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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3
▣ 하나님이 그의 아들로 말씀하심-히브리서 1장-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위대한 멧세지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주의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살아계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제 1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들과 천사들보다 우월한 분이심을 보게 되는데,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이들이었다.
1.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분이신 그리스도(1:1-3)
1)그의 인격에 있어서-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선지자들은 다만 종으로 부름받았던 인간일 뿐이었다.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지으셨으며(또는 “모든 세계를 조성하셨으며“), 온 세상을 붙드시는 분이시다. 그의 말씀은 능력이 있으시다! 그가 말씀하시자 온 세상이 있게 되었고, 이제는 그의 말씀이 세상을 다스리며 보존하신다.
그리스도는 또한 만물의 상속자이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세상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의 제물이시다. 그는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셨다.“ 이제 그는 왕같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영광 중에 좌정해 계신다. 그의 사역이 완성되었으므로 그는 지금까지 좌정해 계시는 것이다.
2)그의 멧세지에 있어서-옛 시대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주어졌다. 어떠한 선지자도 완전한 계시를 소유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입을 통해 하셨던 것처럼 이상과 꿈과 상징과 사건들을 통해 계시하셨다.
이 계시들 모두가 그리스도를 지목하였으며,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최종적인 계시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시다! 구약의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로 점차 이끌어졌다. 오늘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날 계시를 주지 않으신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주어진 모든 계시로 비추어 주신다."
히 1:4-14
2. 천사보다 더 나은 분이신 그리스도(1:4-14)
유대인의 종교에 있어서 천사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신명기 33장 2절, 사도행전 7장 53절, 갈라디아서 3장 19절에 따르면,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성도」=거룩한 이들, 천사들).
만일 유대인들이 천사들을 통해 주어진 율법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천사들보다 더 위대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멧세지에 대해서는 보다 더 큰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저자는 천사들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를 보이기 위해 구약에서 일곱 군데를 인용하고 있다.
1)시편 2편 7절과 사무엘하 7장 14절 인용(4-5절)-만유의 후사이신 그리스도는 보다 큰 기업을 얻으시며, 따라서 보다 위대한 이름을 얻으신다. 시편 2편 7절에서 성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내 아들“이라 부르시는데, 천사들에게는 이 칭호를 주신 일이 없으시다(구약에서 천사들이 집합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리웠지만, 개별적으로는 그렇게 불리운 일이 없다).
이 진술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계된 말이지 그의 베들레헴 탄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행 13:33 참조).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는 한 번도 장사지낸 일이 없는 처녀 무덤에서 “낳은 바 되셨다“. 골로새서 1장18절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고 지칭한다.
두번째 인용은 솔로몬을 언급한다. 사무엘하 7장 전체를 주의깊게 읽자. 왜냐하면 다윗의 “집“이란 말이 히브리서에 다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은 솔로몬이 그 일을 할 것으로 작정하셨으며, 또한 친히 솔로몬의 아버지가 되실 것을 다윗에게 약속하셨다. 히브리서 1장 5절은 이 일을 “솔로몬보다 더 큰 이“이신 그리스도께 적용한다(마 12:42).
2)시편 97편 7절 인용(6절)-아마도 70인경이라고 불리우는 헬라어 역본으로는 신명기 32장 43절을 인용했을 것이다. 이 인용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돌아오심을 가리키고 있다(“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 “).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경배를 드렸던 것처럼 재림 때에도 그리스도를 경배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더 위대하시다는 증거이다.
3)시편 104편 4절 인용(7절)-천사들은 하나님의 종들로 지은 바된 영물들이다. 다음의 인용은 그리스도께서 종이 아니라 절대 주권자이심을 보여 준다.
4)시편 45편 6-7절 인용(8-9절)-시편 45편은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그리고 있는 결혼의 시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즉위하심을 명백히밝히시며, 또한 성부께서는 성자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신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입증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이러한 구절들을 왜곡시키고 있다. 어떤 “왜곡된 해석“은 심지어 “주의 보좌는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구절들은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선포한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5)시편 102편 25-27절 인용(10-12절)-여기서 다시 예수님은 “주님“으로 불리운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우주의 창조자이시다. 우주는 오래된 옷과 같이 낡아져서 산산이 부서질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결코 변함이 없으실 것이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천사들은 피조물이나, 그리스도는 영원한 아들이시다.
