 기둥을 다 갉아먹고 있는데요. 안으로 계속 파먹는 세력들, 즉 내부의 적에 대한 단호한 대처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국가 입장에서 ‘내부의 적’은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봅니까. “원칙대로 하면 됩니다. 대한민국은 법과 원칙이 있는 나라 아닙니까. 자유를 보장하되 법의 테두리 안에서, 어겼을 땐 단호하게 처리하는 겁니다. 자꾸 봐주니까 문제가 커지는 거죠. 요즘은 특히 북한이 대남공작에서 인터넷을 많이 활용하는 것 같아요. 제가 북에 있을 때만 해도 주로 국내 고정간첩이나 일본 등 제3국을 통해 지시하고, 산하 단체에서 주요 인사를 포섭하고, 동조세력을 만들어 선전하는 방식이었는데, 요즘은 인터넷이 있으니 훨씬 쉬운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북한이 인터넷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는 셈이죠.” 김현희씨와 그의 가족은 2003년 11월 집을 나온 후 허름한 단칸방에서 7년째 살고 있다. 전화도 없고, 컴퓨터도 없다. 겨울엔 물이 잘 안 나와 빨래를 종일 해야 하고, 밤엔 생쥐와 바퀴벌레가 돌아다녀 잠을 설쳐야 한다. 그들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좌파 정권 시절 김현희씨를 가짜로 만들기 위해 만행을 저지른 국정원과 정부의 잘못을 현재의 국정원과 정부가 인정하고 공식 사과하는 것뿐이다. MBC 등의 의혹 제기 후 7년 간 ‘피난’ 생활
좌파정권 당시 MBC와 KBS 등 방송사들이 의혹을 제기하자 좌파단체들은 이를 근거로 선동을 시작했다.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위)는 김현희씨를 조사하겠다고 압박했다. 최고 보안을 유지해야 할 김씨의 집에 방송사 카메라맨이 들이닥쳤고, 김씨와 남편은 어린 자녀를 업고 피신해야 했다. 둘째의 돌이 막 지났을 무렵, 그렇게 집을 나온 지 어느덧 7년째다. 기자도 당시 김현희씨를 취재하기 위해 여러 곳을 수소문해 놓은 상태였다. 김씨의 친지가 산다는 서울 사당동 부근을 샅샅이 훑으며 탐문해 그 친지의 집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 친지는 이미 사망했고 가족들은 이사를 한 후였다. 국정원과 정부부처의 주요 인사에게 김씨의 소재를 알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언제나 대답은 “절대 말해 줄 수 없다”였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의 방송사들은 그의 집을 쉽게 찾아낸 것이다. 기자는 훗날, 당시 김현희씨를 추적했던 언론사 가운데 정보기관으로부터 김씨의 주소지를 받은 곳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법원의 3심(審), 국정원의 ‘4심’, 진실화해위의 ‘5심’을 받은 김씨는 2008년 말 <월간조선>을 통해 공개된 편지에서 국정원의 ‘공식사과’를 요구했지만, 국정원은 1년 반째 묵묵부답(默默不答)이다. “저나 저희 가족을 위해 이렇게 투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 안락(安樂)을 바랐더라면, 그냥 지난 정부에서 하자는 대로 다 했겠죠. 가짜가 되든 말든 안전하고 편안하게 사는 게 먼저였을 겁니다. 지난 7년 동안 ‘피난’ 생활은 정말 어려웠지만, 힘겹게 지키고 있습니다.” ―원래 집으론 언제쯤 돌아갈 겁니까. “글쎄요. 일단 투쟁은 계속할 계획입니다. 지난 정부와 국정원에서 잘못한 것이 있으면 반성하고 사과하면 됩니다. 지금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정권 바뀌면 또 6심에 7심까지 이어가겠죠. 북한과 그 동조세력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기 위해 끝까지 저를 괴롭힐 겁니다. 진실은 크게 중요하지 않겠죠. 왜 이렇게 과거에 계속 묶여 있어야 하나요. 국정원도 사과를 통해 훌훌 털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7년째 인터넷과 전화 사용 못해 PC방서 자료수집
|
2006년 8월 국정원 과거사위가 KAL858기 폭파사건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하는 모습. 과거사위는 조사를 통해 김씨의 존재를 최종 확인했지만, KAL858기 조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 김씨는 ‘KAL858기 진상규명시민대책위원회(대책위)’에서 가장 활발한 의혹 제기를 해온 ‘핵심 4인방’으로 신동진 작가, 서현필 작가, 신성국 신부, 심재환 변호사를 꼽았다. 이들은 소설과 방송 인터뷰 등을 통해 “김현희는 북한 공작원이 아니고, KAL858기는 실종됐다”는 내용의 주장을 수년 동안 해 왔다. 