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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독립운동사
Ⅲ. 경제권 수호운동
4) 한상의 대응과 상권 자주성 회복운동
(1) 자유상인의 반특권·잡세철폐운동
갑오경제개혁의 일환으로 단행된 각종 특권회사 및 수세도고와 무명잡세의 철폐로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자의적 수탈이 크게 감퇴되었다. 그러나 그후 아관파천과 광무연간에 이르러 각종 이권이 열강에게 양여되고, 특히 일상과 청상이 국내상권을 침해하는 조건하에서 정부가 “민(民)을 위하여 상로(商路)의 자리(自利)를 권진(勸進)할 생각은 둔망(頓忘)”하였다. 또한 잡세(雜稅)를 복설(復設) 야 각항(各港) 각포(各浦)와 각장(各場) 각시(各市)에 여각주인(旅閣主人)이니 십일세(十一視)니 명색(名色)을 각처상민(各處商民)에게 침해(侵害)하고 있었다. 한국상민(商民)들은 비록 타국과 같은 상민보호를 기대하지 않았지만 소위(所謂) 상업권제(商業權制)를 외국인(外國人)의게 견탈(見奪)하고 내국상인(內國商人)은 불과(不過) 기잔여(其殘餘)를 수습(收拾)하야 승두박리(頓頭薄利)를 근득(僅得) 하고 있는 형편인데, 이들 상민에게 무명잡세의 성격을 띤 각종 명목의 영업세를 징수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상민들이 간신히 판비한 소자본도 ‘잡세 수응(酬應)’으로 낭패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상민제해(商民除害)’를 위해 조칙으로 병개(幷皆)혁파한 무명잡세가 또다시 나타나서 궁내부 및 경외 각아문의 이름으로 토색수렴이 각처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당시 상업진흥을 위해 제기되고 있던 과제는 외국상인으로부터 국내상권의 보호와 더불어 자유상업체제의 발전이었다. 갑오경장때 “중민(衆民)의 생업을 도탈(都奪)”한다는 도고권(都賈權)이 일단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광무연간에 이르러 궁내부는 “상민의 물종(物種)을 분확(分攫)”하는 분세(分稅)와, 그리고 특권상인으로부터 세금을 받고 도고권을 허가하고 있었으며 변형된 무명잡세를 수탈하고 있었다.
무명잡세의 혁파를 요구하는 소극적 저항으로서의 자유상민들의 호소는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몇 가지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사례 1] 황해도내 상민들이 경부에 호소한 내용을 보면, 광무 3년 봄에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가 궁내부(宮內府) 훈령(訓令)을 거(據)하여 각군(各郡) 포항(浦港)에 신설(新設) 여각(旅閣)이라 칭(稱)하고 각항(各項) 물종(物種)에 분세(分稅)를 정(定)하는데 소위(所謂) 파감(派監)이 각군(各郡)에 종횡(縱横)하야 상민물종(商民物種)을 분확정세(分攫定稅)함이 그 전(前) 근무소(勤務所) 구전(口錢)보다 배가(倍加)하야 상민(商民)들이 능(能)히·지보(支保)치 못하겠으니 각궁가(各宮家) 무명기지세(無名基址稅)와 도고분세(都賈分稅)와 포구분세(浦口分稅)를 일병(一并) 혁파(革罷)하야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사례 2] 평안도 삼화항(三和港) 상민들이 청국과 일본에 직무역으로 상무(商務)를 확장코자 “목선(木船)과 풍범(風帆)으로 토화(土貨)를 무(貿)야 아국해관(我國海關)에 납세(納稅)한 후에 청국과 일본에 전매(轉賣)코저 더니 불의(不意)에 해당(該當) 관찰사(觀察使)가 궁내부(宮內部) 훈령(訓令)을 승(承)야 도여각(都旅閣)을 창설(創設)하고 분세(分稅)를 수(收) 삼십명(三十名) 한졸(悍卒)이 항내(港內)에 열행(列行)야 미(米) 1석(石)에 5전(錢), 조(租) 1석(石)에 2전(錢) 5푼(分), 두태(豆太) 1석(石) 5전(錢), 잡화(雜貨) 1척(隻)에 추(抽) 11예(十一例) 지라 해항(該港) 상민(商民) 전영석(田永錫) 등(等)이 외부(外部)에 고소(告訴)”하고 있다.
앞에서 들은 궁내부 훈령을 칭탁하여 각지방에 도여각(都旅閣)을 설립하여 상민에게 징세하는 사례와 관찰사의 허빙경훈(虛憑京訓)과 천납세전(擅納稅錢)하는 사례도 많았다.
그리고 자유상인들로부터 불법수세하는 특권회사의 작폐로 인한 피해와 각지방대 대대장(大隊長)의 영이라 하여 상민에게 전곡을 탈취하는 행패를 언론기관인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어 알리면서 그들의 상권보호를 호소하고 있는 사례도 있다.
[사례 3] “전라도(全羅道) 상선(商船)이 부산항(釜山港)에 왕래(往來)하면 영남(嶺南) 연해(沿海) 제군(諸郡)을 지나는데 통영(統營)·창원(昌原)·웅천(熊川)·김해(金海) 제처(諸處)에서 보션회사(保船會社)라 칭(稱)하고 내왕(來往)하는 상선(商船)에 수세(收稅)를 하니 상선(商船)이 연해(沿海)를 내왕(來往)할 수가 없어서 외양(外洋)으로 가다가 종종 파선(破船)을 하니 작년중에 인명(人命) 상(傷)한 것이 부지기수(不知幾數)”라 하여 그 시정을 호소하고 있다.
[사례 4] “병영(兵營)이라 하는 것은 기예(技藝)나 연습(鍊習)하여 위국위민(爲國爲民)하는 것이 직책(職責)인데 고성지방대(固城地方隊) 병영(兵營)의 십여명(名)이 작당하여 대대장(大隊長)의 영(令)이라 칭(稱)하고 내왕상민(卒往商民)에게 침칙하여 전곡(錢穀)을 무수히 탈취(奪取)하고 음력 무술(戊戍) 정월(正月) 12일(日)에 강진군(康津郡) 상랍오는 명선옥의 배〔船〕에 방곡(防穀)한다 칭(稱)하고 엽전(葉錢) 70냥(兩)을 늑탈(勒奪)하고 ‘흉양상선’에 엽전(葉錢) 30냥(兩)을 늑탈(勒奪)하며 그외에도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니 이들을 중치(重治) 아니하면 상민(商民)들이 지보(支保)하기 어렵다”고 독립신문사에 호소문을 보내어 그 시정을 촉구하고 있다.
[사례 5] “해주지방대(海州地方隊)에서 진세(津稅)를 창설(剏設)야 군수(軍需)에 보용(補用)다 고 감관(監官)을 차송(差送)야 매삭(毎朔) 세전(稅錢)을 독납(督納)”하고 있어 ‘각상고소(各商告訴)’가 계속되고 있다.
[사례 6] “삼화항(三和港) 대안(對岸) 황해도(黃海道) 재령(載寧)·봉산(鳳山)·황주(黄州)·신천(信川)·장연(長連) 연해(沿海) 각포(各浦) 왕래(往來) 본국선척(本國船隻) 소재화물(所載貨物)에 늑징첩세(勒徵疊稅)가 황주지방대(黃州地方隊)에 의해 자행(恣行)되고 있어 각상고소(各商告訴)”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같은 잡세남봉(濫捧)으로 “민생(民生)이 태불능지보(殆不能支保)이니 무명잡세(無名雜稅)를 일병혁파(一并革罷)하라”는 조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각지방대의 경우 “칭이군수(稱以軍需)하고 천행늑정(擅行勒征)”의 폐단이 자심하였다.
