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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원들의 어머니 앙코르 와트로 가다 (해자에서 지성소까지)
lonely planet에는 유적지를 조용하게 감상하려면 단체 여행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점심시간 때 숙소로 돌아가지 말고 현지에서 점심을 먹고 일찍 유적지에 들어가는 방법도 고려할 만하다고 해서 귀가 솔깃했는데 다니다 보니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다. 땀도 많이 나고 피곤도 해서 꼭 샤워를 하고 점심 먹은 후 낮잠도 한숨 자는 것이 좋았다. 첫날은 호기 있게 점심시간 때 풀장에서 잠깐 수영도 했지만 다음날부터는 힘들어 낮잠으로 대신했다. 열대지방에 낮잠시간을 두는 이유가 다 있었다.
유적지 매표소를 지나자 시원하게 뻗은 길이 무성한 밀림 사이로 뻗어 있다. 곧 호수 같이 넓은 해자가 나타나고 그 앞에서 길은 해자를 따라 좌우로 갈라졌다. 왼편이 앙코르 와트와 앙코르 톰으로 가는 길이다. 오른편은 앙코르 동쪽 유적지로 가는 길이다.
멀리 해자 건너편으로 앙코르 와트 꼭대기 탑이 보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영상과 사진을 통해 많이 보아왔지만 늘 신기루나 꿈 속에서 보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직접 본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입구에는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타고 온 버스가 와 있었다. 뚝뚝과 모또와 노점상들과 사람들이 섞여 시끌벅쩍하다.
앙코르 와트는 건축년대가 12세기 초(1113~1150)이며 그 후 증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초기 유적인 롤루오스 그룹으로부터 대략 250년의 시간이 지난 후 지은 사원이다. 앙코르 와트를 지은 왕은 수리야바르만 2세다.
해자로 둘러싸인 이곳은 전체가 당시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고 앙코르 와트는 그 수도에 건설한 힌두 사원이었다. 즉, 앙코르 와트를 포함한 해자 안쪽은 앙코르 시티였다. 해자를 포함한 앙코르 시티의 크기는 동서로 1.5km, 남북으로 1.3km에 이르는 직사각형의 거대한 성벽도시로 면적은 200 헥타르(약 60만평)에 달하는 크기다(1헥타르는 100mx100m=10,000㎡ ). 해자 안쪽인 앙코르 시티의 면적은 82헥타르(25만평)이다.
앙코르 와트의 상징
앙코르 와트는 크메르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상징을 최대로 표현한 사원이다. 그것은 힌두교 우주관의 축소판이다. 해자는 땅 주위를 두르고 있는 신비한 대양을 상징한다. 중세 서양의 해자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다. 앙코르 시티의 해자는 물론 해자 고유의 기능인 적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의 뜻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차적인 기능에 불과하다.
1층 벽면 사방에 새긴 부조는 신들의 거주지인 수미산 주위에 있는 산들을 상징한다. 탑들은 산봉우리를 표현한 것이고 중앙 성소로 오르는 것은 아마 의도적으로 진짜 산을 오르는 것을 모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신들의 영역에 들어가는 인간의 겸손을 요구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데이비드 찬들러(David Chandler)는 그의 저서 <캄보디아 역사>에서 앙코르 와트의 공간구조는 전형적인 힌두교 네 시기(yuga)와 일치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진입로 입구에서 앙코르 와트 성소 중앙탑 탑까지 걸어 가는 것은 우주의 창조 시기로 거슬러 오르는 여행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즉, 인간이 신에게로 나아가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해자를 건너 앙코르 와트 입구로
앙코르 시티로 들어가려면 먼저 돌다리를 통해 해자를 건너야 한다. 해자의 폭은 190m나 된다. 중세 서양의 성채 둘레에 파 놓은 해자가 20m 내외인 점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넓은 해자인지 알 수 있다. 돌다리 입구와 다리 중간에는 십자형 테라스가 있는데 7개의 머리가 달린 뱀인 나가상과 사자상이 있다. <ANCIENT ANKOR> 에 의하면 돌다리는 처음에는 나무다리였다가 1세기 후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 증거로 다리 아래에 장식된 둥근 기둥 양식을 들고 있다.
