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俊河 씨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
金龍煥 씨 수기: 죽음으로의 下山, 그 뒤
이 글은 <月刊朝鮮> 1993년 6월호에 실린 것으로서
나는 지금 18년 전 張俊河(장준하) 선생님의 가족과 친지들 앞에서
18년이 지난 오늘, 지난날들을 다시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장준하 선생님이 타살됐을 것이라고 했다.
18년간 겪어 온 고통의 매듭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쓰겠다고
마지막 동행길
나는 1974년 1월 14일 선생님께서 대통령 긴급조치 1호에 의해
나는 장 선생님을 돕는 일에서 마음의 위안과 보람을 느꼈다.
1975년 8월 16일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 갈 무렵, 장 선생님께
원래 내 생각은 그날 저녁에 인사드리고 다음 날 내려오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 버스를 타신 곳은 상봉동 댁 근처인 것으로 기억된다.
몇 분 올라가다 왼쪽으로 길이 있어서 그쪽으로 올라가게 됐고 5분 내지 10분 정도
나는 “선생님 여기 계시는군요”라고 말씀드렸고 그곳에 앉아
아찔한 계곡
그런데 사람들은 산 입구에서 선생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이상하다고들 한다.
산을 조금 올라가니 야산 같은 등성이가 나왔다.
등성이를 따라 올라갔다.
선생님은 일행이 기다릴 테니 식사 준비하던 곳으로 직선으로 하산하자고 하셨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그만큼 걱정하셨고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뒤를 따라갔다.
추락, 인공호흡, 절명
위기감을 느끼게 됐다.
암석 사이로 나무도 나 있고 해서 나는 그 잡목을 잡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호흡은 점점 약해져 갔다.
이제는 일행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일행이 있는 식사 준비 지점을 향해 달렸다.
다시 인공호흡을 했으나 회생하시지 못했다.
그날 저녁 선생님 댁에서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사고 상황을 말씀드렸다
1975년 봄의 귀향은 내일을 기약하며 희망을 가지고 돌아오는 길이었으나
SBS 팀에게 한 말
지난 2월 13일 오후 2시쯤 SBS에서 전화가 왔다.
“장 선생님이 너무 쉽게 잊혀져 가고 있어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 한다”고 했다.
“선생님 댁에서 당시 가족, 친지들에게 설명드렸던
자정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5월 4일 저녁, 이 글을 쓰기 위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녹화해 둔 것을 보았으나
무슨 말을 또 하란 말인가
3월 28일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 2부는 타살로 이끌어 가기 위해
방송과 신문에서는 또 ‘김용환 씨는 장준하 씨의 장례 직후 잠적했고 최초의 진술 외엔
고향으로 가지 않고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서로 어색한 대면을 해야 하는
선생님과의 산행에서 있었던 불행했던 일들을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고 부정적 으로만 보는
나는 힘을 잃은 사람이다. 나의 입장에서 서서 나를 이해하려 하고 심정적으로
신문, 잡지, 텔레비전, 정치권에서 나를 향해 공격해 오고 있다.
8년여 동안 존경하고 따르며 모시던 분을 무엇 때문에 일부러
단절된 18년! 선생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선생님과 함께 산행을 하게 됐던 것은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가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것을 개척하지 못했다 하는 자책을 해 본다.
金龍煥 씨 수기: 죽음으로의 下山, 그 뒤
이 글은 <月刊朝鮮> 1993년 6월호에 실린 것으로서
인물들의 직책이나 정황 등은 당시 상황 그대로 표기했다.
나는 지금 18년 전 張俊河(장준하) 선생님의 가족과 친지들 앞에서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던 모습을 얘기한 뒤 18년 만에 처음으로
내 의지에 의해 그때 일을 적고 있다.
18년이 지난 오늘, 지난날들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동안 겪었던 숱한 일들이 떠오른다. 존경했던 선생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나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살아온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장준하 선생님이 타살됐을 것이라고 했다.
유일한 목격자인 내가 했던 말은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분명히 18년 전 가족들에게 선생님의 실족 당시의 모습을 본 대로 말씀드렸는데….
18년간 겪어 온 고통의 매듭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가슴속에 품고 있던 생각들은 어디 갔는지 도무지 멍하기만 할 뿐,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장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내내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마지막 동행길
나는 1974년 1월 14일 선생님께서 대통령 긴급조치 1호에 의해
구속되신 뉴스를 호림산악회 산행을 마치고 돌아온 회원들과 함께
다방에서 들었었다.