(2) 시전상인·보부상의 상권 자주성 회복운동
갑오경장이래 개항·개시장이 증설되고 통상이 확대되었으나, 청·일상의 국내침투와 상권침해로 상업의 발달은 일분(一分) 효력도 없고 도리어 국내의 손해장(損害場)을 개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같은 외국상인의 상권침해에 대응해서 서울의 시전상인(市廛商人)들이 1898년 여름에 상무(商務)를 주의(主意)할 목적으로 조직한 황국중앙총상회(皇國中央總商會)는 그 장정(章程) 전문에서
요사이 외국장사는 흥왕(興旺)하고 본국장사의 생업은 조잔하여 심지어 전(廛)자리를 외국사람에게 방매(放賣)할 경우에 당했으니 이것을 막지 아니하면 일편(一片) 중앙의 기지(基地)도 보호(保護)키 어려우니 이것이 다만 전민(廛民)의 실업(失業)일 뿐 아니라 국계(國計)와 민생의 전판 생업이 끊어질지라.
하고 있다. 말하자면 황국중앙총상회는 외세의 상권침해로 인한 개별상인의 이해관계와 국민경제 전체의 문제와의 관련성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황국중앙총상회가 「규칙」에서 제시한 좌표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서울안의 지계(地界:廛界)를 정하여 그 구역내에는 외국인의 상행위를 허락지 말고 그 지계밖의 본국 각전(各廛)은 총상회에서 관할할 것.
② 농상공부에서 허가한 인지(印紙)는 총상회에서 구관(句管)하여 각도, 각군, 장시(場市), 항구, 포구, 객주(客主)회사에서 만물교역할때 무명잡세는 일체 금단하고 규칙을 정하여 이 인지로 신행(信行)할 것.
③ 각항 물가가 무단히 오르고 내리는 것은 본회에서 자세히 살피고 밝혀 좋을대로 관할할 것.
④ 본회 자본은 매 1고(股;1株)에 50원씩 정하되 금액다소는 각기 소원대로 할 것.
등으로 되어 있다. 황국중앙총상회는 시전상인들이 종래 누려 오던 상업상의 특권을 한성 개잔(開棧)과 갑오경장후에 외국상인들과 국내신흥자유상인들에게 침해당하고, 특히 일·청 상인의 상권침탈에 직면하여 국내신흥상인들도 총상회 회원으로 가입시켜 기득 우위권을 유지하면서 정부의 도움을 얻어 외국상인에 대항하여 상권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전국의 상업을 통할하는 상인대표단체의 중앙기구의 설립을 지향한 중앙총상회는 정부당국의 혁파 훈령에도 불구하고, 농상공부에 그 설립 허가를 강청(强請)하고 변칙적인 실력행사로 이를 관철시키고 있다. 총상회는 1898년 10월 18일에, 근일(近日) 외국인(外國人)이 내지 각군요지(內地各郡要地)에 개시(開市)즉 대한안민(大韓人民)의 상권(商權)이 외국인(外國人)의게 전귀(全歸)니 기불개탄(豈不慨歎) 리오……통상조약을 의(依)야 내지각군(內地各郡)에 소재(所在) 외국인(外國人) 상점(商店)을 일일(一一) 조사(調査)야 일체(一切) 철거(撤去)케 하야 인민(人民)의 상업(商業)이 흥왕(興旺)케 거시 역시(亦是) 총상회(總商會) 목적(目的)임을 천명하고, 독립협회와 함께 각기 총대위원 3명씩을 외부에 파송(派送)하여 공개질문서를 제의하고 있다. 이 공한(公翰)에서 근년(近年) 이래(以來)로 소정(所定) 약장(約章)을 등제동각(等諸東閣) 야 부군(府郡) 각지방(各地方) 정계이외(定界以外)에 외인(外人)이 토지(土地)를 매점(買占)며 방옥(房屋)을 임조(賃造)야 상민(商民)의 권리(權利)와 농호(農戶)의 산업(產業)이 일모월손(日耗月損)오니 토위외인소유(土爲外人所有)고 호위외인소점(戶爲外人所占)면 국명(國名)이 수존(雖存)이나 국계(國計) 실공(實空)이라 하여, 문제의 본질을 예의 지적하고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즉
① 외부대신이 조약을 감안(勘案)해서 각 부군(府郡) 조계외에 거류하는 외국상인을 일일이 통상 구안(口岸)으로 이송할 것.
② 외국인이 토지 매점(買占)하는 폐를 절금(截禁)할 것.
③ 본국인의 농상업을 보존케 할 것.
④ 서울 및 양화진(楊花津)의 개시는 비록 조약에 의해 규정되었으나 외국인의 매지구옥(買地購屋)·좌시개잔(坐市開棧)함이 일익자만(日益滋蔓)하니, 조약을 개정하여 도하(都下)인민의 급급한 정형(情形)을 해결해 줄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독립협회의 중추부가 개명관료 출신이었음에 비해서, 황국중앙총상회의 담당주체는 만민공동회와 같이 서울의 소시민이었고 그 계급적 성격은 시전상인이었다. 그 계급적 이해를 달리함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상권회복운동의 일정한 단계에서 공약수를 집약시킬 수 있는 것은 통상조약에 위배되는 외국상인의 불법적인 상권침탈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상권 자주성 회복요구에 대해서 정부측 외부(外部)의 반응은, 첫째로 조약을 위반한 외국인의 ‘조계 10리 이외’의 매지구옥(買地購屋)과 개잔설포(開棧設舗)는 각 관찰사와 각 감리(監理)에 훈칙(訓飭)하여 2개월내에 철폐시킬 것이나, 둘째로 한성철잔(漢城撤棧)문제는 조약을 개정하여야 하고 정부에서 외국인이 이미 점유하고 있는 가옥가금(家屋價金)을 보상해 주고 이접(移接)을 최판(催辦)해야하므로 사실상 실행키 곤란하다고 회답하고 있다.
당시 외부는 총상회의 건의를 일부 받아 들여, 1898년 1월 19일자로 각도 관찰사와 각 감리에게 그 준거가 되고 있던 조·영조약에 위반하여 통상 각항구 10리 이외에서 상설점포를 개설하거나 토지·가옥을 임구(賃購)하고 있는 외국인을 통상항구의 조계로 철환시킬 것을 훈령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총상회가 종종 철시(撤市)를 단행하면서 상민들의 상권회복 요구를 주장하는 압력단체로 성장하자 정부는 1898년 12월말 독립협회 해산에 뒤이어 총상회의 해산명령을 내렸다.
한편 구래(舊來)의 특권상인이던 보부상들도 청·일상의 내륙행상과 내륙정주에 대응하여 그들의 상권수호을 위해 구래의 임방(任房)을 다시 설치하여 상무사(商務社)라 칭하고, 광무정부의 이론바 ‘구본신참(舊本新參)’에 가탁하여 일정한 액수를 행상들로부터 취득할 수 있는 상업특권을 요구했다. 그것은 대내적으로는 자유상업체제를 저해하고 특권상업체제로의 복설(復設)을 꾀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갖지만, 대외적으로는 외세의 국내상권침해에 저항하였다는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보부상 단체의 주동인물의 한사람인 홍종우(洪鍾宇)가 1898년 4월 8일에 상소로 정부에 제기한 건의안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곡가(穀價)의 급등으로 인민이 아사지경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모두 외국인의 곡물 남출(濫出)에 기인되고 있으므로 방곡령(防穀令)을 실시하여 인민의 생활을 보호할 것.
② 외국의 병참(兵站)을 모두 퇴거시킬 것.
③ 외국인의 무단 내륙여행 및 행상을 금지시킬 것.
④ 절영도(絕影島)의 외국 조계를 분명히 정할 것.
⑤ 서울 도성안의 외국인의 개시(開市)를 모두 철거할 것.
⑥ 외국화폐의 사용을 금하고 본국화폐만 사용케 할 것
비록 수구적인 입장에서 제기된 것이지만 당시 외세의 상권침해를 저지하고 상권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간절한 당면과제들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어진다.
