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읍 먹거리 ‘국시’와 ‘국수’에 얽힌 사연들
(작성 중 : 국시시리즈 1회)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에서 오랜 세월동안 유행했던 ‘헤어스타일’ 시리즈를 마치고, 이번 파일부터서는 그 시절 우리들의 선대들과 우리들이 먹던 ‘국시’와 그 ‘국시’와 유사한 면(麵)음식 시리즈를 엮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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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외동읍(外東邑)에는 ‘국시’라는 먹거리가 있다. 표준어(標準語)로 ‘국수’라고 하는 것이나, ‘국시’와 ‘국수’는 그 의미를 달리한다고 본다.
혹자는 ‘국수’와 ‘국시’의 다른 점은 ‘봉지’에 담긴 ‘밀가루’로 만들면 ‘국수’이고, ‘봉다리’에 담긴 ‘밀가리’로 만들면 ‘국시’라고 한다는 희화적(戱畵的) 표현을 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국수’와 ‘국시’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똑 같은 밀가루로 만들지만, ‘국수’는 공장(工場)에서 기술자들이 만들고, ‘국시’는 가정(家庭)에서 주부들이 손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애기가 나왔으니 부산지방(釜山地方) 어느 ‘국시집’에서 내 걸어놓은 간판 글 하나를 소개한다. ‘국시’와 ‘국수’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듯한 내용인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별로인 듯도 하다.
국시집 간판
일부에서는 ‘국시’는 경북의 안동(安東) 지방에서 만들어 먹는 ‘칼국수’를 일컫는 말이라고도 하지만, 안동에서는 공장에서 기계로 만든 ‘국수’도 ‘국시’라고 한다. ‘국시’는 ‘국수’의 경상도(慶尙道) 사투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도 마찬가지다. ‘칼국수’도 ‘국시’라 했고, ‘잔치국수’도 ‘국시’라고 한다. 굳이 다르다면 ‘칼국수’는 ‘국시’ 외에 ‘늘인국’ 또는 ‘느린국’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부르는 정도다.
칼국수
“우리 고양에서너 ‘복날’이머 국시로 해묵는데, 맷똘에다가 밀로 갈어 가주고 채로 치고 반죽으로 맹글어 가주고 ‘홍디깨’로 밀어서 가느게 싸러 살마가주고, 차분 ‘새미물’에 당갔다가 ‘소구리’에 껀제놓고, 이거로 ‘사바리’에 한 무디기썩 담꼬 거게다가 ‘달’이나 ‘꽁괴기’ 다진 거캉 ‘매래치’ 뽂은 거캉 이거저거 ‘뀌미’로 맨들어 언즈머, 잘 묵넌 사람은 ‘시 그럭’도 비운다”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우리 고향에서는 복(伏)날이면 국수를 해먹는데, 맷돌에다 밀을 갈아서 채로 치고 반죽을 만들어 갖고, ‘홍두깨’로 밀어서 가늘게 썰어 삶아서 찬 샘물에 담갔다가 ‘소쿠리’에 건져놓고, 이것을 ‘사발’에 한 무더기씩 담고, 거기다 ‘닭’이나 ‘꿩고기’ 다진 거랑 ‘멸치’ 볶은 거랑 이것저것 ‘고명’으로 만들어 얹으면, 잘 먹는 사람은 ‘세 그릇’도 비운다”라는 말이다.
홍두깨
지금은 국시든 칼국수든 별미로 먹는 정도지만, 옛적에는 노랗게 부황 든 아이들이 가물가물 호롱불 아래에서 콧물 훌쩍이며 저녁을 때우곤 했었다.
그 시절 가난한 서민(庶民)들의 삶을 그린 김내식의 ‘콧등치기 국수’를 감상한다. 이하에서는 국수와 관련한 시를 띄엄띄엄 게재하여 회원님들의 향수(鄕愁)를 달래고자 한다.
콧등치기 국수
김내식·시인, 경북 영주 출생
깊은 산골의 춘궁기엔
밀가루도 귀하였네
시래기를 보태 삶은 칼국수를
쇠죽과 다름없는 칼국수를
가물가물 호롱불 아래 콧물 훌쩍이는
노오랗게 부황 든 아이들이
후루룩 쪽쪽 빨아들이면
태어난 죄 밖에 없는 여린 콧등
냅다 한번 후려치고
입 속으로 빨려들던
뭉툭한 면발
콧등에 흐르는 국물과 콧물
어머니 손가락으로 훑어 먹이던
짭짤하고 따끈한 그 맛
정신없이 먹다보면
뱃가죽이 벌떡 솟아
올챙이배가 되나
참으라던 오줌을 누고 나니
도로 푹 꺼지더라
동지섣달 기나긴 밤
자다가도 배고파
‘어~메 밥 주게’ 하고 조를 때
이웃집 외양간 송아지도
‘움~메’하고 길게
따라 울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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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공장
어린 시절 어머니는 새하얀 밀가루로 반죽을 치대고 방망이로 밀어 ‘칼국수’를 만드셨다. 얇게 밀은 ‘반죽’을 켜켜이 접어 칼로 채치듯 썬 후 ‘면(麵)’이 달라붙지 않게 밀가루를 뿌리는 작업과정(作業過程)은 너무나 재미가 있었다.
어찌나 신기(神奇)하고 재미있었는지 어머니의 거추장스럽다는 지청구(까닭 없이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짓)에도 불구하고 내내 옆에 붙어 거들곤 했었다.
세월이 흘러 ‘칼국수’를 만들어 주셨던 어머니는 벌써 천국(天國)으로 가시고, 수고로운 정성(精誠)을 필요로 하는 ‘칼국수’는 국수 전문점(專門店)에서 간단하게 해결하고 있다.
칼국수
전 국민들이 좋아하고 즐기는 가장 대중적(大衆的)인 음식으로 ‘칼국수’가 사랑받는 이유는 아마도 이처럼 유년시절(幼年時節) 어머니에게서 가졌던 아련한 향수(鄕愁)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회생활(社會生活)을 하면서부터 집에서의 밥보다는 외식(外食)에 익숙해지면서 집에서 먹었던 ‘칼국수’는 단지 ‘엄마표 칼국수’였고, ‘칼국수’의 종류도 수없이 많다는 걸 알게도 되었다.
