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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랑,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병을 어찌 할꼬?]
不當趣所愛 (부당취소애)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마라. 亦莫有不愛 (역막유불애) 미운 사람도 만들지 마라. 愛之不見憂 (애지불견우)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不愛亦見憂 (불애역견우)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통계를 내어본 적은 없지만 대중가요의 제목이나 가사 중에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아마도 '사랑' 일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은 인간에게 간절한 욕망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고 사랑 뒤에는 아픔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은 해야 하나요, 말아야 하나요?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고 했으니 그럴 바엔 사랑도 한 번쯤 치열하게 해버리는 것이 어떨까요? 그 대상이 굳이 사람일 필요는 없겠지요.
사람에 대한 사랑은 쉬 뜨거워지고 쉬 식습니다. 애증은 등을 맞대고 있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오래도록 변치 않는 물맛 같은 사랑을 찾아봅시다. 자연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봉사, 나눔과 베풂이 물맛 같은 사랑일 것입니다.
사람은 순박해야 하고 소탈하고 너그럽고 정다워야 합니다. 순간순간을 즐기되 타락한 쾌락은 멀리해야 합니다. 자연을 벗하여 겸손을 배우고 따뜻한 눈으로 주위를 바라볼 때 정다운 사랑의 문이 열립니다.
樂而不流(낙이불류), 즐거워도 무절제 하지 않고, 哀而不悲(애이불비), 슬퍼도 아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하나 잃어가는 상실의 시대입니다. 보다 단순하게, 아이들처럼 함께 웃고 삽시다. |
[1-2. 나를 옭죄는 사슬도 내가 만들고, 그것을 푸는 열쇠도 내게 있다.]
是以莫造愛 (시이막조애)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을 애써 만들지 마라. 사랑이 있는 곳에 걱정이 생기고 사랑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습니다.
이것은 사랑을 하지 말고 살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데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겠지요.
많이 사랑할수록 상대방에게 배신당하거나 헤어졌을 때 더 큰 아픔과 배신감을 느끼는 법입니다. |
[1-3. 상대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은 반드시 괴로움과 파멸을 부른다.]
愛樂生憂 (애락생우) 사랑에서 근심이 생기고
사랑의 묘약은 그 효능이 정말 대단합니다. 에로스의 화살은 피할 곳 없는 폭풍입니다. 모든 이성과 감각이 마비되어 평범한 여자가 천사로 보이고 평범한 남자를 신화 속 위대한 영웅으로 착각하게 합니다. 흔히 눈에 콩깍지가 씐다고 하지요.
인간의 사랑은 자기중신주의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억제할 수 없는 갈망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이성의 마비는 분별을 혼란시키고 충고에 귀먹게 되며 필사적인 광증으로까지 치닫게 됩니다.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그 터널을 빠져나오기까지 사랑은 불꽃이고 극락과 지옥이며 쾌락과 고통과 슬픔 들이 뒤섞인 근심과 불안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 터널을 미처 빠져나오기도 전에 괴로움과 슬픔을 못 이겨 목숨을 끊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그 터널을 빠져나왔어도 깊게 입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이도 있습니다
결국 자신을 속이고 속임을 당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남을 속이고 속임 당하게 함으로써 끝나는, 상대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은 반드시 괴로움과 파멸을 부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상대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떠나면 설사 자기를 배반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증오가 따르지 않게 되며 증오가 없으면 괴로움도 없어지므로 이것이 큰 사랑인 자비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하셨습니다. |
[1-4. 쾌락을 좇다 보면 인격과 품위가 파탄난다.]
好樂生憂 (호락생우) 쾌락에서 근심이 생기고
어느 축제일에 부처님께서 많은 대중을 거느리시고 웨살리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릭차위 왕자들이 부처님 일행의 맞은편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오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마주쳤을 때 부처님께서는 빙그레 웃으며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상세계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여기 릭차위 왕자들의 화려한 옷차림을 잘 보아두도록 하여라 천상의 화려함과 아주 흡사하구나.”
왕자들은 축제가 열리고 있는 환희의 동산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산에 도착한 왕자들은 그곳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서로 차지하려고 언쟁을 벌였고, 결국은 치고받는 싸움으로 발전했습니다. 화려하고 장엄하던 왕자들의 품위와 위신은 형편없이 추락했습니다. 그들의 옷은 모두 찢겨졌고 어떤 왕자는 피를 흘리며 들것에 실려 갔고, 어떤 왕자는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되돌아갔습니다.
이때 부처님과 일행이 성에서 공양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이 같은 왕자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왕자들의 비참한 모습, 마치 전쟁에서 돌아오는 패잔병 같은 광경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었습니다.
“비구들아, 감각적인 쾌락을 즐기려는 마음과 그에 대한 집착 때문에 모든 슬픔과 두려움이 일어난다.”
술, 여자, 도박 앞에서 사람의 진솔한 성품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격앙된 상태에서 술을 얼마나 절제할 줄 아는가, 모두가 푹 빠질만한 매혹적인 여인 앞에서 얼마나 의연한가 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참여한 상갓집 화투판일망정 양보와 재치를 얼마나 발휘했는가? 돌아봅니다. |
[1-5. 매끈한 듯 보이는 연꽃잎 표면에는 무수한 돌기가 돋아 있다.]
