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불교의 역사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졌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불기 915, 서기 372)이 중국의
전진왕으로부터 불상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인도 출신인 가야국의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로부터 불교를 직접
가져왔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소수림왕 이전에
이미 불교가 우리 나라에
뿌리 내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가 받아 들인 시기의 불교는
중국의 격의불교였습니다.
이후 인도의 중관사상을 계승한 삼론종에
대한 연구가 발달하였고 유식학과
중국의 천태종, 열반종이 유입되어
교학의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말기에는 도교가
성행하고 불교는 정치적 세력 투쟁에
휘말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고구려의 패망을 맞았습니다.
백제는 불기 928년(서기 384) 침류왕 때
동진의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습니다.
백제불교의 특징은 율종 중심의 교학에
있는데 그 밖에도 열반종, 삼론종,
성실종 등의 연구도 활발하여 교학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특히 백제는
일본에 불교와 선진문물을 전해줌으로써
일본 고대사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신라에는 고구려 묵호자에 의해 불기 961년
(서기 417)에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불기 1071년(서기527)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승인되었습니다.
신라불교의 고승대덕들은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통해 그 행적이 전해지는데
원광-안한-자장-보덕-낭지-혜숙-혜공-
대안-원효-의상-태현스님 등으로
이어지는 일대 사상가들이 배출되면서
7~8세기에 화려한 황금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원광법사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에 세속오계를 주어 정신적인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또한 원효,
의상 스님이 이루어낸 눈부신 교학
연구의 성과와 인재 양상은
중국에 까지 큰 영향을 주었고,
한국불교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신라인들은 특히 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신라 땅이 바로 불국토"라는 신념으로
가득차게 되었는데 이를 불국토사상
(佛國土思想)이라고 하며
호국불교사상이라고도 합니다.
신라인들의 불교를 매개로 한 정신적인
통일과 힘의 결집이 작은 나라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신라인들의 이런 사상이 투영된 것으로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렀던 화랑과
불국사, 석굴암, 경주 남산 등의
불교성지가 있습니다. 용화향도
(龍華香徒)란 "미래불인 미륵부처님이
오시는 용화세계(龍華世界)를 여는
무리"라는 뜻으로 신라의 땅에
미래불의 국토인 용화세계를
건설하겠다는 신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라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문화적
걸작은 불교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우러 나온 것이었으며,
그것은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적
발전을 포괄한 삼국의 성취였습니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각 나라와 지역마다 독특한 특성을
지닌 채 발전하면하면서 우리의 전통
사상과 문화로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불교는 특유의 사상적 포괄성으로
민속 신앙을 흡수하여 우리 민족의
전통 사상과 문화로 자리잡았습니다.
특히 원효, 의상, 원광 같은
고승들의 정신적인 역할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고, 교학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성과는 불교 뿐만 아니라
한국 사상사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통일신라 말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선종의 흐름을 계승하여 신라 말에
개산한 일곱 산과 고려 초의 두 산을
합쳐 구산선문(九山禪門)이 된 것은
고려 초의 일입니다. 고려시대에
선종의 구산(九山)과 교종의
다섯 가르침을 합하여 오교구산
(五敎九山)이 성립된 것입니다.
오교구산이란 5개의 교학과 9개의
선종 종파를 말하는 것으로 선종과
교종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다양한 모습을 띤 것은 신라가
망해가던 시기에 각 지역의 호족세력의
출현과도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호족의 실력자들은 자신의 세력을
도모하기 위하여 불교의 정신적인
지도자들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 불교는 삼국시대에 이어
국교(國敎)의 지위를 확립하여
국가적인 지원 아래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최고의
경전으로 받드는 고려대장경을
조판하였고 세계 최고의 인쇄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도선국사의 영향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사찰과 탑이 세워졌습니다.
당시에는 건축술도 뛰어나 우리 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로 꼽히는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도
이 때에 지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함께 불화(佛畵)가 발전하여
세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불교는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왕들은
대대로 당대의 고승(高僧)을
국사(國師)로 모셔 정신적인 지도를
받았습니다. 왕실의 후원으로 사찰이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고,
스님들이 높은 권세를 누리게 되어
그 폐단도 적지 않았습니다.