6)시편 110편 1절 인용(13절)-이것은 히브리서에 나오는 핵심적인 시편이다. 왜냐하면 시편 110편 4절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현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제사장이신 동시에 왕(Priest-King)이시다. 베드로도 사도행전 2장 34절에서 이와 똑같은 구절을 인용한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그리스도께 아직 절하지 않았으나, 어느날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천사들의 지위를 요약한다. 이들은 보좌에 오른 아들들이 아닌 섬기는 영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원 안에서 그와 더불어 후사가 된 우리를 섬기는 것이다.
이 인용 구절들을 복습할 때 하나님의 아들의 위엄과 그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4절에서 진술하듯이,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계신다. 왜냐하면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보다 큰 기업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성품과 사역과 섬김에 있어서 최고의 위치를 점하신다. 오늘날 비록 그리스도의 왕국이 지상에 있지는 않지만 그는 여전히 왕으로 좌정해 계시며, 이 땅에 의를 세우기 위하여 언젠가는 돌아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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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가적 연구
1)3절에 나오는 “형상“(express image)이란 영어의 성품(character)이란 말의 근간이 된다. 그것은 “인“(印, imprint)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인(引)이시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22장 20절에 나오는 “형상“과 똑같은 말인데, 동전에 새긴 가이사의 형상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2)“더 나은“(better)이란 단어(4절)는 히브리서의 핵심 단어이다. 성경에서 이 단어를 찾아 표시해 보라.
3)사무엘하 7장 14절을 그리스도께 적용함에 있어서 저자는 솔로몬이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다윗과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이중적 표상이다. 다윗은 추적당하고 거절을 당한 “도피하는 왕“이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솔로몬은 큰 영광 중에서 왕위에 올랐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는 것이다. 솔로몬의 통치는 평화로웠고 찬란했다. 솔로몬은 건축자였는데, 우리의 주님도 그러하시다. 솔로몬은 그의 지혜로 유명했는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시다.
4)히브리서 1장 10-12절에서 인용되는 시편 102편은 그리스도의 배척자 고난과, 죽음을 나타낸다. 24절은 히브리서 5장 7절과 연관이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죽음에서 구원되기를 바라시며 드린 기도였다.
5)저자는 확실히 구약을 알고 있었다! 히브리서를 공부함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말씀을 구약과 연관시키는 것이다. 그는 시편에서 많이 인용한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조차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관련된 구절들이 들어 있는 시편을 다 읽어 보면 당신에게 무언가를 더 말해 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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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2:1-4
▣ 우리의 큰구원-히브리서 2장-
본 장은 1장에서의 논점을 계속해서 다루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나은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논쟁을 중단하고 권면을 하는데, 이 권면은 본 서의 다섯 가지 권면들 중 첫번째 것이다(개요 참조).
1. 권면(2:1-4)
천사들로 말미암아 주신 말씀(구약 율법)이 견고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신 말씀도 역시 견고한 것이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구약의 날들 가운데서 그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람들을 처리하셨다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거나 거절하는 사람들도 처리하실 것이다!
여기서의 위험은 말씀을 “등한시함으로써 떠내려 가는“ 것이다. “... 언제라도 그 말씀들을 벗어나는 곳으로 떠내려 가지 않기를“(“혹 흘러 떠내려 갈까“)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은 번역이다. 3절은 “불신자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라는 뜻이 아니라, “만일 우리(신자들)가 등한히 여기면... “의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기 시작하는 데에서부터 영적 퇴보가 시작된다. 10장 19-25절에서 주는 권면을 볼 때, 이 서신의 당시 대상자인 유대인들은 기도를 소홀히 하고 하나님의 백성과의 교제를 소홀히 하고 있었던 것 같다(딤전 4:14 참조).
불순종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듣기를 즐겨하지 않는“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지 않는 성도들은 불순종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으로 그의 말씀을 확증하셨다(4절/ 행 2:22/행 2:43 참조). 이 말씀이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상, “등한히 하다“는 말은 마태복음 22장 5절에서 “돌아 보지도 않고“(가볍게 여기고)라고 번역되어 있다."
