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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을 주산으로 삼고 낙산과 인왕산을 左靑龍 · 右白虎삼은 임좌병향(壬坐丙向)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左靑龍 · 右白虎삼는 유좌묘향(酉坐卯向)
1994년 11월 29일자 관련 개성=> 서울지역 수도를 옮긴지 60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1394년09월27일(음력08월24일)도평의사사 상신(上申)따라 한양을 수도로 정하였고,
1394년 11월 29일 (음력 10월 28일)한양에 입성하였습니다.
※1394.09.09-景福宮궁궐터· 주산[북악산]결정 => 1394.11.29-한양 입성 => 대략10개월간 景福宮 착공· 완공
※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 고려말기· 후기 국가 최고 행정· 정무기관 ~ 조선초기 국정 최고 의결 기관.
건국 초기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존속되었던 것으로, 1400(정종 2)년에 의정부(議政府)로 개편되었다.
※ 상신(上申) : 윗사람이나 상급 기관에 어떤 일에 대한 의견이나 사정을 말이나 글로 보고함.
명나라 제후국· 천명기간 기반=>[삼봉]정도전x=자금성 방향식 제왕·북좌남향>
[계월헌]무학대사 박자초님=서좌동향=>양력1394.11.29(음력10.28)X_X
--- 조선왕조 통치기반·근본된 반면 왕조전반역사 망가트리고 무너트린 중국=명나라식(明朝,1368년 건국~1644년 폐국:중국 역대 왕조 가운데 하나로 주원장:朱元璋
원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한족 왕조이다.
정규국호 대명(大明)이며, 모두16명의 황제가 있었고 277년간 존속했다.)유교론
통치이념·유교론 왕도정치 ---
1392.07.17-조선개국 & 건국/태조 이성계 초대즉위
1394.11.27-(음력10.26)고려수도=개경(개성)떠남
1394.11.29-(음력10.28)-한양 천도·도착·입성
1395.10-경복궁 완공=>제왕-북좌남면=주산:북악산 & 좌청룡:낙산 & 우백호:인왕산etc,
한양 천도 시점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산과 남산을 左靑龍 · 右白虎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도전‘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렸고, 동향=동면(東面)하였다는 말은 단1차례 듣지 못하였다.’라고 하며 극력반대,무학대사의 주장이 최종좌절 관련 근원차원-불행씨앗였어요
세상천하 최고군왕-군주가 현군 연존체제 출현하여 다스리는 만민 위한 태평천하:태평성대 구가시킬 수 있었을텐데 정도전 같은 막무가내식-논리란 무슨류- 독단·독불장군식-억지속할까요?
시끌벅적 ,어수선함,정치혼돈,정치혼란,불협잡음,불협화음,극성스럼 비해 < 태평천하=태평성대 그리고 편안,평온,평탄정국 기댐 및 바램 할 수 없는 시발점 관련 조선 개국·건국초기:1394.11.29(음력10.28)전후 현재세대까지 625년-대략21세대 가까이 연존해온 불가피 +불가항체제예요...
대륙국-중국 군사침략 견제하고 동해국-일본 군사침략 관련 강력 막아냄 뛰어넘고,
풍수지리·풍수도참설 기반 서좌동면=서좌동향=태평성대·태평천하·현군왕-연존역사·체제 선택 배척·외면, < 중국 명나라=자금성 방향식 전통풍조 기반-제왕·북좌남면=북좌남향=불행·불화·불협화음 역사·체제 자초하여 만신창이 역사·체제 전락·타락한 조선왕조~현대역사
중국=명나라식 골수-유교론 기반/입각=중시자'三峯'鄭道傳(1342년 출생~1398년 이방원 수하세력 의해'간신질 & 왕가음해죄'의한 경복궁내 피살)
*그의 호 삼봉(三峯)은 따온 것이 아니라 삼각산의 세 봉우리 아래 집을 짓고 살았던 정도전을 그의 동료들이 삼봉이라 칭한 데에서 비롯됐다”
개국 & 건국1등공신 & 혁명실세 '삼봉'정도전의 임좌병향(壬坐丙向)
=>남산이 높은반면, 낙산이 매우 낮고 허한만큼 최고군왕:군주 항상 불안하며, 左靑龍, 右白虎인 낙산과 인왕산의 높이가 불균형하여 항상 불신· 불안정된 정국 & 형국이다.
< 하늘에서 바라본 정도전의 북악산-주산론, 낙산이 매우 낮음 >
풍수지리학 & 풍수도참설 중시자 고승-무학/계월헌(本名:박자초 1327년 출생~1405년 금강산 금장암 영면)
이태조 王師'계월헌'무학대사가 주장했던 유좌묘향(酉坐卯向)
=>주산(主山)인 인왕산(仁王山; 338m)이 후덕하고 수려하여, 정치수완 순탄· 출중급-훌륭한 후덕현군들 대부분이고,
左靑龍 & 右白虎인 북악산과 남산의 좌우 높이·균형이 일치하다.
조선왕조 개국 & 건국초기1392년 07월 17일!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조선왕조를 건국하여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초대즉위했습니다.
정도전은 개국 & 건국공신 가운데 제1인자로서 황산대첩[고려말1380년(우왕 즉위6년) 9월에 이성계(李成桂)등이 황산(現전북 남원시 근처)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승리한 전투]승리이끈
이성계를 찾아가 인연맺어 조선건국 이후 문관직은 물론 무관직도 함께 겸임하며 막강한 2인자 자리를 굳혔습니다.
그러니까,조선건국 얼굴이란 태조-이성계,조선건국 두뇌란 삼봉-정도전이라 가히 일컬을 수 있습니다.
억불 정책(抑佛政策)또는 배불 정책(排佛政策)혹은 숭유배불정책(崇儒排佛政策)=배불숭유정책(排佛崇儒政策)이란 조선왕조(1392년~1897년/대한제국:1897년~1910년)가 500년 넘는기간
불교를 탄압한 대불교 탄압정책으로서 고려말기 및 조선 초기에 정도전이 집필저서《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하여 억불론을 주장했고 조선 건국 초기에는 무학대사가 조선의 수도를 정하는 데 공헌하는 등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숭불정책이 유지되었는 반면 태종 이방원이 정권을 잡으면서 억불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어요...
조선 건국 세력이 태종에게 주청하여 대대적인 불교 탄압을 전개하였고,고려말기 불교 세력이 정도전 등 신흥사대부와 역성 혁명에 방해가 되는 문벌 귀족세력과 결탁하여 고려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언제든지 조선 왕조를 위협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정책이었어요.
고려를 멸하고 지존의 자리에 오른 태조 이성계. 천하를 소유한 그에게도 당면한 과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천도(遷道)였다.
개경에 기반을 둔 기존의 집권세력을 견제하고, 정치변화에 둔감한 백성에게 천하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리고, 자신이 세운 조선의 구심점 역할을 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 천도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숙원사업이었다. 짐작상, 태조 개인기준 고려수도:개성에 머무는 건 꺼림칙하고 찜찜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태조의 바램과 달리 천도는 쉽지 않았다. 개성에 권력기반을 둔 대소신료들의 반대가 극심했던 것이다.
태조 : 도읍을 옮길까 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떤가?