해자를 건너니 넓은 마당이 잠깐 나오고 그 뒤에 라테라이트 성벽이 가로막고 있다. 길이는 동서 1025m, 남북 802m다. 이 성벽이 앙코르 시티를 둘러싸고 있다. 전면으로 5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중앙의 세 곳은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고 조금 떨어져 있는 좌우의 두 개는 코끼리와 우마차가 출입할 수 있도록 넓고 문턱이 없다.
나는 첫날 오후와 4일째 오전, 이렇게 두 번 앙코르 와트를 찾았다. 그리고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마다 이 측면 문으로 나왔다(처음은 북쪽인 노점 쪽, 다음은 그 반대 쪽) 특히 남쪽 방향의 문으로 나올 때 군중들의 복잡함에서 벗어나 한적한 풍경을 즐길 수 있어 아주 좋았다.
중앙의 다섯 출입문 위로 탑이 세워져 있다. 이 탑을 고뿌라(gopura)라고 한다. 지금은 중앙의 세 탑만 남아 있다. 인도의 힌두 사원 출입구 꼭대기에 있는 탑을 고뿌람이라고 하는데 고뿌라는 이 말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도 힌두 사원의 고뿌람은 그 규모와 정교한 조각에 있어서 상상을 초월한다. 왼편 끝 문에서 오른편 끝 문까지 길이는 230m다.
중앙 출입문까지 가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앙코르 와트가 전면에 햇살을 받는 오후에 방문하기 때문이다. 앙코르 유적 중 많은 사원이 서향을 하고 있다. 학자들은 그 이유를 이들 사원이 서향과 관련 있는 신인 비슈누를 모신 사원으로 보고 있다. 앙코르 와트도 그 중 하나이다.
중앙 출입문에 올라서니 멀리 앙코르 와트가 비로소 전체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내부통로를 따라 오른쪽 고뿌라로 가면 8개의 팔을 지닌 비슈누 상이 있다. 학자들은 이 상이 방의 크기에 비해 너무 크다는 사실로부터 원래 이 비슈누 상은 앙코르 와트 중앙 성소에 안치했던 상으로 보고 있다. 후대에 크메르 제국의 종교가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뀌자 중앙 성소에는 불상이 올라가고 비슈누 상은 강등되어 이곳에 내려온 것이다.
치아를 드러내고 웃는 압사라 상
이곳에서 처음으로 압사라 부조를 보았다. 압사라는 앙코르 유적의 기본 테마로 어느 유적지에서든 볼 수 있는 크메르 문화의 독특한 양식인데 30가지 이상 서로 다른 의상과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흔히 '천상의 무희'로 일컬어지고 있는 이들의 출처는 힌두 신화에 근거하여 앙코르 와트 1층에 벽면에 새긴 부조의 한 장면인 '우유바다 젓기'다. 유적 비문에 새겨진 기록을 통해 왕궁에는 궁중무희인 이런 압사라들이 수백 명씩 상주했음이 확인되었다. 이 압사라 상 중 많은 수가 1980년대 인도 복원팀이 깨끗하게 한다고 산성 화학약픔을 쓴 탓에 훼손되었다가 독일 압사라보존 프로젝트 팀에 의해 현재 다시 복원되었다.