(3) 한상의 상권 자주성 확장활동
대한제국시기에 한상들이 안팎의 어려운 조건하에서 상권 자주성의 확장을 위해 어떠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는지, 직무역의 추진과 국내연안무역확장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ㄱ. 직무역 추진활동
개항후 직무역의 첫 시도는 이미 1882년 9월부터 나타나고 있지만 청일전쟁기인 1895년에 “다수의 조선인이 특히 원산에서 외국산 화물을 구구(購求)하기 위해 멀리 상해로 도항하고 있다”는 영국영사보고도 있다. 대한제국시기의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사례 1] 우체기선회사(郵遞汽船會社) 총무 김익승(金益昇)은 부산·경성(鏡城)간의 각 구안의 실지정형(實地情形)을 시찰하고 그 위에 연해주의 해삼위〔Vladivostok〕까지 형편을 열람(閱覽)한 끝에, “또 기선(汽船) 한척을 고용하와 경성(鏡城)으로서 해삼위(海蔘威)까지 통행(通行)케하야 우로(郵路)가 외국에까지 접촉케 하오면 만국우편(萬國郵便)합동에 참입(參入)한 실시로 되옵고……거류 아국지아민(俄國之我民) 2만 7천여호가 고국 친족간에 성식(聲息)이 상달(相達)ᄒᆞᄀᆡᆺᄉᆞᆸ고 경성(鏡城)석탄을 원산(元山)이남에 출구ᄒᆞᆫ외에 본우선(本郵船)에 장재(裝載)ᄒᆞ야 해삼위에 직항(直航) 판매케 하오면 광무(礦務)가 자연 발달하고 국세(國稅)도 수의(隨意) 증진(增進)”하게 된다는 점을 밝히고, 경성(鏡城)은 해관이 없으므로 원산항 해관과 경성부에 훈칙(訓飭)하여 해관으로 하여금 경흥부(慶興府) 웅기포(雄基浦)에 사험관(査驗官) 1원을 출장케 하여 사검수세(査檢收稅)하고 새로 항행하는 우선(郵船)의 경성(鏡城)·해삼위간의 출입항을 청원하고 있다. 이 청원을 접한 농상공부대신도 이를 받아 들여, “원산항(元山港) 해관으로서 사검관(査檢官) 1원을 경흥부(慶興府) 웅기포(雄基浦)에 출장하야 사검수세(査檢收稅)한 후 우선(郵船)을 항행케 함이 사심타합(事甚妥合)”하다고 외부대신에 조회하면서 총세무사에게 전칙(轉飭)을 요망하고 있다
[사례 2] 원일윤선(元一輪船)회사 사원 이근철(李根澈)은 일본기선 1척을 고임(雇賃)하여 우체기선회사와 합동하여 “본국내 개(開)·미개(未開) 구안(口岸)과 청·일·러 연항(沿港)에 우체물(郵遞物) 왕래와 탑인운화(搭人運貨)를 임편무애(任便無碍)하야 이국편민(利國便民)할 업무를” 영업하고자 그 인허를 청원하고 있고, 농상공부는 이를 인허하고 외부를 통해 제반(諸般) 조처를 하고 있다.
[사례 3] 직무역의 시도는 노령 연해주에 재류하는 한인에 의해서도 추진되고 있었다. 즉 해삼위에 거류하는 한인 최봉준(崔鳳俊)이 일본기선을 1903년 4월에 임고(賃雇)하여 매월 3회 이상 원산·성진(城津)·해삼위를 왕복해서 생우(生牛) 등을 운반하고 있었는데, 편승(便乘)이 예상외로 다수이며 이 항로개시로 일본 우선회사(郵船會社)에 영향을 주는 바가 많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사례 4] “삼화항(三和港) 상민(商民)들이 상무(商務)를 확장(擴張) ᄒᆞᆯ량으로 목선(木船)과 풍범(風帆)으로 토화(土貨)를 무(貿)ᄒᆞ야 아국(我國) 해관(海關)에 납세(納稅)한 후(後)에 청국(淸國)과 일본(日本)에 전매(轉賣)”하고 있는 사례도 있다.
[사례 5] 한국기선 창룡호(蒼龍號)는 제물포서 떠나 목포·제주·부산과 일본〔長崎:나가사끼〕까지 선객(船客)과 화물을 운송하고 있다. 1900년까지 한국기선은 창룡(蒼龍)·현익(顯益)의 2척이었으나 1901년에 태익(泰益)·한성(漢城)의 2척이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연안무역의 탑재(搭載)화물 과다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례 6] “현금(現今) 아국해안(我國海岸) 소유(所有)ᄒᆞᆫ 어기(漁基)에 외국인(外國人)의 영업(營業)은 초왕(稍旺)ᄒᆞ고 아인(我人)에 생리(生利)가 점쇠(漸衰)ᄒᆞᆷ을 목견(目見)ᄒᆞᄋᆞᆸ고 분발지심(奮發之心)이 감생(感生)”하여 설립하였다는 대한수산회사(大韓水產會社)는 울산(蔚山)·장기(長鬐) 양군 앞바다에서 엽득(獵得)한 경육(鯨肉)의 외국수출을 추진하였다.
ㄴ. 국내연안무역 확장활동
청일전쟁후 일본국가권력에 비호된 일본기선회사와 회조(回漕) 업자들에 의해 사실상 우리나라 해운이 독점되고 연해 해운마저 침해되고 있던 조건하에서 특히 정부의 보호육성책이 결여된 상태에서 한상들이 국내 연안무역의 확장활동을 어떻게 전개하고 있었는가 살펴 보자.
[사례 1] 1900년에 경인지역의 민족자본에 의해 설립된 본격적인 해운회사인 대한협동우선회사(大韓協同郵船會社:자본금 20萬원의 合資會社)는 농산물과 해산물 등의 연안수송에 종사하고 부산·목포·군산 등지의 미곡을 비롯한 농산물과 우피(牛皮)의 수송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품을 각 지역으로 운송하는 등 개항구 간의 연안항로경영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우리나라 개항구 간의 연안항운을 제압하고 있던 일본 우선(郵船) 및 대판상선(大阪商船) 등 일본기선회사의 경쟁에서 자본의 열세와 일본측의 방해공작 등으로 밀려나고, 이들 일본 대기선회사들이 기항(寄港)하지 않는 개항구와 미개항구 등에 취항하면서 연안 항운(航運)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일본인 기선회사인 굴회조점(堀回漕店)과도 경쟁을 벌렸다.
[사례 2] 1897년 봄에 연해무역을 위해 창설된 광통회사(廣通會社)는 해룡호(海龍號) 1소(艘)로 연해 각구로 정기내왕하여 반년 동안에 “각처상업(各處商業)이 운수(運輸)에 편리(便利)함을 득(得)하와 점위흥왕(漸爲興旺)하는 중 우(又) 당 신곡지시(當新穀之時)하와 수소윤선(數艘輪船)이 불빙(不涄) 장운(裝運)”이나 갑자기 그 윤선(輪船) 구입이 어려워 “위선(爲先) 외국윤선(外國輪船) 1소(艘)를 고용(偏用)하여 내지각구(內地各口)에 편운상화(便運商貨)”코자 청원하여, 관계요로에 의해 준허되고 있다.
[사례 3] 우체기선회사는 이미 농상공부의 허가를 얻어 “국내(國內) 해로(海路) 우체물(郵遞物) 각종(各種)을 교통(交通)하는 사무(事務)와 각상객(各商客)의 물화제건(物貨諸件)을 운수(運輸)하는 영업(營業)을 실시(實施)”하고 있는데, 새로이 일본으로부터 윤선 1척 등을 임고(賃雇)하여 부산·경성(鏡城)간의 개항구와 미개항구안(未開港口岸)에 취항시키고자 그 인허를 요청하고 있다.
[사례 4] 대한협동기선회사는 1899년 1월에 이미 농상공부의 인준을 얻어 일본기선 1척을 임고하여 부산에서 경성 연포(沿浦)에 취항시키고 있다. 일본영사보고에도 대한협동기선회사(大韓協同汽船會社)에서 새로이 기선을 도입한 후 연안무역에 빈번히 왕래하고 있다고 한다.