히 2:5-18
2. 해설(2:5-18)
1장에서 제시한 바, 예수님이 천사들보다 뛰어난 분이라는 저자의 논증은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가지실 때에도 그가 어떻게 보다 뛰어날 수 있는가? 천사들은 자신을 제한하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보다 더뛰어난 존재가 아닌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야기시켰다. 그는 예수께서 친히 육신의 몸을 입으셔야 하는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이 물음에 답한다.
1)마지막 아담이 되기 위함(5-13절)-성경의 그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장차 오는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일이 없다. 창세기로 돌아가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온 땅을 다스리게 하셨다(창 1:26-31). 바울은 시편 8편 5-7절을 인용하는데, 여기서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축복이 반복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는데, 흑은 문자적으로는 “잠깐 동안 하나님보다 못하게“라는 말이 된다. 이 말은 아담과 하와가 시련의 시기에 처해 있었다는 뜻인 듯하다.
이들은 하나님보다 못한 상태로 머물러 있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므로, 만약 그들이 범죄하기를 거절했었다면 이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사탄은 그들이 “잠깐 동안“만 하나님보다 못한 상태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서둘러서 때가 되기도 전에 영광을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죄가 들어왔으며, 이 일은 아담에게서 세상을 통치할 모든 권한을 빼앗아 갔다. 그는 왕이 되기를 중지하고 노예가 되었다. 바로 그 점이 8절에서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사람)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라고 말하는 이유인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 “우리는 예수를 본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시며, 그의 죽음과 부활은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을 때 저질러 놓은 모든 것을 원상태로 회복하였다. 그리스도는 잠깐 동안 천사들보다 못한 자리에 이르셨고, 갈보리 밑바닥까지 낮아지셨다(빌 2:1-12).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담당하여 죽으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으셔야만 했다. 사람들은 가시로 그에게 관을 씌웠으나, 이제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벧후 1:17).
세상에는 이제 새로운 가족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는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아담은 그의 죄로 말미암아 그의 가족을 죄와 사망으로 몰아넣었는데, 그리스도는 이제 아담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변화시키신다. 그는 우리 구원의 “개척자“(대장)이시며 우리가 따라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가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제들인 것은 우리 모두가 그의 거룩한 본성에의 참여자가 되었고,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구별된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10:10).
그는 시편 22편 22절을 인용하는데, 이는 갈보리에 관한 시에서 부활을 다룬 부분이다. 그는 또한 이사야 8장 17-18절도 인용한다. 이사야의 두 아이는 그 민족에게 보이는 징표였다. 스알야숩(사 7:3)은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다“는 뜻이며, 마헬살랄하스바스(사 8:1)는 “서둘러 탈취하다, 약탈하는 데 재빠르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사야 시대에 다른 사람들이 버림받을때에도 구원받은 믿음을 가진 “남은 자“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이들이 “이사야의 자녀들“인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로 구성된 한 가족, 곧 유대인 중의 남은 한 그루터기를 가지신다. 이들은 장차 다가올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2)마귀를 패배시키기 위함(14-16절)-사망과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아담의 죄의 결과였다(창 2:17/창 3:10). 사단은 사망에 대한 두려움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사용해 왔다. 사단은 “사망의 권세“를 전혀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욥의 경우와 같이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권세“라는 단어는 권위라기 보다는 “힘“이라는 뜻이다. 사단은 죄인들과 어두움을 주관하는 권세를 가졌으나(눅 22:53), 그리스도께서 흑암의 권세로부터 성도들을 건져내셨다(골 1:12-13). 사단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주관하기 위하여 “사망의 권세“를 움켜쥐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이러한 권세의 효력을 깨뜨리셨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여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사단을 패배시키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만 했던 것이다(요일 3:8 참조).
16절은 그리스도께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다고 분명히 밝힌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는 천사가 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셨으며, 유대인이 되셨던 것이다. 그는 천사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 타락한 천사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으나, 타락한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3)동정적인 제사장이 되기 위함(17-18절)-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신 세번째 이유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약점을 돕기 위하여 동정심 많은 제사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로 고난받게 하셨으며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그의 제사장 직분을 준비시키셨다(10절).
그리스도의 인격은 숙달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인(God-Man)으로서 그는 우리의 필요에 대처하기 위해서 고난을 견디셔야 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육신을 입으셨고(요 1:14) 이 땅에서 고난의 생을 사시는 동안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죄로 여김“을 받으셨다(고후 5:21).
