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갈 外/류인서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 축축한 그늘 속 아기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으니
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오라 했음을 알겠다
눈
눈이 온다 와서 먹어치운다
가등 아래 남자를 먹어치운다 벤치뿐인 벤치를, 거기 붙은 빈자리를 먹어치운다 공터의 이글루 같은 자동차들을 먹어치운다
먹어치운다 엘니뇨와 라니냐의 소란한 탁자를 먹어치운다 던킨도너츠 커피 한 잔을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담벼락과 포장마차의 낡은 연애를 돌아와 쓰러져 눕는 반 토막 그림자를 먹어치운다
전화선 너머 국경 너머 둥지 밖 새들의 잔고를 먹어치운다 발 묶인 봄, 세상으로 가는 이정목을 먹어 치운다 저의 시작 북풍의 침대까지 남기지 않고 먹어치운다
다 먹어 텅 빈 눈의 식탁 눈의 위장 소화불량 폭설이 온다
공벽
소리를 굳혀 소리벽돌을 쌓는다 쌓을수록 모자라는 말들, 자꾸만 남아도는 소음들, 그림자 지는 쪽으로 쓰러지는 웃음과 울음들의 도미노 절름대는 소리와 벽돌 벽돌과 소리 사이에 소리를 저며 만든 흡음타일을 끼워 넣는다 소리가 닫힌다 눌리고 접히며 애도도 없이 지워지는 소리의 뒷면, 남는 표정들
창 없는 소리의 외벽을 타고 청가시덩굴 담쟁이가 반군처럼 증식한다 어떤 세계는 무성하게 고립한다 그렇게 봉인된다 벽돌 속의 입 없는 소리벌레가 조금씩 안을 파먹으며 몸을 키운다 탈바꿈 중인 벌레의 어둠이 날개를 달 때 소리와 허공의 자리바꿈이 끝난다 차갑고 얇은 내식성의 고요, 이 고요의 내부를 수맥처럼 뚫고 가는 수직사막의 뿌리
어둠의 단애
저문다는 것, 날 저문다는 것은 마땅히 만상이 서서히 자신의 색을 지우며 서로의 속으로 스미는 일이라야 했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서로의 그림자에 물들어가는 일이라야 했다 그렇게 한 결로 풀어졌을 때, 흑암의 거대한 아궁이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일이라야 했다 너를 바래다주고 오는 먼 밤, 제 몫의 어둠을 족쇄처럼 차고 앉은 하늘과 땅을 보았다 개울은 개울의 어둠을 아카시아는 아카시아의 어둠을 틀어안고 바윗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누구도 제 어둠의 단애 밖으로는 한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한 어둠을 손 잡아주는 다른 어두움의 손 같은 건 볼 수 없었다
알
개굴개굴 와글와글, 울음의 강보에 쌓인 점액질의 슬픔이 있다 몸 전체가 눈알인, 눈알 하나가 곧장, 쏟아지기 직전의 눈물 한 동이인
울긋불긋 차갑고 축축한 내 슬픔의 속내를 빠안히, 마주 들여다보는 이 비릿한 눈물송이들 제 어둠의 온기로 부화하는, 몸집 보다 커다란 울음주머니를 예비한
새
잠시 후에 부화한 알에서 걸어나온 어린 조약돌이라 부르자 무리와는 조금 다른, 새싹의 부리를 가진 조약돌 노래를 부르는 조약돌이라 부르자
작은 무덤처럼 슬픔으로 부풀어오른 조약돌 외로운 조약돌이라 부르자 꽁꽁 얼어붙은 빙판 위에서 두근두근 깡충깡충 춤추기 좋아하는 조약돌
바람의 발바닥을 가진 나비 같은 조약돌 깜빡이는 거울 조각 조약돌이라 불러도 좋겠지만 그냥, 바보 같은 조약돌이라 부르자
노래의 단조로운 그물에 가둬둘 수 없는 이상한 조약돌 금지된 해변을 걷는 그런 조약돌이라 부르자
하고많은 조약돌들의 해변 얼어붙은 알에서 걸어나온 얼룩박이 조약돌 구멍난 내 호주머니에 남아 있을지 모를 그 한 알, 살아 있는 조약돌이라 부르자
촛불
어둠은 오늘도 우리의 우울한 안부로구나 얼어붙은 창(窓)을 향해 당기는 부드러운 방아쇠와 납방울처럼 다시 우리 귓속으로 떨어져 굳어가는 촛농의 말 잠든 거리로 피 흘리는 어린 불빛을 물고 사라지는 외로운 저 작은 짐승
별
만일 네가 혼기 꽉 찬 아가씨라면 네 집 담장 위에다 꽃핀 화분 대신 유리항아리를 올려놔주렴 행인들 중 몇은 이날을 기다려 찾아온 젊은이, 그중 발 빠른 손이 항아리를 집어 던져 깨뜨릴 테니 깨진 유리조각을 밟고 혼례의 승낙을 구하려 네 집 대문을 두드릴 테니
