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304년) 분서왕이 낙랑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자, 구수왕의 둘째 아들인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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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왕은 대방백제의 왕이고 낙랑는 당시 비류가 세력가로 있었다.
304년는 낙랑(313)과 대방(314)이 멸망하기 이전인데,
초고왕계는 초고왕->구수왕->사반왕 으로 이어지며 위구태왕계인 위구태~간위거-마여-의려로 이어지는 현도백제이다.
고이왕계는 고이왕->책계왕->분서왕 으로 이어지며 이는 대방백제로 구태에 의해 건국된 구태백제라 할 수 있다
비류왕>근초고왕->근구수왕으로 이어지는 왕위는 낙랑에서 요서지방으로 이주하여 비류왕이 요서백제를 건국하고
근초고왕은 346년 한성백제를 건국한다.
온조 다루 기루 개루 왕으로 이어지는 왕위계승는 아직 그 진위를 파악하기 어렵다.
초고왕계가 왕위를 비류왕에게 이양함으로써 여씨의 세상이 되었다
근초고왕에 이르러 부여씨로 왕위가 계승되고 근초고왕의 원래 성인 해씨집안과 왕후를 배출한 진씨집안이 주로 백제를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구태는 고이왕이라 볼 수 있고 그 뒤를 책계왕 분서왕 으로 이어지며 314년 대방이 멸망하자 320년경 배를 타고 가야지방으로 내려간 구태백제라 할 수 있다
양서(梁書) 제이열전(諸夷列傳) 백제전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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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梁書) 제이열전(諸夷列傳) 나옵니다
바로 아래 글에 있습니다.
작호에 대해서 문의를 주셨군요.
작호는 아마도 400년경 호태왕에게 호되게 당하고 나서 작호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을 보입니다. 404년 경에 왜는 대방지역을 공략하였으니 호태왕이 <왜이불궤:왜가 법도를 어기니>란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법도는 바로 작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작호가 없으면 그만큼 불리할 수 가 있다는 것이죠,
우리나라가 유엔에 가입했는데 비회원국으로 부터 공격을 받으면 유엔이 우리를 도와주겠죠.
이것이 작호를 받으려고 하는 이유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410년경 이후로 해서 <백제>나<왜>는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작호를 받으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작호와 법도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중국과의 통교는 당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호칭을 받는 것이고, 광개토태왕이 왜가 법도를 어긴다고 하는 것은 공격할 명분 때문에 하는 말이죠. 중국과 고구려가 서로 다른데 어찌 법도와 작호를 동일하게 여기겠습니까? 또한 그렇게 중국으로부터 호칭을 받는다고 해서 전쟁이 멈춰진 것도 아니니,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작호를 받았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아래 비사인님이 말씀하셨듯이 무령왕의 죽음을 <제>라고 하기 보다는 <崩>이라고 한 것을 보입니다.
작호와 법도에 관해서 비사인님과 제가 의견이 다르군요.
저는 이 법도를 작호도 없는 <왜>가 대방지역에 침입하였기 때문에 호태왕이 <왜이불궤>하면서 <왜>를 무찌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가 왜? 대방지역까지 가서 공격을 하였을까요?
저는 <왜>가 <대방지역>을 자신들의 <고지:옛지역>를 회복하는 차원에서 공격하였으리라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왜>는 부여에서와서 대방지역에 머무르다가 백제로 건너오고 가야로 가서 임나를 건설하고 신라를 공격하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왜>가 자신들의 옛지역인 대방지역을 뒤차으려고 하였으나 호태왕이 이를 용납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자이수님의 말대로라면 몇가지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일단 작호의 유무를 통하여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는지의 여부, 그리고 고구려가 다른 나라의 경우 작호가 없다는 이유로 공격하였다는 전례, 중국에서 받은 작호가 고구려에게 효용성이 있었는지에 대한 사실 등을 먼저 전제하신 후에, 이야기를 진행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이수님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이해될테니 말이죠. 또한 왜가 대방지역을 차지했었다는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도 있어야 합니다. 일전에도 제가 계속 지적한 사항입니다만, 자이수님께서는 왜가 계속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시지만, 이들은 모두 유추를 조합한 것일 뿐입니다.