그해 12월 3일 구속된 지 10개월 20일 만에 형 집행정지 결정으로
출감하신 후 종로구 견지동 ‘조광현 내과’에 입원하신 선생님을
지구당 당원들과 함께 병문안 갔을 때 선생님은 부기가 있었고
병원의 분위기는 어둡고 무거웠다.
나는 장 선생님을 돕는 일에서 마음의 위안과 보람을 느꼈다.
선생님이 계시기에 내가 있었다.
그러나 1975년 초 나는 장 선생님을 떠나 낙향했다.
아버님께서 병환 중이셨고 큰아들 된 입장에서 병간호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고향인 충남 당진으로 돌아왔다.
그해 3월 당진중학교 강사로 교직에 들어가게 됐다.
처음에는 몇 년 있으면서 내일을 기약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1975년 8월 16일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 갈 무렵, 장 선생님께
인사도 드릴 겸해서 서울에 올라갔다.
농사일도 있고 가축도 기르고 해서 시간을 내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방학이 거의 끝날 무렵에야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나 기억된다.
상경 후 저녁 무렵, 김용덕 씨와 함께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종로 4가에 있던 호림산악회를 찾아갔다.
김 씨에게 장 선생님 댁에 함께 가자고 했더니 김 씨는 “선생님께서
내일 산에 가시니 그때 인사드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원래 내 생각은 그날 저녁에 인사드리고 다음 날 내려오는 것이었다.
서울에 볼 일이 있더라도 특별한 일이 아니면 아침에 일찍 서울에 왔다가
밤늦게라도 내려가야 마음이 편한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요즈음도 서울에 올라가면 당일에 내려온다.
그러나 그날은 김용덕 씨의 권유대로 8월 16일 저녁에
인사드리지 않고 산에 가면서 인사를 드리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선생님께서 버스를 타신 곳은 상봉동 댁 근처인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곳에서 타시는 것을 보지는 못하고
타신 후 좌석에 가서 인사를 드린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님을 비롯한 우리 일행은 약사봉 계곡을 오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식사 준비를 하는 지점에 내가 조금 늦게 도착하게 됐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김용덕 씨인지, 김희로 씨인지 누구인지는 잘 기억되지 않지만 “
선생님께서 어디 가셨느냐”고 물으니까 “저 위로 가셨다”고 하여
그 위를 향해 선생님을 찾아 나서게 됐다.
어떤 사람은 어찌하여 혼자 찾아 나섰느냐고 하지만 선생님께서
안 계신데 모시고 있던 사람으로서 찾아 나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몇 분 올라가다 왼쪽으로 길이 있어서 그쪽으로 올라가게 됐고 5분 내지 10분 정도
그 길을 따라가 산 입구에 도달하게 됐다.
산 입구에 올라가니 그곳에 선생님이 군인 두 사람
(시골 출신 같은 이등병)과 커피를 드시고 계셨다.
나는 “선생님 여기 계시는군요”라고 말씀드렸고 그곳에 앉아
선생님께서 주시는 커피를 마시고 다시 산을 오르게 됐다.
그곳에서 배낭은 내가 메고 선생님은 앞서 가셨다.
선생님은 “여름 등산은 긴팔, 긴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오르셨다
(나는 그때 반팔 점퍼를 입었다).
아찔한 계곡
그런데 사람들은 산 입구에서 선생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이상하다고들 한다.
그래서 SBS에서는 그곳에 없던 텐트도 설치해 놓고 그곳에서 함께 커피를 마셨던
이등병 두 군인이 어떤 뜻이 있었던 사람들인 것처럼 암시했다.
산에 가다 보면 놀러 나온 민간인도, 군인도 있을 수 있는데
부정적으로 보면 한없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을 조금 올라가니 야산 같은 등성이가 나왔다.
나무도 별로 많지 않았다.
북쪽(뒤쪽)의 경관을 보니 뒤쪽 산 밑에 군부대가 보였고
부대 뒤에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선생님께 그곳을 가리키면서 저쪽으로 가면 어떠냐고 말씀드렸더니
“그곳은 군 통제지역이라 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께서는 그쪽 지역 사정을 알고 계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등성이를 따라 올라갔다.
