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倭船(일본 배)은 한 척도 그냥 돌려 보낼 수 없다."- 최무선
?-1395년
엉뚱한 호기심
고려 말기, 예성강 입구에 있는 벽란도에는
바깥 나라 상선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그런데 배들이 들어올 때마다
어떤 50대의 남자가 기웃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남자는 몇 년 동안 계속 이런 행동을 보였다.
이 사람이 바로 최무선(崔茂宣, 1326~1395)이다.
그는 그곳에서 중국의 염초 기술자를 찾아 헤맨 것이다.
최무선이 태어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4세기 초 고려 충숙왕 연간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 동순은
벼슬아치의 녹봉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최고 책임자인
광흥창사(廣興倉使)를 지냈으며 집안은 그리 빠지지 않았다.
그는 경상도 영주(오늘날의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마단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벼슬살이하는 아버지를 따라 수도 개경으로 올라왔다고 여겨진다.
고려 말기와 조선 전기의 무기 발명가이며 장군이다.
중국 원나라 사람에게서
화약 제조법을 배워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약과 화통 · 화포 · 화전 따위를 만들었으며,
이를 이용해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그는 어찌 된 셈인지
하라는 글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어릴 때부터 과학과 기술에 관한 책만 파묻혀 읽었다.
당시 출세하려거나 교양을 쌓으려면
유학이나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지만
엉뚱한 데에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그는 벼슬자리에 나와서도
병기를 만드는 군기감 자리를 얻은 듯하다.
이때 그는 또 엉뚱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서
아직 체제가 정비되지 않아 혼란한 상태였고,
일본도 다이묘(일본의 봉건 영주)들이 함부로 날뛰어 나라 안이 혼란스러웠다.
또 고려도 말기 증상을 보이고,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명령계통이 제대로 서지 못하고 군사도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왜구들이 걷잡을 수 없이 생겨났다.
규슈와 쓰시마에 거점을 둔 왜구들은 남해 일대에 침입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심지어 황해의 조운선(漕運船, 세금으로 낸 곡식을 실어 나르는 배)을
빼앗아 끌고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왜구들은 더욱 날뛰어
수도 개경의 바로 코밑이라 할 강화도에까지 들어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민생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재정에도 큰 지장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방도가 없었다.
이때에 왜구를 물리칠 방법을 찾던 최무선은
바로 화약제조를 생각해 냈다.
그는 과학기술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중국과 원나라에서는
전쟁에 화약을 사용해 큰 성과를 거둔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고려에서도 1101년(숙종 9)
여진을 정벌할 때
별무반(別武班)에 특수 부대인 발화대(發火隊)를 두었고,
1135년
묘청의 난을 평정할 때에도 화구(火毬)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중국에서 수입한 화약은 너무나 적은 분량이었다.
화약은 중국에서 처음 발명했는데
오랫동안 개량을 거듭한 끝에 11세기 이후에 와서야 무기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화약은 14세기에 들어서야 유럽으로 유출되었다.
아무튼 당시 고려는 원나라에서 소량의 화약을 얻어 와
초파일이나 축제의 불꽃놀이에 쓰고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에서는
결코 화약제조법을 일러 주지 않고
엄격하게 비밀에 부쳤으며
아무리 값을 주어도 대량으로 팔지 않았다.
최무선은 책을 참고해
염초와 유황과 목탄을 섞어
화약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특히 먼지가 많이 앉은 흙을 사용했기 때문에
염초 구워 내는 기술을 알 도리가 없었다.
몇 년에 걸친 실험을 거듭하며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헛일이었다.
그래서 벽란도에서
중국 상선을 기다리며
혹시나 하고 그 기술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뱃사람들과 장사꾼들을 동원해
그럴 만한 사람을 알아보게 하기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었는지,
어느 날 최무선은 중국 남쪽에서 온
이원이라는 상인을 만났다.
그는 염초 만드는 기술을 조금 알고 있다고 했다.
최무선은 그를 집으로 초대해 밥과 술을 대접하며 극진하게 모셨다.
한껏 뽐내며 제대로 일러 주지 않으려던 그도
마침내 최무선의 정성에 감동해
그 기술을 아는 대로 일러 주었다.
사실 최무선은
무슨 목적에서인지
젊을 때부터 중국어를 익혀 두었는데
이때 아주 요긴하게 써먹은 것이다.
최무선은
그가 일러 준 대로 화약을 만들어 일꾼을 시켜 실험해 보았다.
그 성능은 아주 좋았다.
그는 너무나 감격해 하며 기뻐했다.
