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전략보다 차라리 잘못된 전략이 낫다"
가만히 있으면 도태 - 다른 기업들은 혁신·개발… 아무것도 안하면 낙오
100% 완벽한 전략은 없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믿는 방향으로 조직을 움직이는 것
어느 날 알프스 깊은 산중에서 훈련 중이던 스위스 산악 부대원들이
갑자기 닥친 폭설에 길을 잃고 조난당했다.
바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펑펑 쏟아지는 눈에 길을 잃고
여러 날을 헤맨 다음 모두 기진맥진해 더는 한 발자국도 내딛기 어려웠다.
탈진한 대원들이 절망하며 죽음에 직면해 있을 때,
어느 병사가 뜻밖에도 자기 배낭에서 지도를 발견했다.
대원들은 그 지도를 바탕으로 가장 가까운 마을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고, 그 결과 모두 구조됐다.
나중에 구조대가 도착해 이들의 생명을 구한 지도를 살펴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알고 보니, 그 지도는 스위스 알프스가 아닌 스페인의 피레네 산맥 지도였다.
이는 행동경제학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 교수가 종종 예로 드는 실화이다.
비록 잘못된 지도라도 병사들에게 눈보라 속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따라서 잘못된 지도라도 가진 것이 지도가 아예 없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기업 경영에서도 잘못된 전략이 무(無)전략보다 나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전략이 왜 필요한가 생각해 보자.
경영 전략이란 기업의 장기적 성과를 높이기 위해 경영 자원을 배분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기업은 같은 자금을 투자하더라도 시설에 투자해 규모의 경제를 추구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할 수도 있고,
광고와 기술에 투자해 브랜드 가치를 높여 경쟁사와 다름을 추구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BMW는 고급 스포츠카 이미지로 고가 제품을 특화하고,
도요타는 대중적 차로 중저가 시장에 포진하고 있다.
이를 그림으로 보면 BMW는 고가 지점에, 도요타는 저가 지점에 포진하고 있는 것과 같다.
BMW나 도요타와 같이 비용 또는 차별화에서 경쟁 우위를 가지는
기업들의 시장 포지션을 연결한 것을 '생산성 곡선(productivity frontier)'이라고 말하며,
이런 생산성 곡선 위에 있는 기업들의 경영 성과는 높게 나타난다.
즉 차별화를 추구하는 BMW나 비용 우위를 추구하는 도요타
둘 다 수익성이 높게 나타나고, 그중 어느 한쪽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생산성 곡선의 중간에 C기업이 있다고 하면,
C 기업은 BMW와 비교하면 비용은 같으나 차별화 수준이 낮고,
토요타와 비교하면 차별화 수준은 같으나 비용이 상대적으로 높아 경쟁력이 없다.
결국 경영 성과가 악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C 기업은
현재 위치에서 생산성 곡선 방향으로 이동하도록 전략을 세워야 한다.
만일 계속 같은 C점 위치에 있으면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생산성 곡선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BMW와 도요타는 계속 연구 개발과 혁신을 통해 신제품을 개발하고
기존 제품의 성능을 높여 생산성 곡선을 우상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생산성 곡선상에 있는 다른 기업들도
아무런 혁신을 하지 않으면 곧 C 기업과 같은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는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은 스위스 산악 부대원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동사(凍死)하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물론 C점에서 생산성 곡선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이는 마치 스위스 산악 부대원들이 잘못된 지도를 바탕으로 전진하다
낭떠러지를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눈보라 속에서 앉아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잘못된 지도를 보고 전진하다
낭떠러지를 만나는 것은 결과로 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잘못된 지도를 갖더라도 우연히 옳은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위스 산악 부대원들이 구조될 수 있었다.
아마도 지금 많은 한국 기업은 2014년 경영 전략을 구상하느라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경영자가 A 방향 또는 B 방향 중 어느 것이 옳은 전략인가에 대해
오랫동안 고심만 하고 결정을 못 한다면,
또는 올해 사업 운영도 작년과 전혀 다름없이 게을리한다면,
눈 폭풍 속에서 부대원들을 그 자리에서 얼어 죽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00% 완벽한 전략이란 없다.