신하들 : 중국의 수많은 왕조들도 관중, 변량, 금릉처럼 두서너 곳에다 도읍을 정했습니다. 하물며 우리처럼 작은 나라에서 곳곳에 도읍을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고려가 500년을 유지한 것은 개경이 명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강역에 개경만한 땅이 없으니 천도는 반대이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내용 토대로 작성)
하지만 고집과 뚝심으로 천하를 일군 강골 태조가 쉽게 뜻을 굽힐 리 없었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경들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왕조가 바뀌고 천명을 받는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이다. “후사를 이을 적자(정실의 아들/후계자)가 비록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도읍을 옮기려고 하더라도, 대신들이 옳지 않다고 저지시킨다면, 적자가 어찌 이 일을 하겠는가?”, “내 자신 때에 친히 새 도읍을 정하”겠다!
(태조 3권,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2월 1일(병자) 1번째기사)
태조가 딱 잘라 말하자 대신들도 더 이상 막아서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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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라운드: 충남 계룡산 신도안 vs 한양-한강 이북]
당초 후보는 충남 계룡이었습니다. 현재 3군사령부가 있는 자리입니다. 이성계의 지시로 기초공사까지 벌였지만 9개월만에 중단됐습니다. 분위기를 바꾼 것은 당대 풍수도참(風水圖讖)의 대가로 통했던 개국공신 하륜이었습니다. 그의 반대 논거는 이랬습니다. “도읍은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있고, 수파장생(水破長生)이기 때문에 도읍을 건설하기엔 적당하지 않습니다.”(『태조실록』 2년 12월 11일)
하륜 : 도읍은 마땅히 나라에 중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계룡산은 너무 남쪽에 치우쳐있으니 합당하지 못합니다...계룡산의 땅은 산은 건방(서북쪽)에서 오고 물은 손방(동남쪽)에서 흘러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나라 호순신이 이른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패(衰敗)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태조 4권,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12월 11일(임오) 1번째기사)
수파장생(水破長生), 즉 (금강의) 물이 (나라가)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장생(長生)’의 기를 꺾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신라 말 고승 도선:고려 건국-태조 왕건王師들여온 풍수도참설은 여전히 영향력이 컸습니다.
두미강 어귀에 이르러 서쪽으로 한양의 삼각산(북한산)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하늘을 어루만지며 솟아난 푸른빛은 희미한 남기(嵐氣 : 산의 기운)와 옅은 노을에 밝고 아리따운 모습이 환히 드러났다. 또 남한산성 남문에 앉아서 북으로 한양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물 위에 꽃이 핀 듯 거울 속에 달이 비친 듯하였다. 어떤 사람은 ‘빛과 바람이 허공에 떠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왕기(旺氣 : 왕성한 기운)이다. 왕기는 왕기(王氣)이다. 우리 서울은 억만 년토록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형세를 갖추고 있다. 그 신령스러우면서도 밝은 기운이 여타의 산과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열하일기 上』, 박지원 지음, 고미숙, 길진숙, 김풍기 엮고 옮김, 북드라망 출판사, 63쪽)
연암의 말처럼 서울(조선시대 수도의 공식 명칭은 한양(한성)이었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말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듯하다. 이 글에서도 서울이라고 하겠다)은 억만 년토록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형세를 갖춘 왕기를 품은 땅이다. 하여 역대 왕조에서도 서울을 명당과 길지로 중시했다. 하지만 서울을 명실상부한 수도로 삼은 것은 조선에 이르러서였다. 태조 즉위/집권3년(1394년)08월16일자 태조 이성계의 말 한마디가 이 땅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거리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8월 13일(경진) 1번째 기사)
하륜의 조언으로 1394년 11월 새로운 조선왕조 도읍지 관련 고려수도:개성에서 충남 계룡 아닌 한양-한강 이북으로 돌려졌지만 논쟁은 이어졌습니다.
이번에는 북악산과 안산(鞍山) 중 어느 곳을 주산(主山)으로 삼을 것이냐를 두고 천도 논쟁은 2라운드로 접어들게 됩니다.
[2라운드: 무악=신촌 vs 북악]
▲연세대학 신촌캠퍼스의 모습. 조선의 개국공신 하륜은 지금의 연세대 일대를 조선의 궁궐터로 점찍었다.
하륜의 설득에 계룡산 신도안은 즉각 폐기되고 두 번째 후보지로 무악(지금의 신촌 일대)이 거론된다. 하륜이 힘을 싣는 곳도 바로 무악이었다.
하륜 : 무악의 명당이 비록 좁은 듯 하지마는, 개경의 강안전과 평양의 장락궁으로써 이를 관찰한다면 조금 넓은 편이 될 것입니다. 또한 고려 왕조의 비록(비밀스러운 기록)과 중국에서 통행하는 지리의 법에도 모두 부합합니다. (태조 5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2월 23일(계사) 2번째기사)
줄을 잘못 선 탓에 공신에 반열에 오르지 못한 하륜은 도읍지 선정에 관여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 하여 무악을 힘껏 밀었다.
하지만 정도전이 ‘나는 무악반대’라고 노골반대 걸고 막아선다.
정도전 : 무악은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漕運)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아쉬운 것은 한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안으로는 궁궐과 밖으로 조정과 시장, 종묘와 사직을 세울 만한 자리가 없으니 왕자의 거처로서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8월 12일(기묘) 2번째기사)
무악이 도읍으로 삼기에는 너무 협소하다는 의미. 그러면 정도전이 ‘밀고있는’ 다른 대안이 있었던 것일까?
사실 골수-유교론자 정도전에게는 풍수지리,풍수도참설 어쩌고 명당 저쩌고 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정도전 : 신은 음양술수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말씀에 ‘어릴 때에 배우는 것은 장년이 되어서 행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평일에 배운 바로써 말하겠습니다...이것으로 말하면 국가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기사)
‘지리멸렬한 여러 사람의 의논을 벗어나’ 핵심을 콕 지르는 정도전의 날카로운 언변에 태조와 하륜 모두 당황한다. 정도전은 하륜의 무악신도안을 저지하는 동시에 태조가 천도하려는 행위 자체를 은근히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마음이 통하는 지기(知己) 정도전마저 자신의 뜻을 몰라주다니. 하지만 태조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는다.
태조 : (남경의 옛 궁궐터에서 산세를 살피다가) 여기가 어떠냐?
윤신달 : 우리나라 경내에서는 개성이 제일 좋고 이곳이 다음에 가나 아쉬운 것은 건방(서북쪽)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 뿐입니다.
태조 : (기뻐하면서) 개성인들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거리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8월 13일(경진) 1번째기사)
태조가 산세를 살피다가 결정을 내린 이곳 남경이 바로 지금의 서울이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서울의 빼어난 산세는 사람을 매료시켰다. 그리하여 말많고,탈많던 도읍지 선정 관련 서울로 결정됐다.
“무악은 산과 물이 모여들고 조운(漕運)이 통하지만 터가 좁고 뒷산이 낮아서 도읍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길지라면 옛사람이 어째서 쓰지 않았겠습니까.” (성석린)
“무악이 좁다고 하나 경주나 평양의 궁궐터에 비하면 좁지 않습니다. 나라의 중앙에 있고 조운이 통하며, 산과 강이 균형을 이뤘으니 궁궐터로 적당합니다.” (하륜)
계룡에 이어 두 번째 후보로 떠오른 지역은 무악(母岳), 즉 서대문구 안산 일대였습니다.
