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후 그리스도교 신학은 사회정치적, 문화적 흐름과 함께 하면서 끊임없이 다변화되고 다각화되는 양상을 보여왔다. 또 철학 및 인문학 등과의 대화 시도를 통해 여러 새로운 신학적 조류를 양산해왔다. 민중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환경신학, 성서비평신학 등등…
이러한 경향은 현대 사회에 주어진 그리스도교 교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재조명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현대에 다변화된 그리스도교 신학은 각 교회 및 교파들이 빠질 수 있는 전통(전례, 교리를 포함한)에 대한 편협한 해석과 매너리즘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우선 그리스도교 신학을 복합적으로 세분화시킨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로 교회 및 교파를 막론하고 그리스도교는 보편성(Catholicity)을 추구해왔다. 동방정교회, 로마 가톨릭, 성공회, 그리고 많은 개신교회들은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보편성을 추구해왔고 그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현대 사회의 맥락에서 특정한 사회문화적, 개별적 상황에 따라 세분화된 현대 신학의 각 경향에는 각기 다른 개별적 그리스도인들 및 공동체간의 폭넓으면서도 깊은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보편성 지향을 위한 상호 이해와 대화를 저해할 위험성도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다변화되고 다원화된 현대 사회의 급격한 흐름 속에서 길을 잃고 서로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도 있음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가령 흔히 언급되는 ‘진보적 신학’과 ‘보수적 신학’이라는 이분적 프레임을 보자. 무엇이 진보적인 신학이고, 무엇이 보수적인 신학인가? 무엇이 진보적이고, 무엇이 보수적인가? 필자는 예전에 캠퍼스에서, 사회운동에 적극적인 ‘활동가’들의 운동 현장에서, 그리고 교회 내 지체들 사이에서, 서로 각기 다른 ‘진보’와 ‘보수’의 개념을 가지고서 진보와 보수를 논하는 광경을 종종 목격하곤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대화는 아무리 서로가 의식적으로 열린 대화와 이해를 추구한다 한들, 소모적인 논쟁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서로 같은 단어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과 정의를 지닌 채, 서로 다름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배제된 상태에서 서로에게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정한 개념에 대한 해석과 정의는 상당히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다. 종종 확증편향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교회에서,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전반적으로 진보와 보수는 고정된 2차원적 스펙트럼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근대와 이른바 ‘탈근대’를 지향하는 ‘후기 현대(Postmodern)’ 사회를 거친 현 시점에서 2차원적인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 (심지어 진보, 보수보다도 더 고정된 개념인) 좌와 우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결코 진보와 보수, 좌와 우의 개념 자체가 폐기되리라는 의미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더욱 복합적으로 다각화, 다차원화되리라는 의미에서 한 이야기이다. 페미니스트들이 논하는 (가부장제로부터의) 해방이 다르고,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계급)해방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이른바 민중신학, 해방신학, 생태신학, 여성신학은 카테고리상으로 ‘진보적’이라고 불리지만 각기 다른(때로는 전혀 다른) 차원과 개념상의 ‘진보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 사이에 접점이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시 웨슬리 신부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현대의 각 교회 및 교파들이 가지고 있는 웨슬리 신부와 웨슬리안 신학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비판적으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우선 감리교를 위시한 주요 복음주의 개신교단들은 존 웨슬리 신부를 형식화되고 복음의 정신을 상실한 영국교회(즉 잉글랜드 성공회)에 대한 종교개혁자이자 복음을 기초로 하여 시대정신을 실천한 사회개혁자요, 선각자로 본다. 또한 많은 오순절 계통의 그리스도인들은 웨슬리 신부를 오순절 운동의 선구자로 본다. 딱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한편, 성공회 공동체 내에서는 웨슬리 신부를 성공회 역사에 있어 대표적인 사상가요, 신학자이자 사회 운동가로 바라보는 시각이 강한 것 같다. 이들에게 있어 웨슬리 신부의 행적은 그 자체로 성공회의 복음적, 보편적 지향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른바 상당수 ‘복음주의’ 성공회 교도들에게 있어 웨슬리 신부는 성공회 전통이 지닌 개신교로서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드러낸 위대한 선각자이다. 역시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현대의 이러한 해석들은 그 자체로 웨슬리안 신학이 가지고 있는 역동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교파적 관점으로 인한 확증편향을 거두고 웨슬리 신부의 신앙과 삶의 여정, 그가 주창한 교의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분명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은 종교개혁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또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성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출발한 은총의 신학과 성서 중심의 신앙을 강조했다.
하지만 전술했던 대로 웨슬리 신부는 잉글랜드 성공회와 청교도 양편으로부터 조롱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길을 가던 도중에 괴한으로부터 습격을 받았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평생 동안 온갖 중상과 비난이 끊이지 않았는데, 당대에 그에게 제기된 음모론과 비난 중 하나가 바로 가톨릭을 복권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에 그는 중세 로마 가톨릭 신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탐독하고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1)
게다가 그는 평생 독신을 유지하며 살았는데(물론 결혼의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직자로서 독신 생활을 해왔다는 것에 대해 그는 나름의 자부심을 가졌던 것 같다.2) 또한 그는 ‘신성클럽’ 시절부터 매 예배마다 성찬례를 거행했는데, 이는 당시의 영국 성공회의 경향에서는 (비국교도 개신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이점에 있어서는 후대의 성공회 옥스포드 운동과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가 선배 종교개혁자들과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사례들이다.
