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은 아름답다
가인 이은미
어두운 새벽 기운을 가르며 버스에 올라 일본 여행객 팀과 합류하였다. 잠을 설치고 나와 공항을 향하면서도 들뜬 마음의 웅성거림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어두운 차창에 성애가 서렸다. 손가락으로 별 의미 없는 그림을 그리고 차창 밖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형체가 선명하지 않은 건물과 가로수들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으로 가는 일본 여행이다. 기침은 가끔 쿨럭였지만 일본에서 과연 무엇을 체험하고 감동을 받게 될지 기대되고 설레기도 하였다.
하얀 구름위에 비행기가 두둥실 떴다. 하얀 솜 나라에 온 듯 환상의 동화나라에 잠시 취해있다 보니 검은 비늘 물결로 번들 번들거리는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었다. 1시간 40여 분 정도 지났을까? 오사카 간사히 공항에 도착하였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대기하고 있는 버스로 갔다. 일본인 버스 기사가 친절히 우리들을 맞이하여 우리들의 여행 가방을 짐칸에 질서 있게 실었다.
관광버스는 청결했고 밖으로 보이는 오사카의 거리도 깨끗했다. 처음으로 도착한 관광지는 오사카성, 아직 겨울인데도 진입로 입구에 서 있는 고목에는 연초록의 이끼가 싱그럽게 가득 번져가고 있었다. 우리나라보다 남쪽이라 봄의 기운이 더 빨리 온 것 같았다. 노란 금장식 문양을 곳곳에 드러내고 있는 오사카성은 단아하면서도 우아하고 정갈한 멋이 있었다. 성벽 아래로 잔잔히 펼쳐지는 호수와 어우러지며 비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어둠이 서서히 밀려오고 간간히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찬기가 스멀스멀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가이드가 안내하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귀여운 고양이가 여유 있게 어슬렁어슬렁 오가고 있었다. 식사 후 천문대에 들려 까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무리를 감탄사로 감상했다.
숙소인 호텔에 들어서니 피곤하기도 하고 몸의 열도 조금 오르는 듯하였다. 기침도 더 나는 것 같았다. 감기약을 챙겨 오지도 않은 것을 생각하고 이 여행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용기를 내어 가이드에게 일본 감기약을 얻어 주십사 도움을 청하였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다는 미남 가이드는 친절하게 나의 요구를 수용했고 호텔 로비의 여직원에게 다가 갔다. 여직원은 놀랍도록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가이드는 일본어로 내가 감기에 걸린 내용을 전달하였고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하이”하고는 이어 작은 3봉지의 감기약을 가이드에게 건넸다.
노랗고 보드라운 가루 감기약이었다. 쓴 맛이 났지만 일본 감기약은 효능이 좋아 곧 나을 거라 생각하며 곤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조금 감기 기운이 가라앉은 듯한 다음 날은 방문지마다 즐거운 체험을 하였다. 저녁때가 다가오자 날씨가 흐려지는가 싶더니 간간히 눈발이 날리고 추웠다. 그 날 숙소는 료칸이라 불리는 일본의 전통 여관이라고 하였다. 일본의 전통의상 유카타를 입고 게다 신발을 신은 중년의 남자가 우리들을 맞이하였다. 넓은 식당용 방에 모여 김까지 단 일본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배정된 방으로 갔다. 창호지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방바닥에 다다미가 깔려있고 탁자에 찻잔 도구가 놓여져 있다. 우리는 료칸 입구에서 받아온 유카타를 입고 분위기를 내어 차를 먼저 한 잔씩 마셨다.
그리고 료칸에 있는 욕탕에 갔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면 여정의 피로와 감기가 더 사라지지 않을까, 기대하며 실내에서 밖으로 이어지는 노천탕으로 나갔다. 밤하늘엔 달빛이 은은히 흐르고 둘러쳐진 대나무 숲에서는 청량한 기운이 코끝에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 편안함과 운치로 나는 점점 빨려 들어가 취했다. 그러나 아뿔사! 온풍기만이 도는 다다미방에서 나는 더욱 열이 올라갔고 기침도 잦아져 전날 호텔에서 준 약을 또 먹었다.
다음 날의 여행은 완전히 포기하였다. 열도 있고 몸의 활동 기운도 떨어져 일행들이 방문지 관람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차 안에서만 있어야 했다. 하얀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나라 사슴공원에 간다고 일행들은 모두 버스에서 내렸다. 혼자 버스에 남아 쿨룩거리며 의자 옆으로 눕자 버스 기사가 다가와 감기약을 미소 지으며 건넨다. 호텔에서 받았던 약과 같다. 고마운 마음에 나도 미소를 보내고 약을 받았다. 기사는 나를 차 안에 있게 하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 버스에 남아있는 여자인 내가 불편할까봐 이리라. 그리고 다른 버스를 몰고 온 기사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 위에도 눈은 하염없이 내렸다.
혼자 버스 의자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발은 더욱 굵어져 함박눈으로 쏟아져 내렸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두터운 눈옷을 입었다. 어디선가 까만 까마귀 떼들이 날아와 ‘까악까악’ 소리를 내며 그들의 눈 세상을 축하하듯 종횡무진 비상하였다. 흑백이 조화를 이루는 한 폭의 수묵화가 펼쳐졌다. 그 풍경 속에는 여전히 두 사내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은 감동으로 각인되었다.
일행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버스로 돌아왔다.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간사히 공항으로 향하였다. 버스기사는 또 우리 일행에게 여행 가방을 차 트렁크에서 일일이 꺼내주며 잘 가라고 환송하였다. 공항 안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버스 기사에게 마지막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버스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어찌 불러야 할지 몰라 손으로 그의 등을 살짝 치고 궁여지책으로 꺼낸 말 - “아리가도 고자이마스!” -
그는 활짝 웃는다. 그리고 잘 가라며 손을 흔든다.
일본 여행은 한 폭의 수묵화와 함께 친절로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다. 그 고마웠던 친절이 감동의 울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전달되는 배려의 친절이 어느 그림 못지않게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