조선의 신 수도를 한강 이북으로 되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하륜은 지금의 연세대가 자리잡은 안산 일대를 주목했습니다. 삼각산-인왕산-안산으로 이어지는 산세의 흐름이 좋고,
한강과 인접해 조운(漕運)에 유용하고 중국과의 무역에도 유리해 상업적 활용도가 높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왕의 스승으로 불리던 고승-무학대사(本名:박자초)와 성석린 등 관료들이 반대했습니다. 안산 일대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약하고 도성으로서 부지도 좁다는 이유였습니다.
논쟁만 길어지자 이성계는 답답했는지 음양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까지 만들었습니다(태조 3년 7월).
요즘 말로 풀이하자면 ‘新수도 선정을 위한 풍수지리 TF’ 정도로 불릴만한 국왕 직속 임시기구입니다.
풍수도참에 대한 해석이 저마다 다르니 여기서 끝장토론을 하라는 의미였죠.
이런 과정을 통해 새 도읍이 들어설 곳은 안산이 아닌 북악산 인근으로 결정됐습니다.
야사에 의하면 당시 이성계는 정도전, 무학대사 그리고 서운관(書雲觀)들을 데리고 무악산에 올랐는데 한 서운관이 “무악은 나라를 도적질 할 사람이 사는 기운을 가진 땅”이라고 평가절하했고,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무악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고도 합니다.
[3라운드: 인왕 vs 북악]
1394년(태조 즉위3년)09월 09일,태조는 정도전으로 하여금 서울에 종묘사직, 궁궐과 시장의 터를 정하게 했다. 태조는 정도전에게 조선의 심장을 설계하는 영광을 주었다. 아니 그만한 그릇이 정도전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정도전 개인기준/입장에서)‘승려’1명 나서며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였다.
무학대사 : (풍수를 따져봤을 때) 서산(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백악산(북악산)을 좌청룡으로 하고, 목멱산(남산)을 우백호로 하여 궁궐을 동쪽을 향하도록 짓는 게 좋겠습니다.
정도전 : 그 무슨 궤변이오! 옛날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고 정치를 하고 천하를 다스렸소! 동향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소!
무학대사는 태조의 왕사(왕의 스승)로 풍수도참설 관련 능숙했다고 한다.
그는 정도전에게 풍수적인 이유를 들어 궁궐을 동향으로 하자는 파격제안을 한다. 하지만 정도전은 무학대사의 말을 가당치도 않다고 여겼다.
세상에 어떤 제왕이 동면(東面)을 한단 말인가! 그는 무학대사의 풍수학적 조언을 무시하고 제왕은 남면(南面)해야 한다는 유교적 가르침을 고수했다.
그 결과 경복궁은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북쪽의 북악산을 뒤로하고 남향으로 지어졌다.
한데 이 사건을 단순히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개인적인 대결로만 간주· 인식해서는 안 된다.
좀더 주의 깊게 보면 기존의 불교적·풍수학적 신비주의에서 새로운 지배 이념인 유교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하는 대사건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이념인 척불숭유(斥佛崇儒: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한다)가 ‘최초’로 ‘선명’하게 드러난 사건이랄까.
궁궐터 관련 무학의 추천지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결국 북악산 일대에 도읍을 정하기로 했지만 이번에는 궁궐을 짓는 구체위치:건설방향 두고 논쟁이 펼쳐집니다.
조선건국의 설계자 정도전과 이성계 스승 무학대사 간에 의견이 갈렸습니다. 궁궐터의 주산:방향 관련 차이를 나타냈습니다.
현재 서울특별시 물론 그렇지만 1394년 11월 29일 천도 당시 한양-한강 이북 중앙부 둘러싸고 자리잡은 東:낙산-西:서산=인왕산=-南:남산=목멱산-北:백악산=북악산이기 때문입니다.
북악산을 세력·영향권내 속하고 있는 북한산=삼각산=三角山이란 유래는 산의 최고봉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국망봉 높은 세 봉우리가 뿔처럼 높이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특히 국망봉 봉명 관련 일찌기 태조 이성계가 1394년 11월 말,한양-한강 이북 천도무렵 王師-무학대사 여기에 올라가 새왕조-도읍 적임지 및 북악산 일대 궁궐터 주산방향을 내려 바라보고
정하여'국망봉'봉명이 생겼다고 한다.
“낙산은 좌청룡으로 삼기에 부족하니, 왕조의 기틀이 흔들릴 것이 우려됩니다. 반드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청룡백호로 삼아야 합니다” (무학대사)
"인왕산(仁王山)아래 궁궐을 낙산을 바라보게 짓는다면 인왕산이 주산이 되고,북악산(北嶽山)용맥이 연결되는 좌청룡(左靑龍)과 오른쪽으로는 남산(南山)연결되는 우백호(右白虎)가
갖춰지게 되므로 새왕조는 그야말로 태평천하(太平天下)를 얻게 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였어요.
정도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인왕산이 아니라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아 자좌(子坐),즉 南向으로 궁궐터를 잡아 앉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왕이 남쪽을 바라봐야지, 어찌 동쪽을 보고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중국의 모든 황제들이 궁을 모두 남향으로 지은 데는 이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정도전)
태조 이성계 스승격-高僧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산을 좌청룡, 목멱산(지금의 남산)을 우백호로 궁궐을 동향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아야 인왕산(우백호)과 낙산(좌청룡)이 좌우를 호위할 수 있어 도읍을 삼기에 안정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당시'개국 & 건국실세'정도전은 새궁궐터 적임지 관련 북악산 자락을 구태여 고집한 반면 무학대사 시각상에는 인왕산 자락이 새궁터의 최적임지였다.
태조 이성계 스승격-高僧무학대사는 남쪽의 관악산에서 화기(火氣:불기운)가 많은만큼 궁궐을 앉힐때 인왕산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궁궐을 앉혀 지어야 한다고 강력주장한 반면,
당시'개국 & 건국실세'정도전은 동양 대국 중국의 궁궐이 남쪽을 향하고 북악산 관련 주산 삼아야 인왕산(우백호)과 낙산(좌청룡)을 좌우에 거느리고 호위할 수 있는데 뭐 때문에
동쪽을 향해 궁궐을 앉혀 지어야 하느냐며 민감,예리하게 맞섰어요.
그야말로 왕조 건국=개국1등공신 & 실세 의지를 막을 철인:鐵人이란 1인자:태조-이성계외 없었다.
조선왕조 군주들은 북좌남면=제왕남향 원칙화됐다. 조선대표 법궁 경복궁,그리고 창덕궁을 보면 쉬운 납득· 이해된다.
그 무렵· 시절,명나라 사대주의 빠져있어 사실상 제후국임을 천명한 이성계는 중국 주나라 주공 저술[주례고공기]기반하여 정도전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무엇보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해야 궁궐을 남향(南向)으로 배치할 수 있다. 임금은 남쪽을 바라봐야 한다”는 정도전의 명분에 힘이 실렸습니다.