대책위는 “잠적한 김현희를 29만원에 현상수배한다”며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자택 인근에서 집회를 갖고 수배전단을 직접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2007년 국정원 과거사위가 조작이 없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사과를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국정원 과거사위는 재조사 과정에서 김현희씨에 대한 직접 조사를 끊임없이 요구했고, 2006년 7월엔 직접 임시 거주지까지 찾아와 남편 정씨에게 “김현희를 조사하러 왔으니 응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정씨는 “‘KAL858기 사건 수사는 한 점 부끄러움 없다’고 말한 국정원을 향해 ‘그러면 99점의 부끄러움이 있다’며 비아냥댄 사람을 조사관으로 채용한 국정원은 정말 자존심도 없느냐”며 다그쳤다. 이 말을 들은 국정원 직원은 숙연한 표정으로 돌아섰다고 한다. ―2008년 공개된 편지를 보면, 좌파단체의 인터넷을 통한 공격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반박했습니다. 폭파사건 당시 상황은 본인의 기억과 자료가 있겠지만, 그 이후의 내용은 자료 조사가 필요했을 텐데요. 인터넷과 전화가 없는데다 활동까지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편지를 작성한 겁니까. “그동안 관련 내용이 신문에 나오면 오려서 차곡차곡 모아뒀습니다. 그게 일단 유용하게 쓰였고, 나머지 컴퓨터나 인터넷이 필요한 부분은 남편이 혼자 PC방에 가서 수집을 했죠.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열악한 환경에서 머리를 부딪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황장엽 암살 시도 사건 후 경호인력 증강
|
납북된 다구치 야에코 씨의 오빠(왼쪽)와 그녀의 아들(가운데)이 2009년 3월 부산 벡스코에서 김현희씨를 만난 후 인사를 나누고 있다. | 김씨가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 건 2004년 망명 권유 사건 때문이다. MBC가 집 앞에 들이닥친 후 집에서 나온 김씨는 어느 날 휴대전화 음성 메시지함에서 수상한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NHK 기자라고 밝힌 목소리의 주인공은 “신변상 안전과 모든 여건을 보장하겠으니 일본으로 망명하라”란 내용을 녹음해 음성으로 남겼고, 이를 수상하게 여긴 남편 정씨는 내용을 다른 곳에 녹음해 뒀다. 정씨의 설명이다. “저 외엔 아무도 모르는 전화번호로 음성 메시지를 남긴 겁니다. 저희 정보를 알아내려는 역공작이란 느낌이 확 왔어요. 4년 후인 2008년에 NHK에 접촉해 기자의 존재는 확인했는데, 어떻게 음성 메시지를 남겼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수상한 일은 계속 일어났다. 2003년 어느 날 아침, 김씨가 사는 아파트에 우유가 하나 배달됐다. 판촉용이었다면 연락처나 신청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내용 없이 우유만 덩그러니 문 앞에 있었다. 얼마 후 우유는 사라졌고, 남편 정씨는 아파트 소독을 하는 아주머니에게 “아파트에 이런 우유가 배달된 적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이틀 동안 아파트 전체를 소독했는데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집에서 쫓기다시피 나오고선 경찰 담당 계장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이젠 신문도 함부로 펼쳐보지 말고 우유도 함부로 먹지 말라”고 했다. 지난 4월 ‘황장엽(黃長燁) 암살조’ 검거 이후, 경찰은 황씨에 대한 경호를 최고 단계로 격상했다. 전담팀 인원보강과 함께 24시간 근접경호가 강화된 가운데, 지난 5월 작계5027 등 군사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붙잡힌 ‘흑금성’ 박채서씨도 황장엽 소재파악 임무를 맡은 것으로 최근 수사 결과 밝혀졌다. 이로 인해 김현희씨에 대한 경호도 강화돼 3개조로 운영되던 경호 인원이 대폭 증강됐다고 한다. ―최근 새로운 신변 위협은 없었습니까. “직접적으론 없었습니다. 그런데 경찰 측에선 신경이 많이 쓰이나 봐요. (황장엽 암살조 사건 때) 서울과 지방청에서 사람이 몇 번 왔다 가고 했어요. 북한 내부의 주민들 동요가 심한가 봅니다. 두려워하는 거죠. 두렵기 때문에 암살까지 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어요. 북한이 만약 저를 암살한다면, 그 자체로 저의 정체와 자신(김정일)의 범행을 인정하는 셈이 되는 것 아닙니까. 또 저는 독약 앰풀을 깨뜨렸을 때 이미 한 번 죽은 몸입니다. 암살 위협은 두렵지 않아요.” ―최근 잇따라 간첩이 검거되고 있는데요. “그동안 너무 해이해져 있었죠. 장군에 의해 군사기밀이 막 넘어가고, 안보가 엉망 아니었습니까. 나라가 무슨 이 꼴입니까. 요즘 국정원이나 정부기관이 안보의 중요성을 깨닫고 본연의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는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도 많고, 곳곳에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활동하는 이들도 많다고 봅니다. 확실한 안보의식과 국가관을 가지고 대처해야겠죠.” 