지방색이 물씬 풍기는 칼국수
여기에서 잠시 김창완이 부른 ‘점심시간 칼국수집’을 게재하여 음미하기로 한다.
점심시간 칼국수집
김창완
사진관 옆에 칼국수집 만두 통에서 김이 나네
구수한 만두 찌는 냄새 골목에 꽉 찼는데
한 손에 배달통을 든 청년이
묘기 부리듯 자전걸 타고 나가시네
곧 갑니다 가요 전화 받는 아줌마 바쁘네
순두부 기다리는 아가씨 젓갈을 쪽쪽 빨고 있고
흰 모자 쓴 주방장 아저씨 땀을 뻘뻘 흘리네
정신 없이 국수를 빼다가도
문이 열릴 때마다 인사하네
어서 옵쇼 어서 옵쇼 이쪽으로 자리 내드려요
바뻐요 국수 빨리 줘요
배고픈 얼굴들 아기 같은데
점심시간 바쁜 칼국수집 정말 사람 사는 것 같네
지하 다방 옆 대구탕집 입구에 서서 기다리네
얼큰한 대구탕 국물 냄새 복도에 꽉 찼는데
한손에 행주 들고 치워대는
아가씨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데
곧 갑니다 가요 주문 받는 아저씨 바쁘네
차례를 기다리는 신사들 목젖이 쭉쭉 늘어지고
아까운 점심시간 반절이 침만 삼키다 가네
정신 없이 주문을 받다가도
손님이 갈 때마다 계산하네
얼맙니까 얼마예요 다음에 또 들러주세요
바뻐요 대구탕 빨리 줘요
배고픈 얼굴들 아기 같은데
점심시간 바쁜 대구탕집 정말 사람 사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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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장 국시집
‘칼국수’의 사전적(辭典的) 의미는 밀가루 반죽을 방망이로 얇게 밀어서 ‘칼로 가늘게 썰어 만든 국수’ 또는 그것을 익힌 음식(飮食)이라고 하고, ‘손칼국수’는 ‘면(麵)’을 기계로 뽑지 아니하고, 손으로 직접 반죽하고 밀어 ‘칼로 썰어 만든 국수’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칼국수’가 지금은 가장 서민적(庶民的)이고 흔히 쉽게 먹을 수 있는 대중음식(大衆飮食)이지만, 옛적 고려(高麗)와 조선시대에는 밀가루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잔칫상에나 오르는 귀한 음식이었다.
돌상에는 아이의 오복(五福)을 비는 뜻으로, 혼례상(婚禮床)에는 여러 ‘국숫발’이 잘 어울리고 늘어나듯 부부금슬(夫婦琴瑟)이 잘 어울리고 늘어나라고, 또 회갑상(回甲床)에는 ‘국숫발’처럼 길게 장수(長壽)하라는 뜻을 담아 먹었다고 한다.
칼국수 만들기
또한 그 시대에는 밀가루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메밀’로 만든 ‘면(麵)’을 먹었지만, 특별히 밀로 만든 ‘칼국수’를 먹던 절기(節氣)가 따로 있었다.
바로 보리와 밀 수확(收穫)이 끝났을 때인 유월 ‘유두(流頭 ; 음력 6월15일)’에는 갓 나온 햇밀로 ‘칼국수’와 ‘지짐’을 부쳐 이웃과 나눠먹던 풍습(風習)이 있었다.
닭을 잡아 그 국물에 ‘국수’를 말고, 고기 살을 발라 갖은 양념을 넣어 조물조물 무쳐 ‘애호박’과 함께 얹어내기도 하고, 또 해안(海岸) 지방에서는 조갯살로 국물을 내 ‘칼국수’를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국물과 고명에 따라 다채로운 칼국수
여기에서 다시 국수에 대한 시 한 수를 감상하고 넘어간다. 그 시절 동대문시장(東大門市場) 옷가게와 꽃가게 사이 비좁은 분식집에서 비빔국수를 먹는 모습이다. 목필균의 ‘비빔국수를 먹으며’를 감상한다.
비빔국수를 먹으며
목필균
동대문 시장
옷가게와 꽃가게 사이
비좁은 분식집에서
비빔국수를 먹는다.
혼자 먹는 것이 쑥스러워
비빔국수만 쳐다보고 먹는데
푸른빛 상추, 채질된 당근
시큼한 김치와 고추장에 버물려진
국수가 맛깔스럽다.
버스, 자가용,
퀵서비스 오토바이가 뒤엉킨 거리
옷감 파는 사람과 박음질하는 사람
단추, 고무줄, 장식품을 파는
크고 작은 상점이 빼곡한 곳
가난과 부유가 버물려져 사는
동대문 시장
가족과 동료, 시댁과 친정
세월의 수레바퀴 속에
나와 버물려져 사는 사람들
새콤하고 달콤하고 맵고
눈물 나고 웃음 나고
화나고 삐지고 아프고
그렇게 버물려진 시간들
울컥 목구멍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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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을 달래주던 서민들의 별미음식(別味飮食)인 ‘칼국수’는 한때 ‘서민과 함께 하는 대통령(大統領)’의 이미지와 맞아 떨어지면서 청와대(靑瓦臺) 오찬 음식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YS의 ‘칼국수 사랑’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얼마나 칼국수를 좋아하는지 2~3년 동안 거의 매일 점심으로 칼국수를 올렸는데도, 한 번도 물린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 당시의 청와대(靑瓦臺) 조리장(調理長)의 얘기다.
청와대를 방문한 어린이들과 ‘국시’를 먹는 YS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YS의 ‘칼국수’는 재임 당시 ‘서민적(庶民的)인 대통령’ ‘소박한 청와대(靑瓦臺)’의 이미지를 대변해주는 기특한 음식이 되기도 했지만, 이 ‘청와대표 칼국수’가 탄생하기까지는 조리팀의 힘겨운 노력이 뒤따라야 했다.
특히 조리팀을 고민스럽게 했던 것은 ‘우리 밀을 적극 사용하라’는 대통령(大統領)의 분부 때문이었다. 수입 밀에 비해 탄성(彈性)이 적고, 점도가 약해 반죽이 잘 뭉쳐지지 않는 우리 밀을 사용해 쫄깃하고, 금방 불지 않는 면발을 뽑아내는 일은 엄청난 고역(苦役)이었다고 한다.
