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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율아, 그리고 한비야!
지난주에 보낸「장미 이야기」를 읽고 한율이는 “장미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을 줄 몰랐어요. 나래실에 가게 되면 장미를 좀 더 자세하게 보고 싶어요.”라는 소감을 할아버지에게 보내줬지? 그리고 한비는 “장미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어요. ‘장미 이야기 2’도 기대가 돼요.”라는 짧지만, 글 쓰는 할아버지가 힘을 내게 하는 메시지를 보내주었고. 그런데 할아버지가 그간의 사진 앨범을 들춰보니 지금부터 4년 전인 2018년 한비와 한율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때 꼭 이맘때쯤 너희들이 농원에 와서 장미꽃을 살펴보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더구나. 이 사진을 보면 아마도 그때의 기억이 떠올릴 수 있을 거야.
지난주 편지에서는 장미를 새로운 여름의 계절을 여는 정열적인 꽃이라고 소개를 했지. 그리고 장미가 매우 아름답고 화려하기는 하지만 가꿔 키우기가 쉽지만은 않은 까탈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꼬집어주기도 했어. 또 오랜 역사를 가진 장미가 그간 어떻게 사람들로부터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온 지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했어. 그런데 오늘은 또 다른 「장미 이야기 시즌 2」에서는 먼저 장미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구나.
장미(薔薇, Rose)의 어원에 대해서는 앞선 편지에서 이미 간단하게 살펴보기도 했지만, 200여 종에 이르는 야생의 원종(原種) 장미로부터 그간 무척이나 많은 품종의 장미가 개발되었다고 해. 19세기 중반 이후 200년이 채 안 되는 동안 2만여 종에 달하는 ‘현대 정원 장미(Modern Garden Rose)'가 개발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그 장미에는 새롭게 개발된 장미 품종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이름이 그들에게 붙여졌다고 할 수 있지. 하나하나의 사람 모두에게 서로 다른 이름을 주어지는 것처럼 말이야. 장미는 해마다 새로운 모델의 근사한 자동차가 새로운 이름으로 시장에 나오는 것과 같이 화훼전시회나 꽃 박람회에 새로운 그들의 모습을 드러낸단다. 왕실이나 귀족의 가문과도 같은 명망이 있는 몇몇의 잘 알려진 이름만으로 그 명맥을 이어 나오던 장미의 세계는 현대 정원 장미가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그 숫자가 수천, 수만으로 늘어나고 지금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이름의 가문이 만들어졌어.
장미는 현대 정원 장미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1867년의 ’La France'를 시작으로 새롭게 개발되는 장미마다 참으로 다양하고도 기발한 발상의 이름이 붙기 시작했어. 장미의 이름에는 장미 육종가(예: 데이비드 오스틴 David Austin), 또는 장미원을 가꾸던 원예가(예: 마담 하디 Madame Hardy), 정치인(예; 존 에프 케네디 John F. Kennedy), 연예인(예: 캐리 그랜트 Cary Grant, 잉그리드 버그만 Ingrid Bergman), 음악가(예: Chopin 쇼팽), 사회의 저명인사(예: 퀸 엘리자베스 Queen Elizabeth, 그레이스 공주 Princess Grace), 도시(예: Graceland 그레이스랜드, Camp David 캠프 데이비드) 등과 같은 이름 이외에도 새로운 장미를 개발한 사람의 의도와 취향에 따라 그때그때의 각별한 이름들이 붙여졌지. 'Peace 평화', 'Double Delight 기쁨 두 배’, ‘Maiden's Blush 처녀의 홍조’, ‘Noble 고상함’, ‘Good Morning America 안녕 아메리카’, ‘Sensation 센세이션’ 등등...
할아버지가 한비와 한율이에게 산촌으로부터의 정원과 꽃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던 해인 2018년 여름 할아버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 Africa)을 여행 중이었지. 이 해는 이 나라를 새롭게 세운 아버지, 국부(國父)라고 할 수 있는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라는 사람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는데, 그해의 8월 15일에는 그의 탄생을 기념하여 새로운 장미 하나가 헌정되었어. 이보다 5년 전인 2013년에 타계(他界: 어른이나 유명인사의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한 그의 이름을 빌려 ‘Nelson Mandela’라고 명명된 이 장미는 ‘여러 꽃송이에서 분홍빛이 묻어나는 주황색(floribunda vermillion-orange)’의 반 겹꽃잎 장미야. 그것은 아주 소담한 모습의 장미였단다. 이 장미는 그가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있었지만, 한평생을 자유를 추구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가운데 나라의 독립을 찾는 데 앞장을 섰고 언제나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갔던 위대한 이 지도자의 이미지와도 잘 매치가 되는 모습이었어. 이처럼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를 주는 것처럼 특별한 장미를 선사하기도 해.
