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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2) 이상연 경한코리아 대표이사 | |
“성실함 하나 갖고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혔죠” 맨몸 상경서 경제단체 회장까지 | |
“아마 지역에서 그를 두고 욕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를 수년간 지켜본 이의 그에 대한 평가다. 그는 경북 예천 출신으로 고교 졸업 후 가정형편상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 상경했다. 사촌형님 댁에 얹혀 지내면서 과자팔이, 공사장 인부, 중소기업체 생산직원을 전전했다. 성실성을 인정받아 생산직에서 관리직으로 발탁된 그는 13년여의 직장생활 끝에 지인의 권유로 창업했고, 사업 시작 25년이 지난 지금은 중견 기업인으로, 경제단체의 수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는 창원시 팔룡동 (주)경한코리아 이상연(60) 대표이사다. (사)중소기업이업종중앙회 회장직도 맡고 있다. 이 회장을 만나기 위해 경한코리아로 들어서자 공장 외벽의 글귀가 먼저 눈길을 붙든다. ‘고객은 저희들의 신(神)입니다. 고객 감동을 위해 경한인은 나날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세계일류기업은 불굴의 도전의식과 강력한 실천력으로부터’ ‘혁신하자, 창조하자, 철저히 하자’. 여기에는 고졸 출신 기업인에서 경제단체 회장이 되기까지 그가 온몸으로 체득한 인생관과 경영철학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고교 졸업 후 상경, 세상과 ‘맞짱’ 이상연 회장은 1949년 7월 경북 예천군 호명면 금능1리에서 가난한 농부 집안의 5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호명초등, 예천중, 대창고 출신인 그는 고교 졸업 후 진학을 포기하고 상경했다. 고3 시절에 큰형수가 암에 걸리자 집에서 논과 밭을 거의 처분해 가세가 기울었기 때문이다. 돈 벌기를 결심한 그는 고교 친구와 동대문시장 과자대리점에서 과자를 떼 성수동, 천호동, 동대문 일대 구멍가게에 팔았다. 벌이가 좋았지만 4~5일 정도 하고 나니 팔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뚝섬의 유리공장을 찾았다. 주야를 바꿔 가며 하루 12시간씩 근무하니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보름 만에 그만두고 대단지 단독주택 공사현장을 찾았다. 하루종일 자갈 찜통을 지고, 삽질을 했다. 뼈빠지게 했다. 그를 눈여겨본 공사 책임자는 일주일 후 사무실 청소를 하도록 했다. 조금 뒤에는 공사자재 입출금 업무가 주어졌다. “대학도 못 갔는데 그들보다 잘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밤을 새더라도 일을 끝내야 집에 갔습니다. 여기서 좌절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고 스스로 채찍질을 했지요.”
▲첫 직장부터 창업까지 혼신의 열정으로 5개월 후 건축공사가 끝났고,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인생 전환점이다. 국제전광사의 견습공 모집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냈다. 벽시계·탁상시계 등을 만드는 회사였다. 1968년 10월 당시 19세였다. 선반기계로 부품 가공하는 일이 주어졌고, 가진 것은 성실함뿐이라는 생각으로 남보다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그렇게 4개월이 지나자 그를 눈여겨본 공장장이 자재부 창고담당 관리직을 맡겼고, 다시 6개월 후엔 물품구매담당 일까지 주어졌다. 35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1973년 제대한 그는 국제전광사에 재입사, 방위사업 인사담당을 맡았다. 회사는 1976년 4월 방위사업부의 시설과 인력을 모두 창원으로 이전(현재 셰플러코리아 창원3공장)했고, 그를 방위사업 인사담당 계장으로 승진 발령했다. 이때가 31세였다. 3년 후엔 다시 최연소 과장으로 승진했다. 회사는 (주)산다로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애썼지만 경영이 순탄치 않았고 결국 부도가 나 1982년 한국한화에 인수됐다. 그는 서울 본사 영업차장으로 발령나 7개월여 근무했고, 다시 공작기계사업부 영남지역 판매소장으로 창원공장에 복귀했다. “어느 날 마산수출자유지역 후문 쪽의 제일정밀 김모 사장이 기계를 외상으로 달라고 찾아왔어요. 그래서 모기업(지금의 신한공업)의 신용장을 가져오면 주겠다고 했더니 대표이사의 아들 허모 상무와 함께 와서 부탁하기에 기계를 내주었습니다.” 이후 이 회장은 이들 김모 사장, 허모 상무와 끈끈한 인간관계를 이어갔고, 이들은 “물량을 줄테니 공작기계 몇대 갖고 창업을 하라”고 권유했다. 결심을 굳힌 이 회장은 대표이사에게 퇴직금 등을 담보로 계약금만 주고, 나머지는 3년간 분할 상환할 테니 소형선반 30대만 달라고 했다. 경한정밀(현 경한코리아)은 그렇게 출발했다. 그의 나이 35세, 1984년 7월의 일이다.