장관들과 ‘국시’를 먹는 YS
때문에 100여 명이 넘는 손님들에게 쫄깃한 우리 밀 ‘칼국수’를 한꺼번에 대접한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육수(肉水)를 만들기 위해 거의 매일 ‘사골’ 국물을 우려내고, ‘면발’ 뜨는 사람과 국물을 담는 사람을 나누는 일, 들어오는 손님의 상황(狀況)을 파악하는 일도 기본이었다.
아랫사람들과 서민들의 고충을 백안시(白眼視)하는 가진 자들의 사고방식(思考方式)이 체질화되어 주방(廚房)에서 일하는 조리팀의 사정을 몰랐기 때문이다.
감자 칼국수
특히 가스 불 5개면 1분에 몇 그릇을 끓일 수 있는지, ‘칼국수’ 한 그릇 뜨는 데 몇 분이 걸리는지, 손이 빠른 사람과 느린 사람의 차이는 얼마나 두어야 하는지 등 시간계산(時間計算)도 중요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칼국수’는 금세 배가 꺼진다는 손님들의 얘기에 별도로 찰떡과 과일을 곁들여 내놓았다는 것은 그 당시 청와대(靑瓦臺) 조리팀의 세심한 배려(配慮)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청와대 조리팀
여기에서 다시 김종제의 ‘칼국수’를 음미하기로 한다. 밀가루를 얇게 반죽을 해서 칼로 죽죽 찢어 한 냄비 끓이면서 굵은 바지락 몇 개 집어넣은 바지락 칼국수를 노래한 글이다.
칼 국 수
김종제·교사 시인, 강원도 출생
불같이 화가 나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는데
칼국수만한 게 어디 있을까
밀가루를 얇게 반죽을 해서
칼로 죽죽 찢어 한 냄비 끓이면서
굵은 바지락 몇 개 집어 넣고
파 숭숭 잘라 넣고
잘게 썰은 매운 고추에
붉은 고춧가루를
한 숟가락 풍덩 빠뜨린 다음에
흐물흐물해진 칼을 후후 불면서
방금 버무린 김치와 엮어
입안으로 넘기면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인데
굳었던 혀가 얼얼해지고
뻣뻣한 뒷목이 허물어지면서
얼굴에 땀방울이 돋아나기 시작하는데
그릇을 통째 들고
뜨겁게 달아오른 저 붉고 푸른 국물을
목구멍으로 한 모금 넘기면
눈앞이 환해지면서
온몸에 칭칭 감긴 쇠사슬이 풀어지는데
뼈가 나긋나긋해지고
눈물이 절로 나는 것인데
칼국수 다 비우고
뜨거워진 마음을
빈 그릇에 떡 하니 올려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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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반죽을 칼로 썰어 국물에 끓여먹는 음식이 ‘칼국수’다. 간편하고 손쉬워 보이지만, 조리법(調理法)과 재료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千差萬別) 달라지는 개성 넘치는 메뉴이기도 하다.
밀가루만 쓰는 집과 콩가루를 섞어 쓰는 집이 따로 있고, 닭·쇠고기·멸치·해물 등 육수(肉水)를 내는 재료도 각양각색(各樣各色)이다.
해물 칼국수
호호 불어 후루룩 ‘면발’을 빨아들이다보면, 어느새 그릇 바닥이 보이는 서민적(庶民的) 음식인 ‘칼국수’지만, 어떤 국물로 끓이느냐에 따라 닭·사골·멸치·바지락·버섯 등의 ‘칼국수’로 나누어진다.
그래서 ‘칼국수’만큼 지방색(地方色)이 뚜렷한 음식도 없다고 한다. 육수(肉水)와 ‘면발’ 모두 지역적(地域的) 특성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두는 까닭이다.
농촌지역에서는 닭으로 육수(肉水)를 만들어 ‘애호박’과 ‘감자’ 등을 넣어 끓이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이고, 경상도지역 산간지방에서는 ‘멸치’로 ‘장국’을 만들어 끓여 먹는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도 ‘칼국수’든, ‘잔치국수’든 주로 ‘멸치장국’으로 만들어 먹었다.
장국 칼국수
그리고 해안지방(海岸地方)에서는 흔히 구할 수 있는 ‘바지락’으로 ‘칼국수’를 끓이고, 일부 내륙(內陸)지방에서는 ‘사골’이나 ‘고기’로 육수(肉水)를 우려 내 곱게 썰어 볶아 낸 ‘호박나물’과 쇠고기 ‘고명’을 얹어 먹는다.
강원도식(江原道式) ‘칼국수’는 ‘멸치’에 마늘, 파 등을 썰어 넣어 끓인 ‘장국’ 국물에 고춧가루를 풀어 얼큰하게 먹는다. 강원도 사람들은 어떤 음식이든 고추장을 풀어 얼큰하게 즐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잔치 국수
겨울 음식일 것 같은 뜨끈한 칼국수, 그러나 예상과 달리 ‘칼국수’는 여름 별미(別味)에 해당한다. 이유는 밀의 수확시기(收穫時期)와 관련이 깊다.
밀농사를 지으면, 음력 6월경 밀 수확(收穫)을 끝내고, 갓 나온 ‘햇밀’을 갈아 별미(別味)로 ‘칼국수’나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기 때문이다.
밀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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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대로 ‘칼국수’는 특히 지방색(地方色)이 물씬 풍기는 음식 가운데 하나다. 어떤 재료의 국물과 ‘고명’을 얹어 조리(調理)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맛, 새로운 종류의 ‘칼국수’가 계속해서 탄생(誕生)하면서 지금은 수많은 종류의 ‘칼국수’가 선을 보이고 있다.
옛적 우리들의 선조(先祖)들은 ‘메밀가루’를 반죽해 방망이로 밀어서 칼로 굵직굵직하고, 조각지게 썰어 익힌 ‘칼국수’와 비슷한 ‘칼싹두기’를 즐기기도 했었다.