무학대사의 말대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는다면 궁궐은 동쪽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대국-중국 명나라 대표격 자금성 관련 중국 베이징 위치"자금성"은 중국의 천문학에 따라 북극성(천제)을 황제에 비유하고, 지상에 "자미원(紫微垣)"을 재현하며 세계의 중심을 지상에 재현한 영역이며,천제를 대신해 지상을 다스리는 황제가 사는 궁전으로 건설되었다. 이런 사실 때문에 "천자는 남쪽에 면한다"는 말대로 북쪽에 황제의 궁전이 놓여있다.
자금성의 유래는 천제(창조주)가 살고있는 별이 되는 북극성을 자미성(紫微星), 북극성 주변을 도는 별자리 근처를 자미원 이라고 부른 것에 유래하는 "자궁(紫宮)"과 "천제의 명을 받아 세계 질서의 유지에 대한 책임을 가진 황제(천자)가 거주하는 "금성(禁城, 서민이 자유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성)"의 두 단어를 합쳐서 자금성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궁극 재표현시!'개국 & 건국실세'정도전 경우-동양 대국 중국식 전통풍조 관련 중요시 했던 반면,
태조 이성계 스승격-高僧무학대사 경우,땅의 기운흐름 관련 풍수지리학 & 풍수도참설 중요시 했던 것입니다.
역사관련 가정이란 없어도 무학대사가 순간 놓치지 않고"대군주전하께서는 소인을 스승으로 생각하며 대하지 않으셨습니까,반드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청룡백호로 삼아 새로 앉힐 궁궐터를 동향 바라보도록 한다면 새왕조는 그야말로 태평천하(太平天下)를 얻게 되는 것이고 조선 비해 대국인 중국 역대 황제/제왕들을 한결 뛰어넘는 동방위치 현군왕조-국가체제 자리매김하여 동방으로 연존 뻗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귀기울여 주십시요!"말을 덧붙였다면 약하지 않은 이성계 내면 심리변화 일도록 함으로 단언/장담까진 아니어도 이성계가 무학대사 손 들어 줬거나 무학대사가 이성계 의한 정도전 견해 꺽어 누르는 사태 발생 일말 가능성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북악산 주산론’에도 약점은 있었습니다. 우백호인 인왕산에 비해 좌청룡인 낙산(현재 동숭동 일대)의 산세가 너무 약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2년 전 서울시는 ‘2025 도시환경정비기본계획’을 발표하며 사대문 안에 높이 90m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 없도록 했습니다. 높이 제한을 90m로 결정한 이유가 바로 낙산의 높이였습니다.
서울시 관계자는 “한양도성을 둘러싼 내사산(북악산ㆍ인왕산ㆍ낙산ㆍ남산) 중 낙산이 가장 낮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낙산과 좌청룡ㆍ우백호의 짝을 이루는 인왕산은 해발 332m에 달합니다.
우백호의 기운이 좌청룡보다 강하면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좌청룡이 약하면 장자(長子), 정통 계승자가 약해진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문인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도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개성은 산과 골짜기로 둘러싸여 막힌 형세라 권신들의 발호가 많았던 반면 한양은 북서쪽 우백호가 높고 남동쪽 좌청룡이 낮아 맏아들인 장자가 잘 되지 못하고 차남 이하 아들이 잘되어
오늘날까지 임금과 재상, 거경(巨卿. 높은 벼슬아치)은 장남 아닌 사람이 많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결정한 정도전도 이 문제가 영 찜찜했던 모양일까, 한 가지 안전장치를 달았습니다.
바로 낙산이 위치한 흥인문(興仁門ㆍ동대문)의 현판에 ‘지(之)’를 하나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갈 지(之)‘자는 산의 모양과 비슷합니다.
이것을 추가해 낙산의 약한 기운을 보충하려고 한 것이죠.
東:낙산-西:인왕산-南:남산=목멱산-北:북악산 가운데 景福宮-着工時,인왕산이 주산 되었다면 좌청룡-북악산 & 우백호-남산을 양 옆에 거느린 宮闕-景福宮관련 자연스레 동향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고 관악산이 내뿜는 불기운도 막아냈을 것이며 후일,대원군이 광화문 앞 '해태'석상이란 방화막을 세월을 만큼 관악산의 화기:火氣는 드세다.
한양천도, 그 중에서도 북악에 대한 이성계의 의지를 읽었고 그 짝사랑을 기필코 성사시킬 위인이라는 것을 정도전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결전에 사용할 힘을 비축하기 위해 하륜(河倫)이 계룡산에 선발투수로 나설 때는 침묵했고, 무학에 구원투수로 나서는 유한우는 방치했다. 서운관 관리 주제에 무악산에서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성계에게 무엄하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유한우의 징계문제가 거론되었으나 진화작업에 나선 것도 정도전이다.
무학대사 역시 계획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록 승려이긴 하나 도참설(圖讖設)로 당대의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풍수지리에 통달한 대가(大家)였다. 한양에 마음을 두고 있는 이성계의 의중을 파악한 무학은 언젠가는 결정적인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삼각산 국망봉에 올라 산세를 살펴봤고 왕십리에서 지세를 살피던 중 십리 앞으로 나가라는 도선국사의 현몽을 실현하고자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무학대사의 마음의 중심추는 선바위에 있었다. 신라 천년, 고려 오백년을 이어온 구심점은 불교라고 믿고 있었다. 고려왕조 말, 탐욕에 물든 일부 타락한 승려들에 의하여 불교가 고려 조정에 끼친 패악도 없지 않은데 그래도 불교가 국가의 버팀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살생을 금하는 불타의 가르침이 도성 안에 살아 있어야 서로 죽고 죽이는 살생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호국불교 정신이 도성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고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 위하여 도성 안에 사찰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장삼을 걸치고 평화의 춤을 추고 있는 듯 한 선바위를 도성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 무학의 염원이었고 계책이었다.
정도전의 생각은 달랐다. 불교의 호국정신은 이해하나 탐욕에 눈이 어두운 일부 승려들의 망동은 용서할 수 없는 고려 망국의 원흉으로 손꼽았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서도 보시는커녕 토지세마저 면탈하려는 사찰의 반국가적인 행위는 척결의 대상이었다.
새 왕국 건설이라는 칼을 빼어들었을 때 주자학적 입장에서 척불숭유(斥佛崇儒)정책은 그의 신념이자 건국이념이었다.
따라 나서겠다는 이방원마저 따돌리며 시종 몇 명만을 대동하고 인왕산 능선에 오른 이성계가 입을 열었다.
"산세가 빼어나구려. 그래, 국사(國師)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곳은 사면이 높고 수려하여 중앙이 평평하므로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만 합니다. 일국의 도읍은 천년사직을 기약해야 할 줄 아뢰옵니다.
나라가 천년세세 태평성대를 구가하려면 나라 안의 혼란도 없어야 하겠지만 외침이 없어야 합니다."
나직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삼각산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은 무학대사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바다 건너 왜구로부터 시달리고 있습니다. 동쪽 바다 건너 왜국(倭國)의 발호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인왕을 주산으로 하고 북악을 좌청룡, 목멱(남산)을 우백호 삼아 정전(正殿)을 동향으로 앉혀야 할 것이라 아뢰옵니다."
무학대사의 눈은 예리했지만 두 가지 문제를 간과했다.
