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63)
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事成雄據天下
일이 성공되면 천하에 웅거하리라.
4월 총선을 앞두고 정계(政界)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이 한창이다. 그 갈래를 보면 이른바 586세대와 그 후속세대의 갈등, 동서지역 간의 갈등으로 나뉘는 듯하지만, 목표는 정권을 잡는데, 있을 터이다. 말하자면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어 영웅으로 천하를 점거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꿈은 정치를 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의 공통된 것일 거다.
그중에는 상당한 지명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 가운데 가끔 ‘삼국지’를 말하면서 ‘책사(策士)’니 ‘정략(政略)’을 꺼내 드는 경우가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지략가들의 지략을 현재에도 써 보려는 마음인 듯하다.
삼국지 하면 권력을 손아귀에 8할쯤은 넣었다가 양아들 여포(呂布)에게 죽은 동탁(董卓)이 쓴 꾀가 생각난다. 후한 말 황제권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10 상시(常侍)가 권력을 움켜쥐고 국가를 유지하던 질서를 무시하고 사사로운 이익에 몰두하는 바람에 왕조는 질서를 잡을 힘조차 없어졌다.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모여서 머리에 누런 띠를 두른 이른바 황건적(黃巾賊)이 관아를 공격하였다. 극도로 무질서가 횡행하였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에 서부지역인 감숙과 사천지역에서 군사적 강자가 있었다. 동탁(董卓)이었다. 그는 혼란해진 세상을 보면서 과거의 시스템 통치의 시대는 가고 무력이 지배하는 시대가 된 것을 알았다. 그래서 적당한 기회에 무력을 가지고 후한의 도읍인 낙양(雒陽)으로 진출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그는 군사를 끌고 낙양으로 들어갔지만, 그리 숫자가 많지 않자, 밤중이면 군사를 조용히 밖으로 뽑았다가 날이 밝으면 북치고 나팔 불면서 낙양성으로 들어가기를 여러 날 하였다. 적은 수의 군사를 뻥튀기하는 꾀를 쓴 것이다.
그리고 그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영제(靈帝)가 죽은 다음에 하태후(何太后)에 의하여 황제에 오른 14살짜리 유변(劉辯)을 폐위시키고 9살짜리 유협(劉協)을 황제로 세웠다. 그뿐이 아니었다. 영제가 죽은 뒤에 그 아들 유변을 세워 황제로 삼았던 하태후를 압박하고 드디어 짐살(鴆殺, 毒殺)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꾀가 발휘된 셈이다.
뒤를 이어 동탁은 가장 높은 관직인 상국(相國)이 되니 황제에게 말씀을 올리거나 절할 때도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하고, 조정에 들어설 때도 종종걸음을 걷지 않아도 되고, 황제가 있는 전각에 오를 때도 검(劍)을 차고 신을 벗지 않도록 하였고, 인사권을 틀어쥐고 관직을 임명하였다. 천하에 웅거하는 데까지는 8부 능선이나 9부 능선 정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 정도라면 그 후 역사의 주인공은 동탁이어야 맞지 않을까? 그런데 다 아는 대로 후한의 마지막 황제이며, 동탁이 세운 황제인 헌제(獻帝)는 나라를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에게 선양(禪讓)하여 한왕조(漢王朝) 황제의 통서(統緖)는 위왕조(魏王朝)로 넘어간다. 물론 이에 찬성하지 않은 손권(孫權)과 유비(劉備)가 반발하여 새 왕조를 세우는 바람에 천하는 셋으로 나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가장 유리한 고지(高地)를 점령하였던 동탁(董卓)은 어디에도 영웅(英雄)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왜 그러할까? 그가 겉만으로는 당시에 최강의 무력을 지닌 것으로 보였지만, 그것을 휘두르는 일로 일관하다가 동부지역 사람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허장성세로 일단 성공했는데 그것이 성공인 줄 알았을까? 후속 조치나 준비가 없었다. 같이 일한 사람을 잃은 것이다. 그러자 각자 개별적으로 움직이던 동부지역 사람들이 원소(袁紹)를 중심으로 힘을 합쳐서 동탁을 반대하는 연합전선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동부지역 사람들의 집단 반대에 부딪힌 동탁이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서부지역인 장안으로 황제를 데리고 천도하였다. 이것 역시 그로서는 꾀를 낸 것이다. 아직 형식적으로는 황제의 명령이 그래도 권위가 있었기에, 그는 황제(皇帝, 獻帝)를 잡고 그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었으니, 대세를 이끌어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작은 꾀는 있었지만 왜 동부지역의 반발에 부딪혀서 서쪽으로 와야 했는지에 대한 긴 안목은 없었다. 그가 역사를 단순히 점(點)의 집합으로만 보지 않고, 전후좌우가 상호 작용하며 전개되는 선(線), 혹은 면(面)으로 통찰하는 안목이 있었다면 설사 동부지역이 단결하여 그에게 대항한다고 하여도 뚫고 나갈 방법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움츠러들며 그 동생 동민(董旻)과 조카 동황(董璜)에게 군사권을 맡겼고, 그 종족(宗族)에게 벼슬을 주어 조정에 늘어 서 있게 하였다. 그 위에 그의 시첩(侍妾)이 낳은 젖먹이 아들에게 제후로 책봉하여 금인(金印)과 자색(紫色)의 인수(印綬)를 주어 노리개로 삼게 하였다. 또 섬서성(陝西省) 미현(郿縣)에 보루(堡壘)를 축조하게 하였는데 높이와 두께가 7장(丈)씩으로 하고 30년간 먹을 양식을 저축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한 다음에 그는 ‘일이 잘 이루어지면 천하에 웅거할 것이다.’라고 하더니, 자신이 없었던지 뒤이어 말하였다. ‘이루지 못하여도 이것을 지킨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충분하다.’ 보루를 쌓고 양식을 저축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니 그의 안목은 너무 작았던 셈이다.
그를 도와줄 사람은 종족 말고는 없는데 그 지위와 부(富)가 지켜질 수 있을까? 결국 그가 아끼며 아들로까지 삼았던 이성(異姓) 여포(呂布)에게 죽는 것으로 끝났다. 그가 지키려고 하였던 미현의 보루(堡壘)도 소용없고, 간난 아들에게 준 제후의 인수(印綬)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황제가 되는데 9부 능선까지 올라갔어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동탁이 조금만 참고 천하가 돌아가는 정세를 살펴보면서 이웃하는 세력에게 믿음을 주었더라면, 그를 반대하였던 원소와 공손찬(公孫瓚)이 갈라져서 동부지역이 약화 되는 기회를 이용할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큰 눈으로 판세를 읽지 못한 까닭에 좋은 기회가 오는 것도 놓쳤고, 자기 세력의 분열 속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요즈음 정치권에도 스스로 대권의 8부 능선이나 9부 능선쯤에 올라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동탁처럼 자기 식구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동탁은 그렇게 하다가 실패했는데, 지금이라고 자기 식구만 챙기는 사람에게 기회가 올까? 단연코 역사에서는 그렇게 성공한 일은 없었다. 우리 말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라.’는 말이 있다. ‘천하의 재물을 천하에 쌓아 두라.’라는 말도 있다. 모두 공적(公的)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내 편 네 편을 가르고 전체를 포괄하고 아우르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작은 꾀로 한다면 동탁과 다름없는 결과가 기다릴 뿐일 것이다.
첫댓글 이 시대에 맞는 사론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