칼싹두기
여기에서 말하는 ‘칼싹두기’는 밀가루 반죽 따위를 방망이로 밀어서 굵직굵직하고 조각지게 썰어서 끓인 음식을 말하는데, 미국(美國)에서 영주하다가 작고(作故)하신 필자의 이모님이 특히 잘 만드시던 음식이었다. 미국(美國)에서도 교포들이 ‘칼싹두기’를 자주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칼국수’와 비슷한 말에 ‘칼제비’라는 것이 있다. ‘칼’과 ‘제비’의 결합(結合)이 생뚱맞게 다가오는 말이기도 한데, 잘못 들으면 칼을 잘 쓰는 사람을 이르는 ‘칼잡이’로 오해(誤解)할 수도 있다. 아니면 ‘제비’의 한 종류인가로 생각되는 말이기도 하다.
수제비
‘칼제비’는 사전(辭典)에 ‘칼싹두기나 ’칼국수‘를 ’수제비‘와 구별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번엔 또 ‘칼싹두기’가 뭔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나, 이는 앞쪽의 설명(說明)과 같이 ‘칼국수’와 ‘수제비’의 중간쯤 되는 음식이다.
그리고 ‘칼제비’는 ‘제비’를 새의 한 종류로만 이해하다 보니 ‘칼제비’가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理解)하기기 쉽지 않다. 그러나 ‘칼제비’라는 말이 있다면 ‘제비’라는 말에 ‘수제비’의 뜻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면 쉽게 풀릴 수 있다.
칼제비
사전에서 ‘제비’ 항목을 찾아보면, ‘수제비’를 뜻하는 경남(慶南) 지역의 방언이라는 풀이가 나오기도 하고, ‘칼국수’를 북한(北韓)에서는 ‘제비국’ 혹은 ‘칼제비국’이라고 한다는 점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結論的)으로 ‘칼제비’는 손으로 때어서 뜯어 넣는 ‘손수제비’가 아니고, 칼로 ‘수제비’ 모양으로 썰어 넣는 ‘칼수제비’라고 보면 된다.
‘수제비’에는 또 ‘밴댕이’ 가시를 발라 버리고 살만을 짓이겨 간장과 후춧가루를 치고 달걀을 풀어서, 맑은 ‘장국’에 ‘수제비’처럼 조각조각 떼어 넣고 끓이는 ‘밴뎅이수제비’가 있다.
이 외에도 멸치의 살과 장, 달걀, 후춧가루를 함께 이겨 끓인 ‘장국’에 ‘수제비’를 떼어 넣고 끓인 ‘멸치수제비’라는 것도 있다.
수제비
‘국시’ 얘기로 돌아간다. 한때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지만,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청와대 오찬(午餐) 때 손님에게 접대해서 화제가 되었던 ‘칼국시’는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 반죽하여 만든 것으로 고소하고 ‘면발’이 가늘고 부드러운 ‘안동식(安東式) 칼국수’였다.
그 당시 ‘청와대표 칼국수’를 ‘국시’라고 말한 것은 YS가 경상도(慶尙道) 사람이라 그의 입에 익은 경상도사투리에 해당(該當)하는 것으로 다른 ‘칼국수’와 무슨 차이에서 불리어진 말이 아니었다.
장국
그리고 지방(地方)에 따라서는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 ‘칼국수’처럼 만들어 ‘장국’에 삶아 다시 장국국물을 부은 ‘건진국수’가 있었고, 밀가루를 반죽하여 얇게 밀어서 칼로 썬 ‘국수’를 ‘국수장국’에 넣어 그대로 삶은 ‘제물칼국수’ 등이 있다.
위에서 말하는 ‘건진국수’는 대표적(代表的)인 ‘안동 양반님네’ 음식이다. ‘수중군자(水中君子)’로 불리는 기품 있는 생선인 은어(銀魚)를 달여 낸 육수에 가늘디가는 ‘국수’를 말고, 실고추, 애호박, 파, 계란 흰자위와 노른자위 등 오색(五色) ‘고명’을 얹어 만든다.
건진 국수
‘건진국수’는 또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 ‘면’을 만드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特徵)이다. 맛도 맛이려니와 쓰인 재료(材料)와 말아 내놓는 ‘국수’의 품위(品位)가 남다른 ‘귀족국수’에 속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명’이란 모양을 돋보이게 하고, 맛을 돋우려고 음식 위에 뿌리거나, 얹어 놓는 것을 말하는데, 주로 버섯·실고추·잣가루·알고명·과일 조각 따위를 썰어 얹는다.
고 명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고명’을 ‘꾸미’ 또는 ‘뀌미’라고 하는데, 마을에 따라서는 ‘끼미’라고도 한다. “무신 임석이든지 그랗지만도 국시는 ‘꾸미’가 좋아야 빛도 나고 맛도 나능기라” 또는 “국시 맛이 조타 캐도 다 ‘뀌미’ 맛잉기라”는 용례들이 있다.
“무슨 음식이든지 그렇지만 국수는 ‘고명’이 좋아야 빛도 나고 맛도 나는 것이다” 또는 “국수 맛이 좋다 해도 다 ‘고명’ 맛이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다시 최진연의 ‘콩국수’를 음미해 본다. 콩국을 찬 우물물에 타서 삶아 건진 국수를 넣어 만든 ‘콩국수’와 그 국수를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를 함께 그리는 글이다.
콩 국 수
최진연·시인, 경북 예천 출생
맷돌에서 나오는 모유같은
콩국을 찬 우물물에 타서
삶아 건진 칼국수를 메운 위에
오이채를 얹어 먹는
구수하고 서늘함이 흐르는
땀을 빨아들이고
말랑거리는 가슴의 어머니 냄새
할머니 어머니 아내의 손과
가슴으로 이어지는 혈맥 같은 그 맛
하얀 오존이 하늘을 뒤덮는
이 도시의 여름을 나자면
어머니를 느끼며 콩국을 먹어야 하고
궂은 날 어머니를 졸라
솥뚜껑 지짐질로 빚으시던
밀전병 생각이 간절하면
먼 하늘이나 바라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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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글에서 사용하는 ‘장국’은 ① ‘토장국’이 아닌 국물. ② ‘맑은 장국’의 준말. ③ 열구자·전골 따위의 국물로 쓰는 간장을 탄 물을 모두 이르는 말이다. 흔히 말하는 ‘육수(肉水)’와는 다른 말이다.
장 국
‘칼국수’의 종류에는 위에서 열거(列擧)한 종류 외에도 호남지방(湖南地方)에서 즐겨먹었던 ‘팥칼국수’, 바지락조개 삶은 국물에다 새우, 홍합, 오징어 등을 넣고 끓인 ‘해물칼국수’도 있다.