이런 말씀드리기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만, 자이수님의 견해가 일본어로 그대로 번역된다면 일본 우익들로서는 환호성을 지르며 반길 사항들이 많습니다. 자이수님의 목적은 그렇지 않겠지만, 적어도 받아들이는 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높지요. 자이수님께서 최근 카페에 여러 글을 올리시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만, 글을 올리시기 전에, 기존의 학계에서 논의된 관련 서적들이나 논문을 참고하시는게 좀 더 낫지 않을까 합니다. 인터넷 상에서는 잘못된 정보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삼고 이야기를 전개하시다간, 사상누각의 논리로 치부되어 수고하신만큼의 인정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제가 보기에는 호태왕비와 삼국사 그리고 일본서기를 잘 분석하면 공통점이 나오리라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한국정통측에서는 일본사기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 같아서 이를 입증하기란 쉽지않으리라 보여집니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 제 의견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호태왕 비문만을 가지고 보더라도 그당시 <왜>의 존재는 한반도남부의 <왜>가 확실해 보이는데 이를 인정안한다면 저로서는 다른 물증을 가져오기가 어렵다고 보여집니다.
한국 학계에서 일본서기를 인정 안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아시는 여러 학자분들은 오히려 일본서기를 인정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다만 그 내용 중에서 너무 일본에 중심을 두고 말한 부분들이 많아서,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걸러서 받아들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또한 일본 내의 학자들도 이러한 한국 학자들과 의견이 비슷합니다. 일본서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한국과 일본 모두 동일합니다. 제가 자이수님의 글을 읽었을 때 광개토태왕릉비문의 왜를 한반도 왜로 말씀하시는 부분은 확증이 있는게 아닌 추정에 추정을 더한 글로 보입니다.
때문에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분은 많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가 앞서서 이렇게 여러 도움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역사에서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은 유추를 통해서 밝히는 게 맞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사항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비판을 하면서 깨나가야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일부 부분이 추정된다는 것만 강조하셔서 이를 밀고 나간다면, 한 근거가 무너지면 모두가 무너지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때문에 역사연구는 그 기틀을 확실하게 다지고 진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호태왕이나 호태왕비는 중국에서 쓰는 용어이며, 이를 맞다고 여기는 한국 학자들은 없다는 것도 알아두시길 바랍니다.
환기라는 말도 안되는 것을 굳이 쓸 필요가 있나란 생각이 듭니다. 또한 소서노가 왕위에 오른 적이 있는지, 고구려의 제후국으로 인정받은 기록이 있는지가 궁금하네요. 환단고기 같은 위서를 가지고 쓴 글을 맹목적으로 퍼오면 곤란합니다. 백제 왕계나 연표는 삼국유사에서도 적혀있는데, 왜 굳이 가짜를 바탕으로 한 것을 가지고 와서 게시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그리고 역사공부하자님, 무령왕의 죽음을 표현한 글씨는 제가 아니라 崩입니다.
아 그런가요
잘못된 부분은 수정하도록 하갰습니다.
한국 학계에서 일본서기를 인정 안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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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조(369)는 침미다례와 가야지방을 점령한 이야기기 나옵니다. 물론 이 말을 일본이 점령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본서기는 일본의 역사를 다룬 것이 아니고 왜와 백제, 왜와 신라의 관계를 적고 있습니다. 백제의 역사를 그 무엇보다는 세세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서 일본서기는 백제의 역사서 또는 항반도남부에 존재했던 왜의 역사서라고 보아도 그리 틀려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일본서기를 저술한 주체가 일본으로 되어있어 이를 세심하게 연구하여 재정립이 필요하지만
단순하게 49년조만 보더라도 백제와 <왜> 가 침미다례와 가야지방
단순하게 49년조만 보더라도 백제와 <왜> 가 침미다례와 가야지방점령한 사실을 한국정통츧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역설적으로 광개토태왕릉비문의 <왜>를 일본열도의 <왜>로 보는 것보다 한반도남부의 <왜>로 보는게 더 타당해 보입니다만, 광개토태왕릉비문의 왜를 일본열도의 왜로 본다면 그렇다고 하는 증거가 나와야 할탠데 확증도 없는 상태에서 광개토태왕릉비문의 왜를 일본열도의 왜로 규정하는 것이 더 부적절해 보이기도 합니다.