[사례 5] 덕원(德源:元山) 상민 박유일(朴有一) 등이 병신년(1896)에 태운회사(泰運會社)를 설립하고 농상공부 인가를 얻어 일본 소화륜선(小火輪船)을 구매하야 내지로 왕래 영업하다가 그 윤선(輪船)이 파상(破傷)한 후 자본 불빙(不▼(甹+攵)으로 일본 소화륜선을 고용하야 내지연해로 사행(駛行)하고 있다.
[사례 6] 덕원상민 김정민(金政敏) 등이 상무(商務) 확장을 위하여 자본을 구취(鳩聚)하여 일본기선을 차고(借雇)하여 내지각안에 항행하여 물화를 종편(從便) 수운(輸運)하고 있다.
[사례 7] “울진군(蔚珍郡) 거(居) 상민(商民) 전사능(田士能) 등이 제익선사(濟益船社)를 창설고……울릉도(鬱陵島) 물산(物產)을 장재(裝載)하야 통상구안(通商口岸)에 발매(發賣)고 육지산물(陸地產物)을 무재(貿載)하야 해도(該島)로 발매(發賣)”하고 있다.
1900년 7월에 인천 감리(監理)가 외부대신에 보고한 「인천항 선부(船簿)」에 의하면 인천상민이 소유한 윤선(輪船)은 광제호(廣濟號;115톤, 선주 金承根), 경보호(慶寶號;본명 明洋號, 99톤, 선주 元敬常), 경기호;420톤, 선주 禹載命) 등 3척이고, 외국인 소유의 소기선을 한상이 차고(借雇)한 것이 천초환(天草丸 ; 27톤, 선주 日人) 및 경리환(慶利丸 ; 34톤, 선주 日人)과 혤호(15톤, 선주 미국 금광회사)로 되어 있다. 대체로 한상이 차고(借雇)한 외국인소유의 기선이 톤수가 적은 소기선인것 같다.
일본영사보고에도 1903년 4월 일본인 소유기선(등록 톤수 48톤)을 대차(貸借)한 한상이 진남포로부터 의암포(外岩浦), 철도(銕島), 요포(堯浦), 석호형(石湖亨) 등을 경유하여 격일 1회 평양에 왕복하고 있는데 예상외의 좋은 결과를 얻어 계속 항행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공사 알렌(Allen)이 미국무장관에게 보고한 「한국무역 보고」에 의하면, 1901년 개항구와 개항구간의 연안무역의 경우, 그 무역액이 외국상품이 약 200만불임에 비해 국내상품의 양은 약 300만불에 달하고 있다.
또한 개항구와 미개항구간의 연안무역은 서양식 한국선박(기선)과 한국에 임고된 외국선박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1901년 국내상품 및 외국상품의 총량이 약 310만불이며 전년도보다 약 52만불, 1897년(최근 몇년 동안 가장 무역액이 많았던 한해)보다 87만불나 초과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이는 국내 연안무역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매우 높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당시 개항구와 개항구간의 연안항로선은 인천을 거점으로 하고 있던 일본의 기선회사 굴회조점(堀回漕店)이 기선 5척으로, 서해안은 진남포로부터 인천·군산·목포·부산을 경유해서 동해안의 원산 북관(北關) 지방에 이르는 항해에 종사하고 있었다. 한상들은 개항구와 미개항구간의 연안무역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여기에도 일본측이 위장 취항하고 있었다. 즉 일본측 기록에 “한인 고선(雇船)의 명의” 또는 “일본인 소유로서 편의상 한국적으로 옮긴 것”도 있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아, 개항구와 미개항구에 취항하고 있던 한상의 일부는 매판적(買辦的) 성격의 존재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연안무역과 관련하여 각개항구에 도박(到泊)하는 윤선(輪船)의 탑인(搭시)·운화하는 종선사업의 이익을 일본인이 독점코자 획책(劃策)함에, 원산과 평양 등의 상민들이 각기 종선회사(從船會社)를 설립하여 이에 대항하여 침탈된 그들의 상권을 회수하고 있다.
원산상인의 경우, 누차의 정소(呈訴)에서 대저(大抵) 아국윤선(我國輪船)에 종선회사(從船會社) 아국인(我國人)이 영업(營業)함이 사계당연(事係當然)이거늘 일인등(日人等)이 시완불청(恃頑不聽)야 사 대한인(使大韓人)으로 부득접종(不得接踵)기 불승분원(不勝憤寃)……해(該) 종선지업(從船之業)을 해항(該港) 종선회사(從船會社)에 전부(專付)하고 외인(外人)은 물위간섭(勿爲干涉)며 각안기업(各安其業)케 이 사심타당(事甚妥當)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외부(外部)에서도 아국인이 종선(從船)을 사용하여 탑객운화(搭客運貨)함은 각항장(各港場)에서 이미 시행하는 정례(定例)이므로 즉시 ‘설법판리(設法辦理)’할 것을 덕원감리(德源監理)에게 훈령하고 있다.
한편 평양상민들도 “판출자본(辦出資本)와 본군(本郡) 내항(內港) 급(及) 삼화항(三和港)에 설립(設立) 종선회사(從船會社)”하여 인허를 받아 연강상민(沿江商民)과 선인(船人)에게 고시하여 영업을 시작하고 있다.
이상에서 대한제국시기의 상권 자주성 회복문제를 살펴보았다. 청상과 일상의 내륙상권침탈도 한상과의 대항관계 속에서 추이되어 나갔고, 대체로 외국상인을 조건화할 수 있는 것은 한상의 내재적인 역량과 대응에 달려 있다는 시점에서 이 시기의 한상의 동향을 살펴본 것이다.
대한제국시기 일본에 의한 경인·경부철도의 부설, 지배 등 한국지배 책동은 한국침략과 대러 전략 등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한상들은 이같은 상황 변화에도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경인·경부철도 개통에 대처하여 국내화물이 철도로 운송되는 것이 편리하고 상권을 유지하고자 서오순(徐午淳) 등이 1899년에 운수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는 농상공부와 철도원의 인허를 얻어 경인·경부간 연로에 지점을 건설하여 일본인 운송회사에 대항하여 화물 운임도 ‘동가(同價) 임금’으로 하여 국내상권을 확립코자 하였다. “국내 각 화주(貨主)가 화물을 모두 본 회사로 내부(來付)하여 신의상부(信義相孚)”인데 유독 부산 등지 상민들만이 이에 불응하고 있어 일본인을 이롭게 하는 사차취타지폐(捨此就他之弊)가 없도록 동래감리(東萊監理)에게 부산항 상회소(商會所)에 효유해 줄 것을 청원하고 있는 등 한상들도 새로운 상황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청일전쟁후 대한제국시기의 청상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우면서 한상 및 일상의 내륙상권이 약한 지역인 서울이남의 경기·충청지역으로 내륙상권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경상·전라지역은 청일전쟁이전부터 이미 일상의 독점지역임에 대해서 한상들의 상권자립성 회복을 위한 뚜렷한 대응과 활동은 조선후기이래의 사상인 송상(松商;開城), 경강상인(京江商人;서울), 만상(灣商 ; 義州), 유상(柳商 ; 平壤) 그리고 함경도상인 (咸興·北靑)의 전통적 기반을 가진 서울과 그 이북지역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지역 상인들이 외국상에 금융적으로 종속되지 않았고, 그 자본력도 자립성을 가지면서 내륙시장에서 독자적인 상권 지배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일상의 독점지역이라는 경상도 대구의 경우,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의 일본영사보고에 의하더라도 “상품중 가장 잘 팔리는 금건(金巾) 및 목면류(木綿類)도 일본 상고(商賈) 중에는 아직도 점포를 가진 자도 없고 행상을 하는 자도 없으며 한상들이 독점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대구 각시장(令市·例市)에 있어서 1년간의 상품거래고는 약 300만원 이상이며 그 상업권은 거의 모두 한인의 수중에 있었고, 그 중 약1/3은 토지 재주(在住)상인이 취급하고 있었다. 그외는 대개 여상인(旅商人)에 의해 취급되었다.