생산성 곡선 위로 가는 데는 수많은 길, 수많은 전략이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지점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믿는 방향으로 조직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불완전하고 때로는 잘못된 전략일지라도 전략이 없는 것보다 낫다.
30년전,
전남 화순 두메산골에 조부모와 몸이 편찮으신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어린 동생들과 함께 넉넉치 않은 삶을 꾸려가면서도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야무진 시골 소녀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소녀에게 생각지 못한 시련이 닥쳤다.
고등학교 입학 원서 마감을 하루 앞둔 늦은 오후,
아버지로부터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 동생들을 잘 돌봐달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당시 16세의 어린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내가 알아서 할게…'는 '회피'가 아닌 '약속'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어른들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한
'회피' 수단으로 쓰는 이 말이, 저에겐 아버지와의 첫 약속이었습니다."
충남대 정심화홀에서 열린 삼성그룹의 대표 토크콘서트 '열정樂서' 무대에 오른
양향자(47)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플래시설계팀 상무의 말이다.
양 상무는 이날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 후, 삼성전자에서 연구보조원으로 일하다
‘삼성의 별’이라는 임원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전했다.
◇ 고졸벽 뚫은 '열정'…연구원 보조에서 출발해 사내 최고 전문가가 되다
양 상무는 1986년 광주여상을 졸업한 후, 삼성에 입사해
옛 삼성반도체 메모리설계실에서 연구원 보조로 일을 시작했다.
연구원 보조는 말 그대로 '보조'. 연구원이
반도체를 설계하면 그것을 도면으로 그리는 단순업무였다.
그때 양 상무는 '내가 나를 돕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끊임없이 배우자'는 약속이었다.
이후 양 상무는 주변의 고수를 찾아 끊임없이 묻고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이해할 때까지 배우기 위해 달려들었다.
어깨 너머로 배우면서도 양 상무의 반도체 설계 실력은 날이 갈수록 발전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양향자 상무는 자타가 공인하는
사내 최고의 반도체회로 설계 전문가가 됐다.
업무 성과도 뛰어났다. D램 설계팀에서
플래시 메모리 설계팀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메모리 제품 설계 자동화를 추진해 제품 개발기간을 단축하는 데 기여했다.
일 하는 틈틈이 공부에도 매달렸다.
1995년 사내 대학인 삼성전자기술대학에서 반도체공학 학사를 받았고,
2005년 한국디지털대 인문학 학사, 2008년 성균관대 전기전자컴퓨터공학 석사까지 취득했다.
독학으로 일어와 중국어도 습득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삼성의 별'이라는 임원을 달았다.
지난 5일, 삼성전자 정기 임원 인사에서 상무로 승진한 것이다.
남들보다 1년이나 빠른 '발탁 승진'이었다.
◇ "'알아서 잘 해내겠다'는 자세가 중요…'도움의 손길'도 바로 그때 다가올 것"
삼성에서 드물다는 호남 출신, 상고 졸업, 여성이라는 3박자를 모두 갖추고도
임원이 되는 특별한 영광을 안은 양 상무는 이날 학생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열심히 합니까?"
양 상무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하더라도 '알아서 잘 해내겠다'는 자세를 갖는 게 중요하다"며
"몰랐던 분야를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씩 깨쳐 나가를 재미를 터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끝으로 "스스로 열심히 할 때 주변에서 도움의 손길이 다가올 것"이라며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갖고
남들을 부러워하는 친구가 아닌
모두가 부러워하는 친구가 되길 바란다"고 격려했다.
별이 된 산골소녀 "의지만 있으면 불가능은 없죠"
삼성그룹 첫 여상 출신 임원, 양향자 삼성전자 상무
연구 보조원으로 입사해 반도체 회로 깊이 알고 싶어 석 달 만에 일본어 자격증
자격 없던 社內 대학 입학 끝내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 학사ㆍ석사까지 쉼 없이 열공
플래시메모리 설계분야 우뚝… 1년 빠르게 임원으로 발탁
"10년 후 자신의 모습 떠올리며 의지 다져라" 학생들에 조언
"아이 둘 낳고 기르는 거 너무 힘들죠.