뜻 있는 스님들 사이에 권세를 멀리하고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 가자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보조스님의
정혜결사, 요세스님의 백련결사가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불교는 숭유배불정책으로
인해 억압과 수난을 당했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정하고
불교사상의 영향력을 의도적으로
비하하였습니다. 고려시대 큰 규모로
성장하였던 사찰의 토지를 몰수하고
스님들을 백정과 같은 팔천민의
하나로 신분을 낮추었으며,
서울 도성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았던 사찰을
몇 십 개만 남기고 강제로 폐찰하였으며,
각기 특성을 지니고 성장하던
각 종파(宗派)도 선종과 교종의 양종으로
통합하는 등 불교를 탄압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혹독한 배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산중으로 깊이 들어가
명맥을 이어 나갔습니다. 유교가
정치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지만,
왕족과 양반가의 부녀자들은 대대로
믿어 온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태조와 세종, 세조, 정조 등은
매우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며 직접
간접적으로 불교의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시하면서 한문으로 된 불교경전을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는
서산, 사명대사가 구국을 위해
승병을 조직하고 전쟁에 나아가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수많은 스님들이 흘린 피로 인하여
불교에 대한 탄압은 수그러 드는 듯
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혹독한 탄압이 계속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로 접어 들면서 유교질서가
한계를 드러내고 조세제도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렵게 되자 사찰도
여러 가지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특히 개혁적인 스님들은 유교지배 아래의
조선을 혁신하고자 백성들과 함께
여러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각종 민란에 스님들의 참여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빈발하는 봉건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봉기와 밖에서 밀려 오는 서양열강의
침략 속에서 불교사상으로 조선을
개혁하고자 이동인스님, 유대치,
김옥균, 박영호 거사 등이 개화당을
결성하여 서기 1884년 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희생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아래 놓여 있던
20세기 전반은 한국불교에도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아래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 있던
일본불교는 정부의 후원 아래
경쟁적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포교 활동과 동시에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것은 서양 제국주의자들이 침략에
앞서 선교사를 파견하여 식민지배의
정보 탐색과 지배 이념 창출에
앞장섰던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제정하여
시행한 <사찰령>은 조선불교를
식민 통치 아래 놓이게 한 법이었으며,
일본에 대한 예속을 촉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사찰령과 여러
조치를 통해 조선불교의 훌륭한
전통을 유린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승려의 결혼을 허가한 것이었습니다.
일본불교는 오래 전부터 승려의
결혼을 허가하고 있었는데 조선불교의
청정비구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일제시대에 우리 나라 스님들이
대부분 결혼을 하여 가족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정신과도
다른 것이었으며, 조선불교의
전통과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한편 식민지 시대에 불가피하게
일본에 협력하면서도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켜 나가기 위해 본사
주지스님들을 중심으로 1941년
조선불교조계종을 결성하여
총독부의 법인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백용성, 한용운, 박한영 등
적지 않은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끝까지 저항하며
조선불교청년회, 만당 등을 중심으로
민족 독립운동을 벌였고, 일제의
불교정책을 거부하던 청정 비구승들도
선학원을 결성하여 자주적인 활동
거점을 유지하면서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불교에는
필연적으로 일제불교의 청산과
교단의 정화가 과제로 제기되었습니다.
해방의 혼돈기에 불교개혁과
교단혁신을 위한 여러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나 좌우이념
대립의 와중에 휩싸여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전쟁 직후
일제시대에 합법화되었던 스님의
결혼제도에 반대하면서 교단의
정화를 요청한 청정비구들의 운동이
시작되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몇 차례에
걸친 정화지지 유시문을 발표하여
정화운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여러 차례의 혼돈 끝에 정화운동은
성과를 보여 조계종은 청정비구
중심의 출가승려로 재편되고
여기에 반대한 스님들은
독립하여 창종하였습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한국불교는
여러 종단으로 나뉘어졌으나 오늘날
불교계 각 종단의 협력기구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를 구성하고
전불교도의 뜻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한국불교의 장자 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은 1960-70년대 정화운동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분란이 있었으나
1970년대 후반 뜻 있는 불자들의
노력으로 포교, 역경, 도제양성이라는
종단의 3대 과업이 정립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대중불교운동과
민중불교활동이 전개되어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종헌(宗憲)』
과 『종법(宗法)』등 제도개혁을
단행하고 총무원과 더불어
도제양성과 포교를 전담하는 기구로
<교육원>과 <포교원>을 독립시켜
종단 활성화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어 대립하고 있으며,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서양화로 정신적인
혼돈과 물질지향적인 가치관의 팽배,
민족문화 경시 풍조 등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또한 산업문명의 부산물인
환경오염은 매우 심각하여 전세계적
차원에서 새로운 문명에 대한
갈망이 높아 가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한국불교는
민족통일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하며,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자연환경을 살리는 새롭고 건강한
문명 창조의 사상적 밑거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물질과
경쟁 위주의 사회에서 지나치거나
상처 입은 많은 대중들을 동체대비
(同體大悲)의 사상으로 포용하고
모두가 더불어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불국토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제가 불교를 믿고 수행하는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하고 믿으며 실행해 나간다면
언젠가 찬란한 불국토가
우리 앞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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