침미다례를 백제가 점령하지 않았다고 보는게 한국 정통 사학계의 견해이다? 죄송합니더만 이 말은 처음 듣습니다. 당장 네이버에서 논문검색만 해보셔도 침미다례에 대해서 8편의 논문이 나옵니다. 게다가 자이수님께서 침미다례를 언급하는 것은 스스로 일본서기를 번역한게 아니라면 한국 역사학자들이 번역한 일본서기를 보셨다는 것일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학계에서 일본서기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보시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죠. 특히 침미다례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기록을 이미 열심히 분석한 연구가 많은데, 그걸 지적하면서 정작 그 연구물을 살펴보지 않은 듯 하네요.
자이수님의 논리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광개토왕릉비문에서의 왜가 일본열도의 왜임을 증명하라면 이는 삼국지 기록으로 이미 다 증명됩니다. 오히려 한반도 왜을 증명하시는게 순서입니다. 왜는 단일 정치체가 아닌 수많은 정치체를 부르는 합칭이기에 공통의 문화나 혈연적 유대를 갖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즉 한반도에 왜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고대 일본의 영역이 한반도에서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기에 우익들이 좋아할만 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고고학 조사가 있었지만 한반도 왜를 입증할 만한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학계는 바보가 아닙니다.
바로 위 댓글에서 제가 하고싶은 말은
지안고구려비 마선비에 1. □□□□世必授天道自承元王始祖 趨牟王之創基也 중
<천도>이란 문구가 있습니다. 이 <천도>를
1. <수>의 목적어로 볼거냐,
2. <승>의 목적어로 볼거냐에 따라 뒤의 <원왕>의 해석이 달라지는데,
<승>의 목적어로 보면 뒤의 <원왕>이 매끄럽게 해석이 되지만,
<수>의 목적어로 보면 뒤의 <원왕>의 해석이 매끄럽지 못합니다.
이럴 경우 2번을 지지하려면 원왕의 뜻을 확실하게 밝혀 2번의 해석이 매끄럽게 되어야 2번을 지지할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왜>를 일본열도로 본다면 <왜>가 400년 군용배를 타고 신라로 쳐들어왔다는 것을 먼저 밝힌 연유에야
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태왕릉비에 <왜만기중>이라는 문구가 있듯이 <왜가 신라성안에 가득찰 정도>로 일본 배가 한국에 상륙해야 하는데 이런 능력이 400년 당시 일본에 있었다는 증거내지 물증이 있어야 <왜>가 한반도 남부에 있지않고 일본에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할수 있을 거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왜>는 한반도남부의 <왜>로 보는게 더 타당해 보인다는 것이 저의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한반도 왜을 증명하시는게 순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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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서 비사인님과 저의 견해가 다르군요
바로 위의 댓글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저는오히려 <왜>가 일본열도에서 왔다는 것을 먼저 증명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사실상 일본는 400년경에는 신라로 군사를 파견할 규모의 정치체제가 없었다고 밝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임나일본부>가 없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럴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가 일본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왜>가 한반도남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댓글 3개가 넘는 경우 가급적이면 답글로 처리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집안고구려비 이야기가 뜬금없이 나오는 이유를 전 모르겠네요. 당시 왜의 역량에 대해 여러모로 의문이 많으신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 일본고고학 관련 서적들을 읽어보시길 권유드립니다. 이미 4세기 대에는 전방후원분이 다수 조성되고, 특히 인덕천황릉의 경우도 이 때 조성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당시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가 일본 내에 있다는 점은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되며, 때문에 이 시대를 고고학에서는 고훈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때 일본의 해상력이 약하지 않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렇게 보기 힘듭니다.
일단 대규모의 선단이 있어야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것인데, 일본 고대 문화를 형성한 도래인은 과연 무엇을 타고 일본으로 갔을까요? 게다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수많은 일본의 신라 침공 기사는 무엇일까요? 그렇나 기사들을 보면 모두 동쪽에서 일본이 공격하는 것으로 나오고, 또한 바다와 배를 이용하는 기사가 많이 있습니다. 때문에 오히려 삼국사기를 통해서도 왜가 일본 열도에 있다는 게 바로 입증이 됩니다. 자이수님은 이 부분은 인정하지 않는 것일 뿐이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보긴 힘들죠. 자이수님께서 여기에 대해 비판하려면 먼저 고대 일본의 역사와 고고학에 대해 공부하시는게 순서라 봅니다.