그리고 멸치국물에 들깨를 갈아 넣어 끓인 ‘들깨 칼국수’, ‘바지락칼국수’, ‘버섯샤브칼국수’ 등 수없이 다양한 ‘칼국수’ 종류가 있다. 이들 칼국수를 도표화하면 다음 표와 같다.
칼국수의 종류 |
개 요 |
닭 칼국수 |
닭을 고아서 그 국물에 면을 삶은 칼국수 |
맛 칼국수 |
멸치국물 칼국수로 국물 맛이 담백 |
해물칼국수 |
바지락조개 삶은 국물에다 새우, 홍합, 오징어 등을 넣고 끓인 칼국수 |
들깨칼국수 |
멸치국물에 들깨를 갈아 넣어 끓인 칼국수로 구수한 들깨 맛의 몸보신용 칼국수 |
도토리칼국수 |
도토리를 주원료로 밀가루와 혼합 반죽하여 김, 깨, 계란 등 ‘고명’을 얹어 정갈하게 상차림 하여 먹는 칼국수 |
제물칼국수 |
밀가루를 반죽하여 얇게 밀어서 칼로 썬 국수를 국수장국에 넣어 그대로 삶은 것 |
팥 칼국수 |
호남지방(湖南地方)에서 즐겨 먹었던 국수 |
사골칼국수 |
‘사골육수’에 채 썰어 볶아낸 호박나물과 쇠고기 ‘고명’을 얹어 담백한 국물 맛이 특징 |
건진 국수 |
‘수중군자(水中君子)’로 불리는 기품 있는 생선인 은어(銀魚)를 달여 낸 육수에 가늘디가는 ‘국수’를 말고, 실고추, 애호박, 파, 계란 흰자위와 노른자위 등 오색 ‘고명’을 얹어 만든다. |
바지락 칼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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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잠시 필자가 향리(鄕里)에서 농투산이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귀리(해밀)’쌀로 만들어 먹던 ‘귀리 칼국시’ 얘기를 조금 보탠다.
표준어인 ‘귀리’를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휘밀’, ‘훼밀’ 또는 ‘해밀’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필자의 향리에도 젊은 사람들은 ‘훼밀’이라고 했고, 나이가 드신 분들은 치아(齒牙)가 모두 빠져 다소 연음(連音)인 ‘휘밀’ 또는 ‘해밀’로 불렀다.
귀 리
그리고 경상도 사투리 중에서 경주(慶州)지방 사투리를 쓰는 외동읍(外東邑)에서도 사물의 명칭(名稱)에 대해서는 마을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발견되고 있다.
‘귀리’의 경우도 외동읍(外東邑)의 북부지역인 필자의 향리 등에서는 ‘훼밀’이라고 했고, 울산시(蔚山市)와 연접한 남부지역에서는 주로 ‘해밀’이라고 했었다.
필자가 파일의 제목을 경상도(慶尙道), 경주사투리보다는 굳이 ‘외동읍 사투리’라고 명명하는 것도 이러한 점을 감안(勘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리 이삭
‘해밀’ ‘휘밀’ ‘훼밀’은 원래 표준말인 ‘귀리’의 북부지방 방언 ‘귀밀’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벼과의 한해살이 또는 두해살이 재배식물(裁培植物)인 ‘귀리’는 한자어로 ‘이맥(耳麥)’이라고 한다.
생긴 모양이 보리와 비슷하나 이삭이 보리와는 달리 마치 귀가 늘어진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귀리 쌀
그리고 여기에서 ‘이맥’을 우리말로 풀면 ‘귀보리’가 된다. 따라서 ‘귀리’는 ‘귀보리’가 축약(縮約)된 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옛 문헌(文獻)에서는 또 귀리를 ‘귀우리’ 또는 ‘귀오리’라고도 나타낸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함경도(咸鏡道) 등 북부 방언에서는 ‘귀리’를 ‘귀밀(귀밀, 귀일, 기일)’이라고 부르고 있고, 이 ‘귀밀’이라는 말은 월인석보(月印釋譜)에도 기록이 되어 있다.
‘귀리’의 주산지인 함경도(咸鏡道)의 방언 ‘귀밀’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삼천리나 떨어진 경주(慶州) 지방에 전해지면서 ‘해밀’도 되고, ‘휘밀’과 ‘훼밀’로도 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귀리 밥
‘귀리’로는 떡, 국수, 술 등을 만들어 먹거나, 가축(家畜)의 사료로 사용하고 있다. 함경도(咸鏡道) 지방에서는 예로부터 ‘귀밀떡’을 만들어 향토음식으로 먹고 있는데, ‘귀밀(귀리)’ 가루에 팥고물을 묻힌 것으로 ‘수수팥떡’과 비슷하다고 한다.
필자의 경우 향리(鄕里)에 거주할 때 야산(野山) 밑에 새로 개간(開墾)한 박토에 해마다 제법 많은 ‘귀리’를 심었는데, ‘귀리’를 섞어 잡곡밥을 지어 먹기도 하고, 말방리의 ‘대성부락’인가에 있던 국수집에 가서 국수를 뽑아 저녁식사로 대용하기도 했었다.
귀리 칼국수
여름철에는 저녁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온 가족이 달라붙어 디딜방아에 빻은 ‘귀리’가루로 반죽을 만들어 밀고 썰어 ‘칼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따로 ‘옹찰이’에 넉넉하게 남겨두었다가, ‘새벽논매기’를 나갈 때 한 그릇씩 먹으면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이마저도 이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추억(追憶)이 되어버렸다.
귀리 빵
‘귀리’는 전 세계적으로 생산량 면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일년생 작물이며, 곡물(穀物) 중에서 최고 양질의 단백질(蛋白質) 함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생산량 중 90%가 가축사료(家畜飼料)로 이용되나, 식량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식용(食用)으로는 오트밀, 빵의 원료 및 아침식사용 ‘프레이크’가 대부분이지만, 옛날에는 벼·보리·밀 등과 함께 중요한 곡식(穀食)이었으나, 지금은 국내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트밀
여기에서는 그 시절 ‘옹찰이’에 넉넉하게 남겨두었다가, ‘새벽논매기’를 나갈 때 한 그릇씩 먹던 ‘귀리 칼국수’ 맛을 그리며 이상국의 “국수가 먹고 싶다”를 소개한다.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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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필자들이 어렸을 때는 ‘칼국수’를 만들기 위해 반죽을 밀고 있는 할머니를 졸라 ‘국시 꼬래이’를 얻어 동생들과 숯불에 구우며, 서로들 자기의 것이 크다고 자랑을 하곤 했었다.