이제 그리스도는 인간 제사장과는 달리 자비롭고 충성된 대제사장이시다. 우리는 그를 의지할 수 있다. 우리가 도움을 받고자 하여 그 앞에 나오면 그는 우리를 도우실 수가 있으시다. “도우신다“는 말은 “부름을 받고 달려온다“는 뜻으로, 의사에게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를 요청하면 우리를 도우시려고 달려오신다!
이상으로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우월하시다는 그의 논증은 완결된다. 이로써 저자는 그리스도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분이신바, 그의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그 이름에 있어서 우월하심을 보여 주었다. 결론은 명백하다. 그리스도는 우월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말씀을 간직하고 순종해야만 한다. 등한히 함으로써 흘러 떠내려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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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8편에 대한 부가적 연구
시편 9편의 맨 처음에 나오는 주(註, “영장으로 뭇랍벤에 맞춘 노래“)는 8편의 맨 끝에 속한 것이다. 그것은 “싸움을 돋우는 자의 죽음에 붙여“라는 뜻이며,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고 승리한 것을 가리킨다. 골리앗은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였으나(삼상 17:45) 다윗은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였다. 하나님은 40일 동안 참람한 말을 했던 “원수를 잠잠케 하셨다“(시 8:2 /시 17:16). 골리앗은 17장 4절과 23절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어린 아이와 젖먹이 같았을지라도(시 8:2) 하나님께로서 힘입어 원수를 무찔렀다(삼상 17:42 참조).
다윗은 크게 승리한 후 하나님께 고하려고 밤에 밖으로 나갔는데, 그로 인해 시편 8편이 씌어진 것이다. 이 시편을 사무엘상 17장과 함께 정성껏 읽고 어떤 새로운 의미를 주는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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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3:1-2
▣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히브리서 3장-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한 세번째 논증으로 들어가,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 뛰어나심을 다룬다. 물론, 모세는 유대 민족에게 위대한 영웅이었는데 바울이 모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입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유대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신 것이 훨씬 더 위대할 것이었는데도 이 사람들이 어떻게 유대주의로 되돌아갈 수 있었을까?
1. 직책에 있어서 더 위대하신 그리스도(3:1-2)
모세가 비록 제사장의 기능과(시 99:6) 심지어는 왕의 기능을 담당하였지만(신 33:4-7), 본래는 선지자였다(신 18:15-19/행 3:22).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보내심을 받은 “사도“ 또는 “보내심을 받은 자“였다(요 3:17/요 5:36-38/요 6:57/요 17:3/요 17:8/요 17:21/요 17:23/요 17:25).
그리스도는 또한 대제사장이셨는데 이는 모세가 결코 종사해 본 일이 없었던 직책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직분은 이스라엘의 지상적 소명이 아닌 “천상적 소명“과 관련이 있다. 모세는 이 땅의 백성을 위해 사역하였으며, 이들의 소명과 약속들은 이 땅에 속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이 땅의 나그네요 순례자들인 하늘나라 백성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시다.
모세는 율법의 선지자인 반면에 그리스도는 은혜의 사도라고 부언할 수 있다(요 1:17 참조). 모세는 죄를 범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죄 없는 삶을 사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주의해서 관찰하라)는 말을 듣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히 3:3-6
2. 사역에 있어서 더 위대하신 그리스도(3:3-6)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충성했던 것처럼(민 12:7)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다고 분명히 밝히신다(3:2). 그러나, 이들의 사역도 바로 이 지점에서 나눠진다. 모세는 종으로서였으나 그리스도는 아들이시다. 모세는 집 안에서 섬겼으나 그리스도는 집 전체를 관장하신다. “집“은 물론 성전이나 성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을 말하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구약의 전인 이스라엘 안에서 종으로 있었으나, 그리스도는오늘날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전반을 관장하는 아들이시다(히 3:6/히 10:21/벧전 2:5/벧전 4:17/엡 2:19 참조). “집“이 “백성“을 뜻하는 데에 대한 한 예를 들자면, 사무엘하 7장 11절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한 집을 이루고... “라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그의 가계와 그의 보좌를 영원히 세울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지상의 전인 반면, 교회는 하나님의 하늘의 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이 언제나 믿음으로 결정지어 진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구약의 백성들은 오늘날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두 언약 하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서로 연결시켰던 것도 바로 이 믿음의 연속성이다. 갈라디아서 3장 7절에서 참된 신자들을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가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인 것이다.