게다가 남들보다 더 많이 공부까지 해야 하니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주변엔 나보다 훌륭한 '선생님'들이 너무 많고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이들의 도움으로 얼마든지 해 낼 수 있습니다."
삼성그룹 창사 이래 첫 여상(女商) 출신 임원인 양향자(47)
삼성전자 상무(디바이스 솔류션 부문 메모리 사업부 연구임원)는
대전 충남대에서 기자와 만나 성공의 공을 도움 준 이들에게 돌렸다.
1,000여 명의 삼성전자 임원 중 연구를 전담하는 여성 연구 임원은 딱 9명.
그 중 반도체 부문에서는 양 상무뿐이다.
지난해 12월 5일. 평균 승진 시기보다 1년 빠른 '깜짝' 승진 발표를 듣고
양 상무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고 했다.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공교롭게 그 날은 아버지가 저랑 같은 나이(46세)에
저 세상으로 가신 지 딱 30년 되는 날"이었다며
"하늘의 별이 되신 아버지께 딸이 이렇게 성공했다는 말을
해드릴 수 있어 뿌듯했다"고 했다.
전남 화순의 산골마을에서 네 형제(오빠 둘과 남동생 둘) 사이에서
'교수님'을 꿈꾸는 평범한 산골소녀로 자라던
양 상무는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원서 마감 전날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며
"동생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말을 남겼다.
양 상무는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말과 함께
다음날 여상(광주여상)에 입학 원서를 냈다.
그리고 열 아홉에 삼성전자 연구 보조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공부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현미경으로 반도체 회로를 들여다 보며 그대로 종이에 그리는 일을 하면서
"반도체 회로를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에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양 상무는 "반도체 기술은 일본이 앞서 있었고 상당수 자료가 일본어로 돼 있었다"며
"석 달 만에 일본어 자격증을 땄다"고 말했다.
양 상무의 악바리 근성은 이것이 시작이었다.
1990년 삼성전자는 사내 기술대학을 세웠다.
그런데 상고 출신이나 여사원은 입학할 수 없었다.
양 상무는 "담당자를 찾아가 시험 볼 기회만 달라고 매달렸다" 며
"가까스로 입학했지만 결국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했다.
그는 이후 한국디지털대 인문학 학사(2005년),
성균관대 전기전자컴퓨터공학 석사(2008년) 등 공부를 이어갔다.
지금도 매일 영어 과외 교사와 영어 공부에 열심이다.
그런 양 상무에게도 육아는 넘기 쉽지 않은 벽이었다.
그는 "시어머니도 도와 주셨고 동네 곳곳에 내 편을 만들었다"며
"수원 망포동에 수민이(딸) 엄마, 준성이(아들) 엄마 하면
웬만한 분들은 다 알았다"고 했다.
학기 초면 양 상무는 아이를 데리고 학교 주변 식당, 학원, 서점을 찾아가
'이 아이가 오면 먹을 거나 필요한 책을 주시고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라는 인사를 해 두고,
퇴근길에 들러 계산을 하면서 아이들 상태를 살폈다.
양 상무는 "소풍이나 입학식 졸업식은 못 챙겼지만
운동회 때는 점심 시간 중에 열리는 엄마달리기에 나가서
정장을 입고 맨발로 악착같이 1등을 해서
아이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주려 했다"고 말했다.
양 상무는 삼성그룹 청년 토크콘서트인 '열정 락(樂)서' 올해 첫 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그는 도서산간 지역 중학생 1,500여 명 앞에서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주제로 자신의 스토리를 풀어냈다.
양 상무는 학생들에게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고 강조했다.
그는 "1991년 10월 12일 사원 시절 큰 딸을 낳고 다이어리에
삼성전자 직급을 적으면서 마지막에 임원에 해당하는 'VP(Vice President)'를 적었다"며
"몇 년 후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아이를 낳았을 때
6개월 잠시 뒤쳐졌던 적을 빼고는 반드시 이뤄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 '내가 알아서 할게'는 귀찮아서 회피하려는 말이 아니다"며
"스스로 결정하고 직접 해 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80세에 시작해 세계 챔피언이 된 99세 이야기"
99세 수영 선수, 나가오카 미에코 세계대회 메달 60개, 신기록 11개… 70대까지 수영장 근처에도 안 가 미켈란젤로, 70세 성당 천장화 완성 신문사 선배도 방송·인터넷서 맹활약… 은퇴 후 30년은 또 다른 靑年期
새해 결심 목록에 '은퇴 후 어떻게 살지 미리 생각해놓기'를 올렸다.