앙코르 와트에는 거의 2,000명 가까운 압사라 상이 있다(LP에는 3,000명 이상). 크기도 다른 유적지 보다 훨씬 크다. 특히 이곳 중앙문에 있는 압사라 상은 반테이 스레이의 압사라 상과 함께 앙코르 유적에서 가장 작품성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또 아주 특별한 압사라 상이 하나 있으니 중앙문에서 동쪽(앙코르 와트 방향)을 향한 벽에 새겨진 압사라 상 중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압사라 상이 그것이다. 앙코르 유적을 통틀어 유일무이한 모습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나는 이 상이 왕코르 와트 입구문에 있는 줄 알고 대충 보는 바람에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중앙문에서 다시 너비 9.5m, 길이 350m의 돌포장길을 걸어가면 앙코르와트 입구의 넓은 십자형 테라스로 오르는 계단이 나오고 그곳에 올라서도 65m를 더 가야 비로소 앙코르 와트 입구가 나온다. 수미산을 향한 계속되는 오르막의 시작이다.
돌포장길 길 중간에는 나가 상이 있는 6개의 교차로가 있다. 이들 교차로는 옛날 앙코르 시티와 연결된 길이다. 나가 상 몸통에 해당하는 난간을 보면 쇠로 고정시켜 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1960년대 복원한 흔적이다. 가는 길에서 보는 좌우의 넓은 잔디밭과 숲이 그 옛날 이 도시의 규모를 짐작케했다.
중간 쯤 되는 곳에 길 양쪽으로 하나씩 두 개의 큰 '도서관'이 있다. 사방으로 4개의출입구가 있는 이 건물 현대적 의미의 문서를 보관한 곳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원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뒤쪽으로 16세기에 조성된 연못 역시 양쪽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물이 있는 왼편(북쪽) 연못은 일출과 일몰 때 앙코르 와트를 감상하는 뷰포인터로 인기가 있다. 일출 때는 앙코르 와트의 실루엣이 아름답고 일몰 때는 오렌지 빛으로 물드는 앙코르 와트의 모습이 환상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앙코르 와트는 오전과 오후, 적어도 두 번은 방문해야 하는 곳이다.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다. 앙코르 와트 하면 떠오르는 부조의 총연장만 600m에 달하는 1층 갤러리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반나절 투어로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나는 처음 갔을 때는 바쁘게 전체를 돌아보느라 부조를 건성으로 보고 지나쳤으나 두 번째 방문 때는 아주 여유 있게 하나씩 집어가며 보았다. 3층 성소도 느긋한 마음으로 올라갔으며 나오는 길은 남문을 통해 나와 성벽과 해자 사이의 호젓한 숲길도 둘러 보았다.앙코르 유적을 한가하게 보는 시절은 이제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일년 내내 인파가 몰린다. 캄보디아 관광청의 바표에 의하면 2005년 캄보디아를 방문한 외국인 수는 1,421,615명이다. 이는 전년도에 비해 34.72%라는 경이적인 증가율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네스코에서는 이 역사적인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방문객 수를 줄이든지 아니면 휴식년제를 도입해 쉬게 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엄청난 수입을 올려주는 이 유적을 캄보디아 정부에서 포기할 리가 없다. 1년에 100만명이 앙코르 유적을 3일 방문하다고 할 때(이것도 적게 잡은 수치다) 입장료만 4천만불이다. 캄보디아에서 1인당 500불만 쓰고 간다해도 5억불이다. 5억불을 유네스코에서 보전해 줄 능력이 될리가 없다. 앙코르 톰 내의 바푸온처럼 일부 유적지 입장을 막는 경우는 있을 것이지만 전면 폐쇄는 없을 것이다.
한국 여행사 중에는 이런 이야기를 빙자하여 앙코르 유적이 보수공사를 위해 곧 문을 닫을 것이라는 소문을 내며 닫기 전 빨리 구경하라는 루머를 흘리고 있다. 한 번 닫으면 앞으로 10년 동안은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10년 전에도 퍼졌던 루머가 지금도 흘러다니고 있다. 장사꾼들의 얄팍한 상술이다.
앙코르 유적은 이곳을 방문한 프랑스인 박물학자 앙리 무오의 유저(遺著)가 1863년 런던에서 책으로 나온 후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그리고 초기의 탐사 기간을 거쳐 19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100년 이상 유적지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앙코르 유적 복원은 기술과 자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가장 급한 유적지만 하나씩 맡아서 하고 있는데 어느 세월에 마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앙코르 와트 역시 부분 보수작업 중이다.