첫째가 남해안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이 왕도(王都) 코 앞 강화도까지 출몰하여 조운선을 약탈할 정도로 성장한 왜(倭)를 위협세력으로 보는 것은 현실감각이 있었지만 고려왕국을 속국(屬國)으로 취급하던 원나라(명나라 전임국)즉. 대륙세력을 침략세력으로 인식 않고 당연시하는 길들여진 사대 시각이었다.
둘째는 왜구쯤이야 대단치 않게 보는 이성계의 심중을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역성혁명에 성공하여 새 왕국의 군왕으로 등극하였지만 고려의 청년장교시절 이성계가 백성들로부터 박수를 받게 된 것은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 소탕이었다.
소탕작전을 진두지휘하면서 왜구들의 오합지졸과도 같은 조직력과 그들이 갖고 있던 조악한 무기는 조선의 적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동향(東向)이라...? 기이하군요. 이유를 말씀해 보시오."
북악산과 삼각산을 지긋이 바라보던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되물었다.
"동향으로 된 정전 옥좌에 성상께서 앉아계시면 문무백관들이 성상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게 됩니다. 왜국 역시 성상께 머리를 조아리게 되는 형국이 되는 것 입니다.
용트림하는 왜국의 기세를 꺾으면 천년세세 태평성대를 이룩할 것이오. 그 위세를 잠재우지 못하면 국난에 처하여 나라의 명운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무학대사는 설법하듯 나직했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먼 후일,임진년의 조선침공:1592.04.13~7년간과 국권피탈:1910.08.29~1945.08.15,그리고 오늘날의 군사· 경제강국 급격· 거대성장 -일본을 생각해보면 심사숙고 하도록 이끄는 대목이다.
하지만 아무리 천하의 무학이라도 여기까지 생각했을 것이라는 것은 무리다. 동향을 주장하는 무학의 의중에는 오로지 선바위를 도성 안에 넣어야겠다는 일념이 주목적이었다.
"말을 듣고 보니 대사의 얘기도 일리가 있구려. 그래, 삼봉(정도전)생각은 어떻소?"
"동향이라 함은 천부당만부당 한 말씀이라 아뢰옵니다. 예로부터(중국을 칭함) 황제는 남면하여 신하의 알현을 받고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불변의 원칙입니다. 인왕을 주산으로 하여 궁궐을 동향으로 한다면
제왕과 신하의 질서를 이룰 수 없습니다. 군신간의 위계질서가 깨지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삼봉은 북악을 주산으로 했을 때 어떤 점이 좋다고 생각하시오?
"북악을 주산으로 하고 타락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 삼아 궁궐을 남향으로 앉혔을 때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현재의 자하문고개)에는 국운을 좌지우지 할 명혈(名穴)이 형성됩니다.
이 명혈이 신생국 조선이 나아갈 바라고 아뢰옵니다."
"명혈이라...? 알듯 모를 듯하오, 자세히 설명해 보시오."
"대사께서 왜국을 견제하자고 하시었는데 왜놈들이란 우리가 약해졌을 때 날뛰고 우리가 강해졌을 때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는 경박스럽고 야만스러운 종족입니다. 왜국은 우리의 적수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요동 땅입니다. 광활한 요동 땅은 우리의 영토입니다. 고구려는 요동벌판에서 말 달리며 대륙을 호령했습니다."
정도전의 입에서 요동과 고구려가 튀어나오자 대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일본을 견제하자는 무학대사의 주장은 갑자기 작아 보이기 시작했다. 논리정연하게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는 정도전의 얼굴도 홍조를 띠었지만
잠자코 듣고 있던 이성계와 무학대사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북악산을 바라보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정도전이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대륙민족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땅 대륙에서 기개를 펼치면 섬나라 왜놈은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게 됩니다. 북악과 인왕산 사이에 틈새가 있듯이 대륙에 틈새가 있을 때 우리에겐 호기입니다. 원나라와 명나라에 틈새가 있는 지금 이 때가 우리에게 기회입니다. 명나라는 천하의 한족이라 자처하지만 중원을 변방민족에게 내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의 영토를 조선이 되찾아야 합니다."
정도전의 말은 힘이 있었다. 신념에 꽉 차있었다. 인왕산에 호랑이던가? 호랑이가 정도전이던가? 인왕산 호랑이가 표효하듯이 정도전의 말은 울림이 있었다. 군주로 등극한 이성계에게 뭔가를 용솟음치게 했다.
정도전과 반대편 주장을 펼치던 무학대사 가슴마저 뛰게 하였다. 이로서 이성계의 수용여부와 관계없이 결판이 나버렸다.
첫째로,서울은 백호와 안산(案山)에 비해 청룡이 너무 낮고 허하다. 풍수지리에서 청룡은 남자와 장자(長子)및 지손을 관장하고, 백호는 여자와 차자(次子)등 지손(支孫)을 관장하는데, 조선 왕조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장자보다는 지손들이 훨씬 잘되었으며 여인네(원경황후&명성황후etc)들과 외척(민씨일가etc)의 발호가 드세었다. 또 동쪽이 허(虛) 하다보니 동쪽에 있는 외적(일본-무장왜구)의 침입에 약했다.
둘째로, 황천방(黃泉方)이라고 하는 건방(乾方) 즉,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인 자하문 고개가 푹 꺼져있어 황천풍(荒天風)을 받아 험한 일을 많이 당하고, 서북쪽(중국-무장오랑캐)에 있는 적의 군사침입 관련 속수무책이었다.
셋째로, 좌향(坐向)이다.궁궐의 좌향을 남향으로 하느냐 동향으로 하느냐를 가지고 유학자인 정도전과 승려 무학대사는 의견을 달리 했는데 왕은 남향을 하여야 한다는 정도전의 말에 따라 서울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을 하였다. 만약 무학대사가 주장했던 유좌묘향(酉坐卯向) 으로 동향을 하였다면 자왕향(自旺向)으로 부귀왕정(富貴旺丁)하는 길한 향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제일 큰 문제점은 인왕산 대신 북악산(북현무)을 주산으로 삼아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우백호인 인왕산(높이 330m)에 비해 좌청룡인 낙산(높이 110m)이 너무 허약하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동쪽 대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만 옹성을 쌓고 허약한 좌청룡의 지기를 돋우기 위해 산맥 모양의 之자를 넣어 이름을 네 글자로 지었다.
다른 한 가지는 경복궁이 남면(南面)하고 있어 관악산의 화기(火氣)에 정면으로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관악산은 방위상 불에 해당하는 정남쪽에 위치한데다 산봉우리가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어 화형산(火形山)이라 불리운다. 관악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기운을 잠재우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는데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인 정도전은 '불은 불로써 다스린다'는 이화치화(以火治火)의 논리로, 관악산의 화기(火氣)와 정면으로 맞서도록 성의 정남쪽에 세운 대문의 이름을 숭례문(崇禮門)으로 정했다. 례(禮)자는 발음상 오행으로 볼 때 불(火)에 해당하며, 여기에 불꽃의 형상과 비슷하면서 '높이다'는 의미를 가진 ‘숭(崇)’자를 더해 현판을 수직으로 써내림으로써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이루도록 했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의 양 옆에 해태상(수기운(水氣運)을 몰아온다는 바다 속에 사는 상상의 동물)을 세운 것도 관악산의 불기운을 피하거나 제압할 목적였다.