큰 소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잡목은 그리 많지 않아 쉽게 산에 올라갈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이 있는 곳에 식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샌드위치를 2인분을 해 왔다”고 말씀하셨다.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파키스탄 政情(정정)이야기를 했다.
식사를 끝내고 조금 있다가 일행이 기다린다고 하시면서 배낭을 들고 일어나셨다.
“배낭은 제가 메고 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빈 배낭이다”고 하시면서
선생님이 메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님은 일행이 기다릴 테니 식사 준비하던 곳으로 직선으로 하산하자고 하셨다.
나는 올라왔던 길로 등성이를 따라 내려가서 일행과 같이 오던 계곡을 따라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서는 일행이 기다리니 빨리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뜻이 그러한데 더 반대할 수도 없어서 선생님의 뒤를 따랐다.
후에 생각하니 ‘왜 선생님의 뜻을 더 막지 못했나’ 하고 후회가 된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그만큼 걱정하셨고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가슴으로 느끼신 거룩한 인간애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선생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하지 않으셨나 생각된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느낀다.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이런 행동을 반복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우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울려면 마음속으로 울든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든지 하라고 몹시 꾸짖기도 한다.
선생님의 뒤를 따라갔다.
평평한 능선 두 개를 넘은 것으로 기억된다.
능선을 돌아가니,
급경사를 이루는 계곡이 시작되는 제일 윗부분에 서게 됐다.
“선생님, 더 못 가겠습니다.
되돌아 가시지요”라고 말씀드렸다.
선생님 께서는 그곳에 좀 서 계시더니 건너편으로
뛰어넘으시면서 나더러 건너오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뛰어넘으셔서 나도 그곳을 뛰어 넘지 않으면 안 됐다.
그곳을 뛰어넘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계곡, 아찔함을 느꼈다.
추락, 인공호흡, 절명
위기감을 느끼게 됐다.
위기에 처해 있을수록 냉철해야 한다는데 나는 그것을 잊고 있었는지
몹시 긴장해 위기감이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뛰어넘은 부분(급경사 계곡의 왼편)부터는 경사가 급했고 암석으로 된 지형이어서
몸의 자세를 낮추고 비스듬한 자세로 그곳을 내려오고 있었다.
암석 사이로 나무도 나 있고 해서 나는 그 잡목을 잡고 내려오고 있었다.
얼마를 내려오니 병풍같이 펼쳐진 斷崖(단애)가 있었다.
단애 밑에는 소나무가 나 있어서 나는 그 나무를 잡고 단애를 뛰어내렸다.
그 단애의 높이는 1.5m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단애의 밑은 평평한 지형이었다.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 뒤를 돌아보니 선생님께서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허겁지겁 선생님이 떨어진 쪽을 향해 내려갔다.
선생님은 그곳에 누워 계셨다.
의식은 없었으나 호흡을 몰아쉬고 계셨다.
선생님을 반듯이 눕히고 손을 대고 인공호흡을 하면서 “선생님,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라고 외쳤다.
그러나 선생님의 호흡은 점점 약해져 갔다.
호흡이 멎는 순간이 왔다.
입으로 인공호흡을 계속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호흡을 다시는 하지 못했다.
아! 이것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이제는 일행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일행이 있는 식사 준비 지점을 향해 달렸다.
어떻게 달려갔는지 모르겠다.
돌에 미끄러지고 물에 빠지면서 달려갔다.
산악회 회장 김용덕 씨에게 “선생님께서 떨어지셨어요.
빨리 갑시다”라고 말했다.
김 씨와 김희로, 김용봉 씨(김용덕 씨의 동생)와 함께 그곳으로 달려갔다.
다시 인공호흡을 했으나 회생하시지 못했다.
그곳에 계신 분들과 상의하여 길 옆으로 선생님을 모시기로 했다.
옷을 벗어 들것을 만들어서 선생님을 길 옆으로 모시고 점퍼를 벗어서
선생님의 얼굴을 가려 드렸다.
김용덕, 김희로 씨와 상의하여 군부대에 협조를 요청하기로 했다.
김희로 씨가 군부대에 가서 군의관과 위생병을 데리고 왔으나 회생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파출소로 가고 그곳에서 포천경찰서로 가 그곳 구치소에서 하루저녁을 자고
다음 날 오후 의정부 검찰지청으로 가게 됐다.