고대 일본의 해상능력과 선박기술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문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다 국내에 나온 논문들이니 마음만 먹으면 구해서 읽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柴田惠司, 1995,「고대일본의 선과 그 주변[古代日本の船とその周邊]」『일본학』14,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또한 관련하여 참고할만한 논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효운, 2007,「九州 海岸島嶼와 東아시아의 戰爭」『동아시아고대학』15, 동아시아고대학회
이재석, 2007,「고대 九州 海岸島嶼와 동아시아의 교류」『동아시아고대학』15, 동아시아고대학회
柴田惠司, 1995,「고대일본의 선과 그 주변[古代日本の船とその周邊]」『일본학』14,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http://db.history.go.kr/front/report/reportFrameSet.jsp?pUrl=/front/report/viewDocumentReport.jsp&pLevel=3&pDatabaseID=hb_092&pRecordID=hb_092_02_000145 라는 사이트에 가서 보려고 하였으나 볼 수가 없군요. 원래 제목만 보이고 본문은 볼수 없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정효운, 2007,「九州 海岸島嶼와 東아시아의 戰爭」『동아시아고대학』15, 동아시아고대학회
이 자료도 안보이고.. 마땅히 참고할 만한 것이 없어보입니다.
혹시 본문이 포함된 참고할만한 사이트가 있으면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논문이라는 게 전공자들은 약간의 루트만 타면 얻기가 어렵지 않지만, 일반인들은 그 루트를 잘 모르니 쉽게 얻기 힘들겠죠. 마음먹고 논문을 찾으신다면 어느정도 비용을 내던지, 혹은 발품을 팔 생각도 하셔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왠만한 논문은 국회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으며, 혹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에서도 구해 볼 수 있습니다. 시바타 게이시교수의 논문은 저에게 있습니다만, 일본어로 된 논문이고 한국어 번역본은 없습니다.
논문의 존재 여부는 네이버 전문정보를 통해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으며, 거기에서도 살펴보면 어디에서 다운 받을수 있는지 경로가 적혀있습니다. 참고하십시오.
저는 주로 인터넷을 검새해서 자료를 보고있습니다만, 위에 추천해 주신 자료는 구하기가 힘들군요.
http://db.history.go.kr 를 저도 자주이용합니다만, 무료라고되어있어 자료를 볼수 있나 보았더니 안되는거 같습니다.
하여 일본의 위키페디아를 검색해 보니 약간의 자료가 있는데.. 구글검색에서 한국어로 번역해서 보니 대충은 알겠는데, 정확하게 보려니깐 한계가 있군요..
보지는 못했지만 추천해 주신 책들 감사합니다.
일본 고대의 배를 검색해 보았는데,
글을 자세히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런 배로 400년대에 현해탄을 건너와
고구려와 맞짱 뜰 정도의 군사가 넘어왔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http://cafe.daum.net/alhc/4xOO/16659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바이킹도 배의 규모가 그렇게 큰 편이 아니었고 저정도 선박이라고 하더라도 배가 서로 왕래하는 것은 가능하였습니다. 고대의 전함이 큰 규모로 나타나는 것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입니다. 현재 이부분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지진 않았지만 폴리네시아 같은 태평양으로 사람들이 집중 이주 할 때 쓴 배들도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니라고 이야기되지요. 작은 배라고 해서 도해가 불가능 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히려 편견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마땅히 주의가 필요합니다. 게다가 삼국사기 내에서도 왜가 배를 타고 공격했다는 표현은 여러번 나옵니다.
현해탄을 건너오지 못했다기 보다 고구려군사 5만명과 대적할 만큼 많은 배가 오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최소 1만명만 건너왔다고 본다면 저런 소형배가 몇대가 필요할지...저로서는 의문점이 많습니다.