모세와 그리스도 사이의 대조에 있어서 두 가지 다른 문제들이 남아 있다.
첫째로, 모세는 종인 반면에 그리스도는 아들이시다. 이 말은 구약에서의 사역이 속박과 노예 상태에 대한 것인 반면, 새 언약 하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해방과 기쁨에 대한 것임을 암시한다. 구약의 율법은 “종의 멍에“로 언급된다(갈 5:1/갈 2:4/갈 4:1- 참조).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서 믿음으로 누리는 아들됨의 축복된 특권들이 옛 언약 하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둘째로, 모세는 모형과 그림자로 섬겼으나, 그리스도는 이러한 것들의 성취로 나타나신다(3:5-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참된 밝은 빛을 가지나, 모세 안에서는 우리가 그림자 안에 있게 된다. 바울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유대주의로 돌아간다는 것은 성취를 모형과 그림자로 바꾼다는 것을 뜻했다!"
히 3:7-19
3. 안식을 주시는 데 있어 더 위대하신 그리스도(3:7-19)
4장에서 안식이라는 말이 12회 사용되었는데, 반드시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이를 상세히 연구할 것이지만, 이 지점에서는 그 기본적인 개념을 소개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영적인 진리를 예증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사용한다(고전 10:1-13 참조).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종되었던 것은 마치 죄인들이 세상에서 종된 것과 같으며,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피로써 이스라엘을 구속하셨던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과도 같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땅을 유대인에게 약속하셨고, 자기 백성들에게 복된 삶을 약속해 오셨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이스라엘은 불신앙으로 반역하였으며, 하나님을 따르기를 거절하였다(민 14장).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제외한회중 전체를 심판하셨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백성의 결의를 반대한 이들이었다. 유대인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해야 했는데, 이는 정탐군들이 그 땅에 갔던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한 연수였다! 달리 말하자면, 이 민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신 12:9/수 1:13-15).
여기서 저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경고를 한다.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으며 세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이제 이스라엘처럼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복된 삶으로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가려는 유혹을 받았다. 3장과 4장에는 세 가지 다른 안식이 나오는데, 다음 장에서 이를 상세히 다룰 것이다.
-구원의 안식 4장 3, 10절
-시련 가운데서의 승리의 안식-가나안으로 상징된다:4장 11절
-미래의 영원한 안식-하늘의 안식:4장 9절
여기에 나오는 권면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약속된 안식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가나안은 하늘나라의 표상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가나안은 축복과 투쟁, 진보와 승리의 생활에 대한 표상인 바, 우리가 그리스도께 굴복하여 그를 믿고 의지할 때 그 안에서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시험과 시련의 한복판에서조차 우리가 소유하게 되는 것이 바로 현재의 안식이다. 이 안식은 모세나 여호수아(4:8)가 줄 수 없는 것이었다.
바울은 시편 95편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완악한 마음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이스라엘이 진행하기가 힘들 때 어떻게 하나님을 힐난하고 시험하였는지를 잘 알기 위해서는 출애굽기 17장을 읽어 보라. 믿는 자들이 오늘날 이런 일을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서의 근본적인 주제를 보게 되는데, “상황이 어려울 때 낙심하지 말고 원수들을 정복하며 온전한 데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요단강을 건너가서 가나안이라는 우리의 기업을 주장하자!
12절에 나오는 이 경고를 신자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까? 물론 할 수 있다! 불신앙도 그리스도인이 빠지기 쉬운 죄의 하나인데, 이것은 악한 마음에서 생겨난다.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일이 있으면, 우리의 의지와 생활을 그에게 굴복시켜서 매일 인도하심을 받으며 봉사의 삶을 살게 되는 또 다른 일이 있다.
좌절과 불신앙의 “광야에서 방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너무도 많다. 이들은 애굽에서 구원은 받았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기업을 주장하며 가나안으로 횡단해 들어간 일은 없었다. 유대인들은 피로써 값주고 산 바되었고 구름으로 가리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광야에서 죽었다! 이것은“구원을 잃게되는 문제“인가? 물론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인생과 축복을 잃게 되는 문제인 것이다.
