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하나의 물건도 없다’라는 뜻으로,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청정한 마음 상태를 말한다.
6조 혜능(慧能) 대사가 행자 시절, 5조 홍인(弘忍)에게 제출한
게송(偈頌)에 나온 말이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 밝은 거울 역시 대(臺)가 아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 본래 아무 것도 없으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 어디서 티끌이 일어나리오.」
깨달음(菩提)이란 나무(樹)도 아니며,
밝은 거울 같은 것도 아니고,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먼지가 묻을 데도 없으니 털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유래해 ‘본래무일물’이란 말이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무소유(無所有)의 마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깨달음의 경지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본디부터 실재(實在)하지 않고 빈 것[공(空)]이라는 말로서,
우주의 진상은 우리의 분별 망상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집착할 만한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ㆍ제행무상(諸行無常)”은 불교의 근본 종지이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 따라 사라질 뿐,
본래 이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부처님이 일러 준 가장 핵심적인 진리이다.
본래무일물이라는 것도 이러한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표현한 말일 뿐이다.
그리하여 본래 하나도 없는 것이거늘 어디에 ‘나’라고 할 존재가 있을 것이며,
‘나의 것’이라고 집착할 것이 있겠는가.
어디에 ‘너’라고 할 존재가 있을 것이며,
‘나와 너’라는 분별이 있을 수 있겠나,
나와 너, 선과 악, 흑과 백이라는 분별이 무너진 곳에
바로 해탈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만물은 본래 공(本來空)이므로 하나도 집착할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헌데 우리는 ‘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다고 여기고,
우리가 접하는 이 세상도 실체가 있다고 여긴다.
허나 부처님께서는 그 반대로 실체가 없다고 하셨다.
이게 무아(無我)이다.
무아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은 있으나, 그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허상이란 뜻이다. 본래무일물이다.
그래서 무아보다 공(空)이 진리에 더 가깝다.
부처님 말씀대로 나도 실체가 없고, 너도 실체가 없다는 것,
본래무일물이라는, 이것을 깨닫는다면 마음은 일체 동요가 없을 것이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움직이는데,
모두 다 허상인 것을 알아버리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고통이란 마음의 움직임으로 인해 발생한다.
화나고, 분통터지고, 슬프고, 짜증나고,… 이러함이 모두 마음의 움직임이다.
나도 있고, 남도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마음이 요동친다.
모든 싸움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나도 남도 실체가 없다고 하셨다.
참 놀라운 일이다. 전부 허상이라는 거다. 본래무일물이라는 것이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움직이는 걸 살펴보면,
정말로 이 마음이란 놈이 혼자서 다 설정을 해놓고
스스로 움직인다는 걸 알 수 있다. 북치고 장구치고 혼자서 다 한다.
바깥의 사물이 진짜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란 놈이 혼자 다 설정해놓고,
혼자서 감독⋅주연⋅조연⋅엑스트라를 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설사 마음이 움직여도 마음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마음이 언젠가 다시 조용해지면 원래의 공적(空寂)한 자리로 돌아온다.
원래 자리란 텅 빈 공이다. 본래무일물이다.
<자경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본래무일물 거역공수거 만반장불거 유유업수신
(來無一物來 去亦空手去 萬般將不去 唯有業隨身) -
올 때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고 갈 때 또한 빈손으로 간다.
아무리 많아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오직 지은 업만 따라갈 뿐이다.」
인생이란 어디서 왔다가 또한 어디로 가는가?
올 때는 무엇을 가지고 왔으며 갈 때는 또한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인생이란 한 번 왔다 가면 그만인가?
아니면 돌고 돌아 다시 오고 다시 가고 하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예부터 사람들이 크게 문제 삼아왔고
그것을 확연히 깨달아 아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불교의 성자들은 이 생사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깊이 깨달아 알고 있었다. 여기에 소개한 <자경문>은 입산 출가해
절에 처음 들어오면 배우는 책이다.
절에 들어오자마자 처음부터 이러한 사상을 공부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실은 발심(發心)이다.
오나가나 아무 것도 가져오지 못하고 가져가지 못한다.
아무리 많은 재산도 명예도 처자 권속도 가져가지 못한다.
오직 자신이 지은 업(業)만 따라 다닐 뿐이다.
사람들이 사는데 천차만별한 것은 스스로 지은 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이 불만스러우면 자신이 지은 업을 탓할 일이지
결코 남을 원망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경문>에 역시 이런 명구가 있다.
“삼일 간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간 탐해 모은 재산은
하루아침의 먼지와 같다.”
「불교적인 안목에서 보면 죽을 때 가져가지 못하는 재산은 재산이 아니다.
죽어서도 가져갈 수 있는 재산이 진정한 재산이다.
부와 명예와 남들로부터의 존경 같은 것은 가져가지 못한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다만 자신이 지은 업만 따라갈 뿐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갈고 닦으며 삼독을 소멸하는 선업을 많이 지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재산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향한 신심으로 기도를 하고 절을 드리며
참선과 간경 등의 여러 가지 난행과 고행은
부를 얻기 위함도 아니다.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다.
그 외의 다른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실은 그런 일 하고는 관계가 없다.
다만 금생에도 내생에도 지금과 같이 부처님께 신심을 내어
기도하고 절하며 참선과 간경으로 지혜를 갈고 닦아
삼독의 소멸과 깨달음으로 향하는 마음뿐이다.
불교인의 가치관은 이와 같아야 생각이 바르다고 할 수 있다.」 -
가려뽑은 명구 100선(무비 스님)
다음은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의 유언이다.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돼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 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런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유서에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 나를 쏠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돼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 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돼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서는 일회적(一回的)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 걸 남길 만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 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서 왔고
갈 때도 나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문(沙門)의 소유 관념이다.
본래 하나의 물건도 없다는 뜻으로,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같은 곳이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 돼 금생에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