무얼 하면서 나머지 30여년을 살아갈 것인가.
젊은 시절 로망처럼 꿈꾸던 전업 작가에 도전해볼까.
자그마한 출판사를 하는 것은 어떨까.
이런저런 궁리의 나래를 펼쳐보지만 결국엔 '내가 될까…' 하는 좌절감에 부닥치곤 한다.
나이 든 내게 경쟁력이 있을까.
무엇보다 새로 일을 벌였다 망신당하면 어쩌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새해 벽두 일본 아사히신문에 한 장의 사진이 실렸다.
꽃무늬 수영복 차림 할머니가 수영장 한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깊게 파인 주름살에 세월의 흔적이 찬란하지만 군살 하나 없는 날렵한 몸매다.
사진엔 '세계기록을 11개 보유한 99세'란 제목이 붙었다.
그녀의 이름은 나가오카 미에코(長岡三重子),
곧 100세 생일을 맞는 시니어 수영 선수였다.
그녀는 아마추어 동호인 대회인 마스터스 수영선수권의 세계 챔피언이다.
2년마다 열리는 세계 대회에서 지금까지 메달을 60개 따냈다.
그녀가 활약하는 95~99세 체급에서 세운 세계신기록만 11개에 달한다.
주(主)종목인 배영(背泳)은 적수가 없는 최강이고,
자유형·평영에서도 대회만 나가면 메달을 따낸다.
신문은 그녀가 53세 때 남편과 사별한 뒤 야마구치현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전했다.
내 눈길이 확 꽂힌 것은 그녀가 수영을 시작한 나이였다.
나가오카 할머니는 원래 수영 선수 출신이 아니다.
70대까지는 수영장 근처에도 안 가보았다고 한다.
무릎 통증에 좋다는 아들 권유로 난생처음 동네 수영장을 찾은 것이 80세 때였다.
처음엔 그냥 물속을 걷기만 했다.
25m를 헤엄칠 수 있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실력이 늘자 욕심이 생겼다.
87세부터 미국·이탈리아·뉴질랜드 등에서 열린 세계 대회에 출전했다.
90세에 처음으로 은메달을 땄고, 95세 땐 배영 200m 종목에서 첫 세계기록을 세웠다.
이후 95~99세 체급의 최강자로 군림하면서 신기록을 쏟아내고 있다.
지금도 일주일에 3~4회 수영장을 찾아 1㎞씩 연습을 한다.
새해엔 100~104세 체급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 목표다.
치열하도록 아름다운 99세의 '청년 정신'이었다.
나가오카 할머니의 사례를 일반화하기는 힘들 것이다.
100세 시대, 30~40년의 삶을 덤으로 갖게 됐지만
행복한 노년을 보내는 경우가 다수는 아니다.
많은 노년이 가난과 질병, 무관심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말년을 맞는다.
그래서 국가 책임론이 화두(話頭)로 등장했다.
국민의 은퇴 후 삶에 국가가 더 큰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동시에 노년층 스스로도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노년에 새로운 일에 도전해 일가(一家)를 이루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작년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賞)을 받은 작가는 75세 할머니였다.
그녀는 교사·사무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써 정상에 올랐다.
99세에 처음으로 출간한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됐던 여류 시인(고·故 시바타 도요)도 있었다.
국내에서도 70대가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한 사례가 나왔다.
미켈란젤로가 그 유명한 성베드로 성당 천장화를 완성한 것은 70세 때였다.
디포는 59세에 '로빈슨 크루소'를 썼고, 칸트는 57세에 '순수이성비판'을 세상에 내놓았다.
76세에 처음 붓을 들어 101세로 눈감을 때까지
'미국의 국민 화가'로 불렸던 모지스 할머니(1860~1961) 케이스도 유명하다.
