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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아이들과 함께한 라오스의 여정(10.26.-10.30)을 기억하며
10월은 정말 분주한 나날이었다. 50명과 100명의 두번의 컨퍼런스를 직접 준비하여야 했고, 체크인과 아웃을 책임져야 했으니 스트레스는 예상를 뛰어 넘었다. 여러나라에서 비자 문제로 참여하는 인원이 20여명이나 줄어드는 바람에 호텔 메니저와 더 많은 실랑이를 해야했지만 그때마다 미소로 대해주며 마지막까지 친절을 잊지않은 태국 사람들이었다.
컨퍼런스가 끝나자마자 찾아온 손님들 덕분에 쉴 수가 없었다. 24일은 우리 본부 대표 부부와 함께 집에 왔는데 전에 터키에서 같이 있었던 선교사를 보고 싶다고 하여 집으로 오라고 하였다. 마침 캄보디아의 최경호 선교사가 부친의 긴급상황 때문에 한국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여 딸이 비행기표를 끊고 집에서 시간을 같이 보냈다. 저녁에는 같이 후지에 가서 식사하고 공항으로 모셔다 드렸다. 이들을 배웅하자마자 한국에서 친구인 이영숙 원장이 세미나 참석차 들어왔다. 만나서 같이 므앙마이 시장에 들러 과일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니 열한시가 넘었다. 오늘도 역시 긴 하루였다.
25일날 저녁은 세미나 참석차 아내가 한국으로 가는 날이다. 아침은 과일로 먹고 오전에는 카오마오 카오팡으로 가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아내는 친구와 함께 맛사지를 하였고 나는 돌아와서 커피를 볶았다. 아내를 데리고 오다가 메히야 시장에서 찹쌀밥이며 무삥이며 생선구이를 사가지고 와서 친구와 함께 태국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저녁 후에 는 한국으로 먼저 가는 아내를 공항으로 바래다 주었다.
26일 오전에는 한국에서 온 이원장과 캄보디아에서 온 선교사님 부부와 함께 치앙마이 선교역사 탐방을 시켜주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윤선교사님 부부가 오늘은 이영숙 원장님네를 자신들이 모시겠다고 하여서 캄보디아 선교사님만 내가 안내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새벽에 일어나자 마자 카톡이 울렸다가 멈췄다. 다시 카톡을 해보니 남편이 침대에 앉아있다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넘어져서 눈썹 밑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병원에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였다. 나는 지금이라도 데려다 줄 수 있으니 가시든지 아니면 식사하고 아침에 가더니 하자고 하였더니 식사하고 가자고 하다가 나중에는 혼자 가겠다고 하였다. 덕분에 내가 세분을 모시고 역사 탐방을 하게 되었다. 이영숙 원장을 모시고 호텔에 가서 오전에 역사 탐방을 하였다.
오후에는 이 원장이 호텔로 가고 싶다고 하여 오성급 호텔인 라띠 란나를 예약하였다고 하여 그곳에 데려다 주었다. 치앙마이에서는 좋은 호텔이었다. 돌아오자마자 라오스로 가는 가방을 쌓다. 너무 피곤하여 잠시 휴식을 취했다. 쏭태우를 저녁 7시 반에 오라고 하였다. 저녁 예배가 끝나고 잠시 쉬다가 쏭태우가 와서 버스터미날까지 열명을 데리고 가야했다. 아이들과 작별하고 터미널로 갔다. 두명이 그곳으로 오기로 했는데 오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거의 다될 무렵에 그곳으로 왔다. 간신히 차에 올랐다. 아이들이 차에 앉은 것을 확인한 다음에 나는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우리가 라오스를 방문하고자 하는 것은 라오스에 2년간 단기 선교사로 가있으면서 검도를 가르치고 북까폐를 운영하며 사람을 돕고있는 위치안을 격려하고 검도를 하는 우리 그레이스 홈 아이들이 그곳에 가서 같이 검도하며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계를 보여주고자 함이다.