장미에 얽혀있는 사연과 이야기는 너무나 많아서 어느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구나. 여하튼 장미는 꽃 중의 꽃,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꽃으로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지. 어떤 특정한 꽃만을 대상으로 하는 정원의 주인이 되는 꽃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장미일 거야. 꽃 중에서는 유일하게 ‘장미원’ 또는 ‘장미화원’이라는 장미만을 심어 가꾸는 독점적인 공간의 주인공이 바로 장미이기 때문이지. 영어에는 ‘rosery(로저리: 장미원)’와 ‘rosarium(로자리움: 장미화원)’이라는 장미만을 위한 특별한 정원을 뜻하는 단어가 있어. 다른 꽃과 나무는 장미와 같은 특별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주로 정원(garden) 또는 수목원(arboretum)이라는 공간에서 여러 다른 것들과 함께 가꿔질 뿐이지.
이와 같은 장미원을 처음으로 만든 이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황후였던 조제핀(Josephine)이었어. 그녀는 말메종(Malmaison)이라는 성에 장미원을 만들고 세계 각지로부터 온갖 종류의 장미를 가져다가 그곳에서 그들을 가꿨어. 전쟁 중에도 새로운 장미를 찾아 가져오라는 특별 명령을 내리기도 했는데, 적군도 이 장미를 운반하는 선박만은 공격하지 않았다고 해.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말메종 장미정원은 잊히고 말았지만 ‘Empress Josephine(조제핀 황후)’과 ‘Sourenir de la Malmaison(말메종의 추억)’과 같은 이름의 장미가 남겨졌지. 한편 말메종 장미정원이 만들어진 19세기 초 무렵부터 유럽 사람들의 장미에 관한 관심과 사랑이 급속하게 커지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도 생각돼.
사실 장미의 원산지는 대부분이 아시아 지역이고 중국과 페르시아에서 기원전 500년경부터 장미를 가꾸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장미가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은 유럽에서였다고 할 수 있어. 또 장미가 더 많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장미가 유럽으로 건너가서 현대 정원 장미가 개발되어 보급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부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이와는 달리 동양에서는 장미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어. 장미(薔薇)라는 이름이 ‘담장에 기대어 피는 나약한 꽃’이라는 뜻과도 같이 아주 미미하게 인식이 되었던 듯해. 통일신라시대에 설총이라는 학자가 지은 『화왕계(花王戒)』라는 이야기책에 따르면 장미가 꽃 중에서는 왕비에 해당하는 ‘화비(花妃)’라는 대접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서화가인 강희안(姜希顏)은 『양화소록(養花小錄)』이라는 원예 책자에서 꽃의 순번인 화품(花品)을 정하면서 장미에게는 5번째의 자리인 제5품을 부여했단다. 그는 또 “순수한 황색 장미가 더 아리땁고 맑으니 시인의 아내가 될만하다.”라고 썼다고 하는구나. 장미가 그리 별로 귀한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지.
그래서인지 장미에 얽힌 이야기와 장미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는 동양보다는 유럽에 훨씬 더 많아.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신화에서 미와 사랑의 신인 아프로디테와 장미가 서로 얽혀있는 사연이 전해져 오고 있고, 4세기경에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장미는 성모마리아의 상징이 되기도 했어. 이후 장미는 기독교에서 여러 의미와 상징으로 사용되었어. 한편 장미는 영국 왕실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잉글랜드의 두 왕가인 랭커스터(Lancaster)와 요크(York) 간에 벌어진 왕위 다툼을 위한 전쟁의 상징이기도 했어. 붉은 장미(red rose)는 랭커스터 왕가를, 흰 장미(white rose)는 요크 왕가를 상징했는데, 30년 동안의 이른바 '장미전쟁'에서 승리한 랭커스터가는 패배한 요크가를 포용하면서 이 두 왕가의 상징인 붉은 장미와 흰 장미를 서로 합쳐서 붉은 장미가 흰 장미를 감싸는 문양의 문장인 튜더 장미(Tudor Rose)를 만들어내기도 했단다. 그래서 연합 왕국의 나라인 영국(United Kingdom)을 구성하는 4개 나라 중의 하나인 잉글랜드(England)는 이 튜더 장미를 왕실의 상징이자 국화로 하고 있어.
이렇듯 장미는 잉글랜드의 국화(National Floral Emblem)이기도 한데 장미를 국화로 채택한 나라는 잉글랜드뿐만이 아니야. 장미는 불가리아의 국화이기도 해. 장미가 국화인 불가리아는 매년 6월 첫째 주에 불가리아 장미 축제(The Bulgarian Rose Festival)를 개최한다고 해. 그리고 미국도 1986년에 장미를 국화로 정했지. 북미 지역에서는 미국의 조지아주, 이이오와주, 뉴욕주, 노스다코타주, 오클라호마주, 그리고 캐나다의 앨버타주가 장미를 그들의 주화로 하고 있어.