< 이씨 조선 역대왕들의 사망원인>
*초대 태조
청심원을 다 삼키지 못하고, 중풍으로 74세 승하(아들 태종과의 마찰로 인한 화병도 그 원인 중 한 가지) 능은 건원릉 동구릉내 있다.
* 2대 정종
오복(五福;수,부,강녕,유호덕,고종명)을 다 갖추고 63세 승하
(상왕으로 물러난 후 편안하게 살면서 가장 많은 자식을 둔 왕임) 조선역대 군왕 가운데 유일하게 북한에 있는 후릉(경기도 판문군 영정리).
* 3대 태종
상왕으로 물러난 후 태종은 폐렴으로 56세 승하
부인민씨도 학질로 56세졸 능은 헌릉
* 4대 세종
대식가로 당뇨병으로 54세 승하
(고기를 매우 즐긴 왕,식단에 항상 고기가 있었음, 그래서 종기가 많이 났음,그리고 여러 부인을 둔 만큼 성병도 있었다고 함)
소형왕후 심씨와 합장됨으로서 조선최초 합장릉 능은 영릉
* 5대 문종
등창으로 39세 승하, 아버지 세종을 닮아 몸이 허약했음.능은 현릉
* 6대 단종
수양대군의 '계유정란'으로 17살때 서인(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에서 사사됨 숙종때 단종으로 복위. 능은 장릉
* 7대 세조
악업으로 문둥병과 불면증으로 52세에 승하. 능은 광릉
* 8대 예종
20세 복상사 당하여 승하
안순왕후 한씨 정사를 즐기다 승하했으며,형 의경세자(성종의 아버지, 덕종)도 20세에 급사. 능은 창릉
* 9대 성종
등창과 폐병으로 38세 승하. 28명의 자식을 두었고 주색을 즐긴 카사노바였다. 능은 선릉이며,임진왜란때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에태워지는 수모를 격는다.
* 10대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유배 강화도에서 괴질로 31세 요절.아들 넷은 강화도에서 사사됨. 묘는 서울 방학동
* 11대 중종
거머리로 등창을 치료하다,울화병과 노환으로 57세 승하.재위기간 39년.
능은 정릉
* 12대 인종
이질로 31세 승하(문정왕후 의한 독살설도 있다.)하늘이 낳은 효자로 알려져 있으며 후사가 없다. 능은 효릉
* 13대 명종
지나친 방사로 34세 승하. 문정왕후의 아들로 마마보이로 성장 하였으며,무수리출신 장씨와 지나친 방사로 인한 졸지에 승하.
어머니 문정왕후한테 회초리도 맞았다고 함.능은 강릉
* 14대 선조
임진왜란 이후 중풍으로 57세 승하.영조 다음으로 41년간 재위. 능은 목릉
* 15대 광해
제일 불운한 왕,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후 유배.그 뒤 십 수년을 더 살다가 제주도에서 67세로 승하.(유배생활간 시중 드는 사람이'영감'이라고 불러도 꿋꿋하게 견뎠다 함) 이때 담배가 일본에서 들어옴
* 16대 인조
청나라에게 항복한 후, 화병 걸림.신하들 손아귀에서 울화병으로 55세 승하.아들-소현세자를 독살한(?)왕으로 보고있으며, 재위기간 늘 그것때문에 신하들에게 시달려 왔으며 능은 장릉.
* 17대 효종
봉림대군 수전증있는 어의실수 의해 출혈사 때문 41세 승하.강한의지의 북벌정책을 마무리 하지못하고 승하했고,능은 영릉.
* 18대 현종
청나라 황제에게 벌금형을 받은 임금으로 학질과 과로로 34세 승하.네더란드인'하멜'에 의해 조선이 유럽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능은 숭능
* 19대 숙종
어릴적 천연두후유증, 노인병,등창 심하고 잦은 당파싸음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60세에 승하(인현왕후,애첩-장희빈과의 문제도 있었을듯)풍류를 즐겼던 숙종은 봄이면 휘하3000후궁을 거느리고
큰잔치 벌렀다고 한다. 능은 명릉
* 20대 경종
게장을 먹다 급사,37세 승하.장희빈이 사약을 받기전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하자 거절하다 인정 이끌려 세자를 데려오자 갑자기 경종의 하초 잡아당겨 성기능 잃어 내시와 같았다 한다. 능은 의릉
* 21대 영조
조선왕조 역대군왕들 가운데 제일 장수하였으며 치매로 83세 승하.세자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한후 뒤주속에 가둬 굶어죽게 한 일과늙어 노망 부린것이 오점으로 남았으며,
일본에서 '조엄'이 고구마를 처음 들여왔다. 능은 원릉
* 22대 정조
개혁적인 군주,사도세자(장조)의 아들 등창으로 49세 승하.(독살설도 있지만, 최근 자료로 보아 등창으로 승하한게 맞다고 봄) 안경을 최초착용 임금. 능은 건릉
* 23대 순조
매독3기로 45세 승하. 이 시절 나라는 콜레라가 창궐했으며, 안동김씨 세도가 본격 시작되었다. 능은 인릉
* 24대 헌종
23세 술과 여자로 보내다 폐결핵으로 승하. 능은 경릉
* 25대 철종
세도정치에 의해 졸지에 왕이 된 강화도령 33세 폐결핵으로 승하. 강화도를 그리워 하며, 안동김씨 그늘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채 재위했다. 능은 예릉
* 26대 고종
조선군왕에서 1897년[대한제국]선포이후'고종황제'명칭 사용.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3밀사:이준 & 이상설 & 이위종 특별파견사건 관련 일제 의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되어 67세 승하(재위기간 1876년 일제 의한 강화도 불평등조약=개항기/1895년 부인-明成皇后(本名:민자영)일제 의한 피살사건=을미사변/1905년 일제 의한
외교권 피탈=을사늑약 강제체결/1910년 일제 의한 국권:주권피탈=경술국치etc,여러굴욕 & 수치 겪음).능은 홍릉
* 27대 순종
몸이 허약했고, 남성 구실을 못했다 함.(그 때문에 生母=明成皇后,많은 재정을 쏟아 궁궐내 제사 지내고 굿을 하는등 국고낭비· 사치 심했다고 알려짐)
1926년,라디오 들으며 심장마비 의해 53세 승하. 능은 유릉
- 의친왕
독립운동을 했던 고종의 아들,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형 그의 아들 이우 왕자가 얼짱 왕자로 유명해졌다. 현재 의친왕 아들과 손자들이 다수 생존해 있다.
1955년,1950년 06.25전쟁기간 걸린 영양실조로 79세 서거.묘는 홍유릉 내의 의친왕 묘(합장묘)
-의민황태자 영친왕
어릴 때 일제에 볼모로 잡혀간 비운의 황태자다.