그는 화약제조에 성공했다는 것을 조정에 알리고
본격적으로 화약제조를 전담할 기구를 설치하자고 건의했다.
이렇게 해서 조정에서는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새로 설치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일이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일부 벼슬아치들은 최무선이 나랏일을 그르치는 자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럼에도 그의 끈질긴 건의에 감동해
당시 우왕은
화통도감의 설치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이때가 1377년(우왕 3)이었는데 우
리 과학기술사에 큰 획을 그은 전기가 되었다.
무기 발명가 답게
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처음 제작하고 사용했다.
1380년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격파시켜 큰 공을 세웠다.
화통도감이 설치되자,
그는 그 책임자인 제조가 되었고
화약을 사용해서 온갖 신무기를 만들어 냈다.
《태조실록》에는 그의 발명품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화석포 · 화포 · 신포와 화통 · 화전 · 철령전 · 피령전 · 질려포 · 철탄자 ·천산오룡전 · 유화 · 주화 · 촉천화 등의 이름으로 만들어지자,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들 무기의 용도와 성능은
설명이 없어서 알 길은 없지만
대포와 불화살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화포의 이름을
대장군포 · 이장군포 · 삼장군포 등으로 정하고
18종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아무튼 많은 군사용 신무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뒤에 그는 화약을 이용하는 새 전함을 설계해서 만들어 냈는데
그 구조 또한 알려져 있지 않다.
이렇게 3년 동안
그는 무기와 전함 만드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화약 무기는 아무나 다룰 수 없기에
이를 다루고 운반하는 특수부대인 방사군(放射軍)을 신설하는 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벌인 일이었다.
1380년 가을,
마침내 왜구가 300여 척의 해적선(500여 척이라고도 함)을 이끌고
금강 입구의 진포에 밀어닥쳤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최무선이 만든 화약을 실험할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그를 도원수 심덕부 밑의
부원수로 삼아 내려보냈다.
한낱 화약기술자이자 무기발명가가
전투부대의 부사령관이 되어 출전하게 된 것이다.
최무선이 금강 입구에 당도해 보니
왜구들은 밧줄로 배를 서로 묶어 두고 육지로 올라와
멋대로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
최무선이 이끌고 간 배 100여 척에는
화약병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는 직접 화약병기(화전)에 불을 붙여
왜구의 해적선을 향해 쏘아 댔다.
해적선에 불이 붙었지만
왜구는 배를 움직여 달아날 수도 없었다.
평소처럼 배를 한데 묶어 두었기 때문이다.
결국 해적선은 거의 다 불에 타 버렸고
배에 타고 있던 왜구들도 거의 전멸했다.
이 불화살이 고려판 ‘미사일’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이때의 화약병기 사용은 세계에서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꼽힌다.
왜구들은 크게 놀랐다.
불을 토해 내며 날아오는 불화살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 바다로 달아날 수 없었다.
육지에서 노략질하던 무리와 배에서 겨우 육지로 올라온 무리들은
계속 도망쳐서 전라도를 중심으로
경상도의 지리산을 넘나들며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이해 9월 지리산 언저리인 운봉에 집결했다.
이때 이성계가 출전해
왜구를 섬멸하여 이른바 황산대첩을 기록했다.
이성계는 이때의 공에 힘입어
군사권을 틀어쥐는 실력자로 떠올랐는데,
따지고 보면 최무선의 진포 승리에 힘입은 것이다.
이때의 사정을 두고 조선의 사관들은 이렇게 기술했다.
임금(이성계를 일컬음)이병마도원수로 여러 장수와 함께 왜구를 남김없이 섬멸했다.
이로부터 왜구가 점점 줄어들어서
항복을 비는 자가 연이었고
바닷가의 백성들이 예전처럼 생업을 회복했다.
비록 임금의 덕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응해 준 소치겠으나
최무선의 공 또한 적지 않았다.
- 《태조실록》 7권, 4년 4월조
사관은 진실을 똑바로 본 것이다.
왜구를 섬멸한 사실을 두고 이성계의 공을 크게 자랑하면서도
화약을 개발한 최무선의 공을 아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운봉에는
황산대첩비 따위를 세워 이성계의 전공을 기리고 있으면서도
군산의 진포 자리인
옛 금강 입구의 나루 일대에는 최무선을 기리는 어떤 표시도 없다.
아무튼 최초의 화약병기 사용으로
이렇게 멋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영성군이라는 작호를 내리며
그 공을 기렸다.
한동안 뜸하던 왜구는
3년 뒤에 2400명을 실은 20여 척의 배를 이끌고
남해의 관음포에 나타났다.