26일 저녁 예배후에 쏭태우를 대절하여 아케이드로 향했다. 라를 포함하여 9명의 아이들(쏨차이, 남딴, 남완, 몬, 바오로, 마튜, 폰, 마나)과 두명의 어른 등 총 12명이었다. 아케이드에서 라오스 국경인 농카이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는 여자는 여자들끼리 남자는 남자들끼리 큰 아이와 작은 아이로 팀을 이루게 하였는데 라는 가장 어린 마나와, 몬은 폰과 남완과 남딴이 같이 앉았고 쏨차이는 바오로와 같이 짝이 되었다. 나는 마튜와 같이 앉았는데 자신이 창가에 앉고 싶다고 하여 그렇게 하라고 하고 아이들을 점검한 후 자리를 잡자마자 나는 그만 잠이 들었다. 19일부터 시작된 회의로 인하여 너무도 지쳐 있었고 계속된 손님으로 인하여 나는 탈진 일보 직전이었다. 버스를 타고 자리라 생각하였는데 스르르 눈이 감겼다. 저녁 8시반에 출발한 버스는 다음날 아침 8시가 넘어서야 태국 북부 라오스 국경지역인 농카이의 터미널에 멈췄다. 우리가 내리니 사람들이 물밀듯이 먹이를 구하는 굶주린 동물들처럼 우리를 에워쌓다. 우리에게 어디로 가냐며 운송 수단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조금 있으려니 위치안이 도착하였다. 내가 나서서하면 조금은 절약하고 잘하겠지만 위치안에게 맡겨보기로 하였다. 위치안은 오토바이에 승객과 짐을 싣도록 고안된 뚝뚝이가 세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내 생각 같아서는 두대에 짐을 싣고 충분할 것 같은데…. 일단 맡기기로 하였으니 따르는 수 밖에…
뚝뚝이를 세대에 나눠타고 가다가 여권이 없는 라와 남완을 위해 라오스로 들어가는 서류를 만들기 위하여 이민국으로 갔다.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번호표는 228번이었는데 170번을 부르고 있어서 족히 30분 이상은 기다려야 했다. 그러면 바로 근처에 있는 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기로 하였다. 각자 주문하여 아침을 먹고 있으려니 라와 남완이 서류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2박3일 동안 라오스에 다녀올 수 있는 서류, 아세안 10개국은 여권이 없이 주민등록증만 있어도 2박 3일은 다녀올 수 있다. 하지만 하루가 늦어지면 200바트를 벌금으로 내야한다고 하였다. 아이들을 다시 뚝뚝이에 태우고 농카이 태국 이민국을 벗어났다. 각자 20바트씩을 내고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라오스 이민국 앞에서니 1인당 one way pass 통행료로 50바트씩을 내라고 한다. 지불하니 카드를 하나씩 여권에 끼워 주었다. 그곳에는 분명 45바트라고 써 있는데 하는 수 없이 50바트씩을 내고 통과하였다.
아이들이 다 나오자 어떤 아주머니가 흥정을 한다. 어디를 가느냐? 위앵짠에 간다고 하자 봉고를 타고가면 2천바트를 내라고 한다. 그럼 쏭태우를 타고가면 얼마냐고 하였더니 600바트(약 20$)라고 하였다. 그러면 쏭태우로 가자고 하여 밖에서 기다리는 쏭태우를 타고 로고스 컬리지(Logos College)로 가기로 하였다. 삼십분 이상을 달려 로고스컬리지로 가는 길은 이전보다 많아 발달해 있었다. 새로운 건축물이 많이 들어섰고 길도 깨끗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22년전인 1996년에는 이 길을 김두화 목사님하고 같이 갔었는데, 그 당시 이곳 라오스에는 단 한 가정의 선교사와 농카이에서 이곳을 오가는 또 한가정의 선교사가 있었을 뿐이었으나 지금은 150여가정의 선교사가 있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낄 뿐이었다. 그후에도 수차례 이곳을 다녀갔었지만 라오스는 언제나 새롭다.
우리는 도착하여 에어컨이 있는 북 까페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아이가 이곳에 오면서 시작한 북까페를 보면서 그리고 이곳에 2년에 걸쳐서 정착한 아이의 모습이 감사했다. 아이들에게 차가운 물로 대접을 하였고 조금의 대화를 한후 아이들은 여자들은 5층으로 남자들은 지하로 각자의 숙소로 갔다. 우리는 마침 5층에서 연습하고 있다는 찬양단을 보기 위하여 그곳으로 갔다. 단원들은 이미 연습을 끝내고 돌아갔고 젊은 담당자만 있었다. 웬지 낯익은 얼굴이어서 인사를 하였더니 지난 5월에 캄보디아에서 만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얼마간의 이야기를 마친후 그분들은 호텔로 가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가기로 하였다. 학교 앞에서 걸어가는 거리에 쌀국수 집이 있었다. 태국의 쌀국수와는 조금은 다른, 양도 조금 많았고 아이들은 너도나도 같은 것으로 쌀국수를 시켜 먹었다. 아이들은 쌀국수가 태국 것에 비하여 쯧쯧하다고 하였다.