▲부도위기 딛고 성장가도 질주 마산 신포동의 공장부지는 보증금 없이 월세를 얻었고, 시설투자비와 운영경비는 둘째 형님의 도움으로 마련했다. “사업을 하겠다는 말을 듣고 형님이 남은 논을 처분해 보태라며 가져왔어요. 당시 형님이 ‘니가 꼭 성공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시골 어머니와 나는 강원도 탄광촌으로 가야할 지경에 놓일 것이다’는 말과 함께 돈을 내미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죽을 각오로 뛰었습니다.” 창업 첫 해 직원 20여명에 2억원가량의 매출을 올렸다. (주)산다의 퇴사 기술자들과 현직 연구원들이 회사로 찾아와 기계 보수 및 기술지도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재직 시 관리직이었지만 현장직과도 허물 없이 잘 지낸 덕분이다. 쌍안경 부품과 조준경 가공품을 생산하던 회사는 물량도 꾸준히 늘어 날로 성장했다. 드디어 1995년 봉암동에 자가공장을 마련, 이전하기에 이르렀고, 마침 GMB코리아의 제안으로 타사가 개발에 실패했던 자동차 부품인 밸브스크류 공동개발에도 성공했다. 많은 돈을 들여 양산시설을 갖췄는데 그만 IMF 사태가 터졌다. 매출이 80% 이상 감소했고,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했다. 이 회장은 “정말 괴로웠고, 회사를 포기하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화기계(주)를 찾아가 사정해 어음 기한을 연장 받았고, 각종 경비 절감을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다. 10개월 후 경영 상황이 호전됐다. 그렇게 위기를 넘기자 성장가도를 내달렸다. 2000년 6월에는 창원 팔룡동으로 확장 이전했고, 2003년 3월 회사명을 (주)경한코리아로 바꾸었다. 지난해에는 208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250억원, 2010년은 300억원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회장은 경한코리아 외에 태국의 (주)경한타일랜드와 대구의 (주)경한인더스트리를 경영하고 있다. 연간 매출액은 500억원대이며, 오는 2012년까지 매출액 1000억원 달성, 미국 EATON사 및 독일 GETRAG사에 3000만달러 수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회공헌활동도 앞장 이 회장은 지난 1997년부터 7년간 경남이업종교류연합회장을 지냈고, 2006년 1월 (주)중소기업이업종중앙회 회장으로 선출돼 4년째 맡고 있다. 이업종중앙회는 그가 맡으면서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회원사 수도 3400여개에서 5800여개로 급증했다. 이는 일단 시작하면 최선을 다하는 그의 성격 탓이다. 이 회장은 내년 2월 말 임기 만료 전까지 업종이 다른 기업들끼리 지식과 기술을 융합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한 ‘지식융합법(가칭)’을 제정한다는 방침 아래 국회 일자리창출 및 중소기업경쟁력강화특별위원회와 손잡고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의 좌우명은 ‘끝없이 부지런하고 처음처럼 겸손하자’이다. 그래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 유한양행 창업자인 고(故) 유일한 회장을 가장 존경한다. 그는 고향사랑, 이웃사랑, 지역사랑 실천에도 열심이다. 자녀 결혼식 때 받은 축의금 3000만원을 지난 1월 산업재해 근로자 자녀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모교인 대창고등학교에 올해부터 연간 3500만원씩 5년간 총 1억75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하고, 올해 분을 이미 전달했다. 특히 2005년부터 매년 도내 경찰 자녀 31명을 추천 받아 지금까지 4회에 걸쳐 총 1억200만원을 지원했다. 또한 고향마을 경로잔치를 매년 개최하는 것에서부터 창원 공단문화제 후원, 상공회의소 문화상 제정 등 근로자 지원활동, 경남오페라단 후원까지 20여년간 다양한 공헌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현재 경남메세나협의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산재근로자 자녀 장학재단 설립이 꿈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오는 2012년 이전까지 중증 산재근로자의 자녀를 위한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게 꿈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이 산재 가족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게 된 것은 누구보다 산재를 당한 근로자와 그 가족들이 겪는 삶의 고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대한민국 경제 성장은 산업현장에서 묵묵히 열심히 일한 근로자들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불의의 산재사고를 당해서 신체적 장애가 생긴 근로자의 자녀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만들고 싶은 게 소박한 꿈입니다.” 바쁘실 텐데 장시간 시간을 내어줘 고맙다는 말에,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그의 모습은 천상 우리의 넉넉한 이웃이요, 어른이었다. 글=홍정명기자 jmhong@knnews.co.kr 사진=전강용기자 jky@knnews.co.kr
★ 이상연 회장은= 이상연 회장은 허스키 보이스(쉰 목소리)다. 태어날 때부터 성대가 약해서 그렇다고 한다. 처음 만나는 이들은 말을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혹 정치에 뜻을 두고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으며, 이업종중앙회장직을 마치면 경영에 전념할 것이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고졸 출신 기업가인 그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대학 진학 욕심이 생겨 지난 89년 2월 한국방송통신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고, 14년 만인 2003년 2월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만학도인 셈이다. 여세를 몰아 창원대 경영대학원에 진학해 경영학석사 학위를 땄고, 현재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혈액형은 A형이며, 취미는 등산이다. 골프는 13년 구력에 핸디 16. 담배는 전혀 피지 않으며, 술은 10년 전부터 건강을 생각해 거의 마시지 않는다. 지난 1976년 결혼한 성혜숙(57) 여사와의 사이에 준형(31), 철형(28) 2남을 두고 있다. 장남은 고려대 석사 졸업 후 MBA과정을 밟고 있고, 차남은 연세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공부를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