대체로 러일전쟁 직전까지 청·일상의 치열한 내륙상권 침해가 계속 되는 가운데 한상의 대응으로 아직도 건재한 부문을 많이 갖고 있었다. 대한제국정부도 일련의 통상(通商) 및 금융정책을 전개하지만, 이 시기의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해서 황실재정 강화책으로 시종되어 실효성을 거둘 수 없었다. 정부의 보호육성이 결여된 조건하에서 한상들은 안팎의 모순에 대응하면서 상권 자주성 회복을 위한 활동을 전개시켜 나갔다. 결국 러일전쟁후 을사오조약에 의해 사실상 국권이 상실되고 정치·군사적 외압으로 인해, 한상들의 대응과 상권 자주성 회복운동도 최종적으로 좌절을 겪게 된 것이다.
3. 어민의 어권수호운동
1) 개항 전후의 한국 어업
(1) 어장 소유형태
조선시대의 어장 소유관계는 토지 소유관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유제를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국유제 그 자체가 지니는 자기모순에 의해 어장 사유화가 진전되어 갔으며, 이에 봉건국가는 재정상의 필요성에서 수차에 걸친 국유제의 재확인 조치를 단행하기도 했지만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어장의 사유화현상은 확대 재생산되어 갔다. 여기서 기존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조선왕조 건국 초부터 개화기에 이르기까지의 어장 소유형태의 변천과정을 개관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겠다.
조선왕조는 건국과 더불어 집권적 봉건재정의 필요성에서 전국의 어장(여기서 어장이라 함은 漁箭 등 정치어장을 뜻함)을 국유화하고, 이를 직접생산자인 연해 빈민에 따라서 이는 곧 어장의 국유화를 통하여 집권적 봉건국가의 재원을 보완하려는 조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어장 국유제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이미 태종 말기 경부터는 권문세가에 의한 어장의 사유화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성종대에 와서는 어장의 국유제를 법제화하기에 이르렀다. 즉 각도의 어장을 분등성적(分等成籍)케 하고, 어장의 음점자(陰占者)와 사점자(私占者)를 엄벌에 처하며 전국의 어장은 모두 국유화하여 이를 빈민에게 3년 기한부로 대급하되, 3년이 지나면 다시 대여한다는 것, 그리고 진상 및 군자의 보충을 위해 관아에서 직영하는 국영 어장의 운영·관리지침 등을 경국대전에 규정하였다. 따라서 경국대전의 규정은 한 마디로 말해서 어장 국유제를 법제화하여 이를 확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어장 국유제의 원칙은 그 운영상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어장의 사유화현상은 지양되지 못하고 오히려 확대되어 갔다. 즉 역대 국왕에 의한 사여어장(賜與漁場) 및 궁방어장(宮房漁場) 등의 분급으로 권문세가와 궁방 등의 어장 사유화현상은 더욱 진전되어 갔다. 권문세가에게 별사된 사여어장은 세조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연산군 및 중종대에는 남사(濫賜)되어 어장의 사유화를 촉진시켰다. 각 궁방에 지급된 궁방어장은 중종 연간부터 창설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후 역대 국왕은 궁방어장을 계속 확대 지급하게 되어, 효종 8년(1657) 충청도의 경우를 보면 전체 어장의 42%에 해당하는 21개 어장이 궁방어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숙종 43년(1717)에 이르러서는 전국의 어장이 경외아문(京外衙門)과 신구궁가(新舊宫家)에게 거의 전부가 지급된 실정이었다. 이처럼 권문세가 및 제 궁가에게 지급된 사여어장과 궁방어장은 그 자체가 어장 국유제라는 원칙하에서 특정인이 사점한 사유어장일 뿐만 아니라, 이를 기화로 하여 일반 지배층 및 토호 등에 의한 어장 사유화도 자극하게 되었던 것이다.
경국대전에 의해서 법제화된 어장 국유제는 또 하나의 자기모순으로 어장의 사유화가 필연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즉 경국대전에는 모든 어장을 국유화하고 이를 빈민에게 3년 기한부로 급대하고 기한이 지나면 다시 그들에게 체급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어장=어전(漁箭)을 설치·유지하자면 적지않은 자금이 소요되는데 이를 빈민 등이 감당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근린(近隣)의 재력있는 토호나 봉건 지배층 등이 빈민에게 분급된 어장을 매점하여 어전을 결조(結造)하고 이를 다시 직접 생산자인 빈민=어민에게 소작을 주는 형태, 즉 이익을 분배받는 조건으로 직접생산자인 어민에게 대여함으로써, 어장의 사유화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임란 이후에는 이러한 형태의 어장 사유화가 토호나 권문세가 등에 의하여 보편화됨으로써, 어장 국유제는 사실상 허구화되었다.
이처럼 어장 국유제가 허구화되고 전국의 어장은 각 궁방을 비롯하여 권문세가 및 토호 등에 의하여 사유화되어 갔으며, 거기에다 국가 재정수입과는 전혀 무관한 각급 관아 소속의 아문어장(衙門漁場)이 확대되어 감으로써 어장은 국가의 재정수입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균역법(영조 26년, 1750)의 실시와 더불어 균역해세(均役海稅)가 창설됨으로써, 각 궁방과 각급 아문 소속의 어장을 비롯하여 토호 및 세가 등의 사점어장은 모두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균역청 소관의 국유어장 형태로 재편성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균역해세의 실시는 결국 집권적 봉건국가의 재정궁핍을 해소하려는 의도에서 채택된 어장 국유제의 원칙을 재확인한 조치였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미 봉건국가의 물질적 기반인 토지 국유제 자체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유명무실해진 상황하에서 어장 국유제의 재확인 조치가 실효를 거둘리 없었다. 균역해세가 실시된 지 20년 남짓하여 군영을 비롯한 각 영·아문 어장이 부활되기 시작하였고, 토호 및 세가 등에 의한 어장 사유화현상도 앞서 말한 일반 어민의 경영조건 결여로 다시 재현되어 확대 재생산되어 갔다. 또한 궁방어장의 경우도 점차 부활되어 19세기 전반의 봉건적 반동기(순종·철종 연간)에는 궁방에의 어장 투탁 등의 현상으로 궁방어장은 크게 확대되어 갔다.
고종 32년에 이르러서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근대적 재정제도가 도입되어 각종의 조세가 재정기관인 탁지부에 이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세만은 궁방 또는 궁내부에 이속됨으로써 각 궁방의 어장 소유는 그대로 인정되고 있었으며, 또 갑오개혁 이후 일체의 어장은 직접 생산자인 일반 어민에게 환급하라는 조치도 취해진 바 있었으나 이는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재력이나 권세가 있는 특정인에게 대소의 어장이 침점되어 어장 사유화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그리고 국권이 말살된 통감부시대에는 일제가 한국인 어장의 합법적인 박탈 및 식민지 재정정책의 필요성에서 융희 2년 6월 25일 칙령 제39호로 궁방어장을 일차적으로 국유화하는 한편, 민간인 소유어장에 대하여는 동년 10월 31일 어업의 ‘한일합병’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일어업협정”이라는 것을 조인케 하고, 또 동년 11월 11일에는 한국어업법을 제정·공포하여 이를 융희 3년 4월 1일부터 시행케 함으로써 이른바 어업면허제가 창설되어, 한국인의 소유어장은 그나마도 합법적인 형태로 일본인에게 탈취되어 갔다.
