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야스다 고이치(安田浩一) 지음, 김현욱 옮김, "거리로 나온 넷우익"(후마니타스 간)이 나온 것은 지난 5월 27일. 그리고 저자인 야스다씨가 출판사의 초청으로 방한한 것은 5월 31일. 6월 1일부터 방한행사가 시작되었다. 애당초 계획은, 칼럼니스트 박권일("88만원 세대"의 공저자)과의 대담(대학로 벙커원, 6월 1일), 서강대와 성공회대에서의 강연(6월 2일), 그리고 독자와의 대화(6월 3일, 후마니타스 책다방) 정도였다. 물론, 그 사이사이 몇몇 언론사와의 인터뷰 정도였다.
이 정도만 해도 야스다씨에게는 적지 않은 스케줄이라고 생각되었고, 그 모든 과정을 혼자서 통역하면서 모시고 다녀야 하는 역자 김현욱에게 적지 않게 무리가 가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특히 북토크에서의 대담을 한 사람이 통역하는 것은 좀 적절하지 않게 생각되었다. 역자는 야스다씨 발언을 통역하고, 박권일씨 발언은 또 다른 누군가가 통역을 해야 청중에게도 좋았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미 정해진 일,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나, 이런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무도 --- 어쩌면 기획을 한 '후마니타스' 출판사조차도 --- 예상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이 벌어졌다. 인터뷰가 폭주하게 된 것이었다. 야스다씨는 KBS TV 뉴스(밤11시)에까지 출연, 앵커와 대담했다. 야스다씨가 한국에 있었던 6월 5일까지, 아마도 주요한 신문, 잡지, 방송 중 인터뷰를 안 한 곳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많은 인터뷰 통역을 역자는 혼자 다 하고 다녔다. 방송의 경우, "자막"까지 챙겨주었다 한다. 새벽 1시가 넘어서 들어온 날도 이틀이나 되었다 한다. 마침내 입술이 부르트기까지 ---. 부모로서는 아들의 건강이 염려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 일의 중심에는 애초부터 번역자 김현욱이 있었기에,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애당초 누구도 예상못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일베'(일간베스트)현상이 문제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일베'가 사회적 문제가 되는 바로 그 순간에 "거리로 나온 넷우익"이 출판되었고, 출판사의 홍보전략 역시 그 점에 맞추어졌기 때문이다. 책의 표지에 씌운 띠지에 "한국에 일베가 있다면, 일본에는 재특회가 있다"라는 문구를 눈에 띄게 제시했던 것이다.
나는 이 표지 사진을 메일을 통해서 전달받았을 때, 비로소 "일베"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일베가 뭐지 이런 정도로 지금의 인터넷 세상에 어두웠던 것이다. 역자는 어느 만큼 일베를 떠올리면서 이 책의 번역을 해왔는지 알 수 없지만, "옮긴이 후기"를 보면, 뭔가 '우리 안의 재특회'라는, 우리 내부에 '재특회와 같은 관점'이 존재한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은 분명하였다. 그런 언급을 보면, 역자가 나보다는 훨씬 더 우리 사회를 깊숙이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일베'가 문제될 때, 한국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일베'에 대한 정보, '일베'에 대한 분석도구, 또는 '일베'에 대한 이해의 틀 --- 등, 그 어느 것 하나 갖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야스다씨가 재특회에 대해서 책을 쓴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일베에 대해서 누군가 책을 써주기를 바란다." 그러한 작업의 여부는 좀더 지ㅕ보아야 할 것이지만, 그런 조건 속에서 '일베'를 비추어 보는 거울로서 "거리로 나온 넷우익"이 유일했던 것이다. 마침 제공되었던 것이다. 가히 그러했다. 누구 말마따나, '일베'와 '재특회'는 일란성쌍동이처럼 보인다. 너무나 닮은 점이 많았던 것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익명으로, 글쓰는 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사회적 약자(로 오래도록 처해있었던)에 대해서 혐오발화(hate speech)를 반복해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차이로서 지적된 것은, 재특회는 오프라인으로 조직화하여 "거리로 나와서" 매주 시위를 통해서 혐오발화를 공공연히 반복하고 있으나, '일베'는 아직까지. 현재까지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 다르다.
2
이러한 '일베'에 대해서, '재특회'와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들이 한국에서는 언급되고 있는 것같다. 거기에는 야스다씨나, 야스다씨 귀국 이후에는 역자인 김현욱 역시 언론을 통해서 그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고 있다.
야스다씨의 이야기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사이트 폐쇄와 같은 권력기관에 의한 강제적 조처에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언론의 통제를 권력에 부여한다면, 그 부메랑은 언론인인 자신에게로 곧 돌아오리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현실공간이든 사이버공간이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범죄행위가 있다면, 응당 그에 대해서는 도덕적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이트 폐쇄'와 같은 강제적 조처가 최선의 약방문인 것은 아닐 것 같고, 또 다른 문제를 불러올 것이다.