국정원 신입 교육에서 직접 강연 ―그들을 통해 입수한 작계5027 내용은 북한에서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 정보입니까. “북한 공작원 입장에서 군사기밀은 정말 최고급 정보입니다. 저는 공작훈련을 받을 당시 주로 일본 침투를 목적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일단 가장 중요한 정보는 남한의 정보, 그중에서도 군사정보라고 배웠습니다. 저를 담당했던 사람들도 항상 얘기했어요. 남한의 군사정보 하나만 가져오면 최고라고. 저희 국제 파트도 그 정도인데, 다른 파트는 오죽하겠습니까. 제가 배운 대남공작원의 임무는 간단합니다. 남한 내 정보, 특히 군사정보를 수집하고, 동조세력을 포섭해 남한을 와해시켜 갈등을 불러일으키라고 교육받았어요.” ―공작원 훈련을 받던 당시, 잠수함 공격에 대해 듣거나 목격한 것이 있습니까. “분야가 달랐기 때문에, 따로 들은 건 없습니다. 다만 침투를 위해 필요하다는 건 알았어요. 일본 담당인 제가 만약 위조 여권 등을 이용해 ‘합법적’ 루트로 침투할 경우엔 큰 상관이 없지만, ‘반(反)합법적’ 방법으로 들어갈 땐 잠수정이나 배를 타고 근해까지 접근해 수영을 해서 침투한다고 교육받았습니다. 또 이를 대비해 바다에서 1km 정도를 한 번에 가는 기본 수영 훈련을 받았어요. 물론 임무가 떨어졌다면 고강도의 특수 훈련을 받았겠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김씨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긴 대화를 이어나갔다. 식탁 위에 차려졌던 과일 접시는 이미 비워진 지 오래였다. 바로 옆 TV에선 나로호 2차 발사가 소방설비 문제로 인해 다음 날로 연기됐다는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인공위성 하나 만들지 못했던 나라가 한국 발사체에 도전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김씨 주변의 환경은 크게 바뀌지 않은 듯했다. 김씨는 지난 4월 말 국정원 신입직원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결혼 후 12년 만에 첫 강연이었다. ―12년 만에 해 보니 예전과 어떻게 다르던가요. “오랜만에 해서 긴장도 되고, 감회도 새로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강의를 들은 국정원 직원들을 보니 KAL858기 사건 당시 2~3세 정도라 전혀 이 사건에 대해 모르더라고요. 한 번은 해야겠다는 의무감도 있었고, 마침 교육 차원에서 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와서 예전 훈련과정과 사건에 대해 두서없이 얘기하고 왔습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KAL858기 폭파사건뿐 아니라 6·25전쟁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고 합니다. 북한에선 6·25전쟁에 대해 어떤 교육을 받았습니까. “이곳보단 훨씬 더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교육 방식 자체가 달라요. 어려서부터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 대부분이 전쟁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은 무슨 고지 전투, 내일은 또 무슨 고지 전투라 해서 교과서를 가득 채우고 있죠. 예를 들어 ‘1211 고지 전투에 대하여’ 이런 주제가 국어교과서에 나온다고 보시면 됩니다. 또 곳곳에 전쟁기념관을 크게 지어놨고, 황해도 신천에 박물관이 있는데 1년에 한 번은 꼭 찾아갑니다. 미군이 양민을 무참히 학살하는 장면을 전시해 놓은 것을 남한 학생들이 수학여행 가듯이 단체로 가서 봅니다. 해마다 6월 25일이 되면 궐기모임도 하고, 미군규탄대회와 토론회도 합니다. 미군, 일제, 남조선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일상이 됐죠.” “김정일이나 김일성이나…” ―당연히 북침이라고 교육받았겠죠. “북침을 받았는데 김일성이 잘 지휘해서 해방전쟁을 이끌었다고 배웁니다. 그런데 남한에 와서 안기부 사람들이 북침이 아니라 남침이라고 해 큰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다시 돌이켜보니, 어릴 적 수업을 들을 때 ‘미군이 주말에 파티를 하고 새벽에 침공을 했다’란 이야기를 들었는데 조금 이상하단 느낌이 든 적이 있었어요. 공격을 하려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데, 파티를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죠. 그런데 그런 걸 느껴서도 안 되는 곳이 북한이니까 그냥 넘어가 버렸습니다.” ―국정원 신입직원뿐 아니라 한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안보의식과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저희가 지금까지 이렇게 투쟁하는 이유는 이 나라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안보는 누가 거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주고 사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자신과 가족, 그리고 나라는 스스로 지켜야 해요. 