이때에도 최무선은
늙은 몸을 이끌고 출전해 단숨에 배 17척을 불살라 버렸다.
왜구의 시체가 남해를 메웠고
나머지 왜구는 많은 시체를 버려 두고 달아났다.
왜구는 그 뒤 조선 초기까지 간간이 들어와 노략질을 벌였지만
세종 시기 쓰시마 토벌작전이 있은 뒤에 거의 사라졌다.
한편 일본에서도 통일국가를 이룩해 왜구를 통제했고
훗날 임진왜란을 도발했던 것이다.
최무선은
그 뒤에도 화약제조와 화약병기 개발에 10여 년을 바쳤다.
그런데 실권을 잡은 이성계 일파인 조준은
왜구의 노략질이 없어졌으니
경비 절약을 위해 화통도감을 폐지하고
군기감에 통합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 때문에 화통도감은
군기감에 병합되었고, 기술개발도 중단되었다.
겉으로는
경비 절약을 내세웠지만
새 왕조 건국을 꿈꾸던 이성계 일파는
화약무기가 보급되는 것이 그들에게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화약이 지방토호나 특정 세력의 손에 들어가면
이를 억누르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최무선은 울분에 차서 집으로 돌아와 세월을 보내야 했다.
더욱이 이성계 일파는
그에게 비법 전수를 부탁하거나 그 기술을 후대에게 가르칠 수 있는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집에 틀어박혀 화약수련법과 화포법을 책으로 엮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동안 이씨 조선왕조가 건국되었다.
기록에는 “그가 늙어서 등용되지 않았다”고 했으며,
허울뿐인 검교참찬이라는 벼슬만 내려 주었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4년 뒤,
그는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늦게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가 죽을 무렵 아들 해산(海山)의 나이는 겨우 10세였다.
죽기 직전 아내에게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 한 권을 전해 주며
“이 책을 고이 간직했다가 이 아이가 크면 전해 주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내는 아들이 15세가 되어 문자를 익히자,
아버지의 유언을 일러 주며 책을 전했다.
최해산이 1년쯤 이 책을 통해 화약제조법을 익히고 있을 무렵에
태종이 왕이 되었다.
이때 신임이 두텁던 권근이
목화를 보급한 문익점과
화약을 제조한 최무선의 공로를 생각해서
그 아들들에게 벼슬을 내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래서 최해산은
조정에 나와 벼슬했고
뒷날 군기시 소감이라는 벼슬을 얻어 화약제조의 책임자가 되었다.
당시 화약은
불꽃놀이에서나 쓰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최해산은 더욱 그 비법에 따라 화약병기를 만드는 데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7년 동안의 노력 끝에
새로 공격용 화차와 화포의 일종인 완구(碗口)를 만들어 냈다.
따라서 화약 보유도 계속 늘어나
그가 조정에 나온 지 10년쯤에는
화약 보유고가 6900여 근,
화약병기의 숫자는 1만 3500여 점,
화포를 전담한 조사의 수효는 1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가 처음 군기시에 들어왔을 때
화약 4근, 화약병기 200여 점 정도를 보유한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도
화약병기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계속 새로운 병기를 발명하게 했는데,
중국에서 온 사신들도 이 사실을 알고 놀라워 했다고 한다.
최무선이 화약제조에 성공한 뒤
한때 좌절을 맛보기도 했지만
약 60여 년 동안 고려와 조선의 화약을 이용한 병기는
획기적인 발전을 보았다.
세종 때에는
이 화약병기에 힘입어
북쪽으로는 야인을 정벌해 국경지대의 안전을 이룩했고,
남쪽으로는 쓰시마를 정벌하거나 왜구를 회유해 그 노략질을 막았다.
그러나 세종이 죽고 난 뒤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문약에 빠진 벼슬아치들 탓이었다.
따라서 이런 답보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한 것이다.
이때 화포의 위력이 크게 드러났지만
성능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했다.
적어도 화약을 무기로만 쓰지 않고 생활에 이용했다면
국가와 민중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세기에 들어
프랑스 · 미국 · 일본의 함대가
강화도의 진지를 대포로 공격했을 때 강
화도의 우리 군사들도 화포로 맞섰지만 그 성능이 비교되지 않았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중국에서 화약을 수입해
새로운 대포를 만들어 화약의 종주국을 공격했던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유산이 있더라도
이를 계속 발전시키지 못하면
그 본래의 의미가 흐려진다.
최무선이 살아 강화도의 일을 목격했다면
크게 통탄했을 것이다.
-<이이화의 인물 한국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