더욱이 "거리로 나온 넷우익"에서, 저자로서 강조한 것이 '재특회'가 표층이라면 그 심층에 지하수맥이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지하수맥은 무엇이겠는가? '일베'에서, 지역감정을 확산하면서 특정지역 인사들에게, 또 여성들에게 혐오발화를 반복하게 된 사람들이 그렇게 하게 된 사회심리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을 용서하거나 용납하자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배경 속에서 치유책을 찾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야스다씨가 "재특회는 일본 사회가 낳았다"고 말한 것은, 일본사회의 변화가 없다면 재특회는 게속되리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거리로 나온 넷우익'에서, 나로서는 가장 인상깊게 받아들인 것이 제9장이다. 저자는 그들의 심성이라든가, 가정환경이라든가를 살피면서, 그들에게는 "인정받고 싶다"는 인정욕구가 있음을 부각해 냈다. '유사가족'이라는 말도 나왔다. 이러한 언급이 중요한 것은, 결코 "그렇게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따위 비인간적인 언행을 했구나"라는 것을 부각싴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겨로 우리와는 다른 존재 --- 이를 '타자'라고 말해 보자 ---로 밀쳐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타자'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라 함으로써, 비록 야스다씨가 '재특회'를 배외주의자, 또는 인종차별주의자(racist)로 보면서 비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타자'나 '배척'의 대상으로만 보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들의 책임 속에 우리의 책임도 인정하자는 것이 아닌가, 라고 나는 본다. 잘못된 생각, 잘못된 관점, 그리고 잘못된 언행에 대해서는 엄격한 비판을 하면서도, 그들을 타자화하지는 않는 것, 이 '자비의 길'을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 그 '일베'가 바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이 낳은 것이기 때문이고, 그들 역시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야스다씨가 말한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라는 말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알고 보니, 그 재특회가 바로 내 곁에 있었다는 '놀라움'도 하나의 의미일 것이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또 다른 의미는 다시금 우리의 '이웃'으로 통합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이다. 겨로 괴물이라거나 적이라거나 --- 그런 타자는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러한 염원을 우리는 가져야 할 것같다.
3
일본의 재특회보다 우리의 '일베'는 좀 더 어려운 문제를 우리에게 남겨준 것으로 나는 본다. 이 점이, 어쩌면 '일베'와 '재특회' 사이의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싶다. 재특회의 혐오발화에 의한 피해자 --- 재일 코리언 --- 들은, 드러내놓고 재특회를 공격하거나 비판하기 어렵다. 재일 코리언은 일본이라는 '물' 위의 '기름'같은 존재라면, 재특회는 어떻든 '일본'이고 '물'이기 때문이다. 재일 코리언으로서는 은인자중할 수밖에 없다. 그 대신, 재일 코리언을 위로하는 것은 반(反)재특회 데모를 해주는 일본인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일베'로부터 피해를 보는 사람들과 일베를 비판하거나 문책하거나 할 세력/사람들이 같은 것이다. 여기서 어려운 점이 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침해라든가, 지역감정의 극복이라는 우리나라의 보편적 지향성에 대한 침해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선을 그어야 하겠지만, 그들의 주장 뒤에는 ---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 정치적 입장, 정치적 사상, 그리고 정치적 세력이 가로놓여 있다. 나로서 걱정되는 것은, 그런 점이 드러나게 되어서 논란이 가열된다면 자칫 우리 사회의 고질병같은 진보 대 보수, 이념대립을 더욱 격화시킬 우려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입은 '상처'를 우리 스스로 다독여가고, 쓰다듬어 가면서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상처를 남겨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줄 수 있을까? 과연 인터넷 공간은 우리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는 공간인가, 아니면 더욱 할퀴는 공간인가?
나로서는 "거리로 나온 넷우익"이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받는 사회, 세계, 그리고 국제관계 형성에 도움이 되길 염원한다. 동시에 그런만큼 계층간의 갈등이나 좌우의 이념적/정치적 대립을 증폭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역자 김현욱은 MBC라디오의 왕상한 교수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전체적으로 사회가 불관용한 방향으로 관용이 없어지는 방향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일베문제만 해도 그렇고, 인터넷을 봐도 점점 과격한 주장들만이 나오고 점점 양극단으로 주장이 갈려서 서로 비판하고, 그리고 상대방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꼭 상대방을 섬멸시켜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그러한 분위기는 이러한 재특회와 같은 일본의 넷우익과 비슷한 것같아서 걱정스럽게 생각합니다."(6월 6일, MBC라디오 방송)
관용(똘레랑스, tolerance)의 사회를 향하여, 우리 모두 깊은 성찰이 있었으면 좋겠다. "거리로 나온 넷우익"이 그런 게기가 된다면, 정말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겠는가. 고마운 일일 것이다.
(2013. 6. 12, 高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