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장부승의 海外事情]를 읽고(2025.03.15.)
우크라이나에서 포로가 된 북한 군인들 인터뷰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이제 20대에 불과한 젊은이들. 그 청년 입에서 “부모님이 못 견디게 보고 싶다”는 말이 나왔을 때 울컥했다. 해외 파병 길을 떠나면서 부모한테 연락 한번 못 하고, 10년 가까운 군 생활 동안 가족들 얼굴 한번을 못 봤다니.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그 청년 입에서 “우리 인민 군단에서 포로는 변절이나 같습니다”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분노했다. 항복을 죄악시하고 국민에게 자살을 강요한 구 일본 제국의 미친 군부 지도자들과 뭐가 다른가? 그런 슬픔과 분노 속에서 내 마음은 약 30년 전 내가 겪은 당황스러운 장면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때는 김대중 정부 초기, 전역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집에 갔더니 모친이 상기된 표정이었다. “편지가 왔다. 너희 둘째 이모한테서.”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둘째 이모는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였는데, 죽은 사람이 어떻게 편지를 보낸단 말인가?
편지는 적십자사를 통해 북에서 온 것이었다. 내가 모르던 둘째 이모가 있었던 것이다. 형제들 중 가장 똑똑했다는 그녀는 학교에 무척 가고 싶었다. 1940년대 가난한 팔남매 가정의 둘째 딸이 학교를 갈 방법은 가출뿐이었다. 그렇게 가출한 그녀는 서울에서 공장을 다녔고, 전쟁이 터지고는 연락이 끊겼다. 그랬던 그녀에게서 편지가 온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소에서 만난 이모는 고생한 티는 역력했지만 표정은 밝았다고 한다. 선물을 주면서 “이거 혹시 뺏기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니 “장군님 품 안에서 잘 살고 있다”고 했다고 한다. 당시는 ‘고난의 행군’ 여파로 북한에서 아사자가 속출하던 시기이다. 이모는 정말로 ‘장군님’이 고마웠을까?
전쟁과 분단의 상흔은 외가 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리산 자락 마을에 살던 부친의 어린 시절, 빨치산은 공포 대상이었다. 툭 하면 내려와서 곡식을 뺏고 심지어 소까지 끌고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빨치산들은 짐꾼이 필요하다며 젊은이들을 데려갔고, 그중 한 명이 빨치산에게 대들다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 젊은이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나중에 우리 막내 고모와 결혼했다.
몇 년 전 고모부에게 한번 물어본 적이 있다. “아버지 생각 나십니까?” 잠시 흠칫한 고모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아버지 얼굴 기억이 안 난다.” “사진 같은 것도 없어요?” “사진이 딱 한 장 있는데 여러 사람이 찍혀서 얼굴이 작아 안 보여.” 잠시 침묵 후 난 다시 물었다. “그놈들이 밉다는 생각 해보신 적 없어요?” 고모부의 답변은 의외였다. “다 지난 일이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되뇌듯이 다 지난 일이라고 반복했지만,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엊그제는 일본 나고야 사는 당숙모한테서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 큰손주가 명문대에 합격했단다. 축하의 덕담을 한 후 나는 오랜만에 옛날얘기 좀 들려달라고 했다. 숙모는 친정 식구가 없다. 1960년대에 북송됐다. 숙모는 1980년대 북한에 딱 한 번 가봤다고 한다. 일본에서 제법 엘리트였던 남동생은 함경남도 단천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 살림살이의 신산함에 가슴이 아파 돈 10만엔과 가져간 옷들을 챙겨주고 왔다고 했다.
“그때 왜 북한으로 간 거예요?” “동생이 공부를 잘했어. 미쓰비시에 합격했는데, 면접까지 끝나고 연락이 왔어. 조선인이라 안 된다고”. 차별을 피해 찾아간 ‘지상 낙원’은 알고 보니 ‘지옥’이었다.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숙모의 검버섯투성이 얼굴 위로 살짝 눈물이 그렁거렸다.(중략)
6·25전쟁에서 군인과 민간인 합쳐 사망한 사람만 200만이 넘는다. 한국 사람 누구라도 한두 다리 건너면 전쟁과 분단의 피해자가 있다. 이제 그 피해자들도 사라져 가고 있다. 살아 있다면 구십이 넘었을 둘째 이모에게서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70년간 홀로 살던 고모부의 모친도 얼마 전 90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당숙모의 부모 형제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제 고통의 역사는 끝나는 것일까?(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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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64918582
2025.03.16 06:22:11
정말 오랜만에 우리가족 이야기 같은 기사를 봅니다 저는 70대중반 살아계신지 생사가 불명한 큰형이 이북에 계신데 살아계시면 90대 입니다.
제가 막내 이거든요 부모님 생전에 주일 아침마다 일찍 식전에 가정예배를 보시면 눈물이 나도록 매번 큰형을 만나게 해달라 기도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1.4 후퇴때 헤어져 못만난 것이지요 작금의 우리나라 사태를보며 진보라는자들이 공산주의와 차이를 구별 못하고 국민을 호도하는것을 보며 정말 큰일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자유대한민국의 혜택을 누리면서 자기 영달을 위해 북한에 돈을 주어 핵무기를 만들게하고 그것을 진보라 착각하는 정치인이 너무많습니다.
이제 20년정도 지나면 우리나라는 어찌될까 눈앞이 캄캄합니다. 특히 기독교인은 종교는 아편이라 하는 공산주의자와 양립할수없는 존재인데 그것도 모르는 목사,교인들도 많은 것이 안타갑습니다.
진보주의자이었다가 김일성에게 숙청당한 정치인이 한둘입니까? 진정한 진보를 보려면 박정희가 진정한 대한민국의 진보주의자 이었습니다
* 우리 젊은이들은 역사를 모르거나 방관합니다. 그러니 세계 전쟁사에도 뚜렷이 명시된 6.25전쟁을 북침(북쪽으로의 침략)이라고 하는 말을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6.25전쟁사나 빨찌산의 활동상에 관한 책을 읽으면, 같은 동포에게 참혹하게 총칼을 휘두른 참상들이 눈에 선합니다. 왜 우리민족이 이처럼 지독히도 분열을 좋아하며, 서로 싸우기를 즐겨할까?
그리고 젊은이들은 남한을 공산화해서 북한에 바치려했던 남로당의 행태와 두차례의 빨찌산 행적은 물론, 그들의 말로는 결국 우두머리 박헌영과 김삼룡,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등이 충성을 바쳤던 김일성 세력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이현상은 자살설?)는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간의 정권 이동에 의하여 교육과 역사관의 왜곡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그 전쟁으로 이땅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피납되었고, 일본에 살던 똑똑한(?) 우리 동포들이 저들의 꿰임에 속아 망경봉호를 타고, 북송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중에는 일본에 사시던 우리 고모님의 소중한 딸과 사위도 포함되었다는 안타까운 현실에 고모님이 슬퍼하셨다는 소식을 접한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알면서도 자석에 끌려가듯 저들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념은 강남콩 꽃잎보다 붉고, 종교보다 훨씬 더 지독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이념은 그렇다치고, 과연 오염된 이땅에서 제자식들이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까? 그래서 이 국가는 파멸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아이들만은 서방세계로 나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하여간 골치아픈 민족 같습니다.
내 나이 어느듯 70중반, 태어나면서부터 이념에 찌든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생을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이 요즘 유튜브를 보면 젊은이들의 의식이 깨어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나는 그들 젊은이들이 특정 정치인이나 정파를 떠나 자신들과 자녀의 미래를 위해 보다 적극적 사고를 가지기를 마음 보태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