이번처럼 한 번 당한다고 그때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정신무장을 단단히 해야 합니다. 북한은 주민이 굶어 죽는 상황에서도 의식교육을 철저하게 합니다. 물론 그게 옳은 방법은 아니지만, 적어도 북한에 대한 대비는 철저하게 해야겠죠. 그리고 이 나라가 얼마나 위대한지, 또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많이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한 6월 9일은 북한의 박남기 노동당 재정부장과 김태영 노동당 재정부부장이 지난 3월 함께 공개처형을 당했음이 언론을 통해 확인된 날이었다. 마침 신문 1면에 난 총살 기사를 본 김씨는 “요즘은 탈북자들이 전하는 소식이 참 빠르고 정확해진 것 같다”고 했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간부 비리 척결을 위한 대대적인 감찰이 시작돼 간부들 사이에서 ‘김일성 붐’이 일고 있고, 김정일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워낙 오래전부터 진행돼 ‘신(神)’ 같은 존재로 돼 있잖아요. 그에 반해 김정일은 젊어서부터 고생 모르고 자란 데다 지금 상황이 안 좋으니까 많이 흔들리나 봅니다.” ―탈북자 중에도 김정일에 대한 반감은 큰 데 반해 김일성에 대한 향수는 남아 있는 이들이 종종 있던데요. 김일성에 대한 개인적 평가를 한다면 어떻습니까. “다 똑같죠 뭐…. 김정일이나, 김일성이나.” 日 정권교체로 訪日 계획 연기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김일성 원수님 고맙습니다’를 외쳤고, 김일성 초상화 앞에선 저절로 고개를 숙였던 고급 출신성분의 북한 공작원은 이제 김정일과 김일성에 대해 따로 언급하기조차 귀찮고 싫어하는 사람이 됐다. 북한에서 받았던 공작원 교육이 한국에 와서 전향한 뒤 대한민국을 위한 충성심으로 변했다는 말이 더욱 설득력 있어 보였다. ―지난 주말 신문에서 김정남이 등장한 인터뷰 기사는 봤습니까. “신문으론 못 보고 TV에 나온 것만 봤습니다.” 지난 6월 6일, <중앙선데이>는 마카오에 체류 중인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을 만나 잠깐 인터뷰했고, 3일 뒤엔 김정철과 김정은의 새로운 사진이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예전 북한에 있을 때 김정남이나 정철, 정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땐 전혀 못 들어봤어요. 김정일의 아들이 몇 명인지도 몰랐고요. 다만 누가 무용배우와 결혼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한창 간부들 사이에서 젊은 아들들이 무용배우와 결혼을 하려는 붐이 일었습니다. 한때 유행처럼 지나갔죠.” 지난 4월 말 한국을 방문해 정부 관계자와 김현희씨 방일(訪日) 문제를 협의할 것으로 알려졌던 나카이 히로시(中井洽) 공안위원장 겸 납치문제담당상은 ‘황장엽 암살조’ 등 북한 간첩의 위협과 천안함 사태 등으로 인해 한국 정부가 김씨의 방일에 대해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유력하게 제기돼 온 ‘5월 중 방일설’이 일단 유보된 것이다. 김씨는 지난해 11월 20일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와의 인터뷰에서 “납북된 요코다(橫田) 메구미를 북한에서 만났다”고 했고, 이후 일본 측은 메구미 가족과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양국 정부, 한국 국정원, 일본 경시청이 김씨의 23년 전 위조여권 사건, 방일 일시, 일본 현지 경호 방식 등을 두고 막후 협상을 진행했다. 그리고 지난 6월 8일 간 나오토(菅直人) 새 내각이 출범했고, 김씨 측과 국내 담당자들은 새 내각의 대한(對韓)·대북(對北)정책과 납북자 문제에 관한 입장을 유의 깊게 지켜보는 상황이다. “탈북자가 대한민국을 지킨다”
|
북한에 납치된 요코다 메구미(왼쪽)와 다구치 야에코 씨. 김현희씨는 “메구미와 다구치는 분명히 살아 있다”고 확신했다. | ―한일(韓日) 양국의 납북자 문제를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납북자 문제는 인권 문제입니다. 일본인 납북자 수는 한국에 비하면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수준인데도 저렇게 정성을 들이고 있죠. 온 정부와 국민이 나서서 끝까지 구해내려고 합니다.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국민 2명을 구하기 위해 직접 북한까지 갔잖아요. 이런 두 국가의 태도에서 진정한 선진국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메구미와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가 살아 있다고 믿습니까. “예. 살아 있습니다. 북한은 비밀이 탄로 나 공개되는 게 두려워 무조건 죽었다고 하는 겁니다. 