역사란 늘 예상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닌 예상 밖의 상황이 늘 일어나곤 합니다. 따라서 다양한 면에서 생각하셔야 합니다. 왜는 당시 백제와 가야와도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함선이 부족하다면 백제와 가야로부터 함선을 끌여다가 쓸 수도 있죠. 저정도 배로 현해탄을 건너는 것에 대해 동의하신다면, 국운을 건 전쟁에서 더 한 것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해 보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볼 때 단면으로만 검토하지 마시고 다양한 측면으로 바라보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역사란 늘 예상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닌 예상 밖의 상황이 늘 일어나곤 합니다>란 말씀에 동감합니다.
허나 이 또한 상식선에서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400년경 상황은 백제와 왜는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많아보이지만 가야는 <왜>에 점령당한 상태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당시 광개토왕릉비에도 임나와 가야를 를 정벌한 후 <안라인수병>이라하여 안라국 사람에게 임나와 가라지역의 수비를 맡긴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백제와 왜가 연합하여 적은 수의 배가 건너와 신라를 공격할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가야지방를점령한 왜가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는 가설이 더설득력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자이수님. 자이수님이 줄곧 주장하시는 왜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가설을 증명하려면 한가지만 보여주시면 됩니다. 바로 왜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직접적인 근거가 되는 사료 말이죠. 그게 없이 정황 상으로 추론만 하신다면 어느 누구도 납득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방증이 아닌 확증이 필요합니다.
가야가 왜에게 점령당했다면 가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왜에 대항하는 게 상식적으로 맞겠죠. 하지만 신리를 공격한 것은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이며, 고구려는 가야를 공격하여 금관가야로 하여금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피해를 줍니다. 상식적으로 정황 상 왜가 가야를 점거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추론입니다. 광개토태왕의 신라 구원에 대한 논문과 저서만 하더라도 수십권이 넘습니다만, 자이수님의 의견과 동일한 가설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좀 더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또하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400년 당시 일본이 신라를 공격할 정도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369년 임나를 정복하여 <임나일본부>를 둔 사실을 일본 스스로 부인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반대로 일본이 400년경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공격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안았다는것을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왜가 가야를 점령하였다는 것은 369년 일본서기를 참고하여 말씀드린 것입니다. 저는 이게 한반도남부에 있는 왜가 백제와 연합하여 가야를 공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분들의 논문이 저와 다른 이유는 모든 논문들이 <왜>을 일본에서 건너온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왜>가 백제와 관련이 있으며 한반도남부에 존재해 있었다는 가설로 글을 쓰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논문과 다르다고 보여집니다. 이부분에서 왜 저만 그리생각해야하는지 저도 좀더 고민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왜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가설을 증명하려면 한가지만 보여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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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광개토대왕릉비>입니다. 거기에는 고구려가 백제와 왜를 점령해 가는 모습이 시간순으로 열거되어 있습니다. 414년에 건립된 비문이기에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다음 증거로는 <일본서기>를 둘수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신뢰한다기 보다 일부 필요한 자료를 참고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일본서기>를 일본역사가 아닌 백제와 <왜>의 역사를 기술한 책으로 보고있습니다. 거기에 369년 백제와 함께 침미디례와 가야를 공격하여 침미다례는 백제가 가야는 <왜>가 다스린 것으로 나옵니다.
현재로써는 이 두가지 밖에 없습니다
말씀하신 바대로 현재로서는 저 두가지 밖에 없고, 이 또한 추론을 통해 구축한 추측이지 학계에서 다 공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는 자이수님만의 가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지,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하긴 힘듭니다. 그리고 5세기 초의 비문을 증거로 드셨는데, 정작 왜의 모습이 담긴 3세기 대의 서적인 삼국지에서는 열도에 일본이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상황익에 자이수님의 주장은 모든 이들을 설득시킬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자이수님께선 생각하시는 바에서 크게 변동하지 않으실 것이기에, 더이상 말씀을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앞서 제가 말씀드린 부분을 잘 고려하시길 바랍니다.
역시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비사인님과 저는 팽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제 의견이 역사적 사실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가설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오해가 생겼다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끊어지고 단절된 역사를 그 누가 정확하게 <이렇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단절된 역사를 퍼즐로 끼어 맞추듯 가장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 알아보려고 할 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부분을 포함해서 제 나름의 퍼즐을 맞추어 가는데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