그 시절 ‘칼국수’를 만드시는 할머니의 솜씨는 신기(神奇)한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할머니께서는 손으로 밀가루 반죽을 치대면서 연신 찬물을 뿌린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린 반죽은 어느새 종잇장처럼 얇아진다.
밀가루 반죽
그리고 이 얇은 반죽을 몇 겹으로 접어 도마 위에 올려놓고, 시커먼 무쇠 부엌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라낸다. 한석봉(韓石峯)의 어머니가 따로 없었다. ‘국시 꼬래이(국수 꼬리)’는 밀가루 반죽을 밀어 국수를 만들 때 잘라낸 자투리다.
할머니께서는 ‘홍디깨질’을 마치고 나면, 널찍하고 얇게 민 밀가루 판을 부엌칼로 몇 개의 사각형으로 잘라 내시고, “자! 국시 ‘꼬래이’ 받어라” 하시면서 침을 삼키며 둘러 서있던 필자들에게 몇 개씩 나누어 주셨다.
꼬맹이 동생까지 고사리 손으로 국시 ‘꼬래이’를 받아 들고는 냉큼 아궁이로 달려가곤 했었다. 가마솥 뚜껑에 올려 진 국시 ‘꼬래이’는 곧 노릇노릇하게 부풀어 오른다.
국시 꼬래이 구워먹기
꼬마 동생들은 바삭거리는 국시 ‘꼬래이’를 야금야금 아껴 먹으며, 친구들 앞에서 자랑을 하곤 했었다. 이렇게 한 그릇의 국수에는 오만가지 추억(追憶)이 담겨져 있었다.
여기에서 다시 이상국의 ‘봉평에서 국수를 먹다’를 감상하고 넘어간다. 강원도(江原道) 봉평 오일장에서 ‘올챙이국수’ 한 그릇에 1,000원일 때 지은 시로 보인다.
봉평에서 국수를 먹다
이상국
봉평에서 국수를 먹는다.
삐걱이는 평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 그릇에 천원짜리 국수를 먹는다.
올챙이처럼 꼬물거리는 면발에
우리나라 가을 햇살처럼 매운 고추
숭숭 썰어 넣은 간장 한 숟가락 넣고
오가는 이들과 눈을 맞추며 국수를 먹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들
또 어디선가 살아본 듯한 세상의
장바닥에 앉아 올챙이국수를 먹는다.
국수 마는 아주머니의
가락지처럼 터진 손가락과
헐렁한 티셔츠 안에서
출렁이는 젖통을 보며
먹어도 배고픈 국수를 먹는다.
왁자지껄 만났다 흩어지는 바람과
흙 묻은 안부를 말아 국수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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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는 밥 대신 국수를 먹을 정도로 국수문화가 전국에서 가장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6.25전쟁 뒤 미군의 원조물자(援助物資)로 밀가루가 대량 공급되면서 부산(釜山)의 ‘밀면’을 비롯해 지역별로 다양한 국수가 만들어졌다.
수산물(水産物)이 풍부한 해안지방(海岸地方)에서는 생선을 넣고, 내륙지방(內陸地方)에서는 채소를 넣어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해물 칼국수
경상도에서 유명한 국수는 부산(釜山)의 ‘밀면’과 ‘구포국수’, 밀양의 ‘수산국수’, 진주의 ‘진주냉면’, 경남 의령의 ‘의령 소바’, 경북(慶北) 포항의 ‘모리국수’, 안동(安東)의 ‘건진국수’와 ‘누름국수’ 등이 있다. 여기에서 잠시 시인 백석의 시 ‘국수’를 감상한다.
국 수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룻밤 뽀오얀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연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던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느 하룻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옛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버지가 오는 것 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의젓한
사람들과 살뜰하니 친한 것은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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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의 내용에 북한(北韓) 사투리가 퍽 많이 포진하고 있지만, 겨울철 메밀국수를 만들어 먹는 어릴 적 농촌풍경(農村風景)과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 시(詩)에서의 메밀국수는 ‘희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맛’을 낸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오묘한 맛의 메밀국수에 곁들이는 식재료(食材料)는 겨울밤 ‘언 동치밋국’, 그리고 얼얼한 ‘고춧가루(댕추가루)’와 싱싱한 ‘산 꿩고기’ 등이다.
메밀국수
요즘이야 흔히 먹을 수 있는 ‘칼국수’지만, 옛적 고려시대와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앞에서 말한 대로 특별한 때나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리고 밀가루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의 국수는 ‘메밀’이 주재료(主材料)였다.
이때 먹었던 우리나라 메밀칼국수는 일본의 ‘소바’의 원조(元祖)라고 한다. 음식문화연구가에 의하면 일본의 ‘본산적주(本山荻舟)’에 “조선의 승려 ‘원진’이 일본에 건너와 밀가루를 메밀가루에 섞는 것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일본의 소바는 바로 우리의 메밀칼국수가 원조
여기서 승려(僧侶) ‘원진’이 가르친 내용이 바로 칼국수를 만드는 법이 아닌가 추측되는 것은 일본에서는 원래 메밀국수를 ‘소바’라고 하지 않고, 자른다는 뜻의 마디절(切)자를 넣어 ‘메밀국수’를 ‘소바기리(소바切)’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역시 ‘소바’는 우리의 ‘메밀칼국수’가 시조인 셈이다.
여기에서도 국수에 얽힌 시(詩) 한수를 소개드린다. 그 시절 우리들 어머니들의 국수 만드시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영민의 ‘황홀한 국수’를 소개한다.
황홀한 국수
고영민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 큰 내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랗게 말아
그릇에 얌전히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루룩 빨아들이듯,
이마의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허 감탄사를 연발하며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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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대로 ‘칼국수’는 주로 겨울에 만들어 먹었지만, 옛적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주로 여름철에 만들어 먹었다.
한여름, 농사 밑천인 ‘풀베기’가 시작되면, 이집 저집 돌아가며 ‘풀베기’ 품앗이를 한다. 오전에 두 짐, 오후에 두 짐, 그리고 저녁때는 큰 ‘작두’를 대령시켜 풀을 썬다.