저는 지금도 두 명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어요.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죠.” 김씨는 “살아 있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지금까지 내외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살아 있다고 믿는다”고 추정했던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살아 있다고 확정의 표현을 한 것이다. 일본 정부 측과의 대화를 통해 어떠한 정보를 입수해서인지, 개인적 신념인지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2명의 생존에 대해 확신에 차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2009년 3월 벡스코 행사(다구치 야에코 가족과의 공개 만남 회견) 이후 알아보는 이들이 많이 늘었습니까. “그때만 잠깐 그랬죠. 행사 직후 가게에 갔더니 ‘(김현희와) 많이 닮았다는 소리 듣죠?’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지금은 그마저도 없어요. ‘다행히도’ 대부분 못 알아봅니다. 한국사람은 정말 잘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KAL858기 사건도 그렇고, 천안함 사건도 그렇고. 사건이 벌어지면 들썩댔다가, 조금만 지나면 금방 망각해 버리니…. 북한은 한 번 당하면 반드시 기억하고 복수하는데, 우리는 다 잊어버리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그 귀한 아들들이 희생됐는데.” ―지금 초등학생인 아들이 커서 군대 갈 때가 되면 보낼 건가요. “예. 당연히 가야죠.” ―최근 탈북자들의 정계 입문이 늘고 있는데, 정치를 시작할 계획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정치는 쇼맨십도 있어야 하고, 남다른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데, 제가 자격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사면도 받았고 세월이 지났지만, 제가 KAL858기를 폭파한 범인이란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할 영역은 아닌 것 같아요.” ―이 혼란한 정국에 대한민국을 지키는 진정한 국민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북에서 내려온 분들이 이 나라를 지킨다고 생각합니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최근 북한에 대해 강경한 목소리를 내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분들을 보면 탈북 또는 월남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공산주의 제국을 실제 겪어 그 현실이 어떻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지 더욱 잘 알거든요. 그 절박함을 알기 때문에 더 열심히 지키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타이타닉>
|
사면 후 여의도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김현희씨. 김씨는 최근 집 근처 작은 교회에 다시 나가고 있다고 한다. | 초등학교에 다니는 김씨의 자녀는 지금도 어머니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 4학년인 아들은 지난해 조갑제(趙甲濟) 전(前) <월간조선> 대표가 쓴 <김현희의 전쟁>이란 책의 뒤표지와 사진을 보고 “엄마 옛날 이름이 김현희였어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김씨가 아니라고 하니까 무뚝뚝한 아들은 “에이”라며 그냥 넘어갔단다. ―지금도 아이들 학교엔 가보지 못했습니까. 학부모를 부르는 행사 땐 어떡하나요. “아직 전혀 못 가봤어요. 학부모 모임이 있긴 있는데, 다행히 모든 부모님이 오진 않더라고요. 바쁜 분들도 있어서 저도 그렇게 얘기하고 안 갑니다.” ―영화는 한 번씩 봅니까.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가요. “안 본 지 오래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게 <타이타닉>이에요. 남편과 같이 가서 봤어요. 영화 안 본 지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TV 프로그램 중에선 즐겨 보는 게 있습니까. “뉴스를 주로 봅니다. 9시 뉴스는 빼놓지 않고 봐요. NHK 방송도 한 번씩 보고요. 신문은 매일 아침 남편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준 후 돌아오는 길에 한 부 사옵니다. 신변 안전의 문제가 있어 구독은 못 하고 있지만, 매일 정독(精讀)하고 있어요.” ―최근 본 책 중에 기억에 남는 책이 있습니까. “얼마 전 NHK 기자가 선물로 준 책인데, 일본어로 ‘지금 내가’란 말이 제목에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중년의 여성이 나이 들어가면서 편안하게 쓴 책입니다. 