1963년 뇌혈전증으로 귀국해 7년간 병상에서 생활하다 1970년 74세의 나이로 서거 왕비인 이방자 여사는 자선 활동을 하다 1989년 서거.능은 홍유릉내 영원(합장묘)
< 역대 조선 통감>
1대 : 이토 히로부미(1906.3.~1909.6. 대략3년3개월)
2대 : 소네 아라스케(1909.6.~1910.5. 대략11개월)
3대 : 데라우치 마사타케(1910.5.~1910.8. 대략3개월)
< 역대 조선 총독>
1대 : 데라우치 마사타케(1910.10.~1916.10. 대략6년)
2대 : 하세가와 요시미치(1916.10.~1919.8. 대략2년 10개월)
3대 : 사이토 마코토(1919.8.~1927.12. 대략8년 4개월)
4대 : 야마나시 한조(1927.12.~1929.8. 대략1년 8개월)
5대 : 사이토 마코토(1929.8.~1931.6. 대략1년 10개월)
6대 : 우가키 가즈시게(1931.6.~1936.8. 대략5년 2개월)
7대 : 미나미 지로(1936.8.~1942.5. 대략5년 9개월)
8대 : 고이소 구니아키(1942.5.~1944.7. 대략2년 2개월)
9대 : 아베 노부유키(1944.7.~1945.8. 대략1년 1개월)
<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하-소련군정>
1945년 10월 3일 ~ 1946년 2월 15일 | ||
성립 이전 | 해산 이후 | |
일제강점기 조선 | 북조선인민위원회 | |
위치 | 조선반도 38도선 이북과 부속 도서 | |
정치 체제 | 군정 체제 | |
언어 | 한국어, 러시아어 | |
민정청 군정장관 | 이반 치스차코프(1945년 10월 03일 ~ 1947년 04월) | |
주요 사건 | 1945년 8월 26일 치스차코프 포고문 선포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1946년 02월 09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수립 1948년 09월 09일 북한 정부 수립 | |
현재 국가 | 대한민국, 북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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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합중국:이하-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 (1945년 09월 08일 ~ 1947년 02월 05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
김규식 (1946년 12월 12일 - 1948년 05월 30일)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 (1947년 02월 05일 - 1948년 09월 15일)
< 대한민국:大韓民國>
이승만 1948 ~ 1960
하야
3.15 부정선거와 4.19학생의거 따라 국민의 뜻에 따라서 사임이 아닌 반강제적 하야 및 망명.
윤보선 1960 ~ 1962
하야
5.16 군사혁명으로 박정희의 군부세력에 의해 강제 사임.
박정희 1963 ~ 1979
암살
10.26 사태 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사망.
최규하 1979 ~ 1980
하야
12.12 사태로 전두환, 노태우의 신군부세력에 의해 강제 사임.
전두환 1980 ~ 1988
본인 실형
12.12 사태로, 5.17 국가내란 등의 헌법 유린,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부정축재 등으로 실형 선고.
전직 대통령 예우 박탈.
노태우 1988 ~ 1993
본인 실형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같이 12.12 군사반란, 5.17 내란 등의 헌법 유린,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에 동조 등.
전직 대통령 예우 박탈.
김영삼 1993 ~ 1998
친인척 실형
아들-차남: 김현철 수뢰 및 탈세로 실형 선고.
김대중 1998 ~ 2003
친인척 실형
아들 김홍일, 김홍업, 김홍걸이 수뢰로 실형 선고.
노무현 2003 ~ 2008
투신사망
친인척 실형
형 노건평 등의 가족 및 주변인이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되어 실형 선고. 본인은 검찰 수사 도중 자살로 생을 마감.
이명박 2008 ~ 2013
친인척 실형
본인 실형
형 이상득이 수뢰로 실형 선고. 그 이후 본인 및 본인의 집사 김백준 구속 수감.
1심 유죄 판결로 인해 예우 박탈.
박근혜 2013 ~ 2016
탄핵=>파면
본인 실형
본인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되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파면.(헌정사상 현직 미혼-여성대통령으로 최초 탄핵가결)
대통령 예우 박탈, 구속 수감.
문재인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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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김일성 1948년 ~ 1994년 중증심근경색 & 급성 협심합병증 06.25한국전쟁:동족상잔 전면전 개전/여러차례 대남군사도발-정치범관리소 정적세력 입감-고문-공개 총살형
김정일 1974년 ~ 2011년 중증심근경색 & 급성 협심합병증 수령절대주의독재사상 입각/여러차례 대남군사도발-정치범관리소 정적세력 입감-고문-공개 총살형
김정은 2012년 ~ 여러차례 대남군사도발-정치범관리소 정적세력 입감-고문-공개 총살형-화염방사기 처형
김여정 2020년 ~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일방폭파조치 & 갖은 대남 압박· 협박발언etc
조선왕조 개국/건국:1392년 이후 경북궁터 낳은 최대비극,
그 것은 다름아닌 명성황후(明成皇后)-본명:민자영(閔玆暎:1851년11월17일 출생:철종2년~1895년10월08일 피살:고종32년)弑害事件이다.
조선국모:왕비가 바다:동해 건너 일본의 자객:칼잡이들한테 비참:처참시해했단 사실은 조선왕조 역사상 극단치욕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다른 곳 아닌 조선의 정궁내에서 이런 참극이 벌어졌는지 이해 할 수 없겠지만,슬프게도 이것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명성황후는 원경황후 비해 뒤치지 않는 여장부였다.고아인 그녀가 중전으로 입궁하여 고종의 사랑을 얻기까지 3년간 처녀로 지냈다는 일화 관련 유명하다.
궁인 이씨가 아들을 낳은 이후부터 흥선대원군과 대립:반목하기 시작,팽팽/첨예한 권력쟁탈을 주도한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쫓겨난 명성황후는 대원군 의해 국상까지 치러졌는 반면 청나라 군대를 이용, 환궁과 동시에 대원군을 몰아내고 갑신정변을 3일 천하로 만든 것도 그녀였다.
그러나,갑오경장에서 비롯된 갑오개혁으로 친일세력이 흥선대원군을 재등극시키며 집권하자 러시아를 이용해 밀어내려다 을미사변으로 시해되고 만다.
명성황후도 열성 불교신자였고 무교도 신봉했고 그녀가 재건한 사찰이 전국에 셀 수 없이 많았다.
질투심 관련 강하여 후궁 엄씨, 귀인 장씨 등을 내쫓아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몇 년 전 명성황후를 위한 구명시식을 올리던 중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1895년10월 08일,일본공사 미우라는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그녀의 억울한 죽음을 천도하기 위해 구명시식을 올리게 됐는데 뜻밖의 영가들이 나타났다. 바로 명성황후가 살아생전 죽인 궁녀 영가들이었다.
투기가 심했던 명성황후는 고종의 총애를 받은 후궁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의화군이 태어나자 명성황후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칼을 들고 의화군의 어머니 장상궁의 처소로 가서 “칼을 받아라!”고 소리쳤다. 명성황후는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장상궁을 가만두지 않았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장상궁 음부 양쪽의 살을 도려내 궁 밖으로 쫓아 버렸고, 훗날 장상궁은 그 상처로 죽고 말았다.
처참하게 죽은 장상궁 영가는 명성황후의 구명시식에 나타나 자신의 한도 풀어 달라고 애원했다. 그녀뿐이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기록할 수 없는 수많은 궁녀 영가들이 직간접적으로 명성황후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명성황후는 국모로서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령세계의 처벌은 면하지 못했다.
구명시식을 하다 보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한에 서린 영가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깊은 한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명성황후의 죽음 뒤에는 그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수많은 궁녀들의 한이 있었다.
과거 역사 회상시!