전문가들은 복원작업의 완성에 100년은 더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게 어려운 작업이다. 수천억원을 투입한다 해도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해야 하는 복원작업의 특징 상 10년은 어림도 없다. 그것은 복원을 거의 마친 앙코르 톰 바이욘 사원의 뒤뜰에 가득 쌓여 있는, 아직도 갈 곳을 찾지 못한 돌무더기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 여행사들의 유언비어에 속지 말기 바란다.
그리고 인파가 많다고 해서 너무 겁 먹을 필요도 없다. 방문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패키지 팀은 시간 절약을 위해 유적지에서도 항상 최단거리 코스만 다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루트를 조금만 벗어나면 같은 공간인데도 그렇게 한가할 수 없다. 앙코르 와트 1층 갤러리를 감상하다 복잡하면 중간에 잠시 바깥 뜰로 내려와 조금만 걸으면 고요한 전원이 펼쳐져 있다. 2층에서도 마찬가지다. 앙코르 와트 외부에서도 남쪽 연못 아래는 인적이 드문 대초원지대다. 앙코르 시티가 한 때 수만 명의 인구가 살던 공간임을 생각한다면 수천 명의 인파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앙코르 톰이라면 코끼리 테라스 건너편 남북 끌레앙 등이 있는 유적지는 너무 한가해서 빤히 보이는 테라스의 많은 사람들이 마치 영화속의 장면처럼 나와는 전혀 상관없이 보였다.
테라스 계단을 오르니 곧 앙코르 와트 입구가 어서 오시라는 듯 입을 벌리고 있다. 드디어 말로만 듣고 그림으로 보았던 앙코르 와트에 도착한 것이다. 입구에서 이곳까지(약 700m) 오는데 한시간 가까이 걸렸다. 거칠 것 없는 직선도로니 중단없는 전진을 한다면 20분이면 충분하지만 그렇게 바쁘게 다닐 바엔 비싼 경비를 들여 이곳까지 올 이유가 없다.
앙코르 와트가 유명한 것은 1층 갤러리의 부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갤러리를 보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원위치로 돌아온다. 이 역시 건성으로 본다해도 1시간이 걸린다. 그 후 지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 3층 지성소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을 보고 한숨쉰다.
앙코르 유적 전문가들은 만일 이곳이 처음이라면 먼저 3층 지성소부터 방문 한 후 내려와 1층 부조를 보라고 권하고 있다. 두 번째부터는 어느 쪽을 먼저 보아도 상관없다. 스스로 어디에 더 관심에 둘 것인지 결정하고 오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과 똑 같은 코스로 돌아보았더니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부조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3층 지성소에서 그 사람들을 그대로 만났다. 순서를 바꾼다면 다른 사람들이(대부분 단체관광객들) 1층 회랑을 돌고 있을 때 한가한 지성소를 방문했을 것이고 나중에 그 사람들이 올라올 때 쯤에는 내려가 한가하고 여유있게 부조를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틀 후 비교적 사람들이 뜸한 오전에 다시 방문했기 때문에 여유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시간이 겹치는 이유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앙코르 와트 관람을 오후 일정으로 넣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앙코르 와트 정면이 서향이므로 오후에 더 잘 보이고 사진이 잘 찍힌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다. 그러나 과감하게 오전으로 바꾸면 관람 후 돌아오는 길에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오후보다는 못하더라도 복잡한 인파들 틈에서 헤매는 것보다는 낫다. 어떤 여행사들은 오전에 앙코르 와트, 오후에 앙코르 톰으로 일정을 넣고 있었다. 그쪽 가이드들도 인파에 진절머리가 난 모양이다.
