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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히브리서 4:12-16 제목 :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히브리서 4:12-16>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풍요로움 속에서 별 탈 없이 행복하게 하는 것을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로 여깁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더 이상 원하는 게 없을만큼 풍요로운 사람은 없지요. 수백 수천억의 재산을 가진 대재벌들은 이제 더 이상 돈에 대한 욕심이 없을까요? 사는 것에 별 탈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라는 곳이 별 탈이 없을 수 없지요. 곳곳에서 터지는 전쟁과 지진, 기후 위기로 인한 여러 재앙들, 수많은 사건과 사고, 살벌하게 경쟁해야 삶의 현실, 그리고 결국에는 병들고 죽게 되는 우리의 현실에 무슨 별 탈 없기를 기대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행복은 기대하지 말아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인간은 행복하게 살 권리가 당연히 있지요. 문제는 행복을 너무 소유와 재산에만 의존하고,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사는 것에만 의존하고, 내 욕심과 욕망대로 사는 것에만 의존한다는 거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실 때에 일곱 마디의 말씀, 가상칠언이 있습니다. 그 중 마지막 두 말씀이 있는데 하나는 ‘다 이루었다.’ 그리고 또 한 말씀은 ‘아버지,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였지요.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삶을 완성하셨다는 겁니다. 뭔가를 완성했을 때의 뿌듯한 행복을 경험해 보셨겠지요. 그러기에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행복하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아버지,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렇게 기도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 평생이 예수님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사람의 생각과 욕망대로만 사셨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게 부끄럽고 두렵겠지요. 결국 다 이루셨다는 말씀이나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한다는 말씀은 나는 이제 완성했다, 그래서 행복하다, 평안하다라는 의미이기도 한 겁니다. 세상의 것들이나 육신적인 것들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행복과 삶의 완성을 예수님은 보여주신 거죠. 비록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극한의 처참한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 되시는 것을 통해 극복하시고, 결국에는 행복과 평안의 결과를 보여주신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의미있게 사는 것에 대해서 말한 것을 보면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라고 하면서 이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소유나 권세나 욕망성취가 아니라 덕을 쌓아야 한다고 했지요. 근대 독일 철학자인 칸트는 의미있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하고, 개인의 행위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 되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공자는 의미있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관계에서의 도덕적 덕목을 실천하는 것, 이것을 예를 다하는 것이라고 말했지요. 맹자도 우리의 삶이 의미있기 위해서는 선함을 바탕으로 의롭고 인자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아니라도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도 인간에게 가장 의미있는 삶은 이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착하는 많은 소유나 욕망 성취나 제 잘난 맛에 사는 것에 있지 않다고 말했지요.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마지막 16절 끝부분을 보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의 보좌에는 누가 계실까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자는 거죠. 아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기도였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이 기도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기도인 겁니다. 그래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곧 구원의 완성, 그래서 최고의 완전한 행복, 온전한 삶의 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거죠.
이렇게 행복하고 완전한 삶의 의미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오늘 본문은 몇가지 거쳐야 할 단계를 말합니다. 먼저 1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말씀의 검으로 우리 자신을 온전히 쪼개면서 내 속에 있는 마음과 생각과 뜻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돌아보는 단계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것을 13절 후반부에서는 이런 말로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모든 것이 그(하나님)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라고 번역했지요. 예리하고 날선 말씀의 검이 우리를 찔러 쪼개어 마음과 생각과 뜻을 드러내 버려서 벌거숭이가 되게 하는 것은 사실 곤혹스러운 일이지요. 옷이 벗겨짐을 당하는 것도 수치스럽지만 나의 내면이 벌거숭이처럼 벗겨지고 드러나는 것은 훨씬 더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두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구약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뵈올 때에 이렇게 두려워하며 떨었지요.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 제단에 임재하신 하나님 앞에서 입술이 더러운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기에 나는 화를 당할 수 밖에 없다고 탄식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간청했었지요.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때에 가장 먼저 하셨던 첫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세상에서는 재산이 얼마나 있고 권세가 얼마나 높은지 상관없이 주님 앞에 정직하게 섰을 때에 내가 얼마나 실제로는 가난한 자인지를 인식하고 발견하고 깨닫는 것, 그것이 천국이 주어지는 가장 중요한 복이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시편 69:29절에 보면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가난함과 슬픈 현실을 깨닫고 겸손히 고백하고 있지요. 이렇게 주님 앞에서 말씀의 검으로 나의 내면이 쪼개지고 모든 것이 드러나 버리는 것은 참 부끄럽고 고통스럽지만 그렇게 자신의 가난함과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우리를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겁니다.
문제는 기독교인들 중에 이렇게 주님 앞에서 자신이 쪼개지고 그래서 자신의 참 모습이 드러나는 경험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거죠. 나는 죄인이라고 다들 고백은 하지만 교회에서 그렇게 말하고 가르치니까 학습된 죄인일 뿐이지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내 모든 것이 까발려지고 내 본색이 다 드러나서 내가 실제로는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미련하고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도 부끄러움과 겸손함보다도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려 하고, 남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성경에서 무수하게 가르쳐도 여전히 너보다는 내가 더 옳고 내가 더 능력있다는 교만함들이 서로 부딪치고 갈등을 겪으면서 신경전을 벌이는 일들이 여전히 일어나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길을 가시되 겸손하게 가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겸손함이 있어야 말씀을 대하고 들을 때에 그 말씀이 12절에서처럼 예리한 검이 되어서 내 영혼과 골수까지 찌를 수 있게 되고, 예수님 앞에서 내 자신을 바르게 보고 인식할 수 있게 되지요. 출애굽 당시의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런 겸손함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하나님의 기적과 율법의 말씀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손길을 보고 듣고 경험했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욕망을 버리지 못하면서 불평과 원망을 일삼고 분쟁과 다툼을 일삼으면서 결국은 스스로 자멸하는 길을 가고 말았지요.
이렇게 주님 앞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벌거벗은 존재인지를 바르게 깨달아야만 그 다음 말씀인 14절이 가능해집니다. 14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그리고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런 겸손함 속에서 예수님도 바르게 보이게 되는 겁니다. 큰 대제사장 같은 분, 그리고 모든 이 세상에서의 사역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모든 과정을 완성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이 제대로 보이는 거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지요. 믿음도 성숙해질수록 더 겸손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자신 안에 있는 감춰진 것들, 그래서 자신도 모르던 모든 것들이 더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 게 초기에 회심했던 때가 아니었지요. 자기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고백했던 말입니다. 신앙이 깊어지고 선교사로서의 사역이 완전히 무르익었을 때 바울은 내가 더 거룩해지고 더 현명해 졌다고 생각된 게 아니라 오히려 죄인 중에 괴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더 회개가 깊어지고, 겸손이 더 깊어졌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 진실해졌고 더 굳건해졌던 겁니다.
마지막 16절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를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하는 것은 내가 가진 많은 재산이 아니라, 너보다 더 올바르고 경험이 많다는 교만함이 아니라, 이렇게 주님의 말씀 앞에서,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벌거벗은 모습으로 올바로 돌아볼 수 있는 겸손함, 그리고 그 겸손함에 담겨진 주님의 긍휼하심이 하나님 계신 은혜의 보좌 앞에 더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주님 앞에서 만물이 벌거벗음과 같이 드러나는 것, 그것은 부끄러움을 뛰어넘어 주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의 은혜와 은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