기자의 신문사 대선배 중에도 새로운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분이 적지 않다.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낸 안병훈(76) 기파랑 대표는 66세 때 출판사를 세웠고,
편집국장 출신의 인보길(74) 뉴데일리 사장은 69세 때 온라인 매체 대표를 맡았다.
두 분 모두 지금 제2의 전성기를 구가 중이다.
조갑제(68) 조갑제닷컴 대표나 류근일(76) 전 조선일보 주필처럼
방송·인터넷으로 무대를 옮겨 맹활약하는 논객도 있다.
이런 대선배를 뵐 때 느끼는 공통점은 여전히 열혈 청년 같다는 점이다.
열정과 의욕에 넘치고 싸움이 필요할 땐 피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구나 80세에 시작해 챔피언이 될 수는 없다.
다만 마음먹기 따라선 노년을 새로운 인생으로 맞을 수는 있다.
중요한 것은 '주책' 소리 들을까 봐 겁내지 않는 청년 정신일 것이다.
은퇴 후 30년은 또 다른 청년기(期)의 시작이다.
--- 박정훈 칼럼--- |
"따돌림 받던 보육원 출신 장애인이 '기부천사'로"
31년 전인 1983년.
시계수리공으로 처음 받은 월급 15만원 중 절반 가까운 7만원을 뚝 떼어 빵을 샀다.
그걸 들고 장애보육시설 대구 성보재활원을 찾았다.
목발을 짚고 다니는(지체장애 2급) 그가 어릴 때 자란 곳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기부가 30년 넘게 이어져 총액이 수억원에 이르렀다.
자신의 시계점을 차린 지금은 처음의 10배인
70만원어치 생활필수품과 먹거리를 들고 매달 보육원을 찾는다.
대구 신천동 ‘태성당’ 대표 장태호(53)씨.
경북 포항을 고향으로 기억하는 그는 네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가난했던 가족은 아이를 포항수녀원 부설 보육원인 성모자애원 앞에 두고 갔다.
보육원에선 장애가 있다고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다.
장애 보호시설인 성보재활원으로 옮겨야 했다.
10대 후반 자립해 보겠다며 무작정 재활원을 뛰쳐나왔다.
그러나 장애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노숙을 하다가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두들겨 맞기도 했습니다.
배가 고파 다시 성보재활원으로 돌아갔어요.
그때 돈을 벌어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재활원에서 2년간 직업 훈련으로 시계수리 기술을 배웠다.
견습생 생활을 거쳐 83년 경남 거창에서 정식 시계수리원으로 취직했다.
빵 7만원어치를 사들고 성보재활원에 간 게 바로 이때였다.
“행복은 전염되더군요.
빵 먹으며 기쁜 표정을 짓는 아이들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씨는 “그 느낌 때문에 기부를 계속하게 됐다”고 말했다.
자신의 가게를 차리면서 주머니에서 꺼내는 돈이 늘었다.
10년 전부터 매달 70만원이 됐다.
성보재활원과 또 다른 보육원 애망원·애활원에
치킨·돼지고기·비누·휴지 등을 사다주는 돈이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보육원 출신 5명에게 매달 5만~10만원의 생활비를 보태주고,
수시로 양로원에 간식거리를 장만해 간다.
85년 전국기능올림픽대회 시계수리부문 금메달을 딴 그는 2000년부터
장애인과 소년소녀가장들을 일주일에 한두 차례
가게로 불러 시계수리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까지 80여 명의 시계수리 기술자를 키워냈다.
스스로도 얼마나 기부했는지는 2011년 알게 됐다.
대한민국 최고 기술자에게 주는 ‘명장’ 인증을 받기 위해서였다.
명장 심사를 할 때 기술만 아니라 선행을
얼마나 하는지도 본다는 말에 적어둔 기부 기록을 살폈다.
합이 2억3000만원이었다. 명장은 신청 직후
시계수리 부문이 없어지는 바람에 되지 못했다.
10년 전 결혼한 그는 “자녀가 없어서인지 기부를 하면서도
돈을 조금씩 모으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원을 밝혔다.
“언젠가 작은 복지시설을 만들고 싶습니다.
배불리 먹여주고, 시계수리 기술도 가르쳐주는 그런 시설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