주 입구에서 계단을 오르면 어두침침한 십자형 회랑이 나오는데 이 회랑은 2층으로 가는 중간 회랑으로 위에서 보면 밭전 자(田) 모양이다. 모든 통로가 연결되어 있으므로 서쪽 입구에서 2층으로 가는 회랑이 셋이 된다. 동쪽 입구도 문이 셋이지만 중간단이 없어 마당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2층으로 향한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남쪽과 북쪽 문은 하나씩밖에 없다.
회랑과 회랑 사이는 물샐틈없이 막혀 있는 사각형의 공간이 있다. 지금은 말라 있지만 이곳은 힌두 신화의 상징에 따라 물을 채운 공간이었다. 사진으로 보면 잘 모르지만 현장에 가면 워낙 큰 건물이라 내가 지금 어느 길에 있는지 방향을 잃어 버리기 쉽다.
회랑의 남쪽 통로에는 몇 좌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뀌자 앙코르 와트는 불교 성지가 되어 이곳에 많은 불상이 모셔졌고 종교의식이 치루어졌다. 그래서 이곳을 천불전(Hall of Thousand Buddhas)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곳에 있던 불상 대부분은 1970년대 안전을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으나 그러지 못했던 불상은 크메르 루즈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
2층 회랑을 관통하여 밖으로 나오니 넒은 마당 위로 3층이 있고 그 위로 5개의 성소탑이 우뚝 솓아 있다. 가운데 수미산을 상징하는 탑의 높이는 2층 바닥에서 42m이고 지상에서는 65m다(LP에는 31m와 55m). 일몰로 유명한 프노 바켕 산이 67m라고 하니 이 탑의 높이를 짐작할 수 있겠다.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2층도 회랑으로 되어 있어 한 바퀴 돌 수 있고 동서남북 가운데로 통로가 있어 1층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내부는 크메르 주즈에 의해 머리가 잘린 불상만 자리를 지키는 곳이라 썰렁한 편이어서 개별 여행자들도 잘 가지 않고 있다.
아래 쪽에 앉아 쉬고 있는 사람도 많고 3층 성소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2층에고 입구 양쪽 끝으로 도서관이 있다. 3층 성소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 아찔하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은 누구나 이 계단을 잊지 못할 것이다. 2층 바깥 벽면에도 압사라 상들이 많이 부조되어 있다. 어느 하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상이 없는 육감적인 모양새다.
2층에서 성소탑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좌우 양쪽 코너 부근이다. 그곳이 제일 멀리 떨어진 곳이다. 다른 곳은 너무 가까워 전체를 보기 어렵다.3층을 오르는 일은 만만하지 않았다. 1층과 2층과는 달리 3층은 정사각형이다. 가운데 수미산을 상징하는 탑이 우뚝 솓아 있고 네 코너에 4대주를 상징하는 탑을 세웠다.
3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한 면에 3개씩 모두 12개의 계단이 있다. 경사가 급해 두 손을 집고 올라가야 한다. 마치 프리스타일로 바위 타는 느낌이 들었다. 계단의 높이는 11m에 불과하지만 이 높이는 인간이 가장 공포심을 느끼는 높이라고 한다. 당시의 사람들도 아마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계단을 오를 때는 마치 수직으로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고 위에서 내려다 보면 까마득한 절벽 위에 선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계단은 서쪽(입구쪽) 정면이 50도로 그 중 완만하다. 나머지 계단들은 거의 70도에 가깝다. 올라갈 때는 멋모르고 올랐던 사람들도 내려다보면 기겁을 한다. 그래서 남쪽 가운데 계단에는 쇠난간과 보조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그곳은 '하산' 전용이다.
3층의 구조도 2층 중간단의 구조와 흡사했다. 다른 점은 가운데가 모두 막혀 있다는 점이다. 계단을 막 올라가서 보는 풍광은 좋았다. 멀리 해자 앞 입구 중앙탑 부근까지 잘 보였다. 그러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田자의 작은 네모 안에 갇혀 버리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왜 이런 모양을 했을까? 바콩처럼 피라미드로 만들었다면 훨씬 시원한 전망을 가졌을텐데...