이런 책이 공감되는 걸 보니 저도 이제 확실히 중년인가 봐요.” 김씨는 1991년 출간한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란 고백록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으면서 등장인물인 라스콜리느코프에 이입돼 잘못된 이성과 양심의 소리 사이에서 방황하고 괴로워했다고 했다. 책을 덮은 후엔 ‘내가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을 읽을 땐 소설 속 세상과 북한의 현실이 너무나 절묘해 충격을 받았다. 책 한 권을 볼 때도 갈등 속에서 고뇌해야 했던 그가 세월이 흘러 ‘편안하게 쓴 책’을 보고 있다고 하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느껴졌다.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며 다시 책을 쓸 생각은 없습니까. “지난번에 책 썼다가 얼마나 많은 공격을 당했습니까. 호미로 긁듯이 ‘여기가 어떻고, 저기가 어떻고’ 하면서 의혹을 제기하는데, ‘괜히 썼다’란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지금 책을 썼다가 또 공격당할 것을 생각하면….” ―남한에서 자신을 가장 괴롭힌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걸 어떻게 말하겠어요. 누구라고 공개는 못하지만, 분명 있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증거를 죽여서 인멸시키려 한 사람들, 정말 저를 많이 괴롭혔죠.” 교회만 가면 눈물부터 나
|
지난 6월 9일 지방의 한 공원에서 김현희씨가 〈월간조선〉 김성동 기자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그럼 남편을 제외하고 가장 도움을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고마운 사람도 많이 있지만, 일단 신앙의 힘이 컸습니다. 재판을 받으면서 힘들 때 큰 도움이 됐어요. 한 10년 동안 열심히 교회에 나갔습니다. 결혼하고 나선 환경이 많이 바뀌어서 자주 가지 못했지만, 요즘도 어려우면 무릎 꿇고 기도부터 하게 됩니다.” ―지난해 인터뷰 땐 교회에 나가기 어려워 집에서 기독교TV를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고 했는데, 요즘도 그런가요. “동네에 작은 교회가 있어 매주는 못 가도 가끔 나갑니다.” ―교회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나요. “편하기보단 눈물이 납니다.” 그는 지금도 교회 의자에 앉으면 눈물부터 흘린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가족이 떠오르고, 북한 어디엔가 있을 납북 일본인 메구미와 야에코가 생각난다고 한다. 미안함과 서러움, 그리고 감사함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감정을 추스를 수 없어 힘들지만, 속죄(贖罪)의 감사함은 다시 그의 가슴을 평온케 한다고 한다. ―좌파정권 시절 한창 힘들 때, 다시 북한에서 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습니까. “글쎄요. 지난번에 한 북한 전문 기자를 만났는데 ‘예전에 북한을 해롭게 했던 사람은 전 정권 때 다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저같이 공개된 사람도 있었고,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도 있었나 봐요. 하나하나 찾아 흔들어대서 결국 떨어진 사람도 있고, 저같이 아직 안 떨어진 사람도 있고 그런가 봅니다. 그래도 아직 북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었습니다. 제가 지금 이곳에서 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죠.” 그의 긴 피난 시절은 누가 보상해야 할까. KAL858기를 폭파해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킨 대가일까. 아니면 그의 운명이 이미 순탄하지 못한 인생에 묶여 있을까. 이동복(李東馥) 북한민주화포럼 대표는 지난해 4월 김씨와 함께한 자리에서 “이 시대가 보상하고, 역사가 보상해야 한다”며 “보상이란 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 행복추구권을 향유하는 지극히 정상인의 생활을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김씨의 남편 정씨는 “상대방에서 자꾸 우리가 돈을 바라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것처럼 회유하는데, 우리는 좌파들의 선전선동을 막고 조국의 안전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라며 “그 외엔 더 바랄 게 없다”고 선을 그었다.⊙ <정리=김정우 月刊朝鮮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