무엇이 이같은 불신앙의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가? 첫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7, 15절)이며, 둘째는 죄에게 속도록 자신을 방치해 두는 것(13절)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첫째로 우리는 말씀에서 떠나가며(2:1-4) 다음으로는 말씀을 의심한다(3:18-19), 우리는 우리를 돕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권면을 거절하며(3:13) 말씀에 대해 둔감하게 될 때까지 고집부리며 계속해서 불순종한다(5:11-6:20 , 서론 참조).
믿는 자의 삶에서 죄란 실로 거짓된 것이다. 작은 것에서 시작하나 점점 더커지게 된다. 어떤 점에서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일이 불신앙의 악한 마음으로까지 이끌어 갈 수 있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전진해 가며 그 신념을 굳게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진실로 그들이 구원받았음과(3:6/3:14) 하나님의 징계와, 마치 이스라엘이 그러했듯 이 생에서의 심판조차도 즐겨 받는 것을 입증해 보여 준다. 불신앙이란 심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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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4:1-8
▣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안식-히브리서 4장-
본 장은 앞의 3장 11절에서 시작된 “안식“에 관한 주제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는데, 사실상 이 “안식“(rest)이라는 말은 이 부분에서 다섯 가지의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안식일:창세기 2장 2절/ 히브리서 4장 4, 10절
-가나안-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던 끝에 맞이한 이스라엘의 안식:3장 11절 등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현재의 구원의 안식:4장 3, 10절
-승리한 정복자의 현재의 안식 4장 11절
-미래의 영원한 안식 4장 9절
하나님의 안식일의 안식은 우리가 현재 소유한 구원의 안식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사역으로 말미암은 안식과, 장차 있을 영광된 “영원한 안식“의 모형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안식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행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을 주장할 때 갖는 전투와 축복의 생활을 모형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본 장에는 안식의 생활에 관한 네 가지 권면이 나온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4:1-8)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식을 주기로 약속하셨으나, 불신앙으로 인한 불순종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자기의 백성을 위하여 안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외관상으로는 불가능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주시며, 시련의 한복판에서도 평화를 주신다는 약속이다.
우리의 신령한 가나안에서의 “안식의 생활“을 가리켜 6장 1절에서는 “완전(또는 성숙)한 데 나아감“으로, 11절에서는 “소망의 풍성함“, 12절에서는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음“으로 일컫는다. 당시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시험의 때를 통과하고 있었다는 사실(10:32-39/12:3-14/13:13)과, 옛날의 이스라엘처럼 옛 생활로 “돌아가자“고 유혹받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승리의 안식을 약속하셨으나 이들은 거기에 미치지 못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으나 “믿음을 화합지“ 않았으며(4:2) 그들의 생활에 적용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의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보게 된다.
저자의 논증은 이렇게 전개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안식을 약속하셨으나(4:1), 이스라엘은 그 안식에 들어가는 데에 실패하였다(4:6). 하나님의 약속이 여전히 서 있는 것은, 여호수아가 비록 그들을 국가적 안식으로는 인도하였지만(수 23:1) 그들에게 이같은 신령한 안식을 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히 4:8). 또 다른 예로서, 수 세기가 지난 후 시편 95편에서 다윗도 이 같은 안식을 말한 적이 결코 없었다.
결론은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는 것이다(4:9). 그는 이러한 안식을 하나님의 안식일에의 쉼과 연관시키는데(4:4, 10), 그것은 지쳐버린 후의 쉼이 아니라 만족한 상태에서의 안식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신 후 지치지 않으셨다. 창세기 2장 2절에서의 안식은 완성과 만족을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영혼의 안식“이며, 또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약속하시는 믿음의 안식“이다.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마태복음 11장 28절의 쉼은 구원이며 선물이다.
승리의 안식은 우리의 헌신과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경고이다. 왜냐하면 그의 자녀들 중에서 이러한 승리의 생활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히 4:9-13
2. 그러므로 우리가 힘쓸지니(4:9-13)
여기서 “힘쓰다“라는 말은 “부지런하다“는 의미로서, “이러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부지런할지니“의 뜻이다. “부지런하다“는 말은 “흘러 떠내려감“의 정반대이다(2:1-3).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부주의하거나 게으른 상태로 성숙에 이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베드로후서 1장 4-12절과 3장 11-18절을 자세히 보면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부지런하라고 세 번이나 권면한다. 만일 우리가 부지런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실패를 반복하게 될 것이며, 약속된 안식과 기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이것은 구원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의 승리임을 다시 주목하자).