울타리
얼룩말의 검은 무늬와 흰 무늬 사이에서 바람이 생겨난다지 피아노의 흰건반과 검은건반 사이에서 풀들이 자란다지
혓바닥을 쟁기 삼아 말밭을 갈던 연인들이 가시나무를 심는다 서로의 귓속에 흉터 속에 심는다
초원을 벗어난 얼룩말이 가시나무를 버리고 맛있는 가시잎도 버리고 내 검은 가로줄무늬 티셔츠의 주름 안으로 뛰어들어온다
술래와 숨은 이가 자리를 바꾸고 심드렁해진 연인들은 다시, 제가 그린 그림의 새장에 갇혀 날개를 퍼덕인다 그들은 흩어진 허공의 새 발자국을 그러모아 세어보고 또 세어본다
가시나무처럼 마디 많은 계절 대신 나는 소심한 얼룩말이나 꺼내 초원으로 돌려줄까 생각 중이다 유리컵의 물그림자가 식탁 위에 말갛게 샘을 파는 사이 상사병 걸린 바람이 가뿐, 피아노 건반을 딛고 장미 울타리를 뛰어넘는다
?시집『신호대기』(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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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먼저 와서 / 류인서
횡단보도 신호들이 파란불로 바뀔 동안 도둑고양이 한 마리 어슬렁어슬렁 도로를 질러갈 동안 나 잠시 한눈팔 동안,
꽃 먼저 피고 말았다
쥐똥나무 울타리에는 개나리꽃이 탱자나무에는 살구꽃이 민들레 톱니진 잎겨드랑이에는 오랑캐꽃이 하얗게 붉게 샛노랗게, 뒤죽박죽 앞뒤 없이 꽃피고 말았다
이 환한 봄날
세상천지 난만하게 꽃들이 먼저 와서, 피고 말았다
------------------------------ 류인서 2001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여우』『신호대기』가 있다.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2009), 청마문학상 신인상(2010)을 수상했다. * 류인서 시인은 2001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는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여우』가 있다. 현재, 대구한의대 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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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아침(36)]
병 / 류인서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그들은 늘 그의 오른쪽에 앉는다 아내 투정도 아이의 까르륵 웃음도 여름날 뻐꾸기 울음소리도 빗소리도 모두 그의 오른쪽 귓바퀴에 앉는다, 소리에 관한 한 세상은 그에게 한 바퀴로만 가는 수레다 출구 없는 소리의 갱도 어둠의 내벽이, 그의 들리는 귀와 들리지 않는 귀 사이에
그의 비밀은 사실, 들리지 않는 귀 속에 숨어 있다 전기를 가둬두던 축전병처럼, 그의 왼쪽 귀는 몸에 묻어둔 소리저장고 길게 목을 뺀 말 모자를 눌러쓴 말 눈을 뚱그렇게 뜬 말 반짝반짝 사금의 말 진흙의 말 잎과 뿌리의 말, 세상 온갖 소리를 삼킨 말들이 말들의 그림자가 그의 병 속에 꼭꼭 쟁여져 있다 그것들의 응집된 에너지를 품고 그의 병은 돌종처럼 단단해져 간다
한순간, 고요한 폭발음! 소용돌이치며 팽창하는 소리의 우주가 병 속에, 그의 귓속에 있다 한번 씩 바닷가에 갈 때마다 수협직판장 부근에서 공갈빵을 샀다. 그 공갈빵을 파는 부부는 청각장애자였다. 손님이 별로 없어 보였고 트럭을 개조해서 만든 작은 공간에 두 사람이 처연하게 앉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둥글둥글하고 텅 빈 공갈빵 속이 소리 저장고 같기도 하다. 온갖 소리들이 침묵으로 반죽된 채 그 빵을 불룩하게 밀어 올린 것 같다. 언제부턴가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장사가 시원치 않아 떠났나 보다. 하지만 수화를 하던 부부의 이미지는 왠지 내 눈 속이 아닌, 귓속에 보관되어 있는 것 같다.
‘한순간, 고요한 폭발음!