동시에 그는 고대 교회의 교부 신학과 예배의 원형에 관심이 있었다. 그가 매 예배 때마다 성찬례를 집전했던 것도 고대 교회의 전례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에서 기인한다. 특히 그는 고대 동방정교회의 교부/모들을 통해 체계화된 신화(Theosis)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를 개신교적 맥락에서 창의적으로 수용했다. 회심, 중생, 칭의를 거쳐 ‘성화(Sanctification)’에 이르는 감리교의 독특한 구원론은 바로 웨슬리의 동/서방 신학의 창의적인 융합, 그리고 그 자신의 신앙 체험에서 기인한 것이다.
웨슬리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는 오랜 기간의 공부와 기도, 체험을 거쳐 형성된 보편적 구원에 대한 믿음을 시대적이고 실천적인 맥락으로 끌어들였다. 비록 당시 서구 백인 개신교 성직자로서 한계를 온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당시 비서구권, 비그리스도교 문화권 주민들에 대한 착취와 노예 무역을 반대했다. 그리고 복음 전파의 동지로서 여성들을 끌어들였고, 평신도 전도사들의 역할을 중시했다. 그는 고대로부터 이어져오는 전통을 중시하고 존중한다는 점에 있어서 보수적이면서도, 전통을 실천적으로 재조명하는 데 있어서는 퀘이커들이나 재세례파들 못지 않게 급진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웨슬리 신부는 자신이 지향한 신학적 열망, 즉 그리스도교 교회의 원형 회복을 구현할 수 있는 교회가 바로 성공회라고 보았다. 이것이 그가 그토록 잉글랜드 성공회 내에서 박해와 소외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성공회에 남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신학적 지향은 분명 당시 칼뱅주의 성향의 청교도들은 물론이고, 잉글랜드 성공회 주류(웨슬리의 신앙의 토대이기도 했던 고교회파를 포함해서)에게도 낯선 것이었다. 결국 성공회의 부흥과 개혁으로 시작한 감리교 운동은 웨슬리 말년과 사후를 거치며 성공회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대 교회에 있어 웨슬리 신부의 감리교 운동은 양면적 성격을 지닌다. 하나는 성공회의 재발견이며, 다른 하나는 성공회의 안티테제로서의 성격이다. 분명 웨슬리 신부는 성공회 안에서 ‘가톨릭 전통을 지키는 개신교, 교리에 너그러운 정교회’3)로서 복된 교회의 가능성을 보았다. 하지만 당시 잉글랜드 성공회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또 오늘날 주요 개신교파들의 뿌리가 되는 주류 종교개혁의 계보에 있으면서도, 화석화된 종교개혁의 교의에 도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처럼 웨슬리 신부의 신앙과 감리교 운동은 다차원적이고 다층적인 면모를 지닌다. 어떤 의미에서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이지만, 다른 의미에서 보면 진보적일 뿐 아니라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감리교 운동은 그 자체로는 주류 종교개혁의 흐름 속에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공회 고교회파, 동방정교회, 심지어는 로마 가톨릭의 영성 전통과도 접점이 있다. (필자는 그가 후대의 성공회 가톨릭(Anglo-Catholic) 부흥 운동이었던 옥스포드 운동의 전조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또 실천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퀘이커와 재세례파 같은 급진적 개신교 소수파들과 맥이 닿아있다.
그럼에도 현대 한국 교회에서 웨슬리안 신학은 다소 2차원적으로 해석되는 것 같다. 주류 보수적 개신교파들은 당대의 개신교회의 테두리를 넘나들면서 폭넓게 영성을 추구했던 웨슬리 신부의 면모에 대해 그리 주목하지 않는다. 그리고 칼뱅파(개혁교회, 장로교회, 이른바 '저교회파' 성공회4))들과 심각할 정도로 갈등을 빚었던 초기 감리교 운동의 역사를 애써 외면한다.5)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주류 감리교회는 장로교회의 교의와 예배, 신학적 측면에서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른 한편에서, 성공회 공동체 내에서 감리교가 성공회에서 나왔기 때문에 한 뿌리라거나, 웨슬리 신부는 성공회 복음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선구자6)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실제적으로는 그렇게만 보기 힘든 다각적인 요소가 존재함에도. 신앙에 깊은 열정을 보이는 에큐메니컬 성향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상처의 역사, 다름의 역사를 별로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교회일치’라는 측면에서 앞서 언급한 것들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개별적 그리스도인들 및 공동체 사이의 폭넓고도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것 같지는 않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그러한 이해가 선행되지 못한다면, (바람직한 갈등과 논쟁이 아닌) 소모적인 갈등과 논쟁을 야기하기 쉽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일치는 그저 획일화일 따름이다.
(다음 회에 계속)
1)<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영향이 웨슬리의 성결 신학에 깊게 배어있다는 견해도 많다. 요한 웨슬레의 신학(개정증보판), 조종남 지음, 대한기독교출판사, 1993, p.34-36 참조.
2)여담으로, 그는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믿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Mary,_mother_of_Jesus#Methodism 참조
3)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성모와 성 니콜라 교회)의 공식 홈페이지에 나온 표현을 빌린 것이다.
4)사실 <영국성공회 39개조 신조> 자체에 칼뱅주의의 영향이 깊게 배어있다.
5)존 웨슬리는 미국에 있는 감리교 운동의 교역자들에게 서간을 통해 칼뱅주의자들을 특히 조심할 것을 권고한 적도 있다. 요한 웨슬레의 신학(개정증보판), 조종남 지음, 대한기독교출판사, 1993, p.34-36 참조.
6)물론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현대 한국 교회와 영미권 교회에서 통용되는 ‘복음주의’와 완전히 부합된다고 보기도 힘들다.
참고자료
1) 요한 웨슬레의 신학(개정증보판), 조종남 지음, 대한기독교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