저녁은 정 선교사가 신닷까올리라는 고기 뷔폐집에서 대접하겠다고 하였다. 아이들과함께 그곳으로 가서 식사를 하였다. 아이들은 식당 종업원들이 눈총을 줄 정도로 열심히 먹었다. 배가 불러 다시 로고스로 왔다. 아이들과 함께 하루 이야기를 정리하고 아이들하고 자려고 잠자리를 봐 노았으나 정선교사가 집으로 가자고 하여 부득불 따라가게 되었다. 이미 탁구를 치고 지쳐있는 나에게 사십분 정도 배드민턴을 하였을까 씻고는 마주 않아 사역 이야기를 나누다가 12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식사후에 우리는 주변에 있는 관광지를 둘러보기로 하였다. 반 사덴이라는 산속에 있는 커다란 호수(저수지)였는데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고 중국 자본이 잠식하고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보트를 타기도 하고 경치를 즐기고 있었다. 아이들도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 네시가 다되어 로고스로 돌아왔다. 조금 쉰 후에 6시에는 배선교사님 부부가 우리 아이들 저녁을 대접하기로 하여 그때 만나기로 하고 아이들더러 쉬라 하고 우리는 탁구를 치러 갔다.
저녁 6시가
되어 실버 선교사로 와있는 배선교사님 부부가 우리 아이들을 식사 대접하겠다고 하여 한국 식당으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우리 일행 10명과 선교사님 부부와 라오스에서 돕고 있다는 현지의
청년과 대규모의 군단을 이끌고 한국 식당으로 갔다. 치앙마이에서 맛갈스런 한국 식당이 없는데 비하여
라오스에는 맛있게 한국 음식을 하는 식당들이 있어서 좋았다. 아이들은 배고픔을 몰아내기라도 하듯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배가 불렀는지 아이들은 돌아다니기 시작하자 식당을 나섰다. 숙소로 가기전에 라오스의 명물인 개선문을 모방한 라오스의 개선문인 빠뚜사이(승리의
문이라는 의미)를 보
정선교사 집으로 가서는 다시 배드민턴을 쳤다. 어제와는 달리 공도 잘 보이고 훨씬 잘 되었다. 30여분을 치고 난후에 같이 이야기를 하고 난후 열두시가 다되어 잠을 잤다.
오늘은 라오스에서 마지막 날이다. 아침에 만난 아이들은 무더운 더위에 어디를 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계획하지 않은 시간은 무의미하게 흘러간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이곳 수도의 상징탑처럼 되어있는 탓루앙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이미 수번을 다녀왔지만 아이들과 함께 태양열이 난무하는 거리를 가로질러, 우리가 머무는 곳에서 거의 삼십분여분을 걸어 드넓은 광장을 지나 그곳에 도착하였다. 탓루앙은 라오스의 상징으로 노란 황금색의 불탑이다. 원래는 소규모로 지어진 것이었는데 1560년에 위엥짠에 천도를 한 세타티랏왕이 새로운 수도에 힘을 부여하고 국민들의 분열된 힘을 모으기 위해 7층 높이의 28미터 높이에 금빛을 두른 탑을 건설하였다고 하였다. 그 탑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들어있는데 당시 인도의 사절단이 가지고 온 가슴뼈를 묻었다고 한다. 그 탓루앙 동쪽 부분에는 당시의 통치자인 세타티랏의 동상이 서있다. 사실인지 확인을 하여야 할 것 같은데 란나왕국에도 세타티랏이 있어 란나공주와 결혼하여 1년 동안 계약결혼을 통하여 치앙마이에서 통치한 후에 라오스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다시한번 확인하여야할 역사의 기록이다.
탓루앙 근처에서 아이들하고 커다란 나무가 있는 그늘진 곳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잔디밭에 앉아서 라오스에 온 소감을 물었다. 아이들 대부분이 생전 처음으로 다른 나라에 온 것이었다. 여권이 없어도 올 수 있는 이웃 나라, 먼길을 왔는데 이젠 다시 돌아가야 한다. 저마다 남다른 감회가 있을 터였다. 처음와 본 라오스의 소감과 자신의 경험을 나누었다. 라오스는 태국보다는 잘 살지 못하지만 순진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태국인들은 라오스를 동생의 나라처럼 생각한다. 종족도 태국인들과 거의 같은 종족이고 거의 모든 지방에서 태국 TV를 볼 수 있고 태국 돈이 통용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곳에서 있으면서 라오스의 현실과 태국의 현실을 볼 수 있었다. 아울러 우리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더 큰 꿈을 꾸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기꺼이 그것을 위해 댓가를 지불하고 싶다. 그곳에 있는 위치안도 우리도 더불어 함께 함으로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