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루스나(양피지) / 윤 정
1
아주 먼 옛날 오래오래 살기 위해 너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해뜨기 전 너에게 내 영을 맡기며
둘만 아는 그림이나 기호 긁적이며
웃기도, 울기도 했었다
오늘 여기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내가
뒤섞여 있었는지 아직도 나를 모른다
내 가슴 물이 흐르고 바람 불면서
풀잎 나고 꽃이 피고 지고 열매 매달리고
새가 되어 날아오르기도 하고 뱀처럼 기어 다니고
굶주린 늑대처럼 침을 흘리며 나는 너에게 얼마나 많은
무서운 맹수의 핏자국을 닦았는지 모른다
2
어떤 곳에서는 커지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줄어들기도 하면서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쓰고 긁다가
다시 긁어내며 두터워진 너는
지금껏 나에게 뜨거운 심장을
얼마나 불어 넣었는지 모른다
내가 나를 조금씩 보는 날
정착과 기다림을 알게 되고
침략자가 되어 남의 피를 빨기도 하고
때로는 버려지는 나그네로 있으면서
내 삶의 두께를 기억하고 있는 너를
아직 나는 모른다
3
어떤 날 검은색 표정으로
어떤 날에 백색의 표정으로
어떤 날에는 황색 표정으로 지우고 쓰고 지우고
작든지 크든지 인간이라 부르면서
다시 긁어 썼다가 지우면서
오늘은 과거를 통해 나를 보게 하고
내일은 꿈을 통해 미래를 밝히려는 너는
내 손과 발이 부서지도록 써주길 기다리고 있다.
4
오늘 둥근 지구별에 앉아
이 대지 향해 걸어가며 시간과 공간 가로질러
종횡으로 얽혀 긁어내고 새기면서
너에게 오늘 달라붙은 나는, 대뇌 피질의 작은 거미로
하나씩, 하나씩 가는 줄을 벗겨내며 뽑아내고
너를 위해 다시 썼다가 지우며 내일을 살아가고 있다.
파피루스나 : 양가죽 종이라고 보면된다. 기록할 때는 다시 썼다가 지우고
반복해서 메모한 가죽 종이다. 종이가 나오기 전 많이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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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건강하시고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이 대지의 파피루스나에 윤정 님의 아름다운 시들을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뜨거운 피가 다시금 치 솟는것 같은 기분이네요,,,, 언제나 사랑은 아름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