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선우 기자
사진 박선우 기자 / 점프볼, 변영재 제공
http://blog.naver.com/sportsku/220718422267
1997년, 프로 농구가 출범함과 동시에 외국인 용병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됐다. 현재 프로 농구에서 외국인 용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좋은 기량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감독, 팀 동료와의 불화와 한국 정서에 맞지 않는 사생활로 문제가 돼 구단 관계자의 골머리를 썩이기도 한다. 이런 좌충우돌 외국인 선수를 밀착 마크하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프로 스포츠 통역사이다.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통역을 맡고 있으며 최근 SNS에서의 활약으로 농구팬 사이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변영재 통역을 직접 만나 보았다. 그를 통해 생생히 들을 수 있었던 프로 농구 통역사의 이야기, 더 나아가 인간 변영재의 스토리를 천천히 따라가 보자.
아버지, 농구 선수가 되고 싶어요
그는 어렸을 때 또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운동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초등학교 때 육상, 씨름, 축구, 농구 등 많은 운동을 가리지 않고 했어요. 그 결과 시(市)에서 운영되는 팀에 선발돼 선수 생활을 할 수 있게 됐어요, 하지만 학교 성적 또한 상위권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공부하길 원하셔서 결국 선수가 되진 못했어요. 중학교 때는 전교 회장을 하고 공부를 잘하기로 유명한 고등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다른 과목은 다 전국 상위권이었는데 유난히 영어 성적이 별로 좋지 못했어요. 영어 실력을 늘리고자 고등학교 1학년 때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갔는데 그때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던 것 같아요.” 더 넓은 세상에 대해 알고 싶었던 그는 캐나다 유학을 결심한다. “그때 마침 아버지의 사업이 잘 풀려서 캐나다로 유학을 갈 수 있게 됐어요. 지금이야 외국으로 유학을 많이 가곤 하지만 1990년 초엔 유학을 가는 게 축복받은 일이라고 다들 생각했어요.” 부푼 기대를 안고 떠난 유학길이었지만 적응이 쉽진 않았다. 캐나다엔 인종차별이 성행했고 동양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엔 친구들이 저한테 말도 걸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얼른 친구들과 친해질 만한 것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바로 스포츠였어요. 농구 시합을 하는데 제가 생각보다 잘하니까 친구들이 관심도 가져주고 말도 걸어주고 했어요. 국경을 넘어 스포츠는 대단한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어요.” 학업을 위해 캐나다 유학을 갔지만 그에게 한 번 더 운동선수가 될 기회가 찾아왔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州)에 있는 고교 랭킹 1위 팀과 농구 시합을 했어요. 그 팀엔 캐나다 고교 랭킹 1위 포인트가드가 있었는데 제 매치업 상대가 됐어요. 평소엔 30점 넘게 득점을 하는 선수였는데 그 날 제가 9점으로 막았어요. 경기가 끝난 후 상대 팀에서 장학금을 줄 테니 학교를 옮겨 농구 선수를 해보라는 제의가 들어왔어요. 결과는요? 역시 아버지의 반대로 무산됐어요. 아버지는 농구는 키가 큰 사람들이 하는 운동이라 생각하셨고 173cm밖에 되지 않는 제가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때부터 제 마음 한구석엔 스포츠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다
캐나다에서 선수 생활이 무산된 그는 대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한 후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장으로 살고 있었다. 잘 나가는 악기 회사에서 해외 마케팅 팀장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하는 듯했지만, 그의 마음속엔 스포츠에 대한 허전한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동생의 전화 한 통으로 그의 인생이 360도 바뀌기 시작했다. “동생이 인터넷에서 채용 공고를 보고 있었는데 마침 창원 LG 세이커스의 통역을 구한다는 걸 보고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저는 그런 중요한 역할을 설마 공채로 뽑냐고 반신반의하면서 고민을 거듭하다 면접 당일에 회사를 조퇴하고 면접장으로 가게 됐고 운이 좋게 뽑히면서 저의 농구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