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산-624m
201010203
시월에는 누군가 그립고 어디론가 가고 싶어서 길을 나선다. 어울려 가는 것이 아니라 홀로 떠돌면서 그리워하고 사색하는 것은 천성이 그러하나보다. 들판에 온통 벼가 익었다. 금빛의 이삭들이 알알이 맺혀있고 가을의 하루, 감나무 가지 끝에 풍경처럼 매달렸다. 농부의 땀과 그들의 기쁨이 가을이 깊었음을 알게 해 준다. 천년고도 경주에서 약 1시간 거리에 무장산이 있다. 무장산은 70년대에 목장의 목초지로 개발 되었다가 어떤 연유로 버려지면서 그 터에 자연발생적으로 억새군락이 형성 된 곳이다. 지금도 목장으로 가는 비포장의 넓은 길이 산 아래 마을에서부터 꼬불꼬불 정상까지 나 있는데 산행길이 되었다. 무장산은 원래 오랫동안 명확한 이름도 없이 무명봉으로 있었는데 한 산행객이 정상의 조그만 돌에 무장산이라 새기면서 산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무장산이란 이름으로 떠돌았다. 뒤 늦게 커다란 정상석이 서고 이름을 얻었으니 사연이 특이하다. 그런데 무장산은 실제로 무기를 감춘 산이다. 삼국을 아우른 태종무열왕(김춘추)이 평화의 염원으로 병장기를 수습하여 파묻었으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비극을 떨쳐버리고 영원한 평화를 바랐던 대왕의 염원이 서린 곳이다. 천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 곳에는 사람의 키만큼 큰 억새들만 무성하다. 굳세고 강했던 대왕의 기상이 깡마르고 꼿꼿한 억새와 닮았다. 아니 어쩌면 억새가 대왕을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 무장산의 억새를 보면서 영광스럽게도 고대 통일왕국의 대왕을 알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장산의 초입은 왕산마을이다. 마을의 버스종점에는 조그만 구멍가게가 있고 가게의 여주인은 평생 농사를 짓느라 허리가 굽었다. 버스운전수와 허물없이 말을 섞는 모습이 도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운전수는 주차를 시켜놓고 아예 의자를 끌어다 자리를 잡는 걸 보니 본격적으로 수다를 떨 모양이다. 주고받는 한마디 한마디가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왕산마을주차장에는 평일인데도 관광버스, 승용차가 빼곡하다. 길가 논에는 벼가 다 익었다. 축축 늘어 진 벼이삭이 소중하고 탐스럽다. 걷이가 끝난 논도 띄엄띄엄 보인다. 이삭을 털어 낸 볏단은 논바닥에 옹기종기 무더기를 이루었고 쭉정이만 남아서일까 허전하다. 그렇지만 빈들의 황량함이 왠지 좋다.
골짜기로 들어서는 곳에서부터 맑디맑은 계곡물이 흘러내린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손톱만큼 작은 새끼물고기들이 제법 있다. 계곡에는 고기를 굽는 집도 술집도 없는 청정의 공간이다. 투명한 햇빛과 청아한 바람과 곡식이 익어가는 냄새만 가득 할 뿐 살아 있는 계류의 물빛과 어우러져서 순수의 세상을 열었다. 물가에 곧게 솟은 돌벽 틈에 예쁜 단풍이 들었다. 저리 고운 나뭇잎은 볼 때마다 가슴을 저리게 하느니. 멀리 산은 있는 듯 없는 듯한데 발걸음은 자꾸만 빨라진다. 길은 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넓어서 숲 속의 오솔길과는 너무 다른 느낌이다. 계곡물은 곳곳에서 길을 가로지르고 물길마다 양쪽으로 징검다리를 놓았다.
초입에서 1시간 거리에 무장사삼층석탑과 아미타불의 이수 및 귀부가 있다. 태종무열왕과 관련이 있다. 삼층석탑과 귀부는 옛빛이 절절이 묻어난다. 석탑의 기단과 탑신에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였다. 풍화되는 것은 만물의 이치인 까닭에 아까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지만 기억마저 마모되어 잊혀질까 봐 두려울 뿐이다. 아미불은 없어지고 약간의 흔적만 남은 이수와 귀부는 천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품었다. 한 모퉁이 겨우 남았지만 돋을새김의 조각은 금방이라도 꿈틀댈 것 같아서 화려하고 역동적이었을 옛 모습을 짐작케 한다. 옛 석공의 숨결은 저렇게 돌에 남아서 또 천년을 가리라.