譬如深淵 (비여심연) 깊은 못은 맑고 고요해 澄靜淸明 (징정청명) 물결에 흐려지지 않는 것처럼 慧人聞道 (혜인문도) 지혜로운 사람은 진리를 듣고 心爭歡然 (심쟁환연) 마음이 저절로 깨끗해진다.
흙탕물 속에서도 연꽃잎은 깨끗합니다. 매끈한 듯 보이는 연꽃잎 표면을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하 면 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미터) 크기의 돌기가 무수히 돋아 있습니다. 돌기 끝부분에는 나노 미터(10억분의 1m) 크기의 더 작은 돌기가 오톨도톨하게 나 있습니다. 이런 구조 때문에 연꽃잎 은 물을 극도로 싫어하는 초소수성을 갖습니다. 연꽃잎에 물이 닿으면 퍼지지 않고 방울 형태로 뭉쳐집니다. 연꽃잎 위에서 뭉친 물방울은 그대로 흘러내리며 먼지를 쓸어내립니다. 자기 세정효 과이지요.
깨달은 사람, 지혜로운 사람도 이와 같겠지요. 겉으로 보기엔 매끈하나 그 표면과 내면에는 수행 의 돌기가 무수히 자리 잡고 있겠지요.
꽃향기는 바람을 거스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흘러가고 올바른 사람은 모든 방향에서 향기를 뿌립니다. 사랑스럽고 색깔이 아름다울지라도 향기가 없는 꽃처럼 실천이 따르지 않는 훌륭한 말은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낡은 것을 혐오할 필요도 없고 새로운 것에 매혹당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라져 가는 것을 슬퍼하 지 말고 애착에 붙잡히지 맙시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에서 욕망을 버리고, 쾌락을 구하는 헛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 어진 이는 즐거움을 만나나 괴로움을 만나나 흔들이는 기색이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집착하여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걱정과 슬픔과 인색함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안온함을 얻은 성인은 소유를 버리고 떠납니다. 건강은 가장 큰 이익이고, 만족은 가장 큰 재산입 니다. |
[1-6. 욕망의 불꽃이 꺼져버린 평온한 상태를 향하여,,,]
如鳥飛虛空 (여조비허공) 새가 허공을 나는 것과 같이
잡념이란 잡념은 모두 끊어 버리고
애욕(愛慾)은 갈애(渴愛)라고도 합니다. 산스크리트어 tanha에서 온 말인데, 목이 마른 것을 뜻합 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애타 하는 모양을 가리킵니다. 또한 애욕을 탐애(貪愛)라고도 하 는데 산스크리트어 raga에서 온 말입니다. 붉다는 뜻, 불이 벌겋게 타오르는 모양을 말합니다. 갈애와 탐애는 모두 욕망의 격렬함을 비유한 말입니다.
출가 수행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애욕은 골칫거리입니다. 잘못 내디딘 애욕의 수렁은 10년 공 부를 허사로 만들고 평생 쌓은 명예를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𝐎𝐎스캔들’이라고 가끔 매스컴을 장식하는 것들이 그런 것이지요.
도대체 애욕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리스신화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애욕의 여신인 아프 로디테의 별명 중에 ‘아프로디테 포르네’, 즉 음란한 아프로디테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여기서 유 래한 말이 포르노그라피, 포르노입니다. 아프로디테를 보면 애욕이 생기지 않는 남성이 없는데, 혹시라도 그런 남성에게는 ‘케스토스 히마스(마법의 띠)라는 비밀 병기를 사용하면 아무도 저항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라노스의 생식기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해석하면 생식기와 아프로디테의 아름다운 육체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애욕의 정체이기도 합니다. |
[1-7. 애욕은 착한 법을 태워버리는 불꽃과 같아서 모든 공덕을 없애버린다.]
以爲愛忍苦 (이위애인고) 천박한 집념과 불타는 욕망에
『장자』⟨잡편⟩에 보면 “생을 존중하는 사람은 비록 부귀해도 살기 위해 몸을 상하는 일이 없고 비록 비천해고 사리를 위해 몸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다. 그런데 요즈음 세상 사람들은 고관대작 에 있으면 그 지위를 잃을까 걱정하고, 이권을 보면 경솔히 날뛰어 몸을 망치고 있다.”는 말이 나 옵니다.
“중생이 생사에 윤회함은 탐욕에 애착하고 있기 때문이다.”는 부처님의 말씀처럼 욕망은 일체 재 앙의 근본이 됩니다. 하지만 이 욕망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튼튼한지 보통의 노력으로는 감히 뿌 리칠 용기조차 내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욕망으로 인해 패가망신한 사례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부처님께서도 6년간 갖은 고행정진 끝에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실 때 마지막으로 마왕 파순으로 갖가지 방해 를 받았습니다.
마왕 파순으로부터 방해는 욕망에 대한 유혹이었으며, 그 유혹은 부처님 자신의 내면으로부터의 유혹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유혹의 관문을 관통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살아가면서 닥쳐오는 갖가지 유혹을 이겨낸 후의 즐거움을 가히 무엇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불교를 흔히 수행의 종교라 합니다. 수행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참아가며 참사람이 되는 것을 말 합니다. 즉 참는다는 것은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을 자제하는 것을 말하며, 탐내는 마음을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고, 성내는 마음을 잘 참기 위해 서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물이나 조건 혹은 상대방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