소용돌이치며 팽창하는 소리의 우주가’ 내 귓속에 오래 오래 보관될 것 같다. - 권주열 시인
< 저작권자 ? 경상일보
별/류인서
만일 네가 혼기 꽉 찬 아가씨라면 네 집 담장 위에다 꽃 핀 화분 대신 유리 항아리를 올려놔주렴 행인들 중 몇은 이날을 기다려 찾아온 젊은이. 그중 발 빠른 손이 항아리를 집어 던져 깨뜨릴 테니 깨진 유리 조각을 밟고 혼례의 승낙을 구하려 네 집 대문을 두드릴 테니
<감상>
가을 밤은 차고 가을 물소리도 차다. 올려다보면 서걱이는 별의 찬란한 행렬이 이승의 끝이 어디인가 묻고 있다. 수억 광년 저편의 공간을 가로질러 온 빛들. 수억 광년이라니. 그것은 시간의 이름인가? 허무의 이름인가? 아니면 무변(無邊)한 인생의 이름인가?
별은 소리를 내듯, 숨을 쉬듯이 하늘을 빛내는데 우리는 왜 때로 아프게 살아야 하는가 묻는 다. 저 찬란한 하늘의 빛들이 때로는 유리 조각의 그것처럼 통증의 무늬로 보이는가. 아프지 만 필사적으로 가야 하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목숨을 내놓고 가야만 하는 길이 있나보다. 가령 '혼례' 같은 것 말이다. 유리 조각을 밟으며 혼례 승낙을 구하러 오는 이 있다니 그것은 세속의 결혼식을 말하는 것은 아니리라. 대우주에서 짐승을 거쳐 인간으로 내려오는, 기쁨과 슬픔이 반분한 사랑의 향연. 비밀문서처럼 숨어 아름다운 시다.
-장석남(시인, 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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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서평 / 2013년 / 가을호 / 류인서시집 / 양애경서평
화사한 디스토피아에서
-류인서의 시집 『신호대기』
양 애 경
평소에 문예지에서 특유의 개성이 인상적이었던 류인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신호대기』를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읽고 나서, 시인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더 커졌다. 그의 텍스트는 너무 순수한 언어적 생산물이어서, 텍스트 뒤에 있는 시인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류인서의 시는 작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시는 특유의 감각과 환상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다. 가상공간을 다룬 영화 ‘매트리스’나 ‘인셉션’ 속의 시공간처럼, 이러한 세계의 창조는 극도의 몰입과 집중력을 요했을 것이다. 왜 그런 세계의 창조가 필요했으며, 그 창조는 예술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또한, 류인서가 창조한 그 세계에는 ‘생경할 만큼 새로운 감각의 풍요로움’이 존재한다. 그의 시집 해설에서 장석원이, 류인서의 시가 “육체라는 근원에서 추출되는 체험과 기억으로 구성”되며, 그 “체험과 기억의 심연에서 부상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라고 요약한 것은 매우 적절한 지적이다. 문제는 시인의 그 풍요로운 체험과 기억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감각에 독자가 어떻게 동참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 읽으면서, 나는 류인서의 시가 창조한 세계는 현실세계를 재해석한, 디스토피아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시 속의 주인공인 話者가 어떤 유토피아를 향한 여행을 끝없이 꿈꾸고 있다는 것, 그러나 그 여행은 아직 완성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읽어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 전체가 시인 특유의 아름다움을 띄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 글을, 그의 사물화 감각, 디스토피아적 세계의 표현, 유토피아를 향한 여행의 세 항목으로 나누어 차례차례 짚어가고자 한다.
1. 역발상 逆發想의 신선함
앞에서 말한 것처럼, 류인서 시인이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는 매우 특이하다. 사물에 대한 인식 전환은 류인서의 시집에 실린 첫 작품 「물이 쏟아지는 붉은 컵」에서부터 강렬하게 독자를 강타한다. 시 속의 화자는 ‘목이 마르다’고 이야기하는 대신, 아직 물이 담기지 않은 빈 컵의 원초적인 목마름부터 이야기한다. 사람을 중심으로 보면, 컵은 물을 담는 도구에 불구하며, 여기서 주인공은 ‘사람’이 되어야 맞다. 하지만, 시인은 입장을 바꿔놓는다. 컵이 주인공이다. 컵의 속성은 물을 담는 것이다. 그런데 컵이 비어 있다면, 컵은 물이 차 있는 상태를 갈망하는 목마름을 가지게 된다는 역발상이다. 그렇게 보면 물을 담는 빈 용기들은 그 크기만큼의 목마름을 갖게 되는 셈이다. 등산배낭에 달린 스테인리스 컵은 그만한 분량의 목마름을, 커다란 맥주컵은 맥주컵 만큼의 목마름을 갖고 있는 셈이다.