(2) 어민수탈과 어업의 침체
조선시대의 한국어업은 한 마디로 말해서 연안유착적인 반농반어(半農半漁)의 경영형태가 지배적인 것이었고, 이러한 어업 경영형태하의 직접생산자, 즉 어민층은 이를 기술한 어장 소유형태와 관련시켜 볼 때 두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그 하나는 국유어장에서 소규모의 어업을 독립적으로 영위한 자영어민층이고, 다른 하나는 재력있는 토호나 봉건지배층(권문세가 및 각 궁방 등)의 사유어장에서 소작인적 어업을 영위한 소작형 어민층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들 어민층은 조선왕조 초기부터 개항 전후기에 이르기까지 단순재생산마저도 어려운 여건하에서 어업을 영위하였고, 그 결과로서 한국의 어업은 침체의 악순환만을 거듭해 왔는데, 이는 결국 극단적인 봉건적 수탈의 소산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절에서는 한국 어업의 침체 요인인 봉건적 어민 수탈상을 개관해 보기로 하겠다.
조선왕조 전기부터 봉건국가 및 봉건 지배층의 어민수탈은 가혹하였다. 우선 국유어장을 지급받아 소규모의 어업을 독립적으로 영위한 자영어민층은 국가에 대한 어세와 어물공납 등의 부담을 지고 있었는데, 그들의 부담이 과중하여 어업을 포기하고 도망하는 자가 속출하게 되었고, 이징(里徵)과 족징(族徵)이 두려워 근린의 주민까지 도피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거기에다 어물공납을 둘러싼 지방관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심하여 어민들은 이중·삼중의 수탈을 당해야만 했다. 또한 소작인적 위치에서 사유어장을 차영(借營)한 소작형 어민층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즉 이들 소작형 어민층은 농업에 있어서의 병작반수제와 마찬가지로 어획고의 절반을 어장 소유주에게 수납해야 했고, 여기에도 관리들의 토색이 가중되어 단순재생산마저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임란 후에는 국가의 재정궁핍과 중앙집권력의 약화 등으로 어민층에 대한 봉건적 수탈은 더욱 무질서해졌다. 특히 18세기 중엽에 재정보완책의 일환으로 균역해세(均役海稅)가 실시되면서부터는 해세제도 그 자체의 모순성과 미비점, 그리고 관리들의 작간(作奸)이 우심하여 어민층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으며, 그에 따라 어업은 쇠퇴되어 갔다. 즉 어획고의 다소에 불문하고 오직 어전의 장단(長短) 및 광협(廣俠)만을 기준 삼아 어장의 등급을 설정해서 과세했을 뿐만 아니라, 어장 사점자를 부정하고 직접생산자인 어민만을 대상으로 하여 과세하는 해세제도상의 모순으로 어민의 부담은 무거워졌다. 그래서 균역해세 실시 이후에도 계속 어민이 이산(離散)하여 어획물은 감소되었으며, 또한 어획물의 감소로 어물의 가격이 앙등하여 소비수요가 격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물가의 상승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거기에다 관리들의 작간과 무질서한 침탈이 우심하여 어업은 계속 부진하고 어촌은 피폐해 갔다.
이처럼 국가에 상납하는 어세 이외에 지방관리들의 작간과 침탈이 무질서 하여 어민이 이산하고 어획물이 감소되어가자, 반사적인 현상으로서 백지징세(白地徵稅)와 이징 또는 족징 등이 자행되어 한국의 어업은 단순재생산의 여력마저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이에 봉건지배층의 일각에서는 어업의 단순재생산만이라도 가능케 하기 위해 18세기 말(정조 말년)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해폐(海弊)를 바로잡는다는 문제가 논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봉건적 반동기인 19세기 전반기의 삼정문란하에서 어민수탈은 완화될 리 없었고, 또 이러한 상황하에서 개항을 강요당하게 되자 이에 일본인의 한해침어(韓海侵漁)까지 겹치게 되어 한국의 어민과 어업은 희생의 길을 잃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대책은 시종 강구되지 못하고 있었다. 즉 갑오개혁 이후에도 국가에 의한 어업 및 어민보호책은 고사하고, 오히려 국가 및 관리 등에 의한 어민수탈만이 시종일관 강행되어 한국 어업의 쇠퇴는 가속화되어 갔다. 갑오개혁 이후에는 특히 수세행정의 난맥으로 인한 수세기관의 다기화(多岐化)로 어민들의 부담은 한층 가중되었다. 다시 말하면 수세행정체계가 다원화되어 균역청, 농상공부, 내장원 등이 각각 해세의 징수기관으로 등장하게 되어 한 사람의 어민에게 이중·삼중의 해세를 부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다 해세징수원의 농간도 여전하였고, 설상가상으로 후술하는 일본인의 침어까지 이에 겹치게 되어 한국의 어민은 복배수적(腹背受敵)의 긴박한 상황 하에서 압살되어 갔다.
2) 일본인의 한해침어
(1) 밀어의 합법화와 통어구역확대
ㄱ. 밀어자의 내침
일본인의 한해침어(韓海侵漁)는 그 기원을 흔히 여말 선초의 왜구(倭寇)에서 찾기도 한다. 여말 선초에 창궐했던 왜구는 일종의 해적단이었으나, 그들은 부수적으로 우리나라 남해안 일대를 무대로 하여 어업활동도 전개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건국과 더불어 왜구의 내침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대마도인(對馬島人)을 중심으로 한 왜구의 침범은 근절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반적·반어적(半賊半漁的)인 어업활동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에 조선왕조는 왜구의 침범을 막고 무질서하게 건너 오는 왜인을 통제한다는 의도에서, 태종 초에는 부산포(동래)와 내이포(웅천)를 개항하고, 세종 8년에는 염포(울산)를 개항함으로써 이른바 삼포의 왜관무역이 전개되었다. 그후 일본인들은 삼포를 거점으로 하여 무역과 어업활동을 병행하는 자가 많게 되어,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 : 소우 사다모리)은 일본인의 어업을 정식으로 허가해 줄 것을 조선정부에 요청하기도 했으며, 세종 17년에는 이를 허락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일본인의 어업을 허락하되, 왜구대책에 주안점을 두어 어로지역과 어로기한 등을 철저히 제한하고 증명서를 발급하여 어로활동을 수행하도록 조치하였다.
그후에도 대마도주 종정성은 수차에 걸쳐 고·초도(孤草島)의 어업 허가를 조선정부에 다시 요청해 왔으며, 그 결과 세종 23년 11월에는 한·일 양국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어업조약이 체결되었다.
즉 ① 고·초도에서 조어(釣魚)코자 하는 왜인은 도주〔對馬島主〕의 문인(文引:증명)이 있어야 하며, ② 지세포(知世浦) 만호(萬戶)에게 그 문인을 제출한 다음 만호가 발급하는 문인을 교부받아 출어해야 하고, ③ 조어가 끝나면 지세포 만호에게 문인을 반환하고 소정의 어세를 납부한 후 만호로부터 도주의 문인을 받아가지고 돌아가며, ④ 이러한 규약을 어기거나 병기를 소지하고 횡행하는 자는 적으로 논죄한다는 것 등이었다.
어세는 어선의 크기에 따라 차등을 두어 규정했는데, 처음에는 대선의 어세가 현물로서 500미(尾), 중선 400미, 소선 300미였으나, 성종 24년 윤 6월에 와서는 대선 200미, 중선 150미, 소선 100미로 크게 경감되었다.
