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2코린 8,9)
교회는 오늘을 11세기 수도 생활의 모범이며 모든 수도자들을 덕행으로 이끈 수도 성인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프랑스 클레르보 수도원의 아빠스로서 수도 생활의 모범과 덕행으로서의 수도자의 삶을 위해 온 삶을 바친 베르나르도 성인을 기억하는 오늘 우리가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신앙의 여정 중에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자세로서 가난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우선,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께 다가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묻는 부자 청년과의 예수님과의 대화 그 이후의 장면을 전합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의 모든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선한 일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간절히 바란 청년은 스승 예수를 찾아와 자신이 어떤 선한 일을 더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지혜를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에게 부족한 딱 한 가지, 곧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를 것을 요구하시지만 그 청년은 가진 재산이 너무 많고 그것을 나눌 마음이 없었던 나머지 슬퍼하며 예수님 곁을 떠나갑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음의 말씀으로 전해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게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24)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 너무 놀라 그렇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말 그대로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부유함은 결정적 결격 사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유하다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부를 쌓은 이들이라면 그의 성실함과 근면함은 오히려 칭찬받아야 할 일이 아닐까? 부유함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에 결격사유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참 뜻은 무엇일까?
이 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오늘 독서의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안에서 하느님은 예언자를 시켜 티로의 군주의 잘못을 꾸짖습니다. 그의 잘못이란 그의 마음이 교만해져 주님이신 하느님을 저버리고 스스로 신임을 자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티로의 군주가 스스로 신이라고 느낄 정도로 교만해 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독서는 그 이유를 바로 다음과 같이 분명히 지적합니다.
“과연 너는 다니엘보다 더 지혜로워, 어떤 비밀도 너에게는 심오하지 않다. 너는 지혜와 슬기로 재산을 모으고, 금과 은을 창고에 쌓았다. 너는 그 큰 지혜로 장사를 하여 재산을 늘리고는, 그 재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다.”(에제 28,3-5)
남다른 지혜와 슬기를 통해 큰 재산을 벌어들이는 것. 그것은 분명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일. 곧 자신의 능력으로 이룬 업적들이 하나씩 쌓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능력과 결과를 우대해주는 주위의 반응과 스스로의 과대평가함으로서 마음 안에 교만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다른 이가 아닌 ‘내’가 다 이룬 것이고 ‘나’는 남보다 모든 면에서 더 뛰어난 사람이라는 착각. 그러나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남보다 지혜와 슬기가 뛰어나고 남보다 더 근면 성실히 노력한다할지라도 그 결실이 반드시 내게 주어져야 할 당연한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 그렇게 본다면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아주 극적인 우연의 결과, 내가 제아무리 슬기롭고 지혜로우며 최선을 노력을 다했다할지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많은 이유가 존재함에도 그렇게 된 극적인 우연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에 내가 얻고 누리는 지금의 모든 것은 어찌 보면 그저 감사할 뿐인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실. 그 결정적 사실을 잊고 다른 이들의 찬사와 사회의 우대에 내 눈이 멀어지고 귀가 어두워지면 우리에게 생겨나는 필연적 결과, 교만에 빠져들고 맙니다. 그 교만은 결국 내게 이 모든 것을 허락해주신 주님을 잊게 하고 내가 최고라는 착각 속에 빠져들게 된다는 사실. 그 착각은 또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신 그 분은 내 기억 속에 완전히 망각하게 만들어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끊어버린다는 것. 교만이 빚어내는 결과가 바로 이러합니다.
이 같은 이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그토록 어렵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시며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부유함을 통한 교만이 아닌 가난을 통한 겸손의 자세임을 분명히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오늘 복음환호송에서 다시금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코린토 2서의 말씀을 인용한 복음환호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2코린 8,9)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시는 주님께 우리가 바라야 할 오직 한 가지는 주님의 집에 주님과 함께 하는 것 오직 그것뿐입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해 교만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으며 내가 가진 것들에 취해 주님을 잊는 우를 피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전하는 가난의 삶, 그 삶을 실천함으로서 예수님께서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가난을 택하고 그 가난으로 참으로 부유해지신 것처럼 여러분 역시 가난을 통한 참 부유의 삶을 누리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2코린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