사실상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 견해 받아들임으로서 조선왕조 전반역사 관련 현군체제 연존 비해 단명군주 & 폭군연속,계유정난,임진왜란,정유재란,정묘호란 & 병자호란,병인양요 & 신미양요,
강화도 불평등조약,을미사변,을사늑약,국권피탈=일제식민체제 겪은 이후06/25동족상잔,남 & 북한분단,남북한간 최고독재통치자 & 역대 대통령들 비참말로 연속 모두 겪어 현대 이르고 있어요...
결론상,이 땅에는 기회주의 & 금전· 물질· 만능주의 사기주의 & 이기주의 & 비굴주의 & 중상모략/협잡주의 & 성급/폭력주의 만연내려 깔림현상 전락됐구 말이예요...
궁극차원 표현하여 한반도7,000만~7,400만 전반 구성민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좀더 구체 & 세부 & 심도차원 표현시,대한민국:남한인구-51,801,449명(2018년 6월 기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인구-25,513,000명(2019년 7월 기준)=77,314,449명 전반구성민들
한테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결론상 표현시,조선왕조 개국· 건국 이후 지금까지 한민족 · 겨례차원에서 주요3대 국란 · 사건 관련1592.04.13-임진왜란/1910.08.29-경술국치 & 국권피탈/1950.06.25동족상잔 & 국토분단 고착=지속비극였다면
근원· 원천차원 화근관련 한양천도1394.11.29(음력10.28)전후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左靑龍 · 右白虎삼는 유좌묘향(酉坐卯向)비하여,
<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고 낙산과 인왕산을 左靑龍 · 右白虎삼은 임좌병향(壬坐丙向)중심·체제현실 부인할 수 없는 그야말로 개탄/한탄현실입니다.
▶인왕산 주산론[仁王山 主山論]◀
종로구 옥인동,누상동,사직동,부암동과 서대문구 현저동,홍제동 경계에 있는 표고 338.2m의 산이다.
仁王寺가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조선을 개국하고 태조가 궁궐터를 정할 때, 북악주산론에 대한 인왕산주산론이 있어 필운대 일대가 궁터로 주목받았다.
조선 중기 인물인 車天輅의 ≪오산설림≫에 보면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좌청룡,우백호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이 ‘옛부터 제왕은 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렸고, 동향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라고 하면서 극력 반대하여 무학대사의 주장이 좌절되었다.
무학대사는 탄식하며,‘나의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또 신라 말의 도선대사가 지었다고 하는 ≪山水秘記≫에는 “국도를 정할 때 스님의 말을 들으면 국기가 연장될 것이나, 만일 鄭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일어나 백성이 어육이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과연 5대만에 세조의 계유정난이 발생하고,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재표현시,무학대사의 ‘인왕산주산론’과 정도전의 ‘백악주산론’은 불교와 유교의 정면 대결 양상이었다. 하지만 ‘군주는 남쪽을 보고 정사를 본다’는 제왕남면(帝王南面)의 원칙을 강하게 주장하는 정도전의 방안이 힘을 얻으며 채택된다. 이에 백악주산의 문제점으로 무학대사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이후 2백 년에 걸쳐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신라 의명대사(義明大師)가 일찍이 말하기를, ‘한양에 도읍을 택할 적에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건다면 곧 5세(五世)를 지나지 못해서 왕위를 찬탈 당하는 화가 일어날 것이며, 2백년 만에 전국이 혼란스러운 난리가 올 것이라.’ 한 말이 있습니다.”《연려실기술 제1권》
이러한 내용은 19세기 기록인 ≪한경지략≫에서 볼 수 있다. 또 명종 때 학자 南師古가 인왕산 아래 사직골에 왕의 기운이 있다고 하였는데, 과연 선조가 사직골에서 났다.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 색문동에 왕의 기운이 있다는 소문이 나서, 그 왕의 기운을 누르기 위하여 인왕산 아래에 경덕궁(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을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인조 2년(1624) 2월에는 안주병사 이괄이 반기를 들고 서울을 점령하여 도원수 장만과 대전할 때, 이괄이 서울사람들에게 “안산에 진을 친 장만을 단숨에 무찌를 터이니, 나와서 싸움을 구경하라.”고 선언하였다. 서울 사람들이 인왕산에 모여 그 싸움을 구경하는데,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어찌 많이 모였던지 인왕산은 흰 사람들로 덮여 백로처럼 되었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또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많아서 태종 5년(1405) 7월에는 경복궁 안까지 들어와 횡행하였다고 하며, 세조 10년(1464) 9월에는 창덕궁 후원에 들어왔고, 연산군 11년(1505) 5월에는 종묘에 침입하였다. 그 밖에도 호랑이의 민가에 대한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아서 세조는 친히 세 번이나 백악에 올라가서 호랑이를 잡았고, 양주 수락산과 고양 버리고개에 가서도 호랑이를 사냥하였다. 그러나 명종 때에도 양근에서 30여 명이 해를 입고 선조 때에는 고양 등지에서 흰 이마의 호랑이가 횡행하여 400여 명이 그 해를 입었으므로, 조정에서는 군대를 출동시켜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속설에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는 말이 전하였다고 한다. 서산,필운산이라고도 한다.
첫댓글 구체전례상!주산=인왕산&좌청룡=북악산&우백호=남산=>서좌동면론 기반된 조선정궁=경복궁 앉혀 지어졌다면'삼남=충녕대군=>세종'즉위비하여 장남=양녕대군=>권좌=왕위즉위했다면 후일'수양대군 세력중심[계유정난]없었을 것이고 조선선비들의 정기관련 그렇게 흐려지진 않았을뿐만 아니라 1592년-임진왜란&1910년-국권피탈=경술국치 및 1950년-06.25한국전쟁 및 국토&민족분단 없었을 것이고 역대 절대태반 후덕현군연존체제 안착되어 동방위치-전대미문급&전무후무급 태평천하-태평성대 왕조-정국 이어내려져 왔을 것이고 이런 사실 관련하여*작가-김진명 저서[하늘이여,땅이여]&*법사-차길진 저서[효자동1번지]구체&대략 거론되어 있습니다X_X~
조선 왕조 개국= 건국"1등공신 & 혁명실세"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방계후손-1979th12.12사태 故정병주(鄭柄宙,1926년 음력03월 30일 출생 ~ 1989년 03월 04일 의문사망)예비역 특전사령관께서는 천상영계 올라가 선조 향한'원망'관련 어느 정도 클 것이고 조선 왕조를 설계하고 도성 한양의 밑그림을 그린 삼봉(三峰) 정도전 직계 19대후손 정광순씨(63·출판업=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는 사후 천상영계 올라가 조선왕조 => 한반도-전반역사 관련 결정적 비극역사 전락 & 타락시킨 "조선왕조 개국=건국1등공신 & 혁명실세"선조 향한'원망'관련 어떻게 풀 것이며 어떻게'용서'받아 낼 수 있을 것일까? 그렇다면"삼봉-정도전"경우!본인 심대오판 의해 626년째 연존되어 이어져 내려오는 한반도 전반역사-불행사태 관련 어떤 방식으로 자신 후손들한테 사죄 건넬 수 있을 것일까,진심 궁금하고 반복 궁금하다X_X
1398년(태조7년)음력08월 26일밤,당시 56세 일기 이방원 및 수하세력 의해 무참히 살해된 제왕·북좌남향론+중국식-유교론자이며 비운=불운 조선 개국1등공신 & 혁명실세-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