이러한 안식에 들어가는 비결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온갖 영적인 상황에 대한 해결을 제시해 준다. 만일 우리가 말씀이 우리를 심판하며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도록 허용한다면 그 축복을 기업으로 받기에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말씀에 대적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므로(시 55편) 그들은 40년간 광야에서 좌절하며 방황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검이다(계 1:6/계 2:12-16/계 19:13). 그리하여 그 검은 마음을 찌른다(행 5:33/행 7:54- 이스라엘이 재차 말씀에 순복하기를 거절함). 너무도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삼가는 데에 실패함으로 인하여, 축복을 빼앗긴다.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부지런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적용하는 방법이다."
히 4:14
3.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4:14)
이 말은 “우리의 구원을 굳게 붙들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는 도리“란 말은 실로 “동일한 내용의 신앙고백“인 바, 4장 14절에서와 같이 3장 1절, 10장 23절, 11장 13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그의 믿음을 증거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그의 신실함, 그리고 약속된 상급을 얻는 것과 관련이 있다(10:34-35 참조).
광야에서 방황한 유대인들은 구름 아래 있었고 애굽으로부터 구속함을 받았지만 간증이 될 만한 것을 잃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얼마나 보잘 것없는 증거자들이었던가!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해 내셨으나 이들을 이끌어 들일수는 없으셨다! 그들의 불신앙이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아갔다.
이 일은 바울이 11장에서 위대한 “믿음의 거성“을 그의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 사람들은 모두 다 역경과 시련에 직면했으나 그것들을 극복하고 선한 간증을 남겼다. 히브리서 11장 13절은 이 모든 사람들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였던 것을 “증거하였다“고(4:14 과 같은 단어임) 말한다. 에녹은 하늘로 들리워가기 전에 좋은 증거를 받았다(11:5).
그 장 맨 끝에 가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지금까지의 말을 종합한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며...“ 믿음이 있는 곳에는 좋은 증거가 있고(11:2) 불신앙이 있는 곳에는 증거가 없다.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믿음이 없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은 3장 7, 15절과 4장 7절에서 반복되는 경고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삼가는 그리스도인은 좋은 신앙고백을 유지할 것이며, 세상에서 그의 증거를 잃지 않을 것이다."
히 4:15-16
4.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것이니라(4:15-16)
이 구절들은 신자들이 그의 구원을 잃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유혹과 연약함을 아시는 대제사장이 계시며, 그분은 우리가 결코 당하지 않는 시험들을 참으셨다. 시험의 때가 오면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주실수 있는 도움을 받고자 은혜의 보좌 앞으로 돌이킬 필요가 있다.바울은 마지막 장들에서 본 주제를 더욱 세밀하게 다룬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이 권면을 첨부하고 있는 것은 독자들이 낙담하여 “계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계속 전진하는 데 필요한 것이 우리에게는 없어!“라고 말하지 못하게하기 위함이다. 물론 당신은 이런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신자도 요단강을 건너가 원수를 정복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비로우시며 “때를 맞추어 돕는 은혜“를 주시는 대제사장이 계신다.
저자가 이 시점에서 “보좌“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구절은 출애굽기 25장 17-22절에 나오는 황금으로 된 시은소와 관계가 있다. 법궤는 금으로 입힌 나무로 된 상자인데, 모세는 이 궤의 맨 위에다가 양쪽 끝에 그룹이 있는 황금 “시은소“를 두었다. 이 시은소가 하나님의 보좌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좌정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셨던 곳이다. 그러나 구약의 시은소는 은혜의 보좌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민족은 율법의 멍에 아래있었기 때문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그리스도는 우리의 시은소이시다(요일 2:2-“화목제물“).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는 심판의 보좌가 아닌 은혜의 보좌로 나오는 것이며, 그는 우리를 만나시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본 장을 다시 읽으면 우리가 구원을 잃으리라는 그런 경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가 말씀과 기도 가운데 살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신령한 가나안으로 인도하셔서 안식과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