품앗이 풀베기
커다란 ‘작두’에 한 사람은 풀을 먹이고, 하나는 뒤에서 이어주고, 두 사람은 ‘작두’를 밟고, 나머지는 풀을 나르고 ‘풀 산더미’를 만들어 간다.
흐르는 땀을 훔치며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흥겨운 노랫가락 소리, 반딧불도 춤을 추고, 모기는 사람냄새 좋다며 동서남북(東西南北)에서 달려든다.
마당 한켠에 모기 불을 피우고, ‘사각등’을 처마 끝에 달아 놓으면, 환한 달빛에 온 동네가 잔치하는 날 같다. 아낙들은 모여서 ‘칼국수’를 밀고, 애호박에 풋고추 ‘전’을 부치는가 하면, 커다란 쇠죽솥에 강냉이(옥수수)도 한 솥 앉힌다.
칼국수 만들기
강냉이 위에는 감자도 그득하게 넣고, ‘칼국수’ 만들고 남은 밀가루 반죽을 얹어서 푹 찌면,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벌름거리게 한다.
커다란 ‘대지비(대접)’에 철철 넘치듯 칼국수를 담아 한 그릇 비우고, 시금털털한 막걸리를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서 벌컥 벌컥 들이키시던 동네 어르신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태산(泰山) 같아 보이던 풀 동산 하나를 만들어 놓고, 깊어 가는 밤 깊어 가는 웃음소리들은 ‘삽작문’을 타넘어 밤하늘로 흘러간다.
달님도 빙그레 웃으며 내려다보고, 별빛도 깊어지기 시작하면 그제야 사람들은 내일은 누구네 집으로 모인다며, 의논(議論)하면서 시재마꿈(각자) 집으로 흩어진다.
부족함이 많아도 나눠 갖는 마음만은 늘 푸짐했던 그 시절, 부족한 게 없어지고 대신 마음이 메말라 가는 현실 앞에서 고향(故鄕)은 늘 그렇게 우리들의 기억을 흔들어 준다.
다시 시(詩) 한 수를 음미하고 넘어간다. 잔칫집에서 먹는 잔치국수의 모습이 적나라(赤裸裸)하게 그려져 있다. 김승희의 ‘향연, 잔치국수’를 소개한다.
향연, 잔치국수
김승희
어수룩하게 넓은 국사발에
물에 삶아 찬물에 헹궈 소반에 건져놓은
하이얗게 사리 지은 국수를 양껏 담고
그 위에 금빛 해 같은
노오란 달걀지단 채 썰어 놓고
하이얀 달걀지단 따로 채 썰어 올려놓고
파아란 애호박, 주황빛 당근도
채 썰어 볶아 올려놓고
빠알간 실고추도 몇 개 올려드릴 때
무럭무럭 김나는 양은 국자로
잘 우려낸 따스한 멸치장국을
양껏 부어 양념장을 곁들여내면
헤어진 것들이 국물 안에서
만나는 그리운 환호성
반갑고 반갑다는 축하의 아우성
금방 어우러지는 사랑의 놀라움
노오란 지단은 더 노랗고
새파란 애호박은 더 새파랗고
빠알간 실고추는 더 빠알갛고
따스한 멸치장국
아픈 자. 배고픈 자.
추운 자. 지친 자
찬란한 채색고명과 어울려
한 사발 기쁘게
모든 모두 잔치국수 한 사발
두 손으로 들어 올릴 때
무럭무럭 김나는 사랑 가운데
화려한 한 그릇의 사랑
그 가운데로 오시는 분
마침내 우리 앞에도
놓이는 잔치 국수 한 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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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국수
‘먹거리’가 부족했던 시절 ‘칼국수’는 한 끼의 식사로 충분한 우리네 음식이었다. 동네마다 있었던 국수집에는 빗줄기 같은 ‘국수’들이 길게 걸려있었다. 이것은 ‘잔치국수’를 이르는 말이다.
‘칼국수’ 뿐 아니었다. 국수집 국수를 사 오셔서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시던 ‘잔치국수’와 ‘비빔국수’맛 또한 잊을 수 없는 우리네 맛이고 추억(追憶)이었다.
잔치국수
때문에 ‘국시(국수)’하면 생각나는 사람은 언제나 어머니였다. 허기져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한참 먹을 때라고 하시면서 한 양푼 가득 담아내는 ‘잔치국시’의 맛이란 문자 그대로 감칠맛이었다.
한 젓가락 두 젓가락, 입 안 가득 듬뿍 우적우적 씹어 넘긴 뒤, 김치 한두 조각 와작와작 씹으면, 그땐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던 것이 그 시절 ‘잔치국수’였다.
국수 썰기
국수 외엔 간식(間食)으로 대용할 거리가 없어서 그랬겠지만, 그때 그 시절, 허기진 배를 채우는 덴 국수만한 게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배고픈 시절 괘종시계를 전당포(典當鋪)에 맡기고, 다발국수 한 다발 사와서 온가족의 곯은 배를 채우던 영세민(零細民)의 기막힌 삶을 그린 이창윤의 ‘그날의 국수’를 일별해 본다.
그 날의 국수
이창윤·시인, 경북 대구 출생
아침, 점심,
두끼 굶던 날
벽에 걸린 괘종시계 떼어내어
보자기에 싸던 아버지
말없이 손을 잡고
길을 나섰네
전당포도 문 닫은
일요일
한참을 걸어가
시계 잡히고 받은 돈 이천 원
시장에 들러
국수를 샀네
길다란 막대에 걸려
말려지던 국수
고추장 푼 냄비 안에서
끓고 있었네
온 식구가 둘러앉아 나누어 먹던
뜨거운 국수
곯은 배를 훈훈하게 채우고
기분 좋게 드러누웠던 저녁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떠 있는
그 날, 그 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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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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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60년대 필자가 무작정 상경(上京)하여 직장생활을 하면서 야간고등학교(夜間高等學校)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집이 천리나 떨어진 시골(외동읍 괘릉리)이었던 필자는 앞쪽 파일 몇 군데서 소개드린 바도 있지만, 서울에서 다닌 야간고등학교(夜間高等學校) 삼 년 내내 자취를 했었다.