시의 진술은 여기서 멈춘다. 하지만 열린 결말은 독자에게 의미가 비어있는 자리를 채우도록 부추긴다. 컵의 욕망은 인간의 욕망이 대체된 것이며, 욕망이 클수록 갈증은 더 커지니, 결국 ‘물이 쏟아지는 붉은 컵(입술)이자 천둥처럼 무거운 컵’은 인간의 무겁고 커다란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역발상은 다른 시 「추문」에서도 잘 나타난다. 창가에 놓인 꽃병을 보고 시인은 “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꽃으로 막혀” 있다고 말한다. 꽃병에 꽂힌 꽃을 아름답게 보는 대신, 시인은 병 입구가 꽃으로 막혀 있으며, 꽃 또한 “병 속의 물을 끌어올리느라 핏발 서고 혀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상태라고 본다.
이처럼 류인서 시인의 사물에 대한 시각은 매우 새로우며 그 새로움은 종종 역발상에서 나온다.
2. 화사한 디스토피아에서
류인서의 시 속의 풍경들은 화사하다. 주로 장식적으로 잘 꾸며진 도시적 풍경이다. 그러나 그 화사함 뒤에는 어둠이 있다. 시 「철사천사」에서 시인은 백화점 쇼윈도우 속을 들여다본다. 디스플레이된 조화 나뭇가지에 매달린 철사로 만든 천사 는, 물질적 풍요가 궁극의 행복을 줄 수 있다는 환상을 전시한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거짓이다. 쇼윈도우 속의 신상품을 살 수 있는 것만으로 인간이 행복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시 「나비」 속의 나비들도 그렇다. 이 시 속의 나비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천상에 가까운 존재이지만, 날지 못한다. 아마도 박물관 속 나비표본으로 고정된 듯한 이 나비들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세계”에 자유를 속박 당하고, “내 꿈 건들지 마 내 잠에 손대지 마”라고 독백할 뿐이다. 왠지 이 나비들은 다이어트와 미용성형으로 창백해진 젊은 여성들을 닮았다.
그래서 류인서 시 속의 세계는 화사하지만 일종의 디스토피아이다. 정돈되고 화사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 세계 속의 존재들은 거의 생명이 없는 존재이거나 생명이 유예된 존재다. 그 세계의 거주민인 인간도 마찬가지다. 현대 도시에 건설된 디스토피아에서 인간은 어렴풋이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산다. 현실이 행복하지 않으므로, 꿈속에서 유토피아를 찾는다.
그런데 현대 도시가 디스토피아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류인서 시인은 여러 편의 시에서 ‘욕망’에 주목한다. 시 「라스푸틴」에서, 시인은 제정 러시아 시절 니콜라스 2세의 황후인 알렉산드라의 비호를 받아 막강한 권력을 떨쳤던 요승 라스푸틴의 죽음을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얼음이 녹고
저자의 취한 바람이 주문과 추문으로 그의 부활을 부추길 때
검은 유머처럼 강물 위로 떠올라 펼쳐지는
그의 승복僧服
그것은 내가 사는 이 왕국의 지도와 난감토록 닮아 있다
지도의 아랫도리에는 거대한 남근이 달려 있었다
_「라스푸틴」 부분
처음에는 농부들의 성자로 예언자로 추앙을 받다가 황실의 총애를 받아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고, 마침내 귀족들의 손에 암살당한 라스푸틴의 드라마틱한 삶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시인은 왜 라스푸틴에게 주목했을까? 그 이유는 “내가 사는 이 왕국의 지도와 난감토록 닮아 있다”는 서술에서 나타난다. 라스푸틴이 끝없이 욕망을 키우다가 괴물이 되었듯,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또한 구성원들의 욕망이 쌓아올린 거대한 괴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류인서는 물질문명에 희생된 것들의 주검 위에 세워진 우리의 거대도시, 즉 디스토피아를 묘사함으로써 문명비판적인 주제를 드러낸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시가 그것이다.