그 이유는 이미 알고 있다시피 힌두교의 우주관을 표현한 사원이기 때문이다. 2층 중간단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중앙의 수미산을 중심으로 4대륙과 4대강을 나타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앙코르 와트는 인간을 위한 사원이 아니라 신화속의 힌두적 우주를 지상에 현현시켜 놓은 사원인 것이다.
앙코르 와트는 앙코르 유적 중 가장 독특한 형태의 사원이다. 가장 특이한 점은 서향이다. 서향은 죽음을 상징하는 방향이다. 이 사실을 들어 학자들은 이 사원이 비슈누의 화신으로 받들어진 수리야바르만 2세-크메르 역대 왕들이 모두 신왕(god-king)으로 간주되었다-의 무덤으로 생각해왔다. 그것은 1층 회랑의 부조가 시계 반대방향으로 보도록 설계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것은 고대 힌두교의 장례 풍습이었다.
그러나 힌두교에서 비슈누도 서향과 관계되는 신이어서 지금은 사원인 동시에 수리야바르만 2세의 영묘(靈廟) 두 가지 용도로 쓰인 것으로 보고 있다. 앙코르 와트에 쓰인 사암은 50km 떨어져 있는 꿀렌 산에서 가져왔다. 그곳에서 채취한 바위를 시엡립 강을 통해 뗏목으로 날랐다. 변변한 장비가 없는 시절에 이런 거대한 건축공사를 하려면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3층에서도 네 군데 공간을 다 돌아다니자면 높은 턱을 넘어야하므로 불편했다. 한참 돌다보면 여기서도 방향을 놓치기쉽다. 나침반이 달린 고도계 시계를 차고 오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직선으로 올라갔다가 되돌아 오면 별 문제가 없지만 가다보면 그렇게 되지도 않고 그런 식의 관람은 의미도 없다. 2층 중간단 통로를 지나다가 옆길이 나타나면 "여기는 또 뭐가 있지?" 하고 들어가거나 압사라 상을 구경하느라 벽을 따라가다 보면 똑 같은 모양의 돌구조물 속에 갇혀 방향을 잃고 만다. 중간에 통로도 많아 한참 따라나오다 보면 영 엉뚱한 곳으로 나오게 된다. 그만큼 내부 공간이 넚다.
3층 성소에서도 길을 잃은 고객을 찾는 가이드들이 가끔 보였다. 내려갈 시간인데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양반은 그 양반대로 田자 내부에 같혀 자기가 어느 칸에 와 있는지 분간을 하지 못한다. 한참동안 '장애물'을 넘어 겨우 원래의 위치로 돌아와 안도의 숨을 쉰다. 이럴 때 나침반이 있으면 현재 위치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음에 갈 때는 꼭 가지고 갈 생각이다.
중앙탑과 연결된 회랑에 사람들이 많이 있길래 처음에는 "불공을 드리려고 줄 서 있는가?" 생각했다. 나중에 하도 줄이 줄어들지 않아 궁금해서 가 보니 난간이 설치된 계단으로 내려가려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난간이 있는 계단이라면 남쪽이다.
3층 회랑 벽면과 중앙탑에도 압사라 상이 많이 있다. 2층과는 달리 사람이 다니는 길목에 있어서 사람 손을 많이 타 반질거렸다. 처음에는 당연한 일이지만 각 코너 탑 아래에 비슈누를 모셨다(그 중 하나가 해자 앞 출입문에서 본 비슈누 상이다). 그러다가 14세기 또는 15세기, 국교가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뀐 후 이곳은 불교성지로 바뀌었다. 그래서 중앙탑과 코너 네 개의 탑 아래의 비슈누 상은 지금의 불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중아탑에는 활금 비슈누 상이 있었다고 한다.