그러나 삼포의 항거왜인(恒居倭人)이나 통어자(通漁者)들은 조선정부의 후의에도 불구하고 위약행위와 해적행위 등을 자행함으로써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많았다. 즉 세종 25년 6월에는 왜선 두 척이 제주도의 공선(貢船)을 습격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고, 세종 26년 7월에는 흉기를 소지한 대마도 어선 두 척이 지세포 만호의 문인을 교부받지도 아니하고 고·초도로 직행하여 어업을 자행하는가 하면, 성종 24년 10월에는 내이포의 항거왜인 50명이 때를 지어 연해민의 어장을 약탈하기도 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결국 고·초도의 일본인 통어를 일시 금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고, 또 중종 5년의 삼포왜란(三浦倭亂)으로 양국간의 국교가 단절됨으로써 일본인의 한해통어(韓海通漁)는 전면적으로 금지되고 불법화되었다. 그후에도 일본인의 한해통어는 밀어의 형태로 계속되었으나, 덕천막부(德川幕府)의 쇄국정책으로 일본인의 한해밀어는 쇠퇴되어 갔다. 그러나 일본인의 한해밀어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고, 이후에도 면면히 이어져 왔다. 그리하여 명치유신으로 일본의 봉건체제 및 구관습 등이 타파되면서부터 한해밀어는 다시 번성하여 일본인의 한해침어는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ㄴ. 밀어의 합법화와 통어구역확대
명치유신 이후 일본인의 한해밀어가 번성해지자, 일본정부는 수익성이 높은 한국의 연안어업을 장악함으로써 일본어업의 근대화 촉진에 기여토록 하고, 또 산업화과정에서 창출되는 상대적 과잉인구를 한국에 분출시킴으로써 일본 국내의 사회문제를 외부에서 해결함과 동시에 산업화과정의 낙오자를 제국주의 첨병으로 이용한다는 획책하에서 한해밀어의 합법화를 기도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서 초보적 외교수법을 습득한 일본정부가 국제정세 등에 어두웠던 구한국정부의 당로자(當路者)를 우롱하여 성취시킨 것이 불평등 개국조약 체결 7년 후에 성립된 한일통상장정(韓日通商章程;1883년 7월 25일 조인) 제41관의 규정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일통상장정 제41관은 일본정부가 초보적인 무력외교 및 기만외교 등의 수법으로 종래의 밀어를 합법화시킨 규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계기로 하여 일본인의 한해침어는 공공연하게 전개되어 한국어민의 어권은 전면적으로 침탈되어 갔다. 여기서 한일통상 장정 제41관의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일본국 어선은 조선국 전라·경상·강원·함경 4도 해빈(海賓)에서의 포어(捕漁)를 허가하고 조선국 어선은 일본국 비전(肥前), 축전(筑前), 석견(石見), 장문(長門), 출운(出雲), 대마(對馬) 해빈에서의 왕래포어를 허가한다. 단 사사로이 화물을 무역하는 것은 허가하지 않는다. 위반한 자는 본 화를 관에 몰수한다. 포획한 어류를 매매하는 것은 차항에 부재한다. 피차의 어세의 응납과 기타 세목에 관해서는 2년을 준행한 후에 그 정황을 파악하여 다시 타정한다.
위의 규정에서 보면 양국 어민의 통어구역을 설정하고, 어업을 빙자한 사무역을 금하며, 현지에서의 어획물 판매를 허용한다는 것과 피차의 어세는 2년 후에 협정한다는 것 등을 규정한 것으로서 형식상으로는 호혜주의(互惠主義) 규정과 같이 보인다. 그러나 현실적인 면에서 보면 일본인조차도 버리고 오는 서일본 연안에 한국어민이 통어할 리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호혜주의를 가장한 불평등 편무조관(片務條款)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이는 한국의 어장을 일본인에게만 일방적으로 개방한다는 것을 한국정부가 약속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통상장정과 동시에 「처판 일본인민재약정조선국해안 어채범죄조규(處辦日本人民在約定朝鮮國海岸漁採犯罪條規)」라는 것이 조인되었는데, 이는 한 마디로 말해서 일본정부가 자국의 통어민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 어민의 모든 범법행위에 대한 영사재판권을 편무적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또한 고종 26년 10월 20일(양력 1898년 11월 12일)에는 통상장정 제41관의 세칙이라 할 수 있는 한일통어장정(韓日通漁章程)이 체결되었다. 동 장정은 결국 통상장정 제41관의 규정(피차의 어세문제와 기타 세칙은 2년 후에 타정한다는 규정)에 따라 체결된 것인데, 통상장정 체결 6년 후에야 비로소 타결을 보게 되었다. 이처럼 동 장정의 타결이 지연된 것은 어세문제 그 자체가 일본 어민에게는 큰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였으므로, 일본측이 이의 타결을 고의적으로 지연시켰기 때문이다.
한일통어장정은 전문 12조로 구성되었는데, 그 주된 내용은 양국 해안 3리 이내에서 통어하고자 하는 양국 어민의 수속절차, 어업세, 포경 특허, 범법자에 대한 벌칙 등을 규정한 것이었다. 특히 동 장정의 핵심은 제2조의 어업세 규정과 제7~11조의 각종 일본인 범법자에 대한 편무적 영사재판권 등을 규정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들 규정은 모두 일본 어민에게만 유리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즉 일본 어민이 부담해야 할 어업세라는 것은 명목적인 것이어서 거의 무세에 가까운 것이었고, 각종의 벌칙이라는 것도 경미한 것이어서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일본인 범법자에 대한 영사재판권은 완전히 편무적인 것이어서 한국 어민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무의미하기 전에 해로운 것이었다.
이에 구한국정부는 그후 제주도를 통어구역에서 제외할 것과 어업세의 증액문제 및 벌칙강화문제 등을 중심으로 하여 통상장정 제41관 및 통어장정의 개정을 수차에 걸쳐서 일본정부에 제의한 바 있었으나, 그 때마다 일본측의 이치에도 맞지 않는 반대와 터무니 없는 교환조건의 제시 등으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편무적인 한일통어장정은 어업의 한일합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업에 관한 한일 협정」이 1909년 4월 1일을 기하여 이른바 ‘한국어업법(韓國漁業法)’의 시행으로 발효될 때까지 약 20년간이나 존치되었다.
이처럼 일본정부는 일본인의 한해밀어를 합법화하고, 또 이의 제도적 장치를 일본인에게만 유리한 방향으로 보완해 가는 한편, 구한국정부를 교묘한 수법으로 조종 내지 협박하여 통어구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우선 인천 연해를 통어구역으로 첨가시키기 위해 고종 24년(1887)부터 인천 연해의 어업특허를 구한국정부에 요청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로서 이듬해인 고종 25년(1888) 6월 4일에 이르러서는 전문 9개조항으로 된 「인천해면 잠준 일본어선 포어액한규칙(仁川海面暫准日本漁船捕魚額限規則)」이라는 것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광무 4년(1900) 11월 1일에는 다시 경기도 연안을 통어구역으로 첨가시켰는데, 그 경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광무 4년 5월에는 일본인에 의한 송도지방의 삼포매매행위를 금지한다는 문제가 구한국정부에서 논의된 바 있었는데, 이를 일본측이 악용하여 그 교환조건으로 경기도 연해의 통어권을 요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서 구한국정부는 이를 어이없이 허가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광무 7년(1903) 1월에는 진남포 거류 일본인에 대한 수산물 공급을 이유로 하여 진남포 연해의 통어권을 획득한 다음, 이듬해인 광무 8년(1904)에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측은 자국 군대의 부식물을 공급한다는 구실로 충청·황해 및 평안도 연해의 통어권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로서 광무 8년 6월 4일에는 구한국정부가 이를 허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충청·황해·평안 등 3도 연해를 일본인의 통어구역으로 허가함으로써, 한국의 전 어장은 일본인에게 모두 개방되었던 것이다.
(2) 일본인의 침어양상
일본인의 한해침어가 합법화되자 일본인 침어자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갔다. 청일전쟁 전인 고종 29년(1892)만 보더라도 경상·전라 양도 연안을 중심으로 한 일본 통어선수는 2천척 이상에 달하였고, 그에 종사한 일본인 어부수는 1만명 이상이었다. 다시 청일전쟁 후인 광무 2년(1898)에 와서는 일본 통어선수가 3,385척으로 늘어났고, 그에 종사한 일본인 어부수도 19,138명으로 격증하였다.