야간고등학교 수업
매월 월말 쯤 집에서 보내 준 돈이 떨어지면, ‘다발국시’를 외상(外上)으로 얻어 와 아무런 양념도 없이 그냥 삶아먹기도 했다. 이를 ‘제물국수’라 한다. 제물에 끓여 먹는 국수라는 뜻이다.
‘다발국수’는 만들 때 소금을 넣어 만들기 때문에 반찬도 필요치 않아 여차하면 ‘다발국수’로 끼니를 때우곤 했었다.
아침부터 8시간 동안 공장(工場)에서 일을 한 후 저녁밥도 먹을 시간이 없어 굶은 배를 움켜잡고, 교실에 들어서면 머리가 어지럽고 눈까풀이 깔리기만 했다. 칠판의 글자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칼국수집
서너 시간 수업(授業)을 받은 후 부리나케 다시 공장(工場)으로 달려가 새벽 1시까지 야근(夜勤)을 하다가 새벽 두시 정도에 ‘다다미방’에 도착해서 숙제(宿題)를 하고, 복습(復習)을 한 후 새벽 4시경에 조금 눈을 붙였다.
두어 시간 후에 기상(起床)하여 누런 ‘국수 다발’을 헐어 우그러진 양은냄비에 양념도 없이 끓여 반찬도 없이 먹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때우고, 책가방을 챙겨 공장(工場)에 들어서면 시커먼 공장건물 천정이 빙글빙글 돌아가기도 했었다.
다발국수
그 시절 필자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던 군상(群像)들이 꼬깃꼬깃 아껴두었던 종이 돈 몇 푼을 들고 나가 띄엄띄엄 사먹으며, 기운을 차리던 용혜원 의 ‘종로2가 막국수’를 음미해 본다.
종로 2가 막국수
용혜원
지성을 파고 있는
종로 2가
뒷골목에서
300원짜리 막국수를
먹어본 사람들 중에는
보기보다 험난한 회사라는
보험회사를 다니며
점심값을 아끼던 사람도 있었고
남들은 레스토랑에서
칼질을 할 때에
사랑을 위하여
함께하는 가난한 연인들도 있었다.
허기진 창자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낮추려는
남루한 옷차림의
인생 나그네도 있었고
무얼 먹어도 맛있기만 한
시골에서 올라온
자취하는 학생이
한 끼를 때우고 있었고
이런 것도 먹어 두어야
기억에 남는다고
킥킥거리며
한 사발 후딱 먹어 치우던
낭만파도 있었고
웬 사내가
마른 눈물 훔치며
속앓이를 하며
내일을 기약하며
하루를 넘기려
후루룩 소리도 죽여 가며
먹기도 하였는데
종로 2가 뒷골목
뜨거운 김 힘차게 오르던
300원짜리 막국수가
지금은 세상인심에 밀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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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에는 ‘사리’라는 말이 있다. ‘사리’는 사전(辭典)에서 국수·새끼·실 따위를 사려서 감은 뭉치를 말하고 있다.
‘잔치국수’에도 ‘사리’가 있고, 냉면(冷麪)과 라면에도 ‘사리’가 있다. 간혹 ‘국수사리’와 같이 쓰이는 ‘사리’를 일본말로 오해(誤解)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사리’는 순수한 우리말로 동사(動詞) ‘사리다’에서 온 말이다.
국수 사리
‘사리다’는 ‘국수·새끼·실 등을 동그랗게 포개어 감다’라는 뜻의 동사이며, 그렇게 만들어 놓은 물건을 부르는 말이 ‘사리’다. ‘새끼를 사리다’, ‘다음에 쓰기 좋게 줄을 잘 사려 둬라’ 등과 같은 용례(用例)들이 있다.
또한 ‘사리다’는 뱀 등이 똬리처럼 몸을 동그랗게 감거나, 다른 짐승이 겁을 먹고 꼬리를 내리는 모양새를 나타내기도 한다. ‘큰 뱀이 둥글게 몸을 사리고 있다,’ ‘개가 위험을 느꼈는지 꼬리를 사리고 숨었다’가 그런 용례에 속한다.
냉면 사리
‘사리다’는 사람에게도 쓰인다. 어떤 일에 적극적(積極的)으로 나서지 않고 슬슬 피하며, 몸을 아낄 때 흔히 ‘몸을 사린다’고 한다.
그 모습이 평소(平素)엔 사납다가 일단 겁을 먹으면 꼬리를 내리고 기어드는 동물(動物)의 행동과 닮아서 사람에게도 ‘몸을 사린다’는 말을 쓰는 것이다.
언제나 같은 말이지만, 또 글이 길어져 여기에서 무조건(無條件) 자르기로 한다. 그리고 국수에 얽힌 대중가요(大衆歌謠)가 있기는 한데,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대신 반드시 ‘잔치국수’가 등장하는 혼례식(婚禮式)을 그리고 있는 ‘갑돌이와 갑순이’를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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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경상도 사투리 역시 잼 있네요ㅎㅎ다양한 국수요리를 보니 오늘 점심은 국수 생각이 간절히..감상 잘 하고 웃어보고 갑니다^^
쪼맨할때~저녁늦까까지 나락 타작하고....라지오서는 사랑의 계절이 끝나고 법창야화가 시작될무렵 엄마가 지국에 끊여준 그~국시맛 생각이 마이나네요~~
아우야 진짜 니웃긴다. 맞어 지난날 추억이 새록새록난다얘 ㅎ 법창야화 니도 알고있니? 마니들었는데 선배님 재미난글 덕분에도 마니웃고간다 그지?
법창야화는 지가 먼저 들었을걸요 ㅋㅋㅋ가을날이 따가버요 건강관리 잘 하시구요~~~
ㅎㅎㅎ넘 웃겨..법창야화 얘기땜에 또 웃어보네요,,,
선배님 덕분에 웃음을 못참구 가네요...사투리. 방언 언제들어도 구수하구 정감이 가죠~~ㅎ
나는 어릴쩍 국시를 너무 좋아해...국수를 먹으면 힘이 넘첬습니다. 그래서 영지에 국수 공장이 있다기에 한번 가보니 어릴쩍의 국수와 맛이 비슷해서
직접 구입해서 지금도 먹고 있습니다. 글을 올리신 분은 괘릉 사셨던 분으로 외동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작성하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