장 선생님 사모님께서 신원보증을 해주셔서 의정부 검찰지청을 나오게 됐다.
의정부 검찰지청을 나와 이문동 집에 들렀다가 선생님 댁으로 갔다.
그날 저녁 선생님 댁에서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사고 상황을 말씀드렸다
(함석헌 선생님, 계훈제 선생님, 장 선생님의 숙부님
그리고 한두 분이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통일당 주도의 영결식이 명동 성당에서 있었다.
영결식이 끝난 뒤 전세 버스를 타고 장지로 가서 하관식에 참석했다.
제일 뒤에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고향 당진으로 돌아왔다.
1975년 봄의 귀향은 내일을 기약하며 희망을 가지고 돌아오는 길이었으나
그날의 귀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망과 체념과 슬프고 공허한 귀향이었다.
선생님! 홀로 길거리에 남겨 두고 가셨습니다.
길거리의 돌처럼 이 사람한테 차이고 저 사람한테 차이는
가련하고 방황하는 초라한 신세가 됐습니다. 선생님!
SBS 팀에게 한 말
지난 2월 13일 오후 2시쯤 SBS에서 전화가 왔다.
몸이 불편하여 자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분의 목소리였는데 선생님의 산행 사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 중이라고 했다.
오후 9시 30분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도 좋지 않고 하여 잠을 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방에 있는 점퍼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나갔다.
문 밖에는 ENG 카메라를 멘 기자 등 SBS에서 온 사람 세 명이
장 선생님 관계로 취재차 왔다고 했다. 방으로 안내했다.
“장 선생님이 너무 쉽게 잊혀져 가고 있어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 한다”고 했다.
선생님의 업적도 많은데 왜 하필 그 부분을 다루려 하느냐고 항의했다.
“18년 전에 결론이 내려진 것인데 무얼 더 말하라는 것인가.
그리고 당시 사모님 께서도 신원보증 하여 주셔서 종결된 것인데
무엇을 더 말할 것이 있는가.
나는 그 당시 선생님 댁에서 함 선생님, 계 선생님 등에게
사고 상황을 소상하게 말씀드렸다.
그 외에는 더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선생님 댁에서 당시 가족, 친지들에게 설명드렸던
사고 상황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니 그것을 참고해 보라.
불행했던 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다.
나더러 그걸 또 반복해서 말하란 말인가.
이건 혹독한 고문행위이다. 나는 싫다.
누가 무어라 말해도 나는 싫다.”
자정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가시는 손님에게 자고 가시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내 본의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하며 나를 위로해 본다.
1993년 3월 14일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1부를 나는 보지 않았다.
예고 선전 때에 보니, 선생님을 인형으로 만들어 마구 절벽에서 굴렸고
타살이라고 선전하는 것을 보고 그 이후 SBS 프로는 보지 않았고
제1부 방영시간에 잠을 자 버렸다.
다만 서울에 있는 아이들에게 녹화해 두라고만 일렀다.
5월 4일 저녁, 이 글을 쓰기 위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녹화해 둔 것을 보았으나
이 글에 쓸 것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고 머리만 아프고 잠도 오지 않고
마음에 괴로움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집 주위를 몇 십 번 돌다가 하루를 보내고 말았다.
다음 날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머리는 무거웠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무슨 말을 또 하란 말인가
3월 28일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 2부는 타살로 이끌어 가기 위해
상봉동에서 ‘산에 가지 못하겠다’는 말을 전하러 오신 선생님을
내가 ‘억지로 끌어 올렸을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모시던 선생님 이었고 존경하는 분이었는데 그분께 인사도 올리고
“타십시오”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가지 않겠다는 선생님을
억지로 끌어 올렸을 것이라고 묘사할 수 있는가.
방송과 신문에서는 또 ‘김용환 씨는 장준하 씨의 장례 직후 잠적했고 최초의 진술 외엔
아직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고 적고 있었다.
선생님을 잃어버린 이 초라한 사람이 갈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나 슬플 때나 나를 포근하게 감싸 주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도 잠적이라고 하는가.
고향으로 가지 않고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서로 어색한 대면을 해야 하는
환경에 머물러 있으란 말인지….
나는 그런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것을 나는 싫어한다.
이해가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선생님과의 산행에서 있었던 불행했던 일들을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나는 할 말을 다했는데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내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없었던 일을 지어서 말하라는 것인가.