한편 장미는 문학과 예술, 영화와 음악 등 실로 여러 분야 창작의 모티브와 소재를 제공해왔단다. 그 예를 하나하나 나열하기가 어려울 정도야. 그 대표적인 것 하나를 소개한다면 장미는 그 꽃말이 사랑인데 영국의 세계적인 문호인 윌리엄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매우 유명한 작품의 하나인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이라는 제목의 희곡에서 장미를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표현했어. “장미는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여전히 달콤한 향기(A rose by any other name would smell sweet).”라고 말이야.
그 무엇과 비교해도 더 아름답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많은 사연의 이야기를 간직한 장미이지만 치명적(致命的; 목숨을 잃을 정도의 큰 영향을 주는) 면을 가지고 있단다. 그것은 아름답고 화려한 장미일수록 무시무시한 가시를 가지고 있어. 퀸 엘리자베스라는 무척이나 화사하고 탐스러운 분홍 꽃송이의 나뭇가지 줄기를 보면 매우 예리한 수도 없이 많은 큰 가시가 가득 나 있단다. 맨손으로는 꺾을 수가 없어.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의 장미가 그토록 무서운 가시를 달고 있는 것은 그 아름다움과 사랑의 상처가 그만큼 더 아프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지. 겉으로만 드러나는 아름다움이나 무조건의 사랑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어. 이것은 장미가 겉으로만 보이는 아름다움에 탐닉(耽溺; 지나치게 빠져버림)하거나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라고도 해.
할아버지는 산방(山房) 앞 화단에 있는 이 퀸 엘리자베스 장미의 나뭇가지를 한번 눈여겨본 일이 있어. 이 장미가 초겨울까지도 짙푸르게 달고 있던 잎을 모두 떨어트리고 깊어진 겨울을 나고 있는 때였지. 할아버지는 이 장미의 밑동 부근의 무성한 가시와 가시가 조금 적은 나뭇가지의 모습을 자세하게 살펴보았지. 나뭇가지에 가시가 무성하다는 건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나뭇가지의 모습이 무척이나 색다른 모습이라는 데 놀라고 말았어. 왜냐 하면 그 장미의 나뭇가지는 무척이나 거칠고 칙칙한 색감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어. 화사하게 빛나는 꽃 빛, 싱싱한 초록 잎새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느낌이었지. 장미의 나뭇가지는 온통 메마른 데다 마치 검버섯이 돋아난 듯 거무스름한 반점이 가득해서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였지. 그토록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장미의 몸뚱이가 그토록 어둡고 거칠게 메말라 있을까? 꽃을 피우고 있는 장미의 나뭇가지는 그토록 윤기 있고 생기가 흘러넘쳤는데... 장미가 뜨거운 여름의 계절에 그토록 아름답고도 화려한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처럼 볼품없고 초라한 긴 기다림과 준비의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우리 또한 살아가면서 아프고 힘든 시간을 견디고 이겨내야만, 더욱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한비, 한율아! 오늘은 편지가 많이 길어진 것 같구나. 장미에 담긴 이야기가 워낙 많기도 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장미 이야기 2를 기대한다’는 한비의 말에 할아버지가 고무되어 너무 욕심을 부린 게 아닌가도 생각되는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줄일게. 잘 있어~ (2022.6.9.)
첫댓글 장미란 소재를 가지고 2편의 긴 수필을 쓴 순우의 문학적 상상력과 해박한 지식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네요. 글이란 체험과 지식과 나름대로의 깊은 성찰이 어우러지는 유기체라는 생각을 종종하는데, 3박자를 모두 구비한 순우가 부럽습니다. 노력하여 순우의 문학작품을 모방하도록 노력하고지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장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는군요. 많은 사연 잘 읽었네요. 장미를 주제로 글을 쓰는 작가나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한번 읽어 봐야 할 듯싶군요.
깊고 넓은 해박한 지식에 감명을 받았어요. 장미에 얽힌 이야기가 매우 많군요. 두 손녀들에게 자상하게 들려주는 이야기, 옛날 같으면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묵직한 음성으로 손녀들에게 들려주었을 것 같아요. 화려한 장미를 손에 넣으려면 가시 아픔을 견디어야겠군요. 세상일이 다 그런 것 같군요.
순우의 글을 3번 반복해 정독을 한후
사랑하는 아내를 생각하면서 장미꽃
에 대해 순우의 지식을 컨닝하여 한
건의 집필을 했습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손녀들의 정신 세계가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물론 순우의 글의 뜻을 다 알기는 아직 어리겠지요.
요즘 성북천엔 찔레처럼 작은 꽃을 단 장미가 많이 피고 있습니다. 이름표를 달아 놓아서 보니 '스칼렛 메이 딜란트'라네요.
장미 연재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