무장사 옛터에 돌탑이 홀로 섰나니
천년의 가람은 흔적도 없어라
아미불에 손 모아 빌던 여인은
천년 뒤에 길손이 찾아 들 줄
차마 몰랐어도
인연은 억겁으로 이어지나니
거룩한 아미불이 이어 준다면
석공의 망치소리 다시 울리고
여인과 길손은 예서 만나리라
다시 30여분을 오르면 길은 마침내 억새평원으로 들어선다. 초입에서 1시간 30분 거리다. 억새는 키가 껑충하고 빽빽하다. 바람이 억새의 물결을 일으키고 천성산의 화엄벌을 생각나게 한다. 억새의 군무는 언제 보아도 감흥이 새롭다. 억새밭을 가로지르는 산객의 모습이 보일 듯 말듯 한다. 정상까지 길은 그대로 넓다. 그래서 운치는 없고 구획정리 된 느낌이다. 어쩌랴 태생의 사연이 그러한 것을. 정상에는 아직 때도 묻지 않은 커다란 정상석이 섰다. 624m, 동대봉산 무장봉으로 새겨 져 있지만 이름은 무장산으로 기울었다. 정상은 평평하고 넓게 다듬었다. 아래로 억새평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억새가 꿈을 꾸는 듯하다.
점심과 그림박기에 1시간을 보내고 4시 16분, 다시 억새의 숲으로 내려선다. 숲은 훤히 뚫려서 참 휑하다. 스걱스걱 스치는 억새와의 부대낌도 없어서 서운하기까지 하다. 길은 등성이의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크게 선회하듯 돌다가 내려간다. 원래 가려고 했던 산행길은 왼쪽으로 해서 664봉을 넘어 운수골로 내려 와야 하는데 너무 늦었다. 12시 50분에 산행을 시작한 탓에 애당초 완주는 무리였다. 이미 해는 많이 기울었으니 가까운 길로 방향을 잡는다. 이정표에는 암곡까지 3.3km 1시간 거리다. 10여분을 내려와서 나무숲으로 들어간다. 처음 만나는 능선의 숲길이다. 낙엽이 떨어진 작고 좁은 길은 산행의 참맛을 느끼게 한다. 나무들이 머리를 풀어 하늘을 가렸다. 숲은 그렇게 길손을 기다렸나 보다.
햇살은 어깨위에서 머리위에서 조각조각 반짝이는 사금파리가 되었다가 산길에 낙엽 되어 흩어진다. 산길을 걸어가면서 깊어가는 가을의 기운에 흠뻑 젖어든다. 숲 속의 세상은 바깥의 세상보다 아름답다. 산의 향기는 그윽하고 산의 느낌은 자유롭기 그지없다. 속박도 없고 굴레도 없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산은 오라하지 않지만 구태여 가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며 순리라 여겨진다. 산에서 열어보는 세상은 산으로 가는 사람만이 아는 일이다.
4시 56분, 목장으로 이어지는 길과 다시 만난다. 길에 깔린 작은 돌들을 밟을 때 마다 차그락 차그락 경쾌하고 기분 좋은 소리가 난다. 마음도 발걸음도 어느 새 가벼워지는데 먼 곳의 산봉우리에 노을이 탄다. 타는 노을처럼 추색은 짙어지고 길손의 마음도 깊어간다. 암곡의 금빛 들녘을 지나 집으로 간다. 길은 멀어서 어둑어둑한데 길손은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이 길을 언제 다시 와 볼꼬..
- 무장산 가는 길-
1. 노포동시외버스터미널
/10~15분 간격
/ 4,500원
/ 50분 소요
2. 경주시외버스터미널 맞은 편 정류소
/왕산마을(암곡)행 18번 시내버스
/08시 ~20시(2시간 마다)
/ 1,500원
/ 40분 소요
3. 왕산마을 정류소
/경주터미널행 18번 시내버스
/08시 50분~20시 50분(2시간 마다)
첫댓글 흠~~중년의 고독은 오랜 연민의 병이러니...
병중의 제일 큰병이 천석고황인데?? 조심하삼! ㅋㅋㅋ
ㅎ~ 사전 찾아 봤더마는 고질이라카데 연.하.고.질.. 요카다가 진짜로 고질병 되는 건 아닌지 몰것엉 -,,-;
음~ 부럽습니다. 혼자 다니는거 내 특헌데...
특허번호 대 봐봐!! ^^
지금머하노.강강술레하나.ㄴㄴㄴ~~~
잦은 음주로 아리까리 한데...일구칠산가?
우히히 역쉬 짜가네. 1973 이 오리지널이여
호젓한 산행 부럽습니다..ㅎㅎ
나는 초당이 부럽당 ^.,^
나도ㄷㄷㄷㄷㄷㄷㄷㄷ~~~~
잘 봤습니다. 다음주 나도 혼자 갈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