시작도 끝도 없고, 새로운 사실도 없는데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을 나 혼자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고 부정적 으로만 보는
불신 풍토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고 없는 말도, 없는 것도 마음대로 만들어
한 방향으로만 몰아가고 있는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나는 힘을 잃은 사람이다. 나의 입장에서 서서 나를 이해하려 하고 심정적으로
도와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괴롭기만 하다.
‘힘이 정의인지, 정의가 힘인지’ 어떤 것이 옳은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런 진실을 밝힐 힘이 없다.
나는 말할 수도,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처지에 서서
갈 곳을 잃은 거리의 고아가 되어 버렸다.
신문, 잡지, 텔레비전, 정치권에서 나를 향해 공격해 오고 있다.
유일한 등산 동반자이며 목격자의 증언도 부정한다면 그곳에서
어떤 진실이 밝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부모님이 자식을 데리고 외출하거나 집 안에서 한방에 같이 있었는데
불의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자식이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했다고 말할 것인가.
자식이 갑작스럽게 변고를 당하면 부모가 그렇게 했다고 할 것인가.
8년여 동안 존경하고 따르며 모시던 분을 무엇 때문에 일부러
위험한 경지로 몰아가려고 했겠는가.
명예, 돈 때문인가.
아니면 정치적 목적 또는 원한 관계에서 였겠는가.
나는 정치적 으로는 선생님이 계셨기에 내가 있다고 생각했고
선생님을 떠나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명예, 돈 때문에 눈이 멀어 버린 사람은 결코 아니다.
선생님께서 타계하신 후 나는 정치적 욕망도 꿈도 다 버렸다.
선생님과 가까웠던 분들도 만나지 않았다.
단절된 18년! 선생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도의적 책임감에 억눌려 한스러운 18년을 보냈다.
선생님을 존경했기 때문에, 선생님을 모셨기 때문에, 선생님과
산행을 함께 했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공격을 받으면서 짓눌려 살아왔다.
선생님과 함께 산행을 하게 됐던 것은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나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는 운명 찬양론자는 아니다.
나는 교단에서 ‘자기의 운명은 누구에 의해 개척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 의해 개척된다’고 강조하는 때가 자주 있다.
그런 내가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것을 개척하지 못했다 하는 자책을 해 본다.
1975년 8월 16일 저녁, 선생님 댁에 가려고 했을 때 선생님께서 산행을 하신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그냥 인사만 드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산행 때 식사 준비 지점에서 하필 내가 선생님을 찾아 나섰던 일,
선생님을 찾아 나섰을 때 길도 여러 갈래가 있었을 텐데 하필
선생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 등산로 입구에서 군인 두 명과 커피를 드시고 있던
선생님을 만난 일, 일행이 기다린다고 하시면서 바로 질러 가자고 했을 때 말리지 못하고 따라갔던 일,
벼랑이 나타났을 때 더 이상 가지 못하겠다고 주저앉아 버렸다면,
그리 위험하지 않다고 느껴지던 곳에서 선생님이 떨어지던 그 운명의 순간들….
인간의 힘으로 그 순간을 거역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위대한 순간이 됐겠나.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위대한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
첫댓글 후손들이 장준하 선생을 욕보이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장선생의 해골을 파 들고 나와서 공개하는 행위는 인륜으로 도저히 용납못할 일입니다
이제와서 해골 가지고 뭔 장난이람? 아무리 자랄들 해 봐라..
검사했다는 놈이 절라강진 하니예요 ? 그나물에 그밥 서울대는 종북좌빨 은신처입니다 ~
진실이 보이는 글과 얼굴모습입니다. 목적을 위해 왜곡하고 괴롭히는 나쁜놈들 . 정확한 현장을 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함 ..75년 민둥산 녹화사업으로 작은나무가 듬성듬성있던시절사고를 18년 지난 녹음우거진산은 절벽은 녹음으로 숲으로 변해 있었을텨니. 당신 위험한 계곡은.현장검증시는 그냥 나무와 풀숲이 돼 있었을테니 현장 못찿지.
장준하선생께서 훌륭하다는 것은 책으로나 주위에 들어 봐도 훌륭하신 분이란것은 알수가 있지면 운명하신 분의 명예를 자식들이 더럽히고 있내요 아타갑습니다. 정치적으로 반대 했다고 타살로 몰고 가는 현실이 부끄럽다. 이용하지 말라 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