해변으로 떠밀려 와 죽어가는 화면 속의 고래
그 고래 물기 그렁한 눈접시에 담기는 배부른 구름
그 구름 몸 풀어 어린 구름에게 젖 물리는 동안
어린 구름 자라 덩치 큰 고래 구름으로 다시 떠가는 동안
죽어가는 고래 둥근 눈접시 둘레에
백 배속 빨리감기 테잎처럼 되감기며 지워지는 머나먼 낯선 별의, 바깥
_「렌즈」 전문
짧고 박력 있는 시다. 아마도 해변에서 죽어가는 고래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같다. 그 영상의 배경에 있는 구름의 모습과 죽음에 임해 멀어져 가는 고래의 의식에 대한 묘사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연민을 자아낸다. 고래의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과, 현재의 슬픔과 고통이 전기충격처럼 시청자에게 옮아오는 순간이다. 인간과 고래라는 서로 다른 種이 동등한 생명 대 생명으로 소통한다.
그러고 보면 류인서 시인이 묘사한 디스토피아는 가상현실이 아닌, 실제의 현실이다. 시인과 우리가 살고 있는 디스토피아는 이처럼 아름다운 것들의 불행 위에 세워졌으며 앞으로도 더욱 가속되는 희생 위에 존속할 것이다.
3. 유토피아를 꿈꾸며
근대인들은 현대가 도래할 때, 도시문명의 편리성으로 인해 평등한 행복을 누릴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와 많이 달랐다. 자연을 희생시키고 얻은 도시의 풍요로움은 모두의 것도 아니었고, 욕망하고 경쟁하면서 사람들은 더 불행해졌다. 그래서 류인서가 그려낸 화사한 디스토피아 속의 화자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꿈꾸고, 어딘가로 가고 싶어 한다. 아마도 그 ‘어딘가’는 여기서 찾을 수 없는 조화로운 공간, 일종의 유토피아인 듯하다.
예를 들어 시 「생일」 에서, 생일을 맞은 화자는 어머니를 초대하여 생일상을 대접한다.
어서 오세요 어머니 오늘 이예요
나 지금, 당신이 말한 그 끔찍한 나이에 닿았어요
습관처럼 놓인 생일상을 보세요 아름다운 붉은 상보를 보세요
_「생일」 부분
화자는 태어난 것을 자축할 수 없다. 삶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끔찍한 나이”에 도달한 화자는 낳아주신 어머니께 생을 도로 거두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밝은 날 밝은 시 골라/ 다시 날, 낳아주세요”라고 간청한다. 원치 않는 지금의 생에서 다른 생으로 이동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제 디스토피아에서 탈출하기를 원하는 그는 끊임없이 떠나기를 꿈꾼다. 「매직블록」, 「별」, 「달팽이」, 「봄, 무방향 버스」 등에서 여행의 이미지는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가 가고자 하는 유토피아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다. 어쩌면 류인서 시인은 유토피아의 존재를 스스로도 믿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Let me in」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 「달팽이」에서 화자는 “우리가 기다리는 기차는 세상에서 가장 먼 곳으로 데려다 줄 기차”라고 노래한다. 그런데 그가 언급한 「Let me in」은 따돌림 당하는 열두 살 소년과 흡혈귀 소녀의 기묘한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흡혈귀 소녀가 괴롭힘을 당하던 소년을 편들어 무자비한 살육을 벌인 후, 둘은 어딘가로 함께 떠날 것을 희망한다. 그러나 이 떠남에는 장래가 없다. 흡혈귀 소녀와 소년이 처음 만난 아파트 앞 놀이터는, 소녀가 그녀에게 피를 뽑아 바치는 헌신적인 사나이와 함께 어딘가에서 떠나와 닿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현재 시점에서 소녀에게 버림받은 그 사나이는, 미래의 소년의 모습이다.
그러고 보면 이 시집의 표제가 『신호대기』인 것도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시인은 디스토피아에 살면서 유토피아를 꿈꾼다. ‘신호대기’ 상태에 얼어붙어 있지만, 마법에서 풀리듯 살아날 순간을 꿈꾼다.
비록 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다는 인식이 이 시집을 관통하고 있지만, 시인의 어법은 그다지 어둡지도 무겁지도 않다. 그는 시 「봄, 무방향 버스」에서 무방향성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이 길은 무방향, ‘없음의 방향’ 하나를 더 가진 길이라 하네
아직 실체를 모르는 유토피아를 향해 더듬더듬 나아가면서, 류인서 시인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자신을 비관하는 대신, ‘없음의 방향 하나를 더 가진’ 상태라고 경쾌하게 발음한다. 이러한 태도가 류인서 시인의 개성인 것 같다. 그리고, 함께 디스토피아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그 긍정적인 태도는 꽤 위안이 된다.
양애경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 『맛을 보다』 외 현 한국영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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