회랑 밖으로 나와 까맣게 보이는 아래쪽 사람들과 시원한 열대 밀림의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 내려왔다.
앙코르 제국의 뛰어난 왕들
9세기부터 14세기까지(그 이후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언급할 가치가 없다) 크메르 제국을 통치한 왕은 많지만 강대한 제국을 만들었던 왕은 10명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벼운 마음으로 앙코르 유적을 찾은 여행자라도 4명의 왕 정도는 기억해 주는 것이 좋다.
● 자야바르만 2세(802~850) : 크메르 제국을 처음 세운 왕이다.
● 수리야바르만 1세(1002~1049) :그의 치세 때 크메르 제국은 태국의 롭부리, 라오스의 비엥티엔, 남부 베트남을 아우르는 최대의 영토확장이 이루었다.
●수리야바르만 2세(1112~1152) : 앙코르 유적의 백미이자 지상 최대의 종교건축물인 사원 앙코르 와트를 건축했다.
● 자야바르만 7세(1181~1219) :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성벽도시 앙코르 톰을 건설했다. 왕중의 왕으로 불린다. 그는 크메르 제국의 종교를 힌두교에서 다시 불교로 바꾸었고(크메르 제국의 종교는 힌두교-북방불교-힌두교-남방불교로 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큰 바위 얼굴'로 유명한 바이욘사원을 지었다. 또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한 불교사원으로 프레아 칸,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불교사원으로 타프롬을 지었는데 신기하게도 오늘날 수 많은 유적지 중 이 두 사원에만 거대한 나무가 유적을 감싸고 있어 캄보디아 사람들은 그의 효성에 감복한 하늘의 조화라고 생각하고 있다.
앙코르 유적의 건축재료
앙코르 유적의 건축 재료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벽돌과 사암과 라테라이트가 그것이다. 왕궁이나 거주민들의 집은 나무로 지었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 벽돌
초기 사원은 앙코르 지역에 흔한 붉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지었다. 가장 대표적인 벽돌 사원으로는 프라삿 크라반, 프레아 코, 롤레이가 있다.
● 사암
웅장한 외관을 표현할 수 있는 사암은 숙련된 기술과 노동력이 필요했으므로 문틀에만 사용했고 후대에는 기단을 쌓는데 이용했다. 이들 중 사암은 '원가'가 가장 비싼 재료여서 오작 중요한 사원에만 썼다(물론 당연한 일이지만 현지에 사암이 많은 곳은 사암을 썼다). 앙코르 유적에 쓰인 사암은 반테이 스레이 북쪽에 13km 지점에 있는 꿀렌 산에서 가져왔다. 앙코르 톰 슬리의 문 근처에 있는 타케오는 전체가 사암으로 지은 사원이다. 앙코르 사원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모양의 돌 창살도 모두 사암으로 가공한 것으로 크메르인들의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앙코르 와트사원은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벽면 부조에 들어간 사암만 거의 2,000㎡에 달하고 있다.
● 라테라이트
작업은 쉽지만 마감이 거친 라테라이트는 기단과 거대한 건물을 짓는데 가장 많이 이용한 재료였다. 박세이 참끄롱은 모두 기단과 문틀을 제외한 모든 것이 라테라이트로 만들어졌다. 라테라이트는 동남아시아에 넓게 분포되어 있는 철분 성분이 많은 진흙으로 부드러워 블록으로 만들기 쉽다. 그러나 일단 만든 후 공기와 햇볕에 말리면 돌보다 더 단단해진다. 그러나 마른 후에는 표면이 거칠기 때문에 이 재료는 기단과 성벽, 그리고 보이지 않는 부분에 많이 쓰였다. 앙코르 톰 입구 가까운 곳에 있는 박세이 참크롱은 전형적인 라테라이트 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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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와트의 압사라(천사)
돌로 만들어진 창문틀
앙코르와트를 지나
앙코르와트의 해자
앙코르와트 회랑
앙코르와트의 우유바다 휘젓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