그리고 이들 일본인 침어자들은 당시의 일본인 자신이 술회하고 있듯이, 일자무식의 난폭자들로서 조선을 미개국으로 멸시하고 조선 관민에게 난폭한 행패를 자행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잠수기 어부들은 가장 극단적인 무뢰배들로서 살상을 일삼는 무리들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일본 당국자들까지도 그들 침어자의 난폭성을 개탄하고 그들을 선도하기 위해, 1900년 3월에는 조선해 통어조합(朝鮮海通漁組合) 및 동 연합회라는 것을 조직케하여 통어자 스스로가 시정토록 유도하기도 했다.
일본인 침어자들의 난폭성은 여러 가지 유형의 양상으로 나타났으나, 이를 종합해 보면 크게 두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겠다. 즉 그 하나는 살인·약탈·폭행 등 반적·반어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밀어·밀수·무단결막·어장 침탈 등의 불법행위가 그것이다. 여기서 이들 유형의 각종 행위를 구체적인 사례로 보면 다음과 같다.
ㄱ. 반적·반어행위
일본인의 한해침어가 합법화된 이후 전국 각 지역의 연안에서는 일본인 침어자들의 살인·약탈행위가 빈발하였다. 특히 제주도는 잠정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통어구역에서 제외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침어자들이 계속 내침하여 살인·약탈행위를 자행하였다. 고종 24년(1887) 7월 제주도의 가파도(加波島)에 내침한 일본인 어부들은 민가에 침입하여 가축을 약탈하고 주민 1명(이만송)을 살해했으며, 고종 28년(1891) 5~6월에는 제주도의 건입포·조천리·북포리·함덕리·동복리·금영리 등지에서 일본인 잠수기 어부들이 총칼을 휴대하고 상륙하여 부녀자를 겁간하고 동민을 살상하면서 민재(식량, 의복, 닭, 돼지 등)를 약탈하였다. 또한 고종 29년 3~6월 사이에도 제주도 정의현 성산포·화북포·두모리포 등지에 총칼을 휴대한 일본인 잠수기 어부들이 상륙하여 주민을 살상하고 민재를 약탈하면서 부녀를 겁간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일본인 침어자들의 이러한 만행은 제주도에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고종 30년(1893) 11월에는 강원도 삼척군 장호동 연안의 어장에 어업 면허증도 휴대하지 않은 일본인 참수기 어선 3척이 나타나 해삼과 전복 등을 채취하면서, 이를 저지하던 동 어장의 관리인에게 침어자들은 집단폭행을 가하고 금품까지 탈취하였다. 고종 32년 9월에는 경상남도 장기군에서 일본인 어부가 한국 어민의 어획물을 약탈하고 민가에 침입하여 부녀자를 끌어가는 행패를 부렸으며, 거제도 지세포에서는 일본인 침어자들이 주민의 소를 끌어다가 도살하는 일도 있었고, 광무 8년(1904) 4월(음력)에는 경상북도 영덕군 남면 원척리에서 일본인 어부가 조업중이던 한국 어민을 장검으로 중상을 입힌 다음 그 어획물을 약탈했으며, 이튿날에는 상륙하여 동장을 살해하고 동민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또한 광무 9년(1905) 9월에는 전라남도 강진군 신흥면 상삼리에서 일본인 어부 4명이 상륙하여 마을의 닭을 약탈하고 행패를 부리다 이를 저지하는 동민을 살해하였다.
한편, 일본인 침어자들은 스스로가 탈선·부당행위 또는 불법행위 등을 저질러 놓고도 이를 힐책하는 한국인 관민에게 폭행을 가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고종 25년(1888) 7월 경상남도 통영에서는 10여 명의 일본인 어부가 상륙하여 그들의 어획물을 부당한 고가로 판매하면서 값이 비싸다고 대꾸한 주민을 난타한 일이 있었고, 고종 26년 6월에는 부산 근처의 암남리에서 일본인 어부 8명이 상륙하여 공동우물을 점거하고 알몸으로 목욕하는 것을 지나가던 주민이 힐책하자 그에게 집단적으로 폭행을 가하고 도주했으며, 광무 5년(1901) 2월에는 강원도 간성군 토성면 아야진에서 일본인 잠수기 어부가 한국인 어부 1명을 장검으로 살해하고 2명에게는 중상을 입혔다. 또한 광무 7년 9월에는 황해도 장연군 장산관 해안에서 통어구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법어로를 자행하던 일본인 어부가 이를 저지하는 순검을 구타한 일도 있었다.
ㄴ. 불법행위
일본인 침어자들은 조약위반 또는 기타의 각종 불법행위를 자행함으로써 한국인의 어권을 침탈했으며, 그로 인하여 한일 양국간에 외교적 및 사회적인 물의를 허다하게 야기시켰다. 일본인이 한국 연안에서 어업을 행하자면 우선 당해 지역의 지방관서나 해관에 출원하여 소정의 통어수속을 마친 다음 면허증을 교부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수속 절차를 무시하고 무면허로 무단어업, 즉 밀어를 자행하기도 하였고, 어업을 빙자하여 밀무역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어업근거지의 토지를 점거하고 지주의 허가도 없이 어막을 짓거나 혹은 한국 어민의 정치어장(定置漁場)을 점탈·매점하는 행위도 서슴치 않았다. 우선 밀어 및 어업을 빙자한 밀무역 등의 사례부터 보면 다음과 같다.
고종 25년 5월외 부산감리(釜山監吏) 보고에 의하면 근래 일본인이 어업을 빙자하고 연해 각처에서 밀무역을 자행하는 자가 많다 하였고, 고종 26년 4월의 보고에 의하면 울릉도에 무집조(無執照)의 일본어선, 즉 밀어선 4척이 와서 밀무역을 자행하고 도민의 어획물을 약탈하였다. 또한 전라도의 소안도에서도 일본인이 어업면허도 없이 밀어를 자행하는 한편, 밀무역을 행하는 자가 많았으며, 광무 6년에는 부산해관에서 어업을 빙자한 일본인 밀무역자와 무면허로 어업활동을 자행한 일본인 밀어자 등을 다수 적발하였다. 그리고 통어장정에는 어업 근거지에 어막을 짓거나 혹은 어획물의 가공행위 등에 관한 규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침어자들은 각 지역의 연안에서 토지소유자의 허가도 없이 전토를 무단 점거하여 어막을 짓고 어물의 가공행위도 자행하였다.
그런데 일본인 침어자들의 불법행위 중에서도 한국 어민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었던 것은 한국 어민의 정치어장을 점탈하는 행위였다. 이는 적어도 어업에 종사한 어민에게 있어서는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었으며, 따라서 이를 둘러싸고 피아간의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고종 25년 11월의 부산감리 보고에 의하면 부산 연안에는 수백기의 어장이 있는데, 이의 대부분을 일본인 어부가 침탈하고 있어 그 곳 어민들이 실업상태에 있다 하였고, 광무 6년 2월에는 통어구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충청남도 홍주군과 보령군 등지와 각 도서자방에서는 일본인 어부가 주민을 위협하여 주민들이 운영하고 있는 어장을 침탈했으며, 광무 7년 2월에는 경상남도 창원 연안에서도 일본인 침어자들이 작당 내도하여 주민의 어장을 탈취하였다. 또한 광무 10년 4월에는 경상남도 동래군 상남면 각 포구에서 일본인 아부가 한국 어민의 어장에다 자의로 어망을 설치하고 도리어 한국인의 어업을 금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한편, 일본인 침어자들은 한국 어민의 경제적 약점을 악용하여 고리대적 수법 등으로 한국인의 어장을 매점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종 27년 윤 2월 부산감리의 보고에 의하면 일본인의 어장 매점으로 한국 어민의 생활이 막연하다 하였고, 광무 6년에는 궁내부가 외친왕부 소관의 경상남도 연해어장을 일본 어업자와 계약하여 매년 10만환의 세금을 궁내부에 납부한다는 조건으로 20년간의 어업권을 일본인에게 넘겨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실정을 당시 『황성신문』은 연안해읍의 모든 어장은 일본인에게 점탈되고 한국 어민은 어세만을 물어야 한다고 개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